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 공짜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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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공짜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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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공짜 아닌데
2023.05.14.
-네, 저번에 오 사장님이 제출한 주문서 내역과 리뷰 작성자 리스트를 비교해봤는데요. 악성 리뷰를 작성한 사람이 총 세 명인데 모두 같은 모텔로 배달을 시켰더라고요! 모텔에서 CCTV를 따면 금방 잡을 수 있을 것 같아 경찰 하나가 그쪽으로 출동한 상황입니다. 저희를 믿고 조금만 기다려 주십쇼, 허허!
경찰의 전화에 혜주는 실소를 흘렸다.
수철이 경찰에 신고한 게 벌써 몇 주나 지났다고 했다.
그동안 조금도 진척되지 않았던 수사가 십 분 만에 이렇게 진전이 된다고?
외압이 없다면 절대 불가능한 얘기다.
혜주는 능청스럽게 돌아오는 주원을 눈을 가늘게 뜨고 쳐다보았다.
“오빠, 대체 뭘 한 거예요?”
주원이 씩 웃으며 대꾸했다.
“아빠 찬스.”
혜주의 눈꼬리가 옅게 진동했다.
필연의 친구 중 경찰에 높은 분이 있다고 듣기는 했다. 지난번 귀녀를 체포할 때도 그분 입김이 작용했다고.
‘고맙긴 한데…….’
이런 일에 경찰총장까지 동원해도 되는 건가?
솔직한 말로 부담스럽기 짝이 없었다.
이럴 때면 주원과 자신 사이에 거대한 벽이라도 있는 것 같았다.
수철이 몇 번이나 경찰서를 찾아가 읍소해도 해결할 수 없었던 일을 전화 한 통으로 해결해버릴 때.
그만큼이나 다른 사회적 위치를 실감하는 것 같아서 마냥 기쁘지만은 않았다.
“고마워요. 오빠 덕분에 아빠 일을 잘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공짜 아닌데.”
주원이 혜주의 뺨을 톡 치며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아버지가 너 보고 싶대.”
“!”
“조만간 너 데려간다고 약속하고 받아낸 거야.”
이 남자가 진짜.
“오빠 아버지한테 제 얘기했어요?”
“응.”
“뭐라고 하세요?”
“뛸 듯이 기뻐하시던걸.”
“거짓말.”
“왜 거짓말이라고 생각하지?”
그야……. 오빠에 비해 내가 조금, 아주 조금 부족하니까?
이럴 때는 자기 객관화가 너무 잘 되는 것도 문제다.
평소 자존감이 없는 편이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는데 어쩌면 그건 정말 잘난 상대를 만난 적이 없어서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모든 건 상대적인 거니까.’
혜주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뭔 생각을 하는 거야.”
주원이 혜주의 정수리를 ‘꽁’ 하고 살짝 쥐어박았다.
“아얏, 왜 딱콩 놔요?”
“자꾸 쓸데없는 생각 하니까 그렇지.”
“내 머리로 마음대로 생각도 못 해요?”
“어. 하지 마.”
“이 독재자…….!”
“이상한 생각 할 거면 차라리 잠을 자라. 머리는 나 주고.”
“!”
“뽀뽀하기 딱 좋은 머리네. 목 위에 얹어 다니기도 귀엽고.”
주원이 혜주의 머리통을 두 손으로 딱 잡은 채 눈을 마주 보았다.
“우리 쭈야.”
옅은 미소가 어린 눈동자가 사랑스럽게 혜주를 어루만졌다.
“넌 너 자신에 대해 더 자신감을 가질 필요가 있어.”
그의 음성은 쓸데없이 진중했다.
낮고 단단한 어조는 아닌 사실도 진실로 탈바꿈할 만큼 신뢰감을 주었고, 없던 용기를 불러일으킬 만큼 단호했다.
“예쁘지, 똑똑하지, 능력 있지, 사랑스럽지, 착하지. 게다가 침대에선 섹시해. 이보다 더 완벽할 수 있어?”
오빠가 그렇게 말하니 정말 내가 멋진 여자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드는걸.
혜주는 입꼬리를 씰룩거리다 불현듯 소리쳤다.
“설마 아버님한테 침대 얘기까지 한 건 아니죠?”
“이게 누굴 미친놈으로 알아.”
주원이 혜주의 머리칼 사이에 손가락을 넣고 마구 헝클었다.
혜주가 으악 소리를 지르며 피하니 그가 웅크린 몸을 그대로 감싸 안았다.
주원은 품에 쏙 들어온 혜주의 얼굴에 쪽쪽 뽀뽀를 하며 말했다.
“너만큼 나한테 딱인 여자는 없어. 남들이 뭐라 하든 이게 팩트야. 내가 당사자니까.”
“저기요. 보통 이럴 땐 충분히 넘치고 벅차다고 하지 않나요?”
“그건 불가능한 얘기잖아.”
잠깐 느낀 감동이 쓰나미처럼 빠져나갔다.
아, 이 남자 강주원이었지. 어쩜 이렇게 한결같은지.
“그보다 할 얘기가 있어요, 오빠.”
