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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 라임보다는 네가 먼저 뒈질 거 같은데. (98/121)


#98. 라임보다는 네가 먼저 뒈질 거 같은데.
2023.05.07.



 
필립과의 기묘한 동거가 시작된 지 일주일이 흘렀다.

그간의 고생을 어찌 다 말로 할까마는, 주원은 딱 한마디로 표현할 수 있었다.


‘그건 생지옥이었다.’

처음 필립의 무개념을 실감한 건 둘째 날 오전이었다.

나름 동거인이랍시고 출근한단 말을 전하러 갔는데 글쎄, 손님방의 하얀 벽지에 온통 종이 쪼가리가 덕지덕지 붙어 있는 거 아닌가!


“아, 이거요?”

흠칫 놀란 주원을 향해 필립이 해맑게 말했다.


“제가 밤새 써 내려간 가사예요. 집이 좋아서 그런가 죽이는 라임이 쏙쏙 떠오르네요, 헤헤.”

……라임보다는 네가 먼저 뒈질 거 같은데.

주원은 파르르 떨리는 주먹을 감싸 쥐고 또박또박 끊어 뱉었다.


“벽지에 뭐 붙이는 거 금지.”

“하지만, 형님! 이렇게 붙여놔야 다음 가사가 더 잘 떠오른다고요. 간만에 시상이 떠올랐는데……!”

“지금 당장 떼.”

하아, 그래 백 번 양보해서 벽지가 더럽혀지는 것쯤은 얼마든지 참아줄 수 있다.

천년 만 년 살 것도 아니고 기껏 한 달 같이 살기로 한 거니까.

문제는 그놈이 주원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강적이라는 것이었다.


“형님, 형님! 나 지금 야식 만들었는데 한 입 하실래요?”

야밤에 온 집 안에 닭발 냄새를 풍기는가 하면.


“형님, 형님! 아침 먹고 가요. 제가 형님 주려고 새벽부터 만들었다고요.”

먹지도 않는 아침은 왜 그렇게 해대는지.

형님 소리에 노이로제가 생길 것 같았다.

제 딴엔 일면식도 없는 사람 집에 얹혀사는 게 미안해서 우렁각시 노릇이라도 하는 모양인데, 그냥 안 마주쳤으면 좋겠다고! 버터 범벅인 샌드위치는 이제 그만 먹고 싶다고!

생전 안 먹던 아침까지 꼬박꼬박 챙겨 먹는데 이상하게 살이 빠졌다.

일주일간 3킬로가 빠진 걸 보면 영혼이 말라가는 거 같다.


‘그때 오춘택이 아니라 오혜주를 주워왔어야 했는데.’

주원은 뒤늦게 후회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오늘 아침도 조용하진 않았다.

필립이 쪽쪽 빨던 빨대 음료를 고대로 냉장고로 넣는 걸 보고 주원이 눈썹을 구겼다.


“냉장고에 먹던 거 넣는 거 금지.”

“아, 또 금지예요? 형님 진짜 너무해요. 이건 차갑게 먹어야 하는 음료라고요. 반도 넘게 남았는데 그럼 버려요?”

“버려.”

“치, 자기가 사준 것도 아니면서…….”

구시렁대는 주둥이를 보니 손바닥으로 몇 대 때려주고 싶다.

오기라도 생긴 듯 빨대를 입에 물고 마지막까지 빨아먹는 모습에 절로 그 말이 나왔다.


‘신이시여. 제 동생으로 강승원을 보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

마침 그날 승원에게서 연락이 왔다.


“어디야. 너 괜찮냐?”

-……형.

수화기 너머 승원의 목소리는 어딘지 평소와 달랐다.


-미안해, 형. 그냥 생각할 시간이 좀 필요해서……. 별일 없어.

“별일 없는 목소리가 아니잖아. 어딘데.”

-나 잠깐 지방에 내려왔어. 말도 안 하고 결근해서 미안해. 나 잘리는 거지?

“무단결근이 2주가 넘었는데 잘리지, 그럼. 너 대체 무슨 생각이야?”

-회사엔 민폐 끼치지 않도록 내가 잘 정리할게. 조만간 서울 올라갈 테니까 자세한 건 그때 얘기하자.

뭔가 석연치 않은 통화였다.

살아 있다는 건 알겠는데 전혀 괜찮지 않아 보였고, 어딘지 몇 번을 물어도 시원하게 대답해주질 않는다.

승원이 잠수를 탄 적은 종종 있었지만 이번엔 뭔가 달랐다.


‘느닷없이 천다희 편을 든 것부터가 이상했어. 이 X끼 진짜 약점이라도 잡힌 거 아니야?’

동시에 회사에서 사라진 두 사람.

퇴사 처리를 위해 몇 번이나 연락을 했음에도 약속이라도 한 듯이 받지 않는 것도 똑같고, 평소 활발히 하던 SNS가 싹 내려가 있는 것도 똑같았다.

아무래도 승원의 잠수에 다희가 관련이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이상한 건 아무리 생각해도 승원이 발목 잡힐 만한 약점이 떠오르지 않는다는 거다.


‘자식이 맹하긴 해도 어디 가서 나쁜 짓 하고 다니는 놈은 아니잖아. 천다희에게 약점을 잡힐 만한 일은 하지 않았을 텐데.’

설마 임신?

잠깐 그 생각을 하긴 했으나 이내 주원은 뇌리에 떠오른 단어를 지웠다.


‘생각만으로도 재수 없네. 아무렴, 그렇게 정신머리 없는 놈일까 봐.’

주원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선우연 여사는 어릴 적부터 형제에게 누누이 강조했다.

인생에서 잘못 휘두르면 X 되는 세 가지가 있는데 첫 번째가 권력이요, 두 번째가 주먹, 세 번째가 방망이라고.

어렸을 땐 그 방망이가 진짜 휘두르는 방망이인 줄로만 알았다.

머리가 굵고 나서야 그 방망이가 그 방망이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문화 충격이었지.

해서 주원은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술에 취한 어느 밤, 승원이 다희를 혜주로 착각하고 안았을 거라고는.


“다 컸으니 제 일은 알아서 하겠지.”

내일모레 서른인 놈이 제 앞가림 하나 못 하겠어?

퇴근 시간임을 확인한 주원이 휙 재킷을 들고 일어났다.

*

필립을 집으로 들인 후 좋은 점이 딱 하나 있었다.

그건 바로 혜주가 거의 매일 집에 들른다는 거다.


“오춘택, 오늘은 사고 안 쳤어?”

민폐를 끼쳐 어떡하냐며 무척 미안해하던 그녀는 매일 같이 생필품이며 먹거리를 사다 날랐다.

필립이 사고를 못 치게 귀에 딱지가 앉도록 잔소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너 나한테 하는 것처럼 개념 없이 굴면 바로 이 집에서 퇴출이야. 길바닥 나앉으면 이번엔 진짜 쌩 깔 거니까 형 말 잘 들어. 알았어?”

혜주가 나서서 단도리를 하니 제아무리 제멋대로인 필립이라도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멋대로 굴다가도 주원이 “그거 금지” 한마디만 하면 깨갱 꼬리를 말았다.

일주일 만에 사람 됐다고 하기는 뭐하고, 사람 흉내는 내는 정도는 된 것 같아 그래도 다행이었다.


“누나.”

혜주가 사 온 스테이크 덮밥과 날치알 파스타를 우물거리던 필립이 입을 열었다.


“왜.”

슬금슬금 눈치를 보는 것이 또 헛소리를 할 것 같아서 혜주가 건성으로 대꾸했다.


“혹시 이루비 잘 있어?”

역시나 그 입에서 쓸 만한 말이 나올 리가 없지.

난데없는 루비 타령에 혜주가 못 들은 척 포크를 놀렸다.


“누나, 내 얘기 들었어? 나 지금 궁서체야. 우리 루비 잘 있냐고.”

“…….”

“누나? 나 투명 인간 아닌데? 나 여기 있는데?”

“…….”

“그래, 알았어. 그럼 듣기만 해. 난 진짜 우리 루비가 그렇게 매몰차게 날 차버릴 줄은 몰랐어. 내가 요즘 얼마나 힘든지 알기나 해? 이별의 아픔을 승화하느라 볼펜 심이 닳을 정도야.”

혜주가 눈살을 찌푸렸다.


“너 아직도 래퍼 되겠다는 헛꿈 꾸니?”

“헛꿈이라니. 내가 비록 성공하진 못했지만 랩을 향한 진실한 마음까지 무시하진 마.”

“하아…….”

“내가 이번에 우리 루비를 생각하며 가사를 하나 썼어. 일단 한번 들어봐.”

아아.

목소리를 가다듬은 필립이 젓가락 장단을 치며 랩을 시작했다.

말하지 않아도 넌 다 알고 있잖아.

표현하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잖아.

점점 짧아지던 전화.

점점 길어지던 한숨.

떠나는 네 뒷모습에 손을 뻗어보아도.

but 그녀는 떠났고 나는 베개를 적시네.

혜주는 어금니가 부서져라 이를 악물었다.

어째 저놈의 작사 실력은 늘지를 않는지, 나이도 어린 게 쓰는 족족 싸이월드 감성이다.


‘아, 쪽팔려…….’

가사를 쓴 건 필립인데 왜 내가 창피한지.


‘저런 걸 동생이라고 둔 내가 죄인이다, 죄인.’

민망한 얼굴로 주원 쪽을 바라본 혜주는 이내 충격에 휩싸였다.


‘뭐, 뭐야, 저 표정?!’

 

 
입꼬리를 지그시 늘리고 고개를 끄덕이는 주원의 표정엔 뭐랄까. 깊은 감동이 서려 있었다.

말은 안 했지만 저 표정이 의미하는 바는 명백했다.

‘괜찮은데?’ 내지는 ‘제법 하는군.’ 내지는 ‘오올’ 정도의 감정이랄까.

……미쳤나 봐, 저 오빠!

혜주가 주원의 옆구리를 쿡 찌르자 주원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는 혜주의 시선을 눈치챈 그가 최대한 심드렁하게 감상평을 내놓았다.


“너 내 베개 적셨냐.”

“아니요, 형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랩은 원래 가슴으로 쓰는 거예요. 사나이의 진한 감성으로 말이죠.”

“좋은 자세군.”

“역시 우리 형님은 뭘 좀 아신다니까? 심장으로 쓴 제 가사를 형님은 알아주실 줄 알았어요!”

주원의 반응이 만족스러운 듯 필립이 실없이 웃었다.

두 바보를 번갈아 바라보던 혜주는 의외로 여기에 제정신인 사람은 자신뿐이라는 걸 깨달았다.

정신 차려요, 오빠. 저 똥멍청이한테 넘어가면 안 돼!

혜주는 주원의 코앞에서 박수를 짝 치며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루비 씨 얘기를 왜 물어? 헤어진 마당에 구질구질하게 매달리지 마. 너 없어도 잘살, 아니 네가 없어야 잘살 사람이야.”

“아닌데. 우리 루비는 나 없으면 안 되는데?”

“루비 씨가 연상 아니었냐? 어따 대고 우리 루비래.”

“누나는 몰라. 나와 루비 사이에 쌓인 산 같고 물 같은 시간을.”

산이고 물이고 별로 알고 싶지 않다.


“취업 준비는 하고 있어?”

“당연하지. 누나랑 형님한테 폐 끼치지 않으려고 진짜 노력하고 있어. 이력서도 백 통이나 넣었다고.”

“연락 오는 데는 없고?”

그제야 저 망할 놈의 주둥이가 꾹 닫혔다.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개를 떨군 필립을 보며 혜주가 조언했다.


“그러지 말고 천안 내려가는 게 어때? 아빠 가게에 직원도 없다며. 일손 바쁠 때라도 가서 도와드리고 용돈 벌이라도 하는 게 낫지 않아?”

“내가 안 그래도 엄마한테 전화해 봤지. 일손 필요할 때가 없대.”

“요새 정말 왜 그러지? 아빠 가게 그래도 잘 됐었잖아. 삼십 년 넘게 같은 자리에서 장사해서 단골손님도 많을 텐데, 갑자기?”

“그러게. 얼마 전부터 갑자기 손님이 뚝 끊겼대. 매일 드나들던 기사님들이나 동네 지인들도 발길을 뚝 끊어서 귀신에 씌인 거 같다고 하더라니까?”

뭔가 불길한 예감이 혜주의 뇌리에 스멀스멀 차올랐다.

30년 넘게 같은 자리에서, 같은 사람이 장사를 했는데 어느 순간 손님이 뚝 끊기는 게 말이 되나?

설령 주인장 손맛이 바뀌었더라도 서서히 고객이 줄어드는 게 정상이고 경쟁업체가 코앞에 들어섰더라도 손님이 아예 끊기는 건 이치에 맞지 않았다.

혜주는 퍼뜩 검색창에 가게 이름을 검색해보았다.

동네 주민과 기사님들을 주 고객으로 하는 터라 배달 앱도 쓰지 않는 수철의 가게지만 나름 입소문을 타서 인터넷 리뷰는 꽤 되는 편이었다.


“리뷰가 언제 이렇게 늘었지?”

몇 달 전에 확인했을 때 200개가 조금 넘던 리뷰가 어느새 500개가 넘었다.

30년간 쌓아온 리뷰가 200개인데 몇 달 새 두 배가 넘게 늘었다고?

이상하다. 이건 진짜 이상해.


“게다가 별점은 왜 이래?”

반타작 난 별점에 불길함을 느낀 혜주가 서둘러 리뷰를 클릭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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