혜주는 잘난 척 대마왕의 입술을 살짝 꼬집었다 놓으며 몸을 바로 했다.
품에서 빠져나간 혜주를 아쉬워하며 주원이 말해보란 듯 고개를 까딱했다.
“아까 리뷰를 찬찬히 훑어보다가 발견한 건데요.”
혜주는 악성 리뷰에서 느낀 꺼림칙한 점을 이야기했다.
‘같데요.’와 ‘없데요.’
맞춤법 틀리는 사람이 어디 한둘이겠냐마는 딱 다희가 자주 틀리는 부분을 틀리니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턱에 손을 얹고 가만히 얘기를 듣던 주원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잠시 후 전화를 마친 그가 말했다.
“지금 가보자.”
“어딜요?”
“경찰서. 모텔 CCTV 조사 끝났대.”
혜주는 반색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휙. 반짝거리는 물체가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왔다.
“나 술 마셨으니까 운전은 네가 해.”
“당연하죠.”
엉겁결에 고개를 끄덕인 혜주는 번쩍번쩍, 위풍당당하게 서 있는 세단을 보자마자 후회했다.
‘헉, 망했다.’
어디 콩 박기라도 하면 억 소리 날 것 같은 차를 나더러 운전하라고?
*
다행히 운전 짬밥은 허투루 먹은 게 아니었다.
시내 도로를 거의 기다시피 달린 혜주는 무사히 경찰서에 도착했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피로에 찌든 안색의 경찰 하나가 두 사람을 보고 물었다.
“국밥집 악성 댓글 문제로 신고한 사람인데요.”
혜주가 수철의 이름을 대자 안쪽에 있던 담당 경찰관이 얼른 엉덩이를 떼고 일어났다.
윗선에서 들은 바가 있는 모양인지 전에 없이 무척 빠릿빠릿했다.
“안 그래도 연락드리려던 참입니다. 음식을 주문한 사람이 묵었던 모텔 CCTV를 확인해 봤는데요. 아무래도 시일이 꽤 지난 터라 남아 있는 기록이 없더라고요.”
“범인을 찾지 못했단 말씀이신가요?”
“말하자면 그렇죠.”
혜주는 속에서 천불이 올라오려는 걸 간신히 참았다.
수철이 경찰에 신고한 게 한 달도 넘었다고 했다.
그때 바로 수사를 시작했다면 CCTV 증거가 남아 있었을 텐데 중요한 사건 아니라고 미적지근하게 수사를 하니 이 모양 이 꼴이지!
붉으락푸르락한 혜주의 표정을 보고 경찰이 얼른 덧붙였다.
“다행히 아주 성과가 없는 건 아니었어요. 음식점 리뷰에 댓글 남긴 아이디 있죠? 그 아이디 주인을 찾아냈습니다! 아마 지금 오고 있을 텐데…….”
“그 사람 이름이 뭔가요?”
“이름이요? 잠시만요. 아, 여기 있네요. 박소희.”
“박소희?”
주원이 아는 이름이냐는 듯 눈짓했다.
혜주는 바로 고개를 저었다. 곰곰이 생각해 볼 것도 없이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이었다.
마침 경찰서 문을 열고 앳된 모습의 학생이 들어섰다.
펑퍼짐한 와이드 팬츠에 목 늘어난 티셔츠. 동그란 안경테 안의 흰자에 실핏줄이 가득한 꼬라지가 왠지 익숙했다.
‘조금 전까지 컴퓨터 앞에 앉아 있었다는 것에 십만 원 건다.’
게임에 미친 승원이 한창 저 꼴로 돌아다닌 적이 있었던 걸 떠올린 혜주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많이 쳐줘도 중학생밖에 안 되어 보이는데 쟨 무슨 일로 경찰서에 온 걸까?’
혜주의 궁금증은 금세 풀렸다.
“불러서 왔는데요. 박소희요.”
그녀의 이름을 듣는 순간 눈이 번쩍 뜨였다.
“그쪽이 박소희예요? 국밥집에 악성 댓글 남긴 사람?”
득달같이 달려든 혜주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소희가 짜증 난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에이씨, 저 아니라고요. 전 돈 받고 아이디 판 것밖에 없어요.”
“아이디를 팔았어요? 누구한테?”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요. 누가 아이디 팔 때 얼굴 보고 팔아요?”
“입금한 사람 이름이라도 있을 거 아니에요! 현금으로 직접 받았으면 여자인지, 나이대가 어떻게 되는지 정도는 알 거 아냐!”
“아, 몰라, 샹! 고작 댓글 몇 개 남긴 거 가지고 경찰서에 오라 마라, 진짜 빡치게 하네!”
소희가 껄렁껄렁 손부채질을 했다.
“고작 댓글 몇 개?”
혜주는 머리끝까지 화가 났다.
그녀는 경찰서라는 것도 잊고 아직 젖살이 통통한 소희의 뺨을 손가락으로 딱 꼬집었다.
“으악! 므츳어요?”(으악, 미쳤어요?)
“다시 말해봐. 너 지금 고작이라고 그랬니?”
“으, 긍츨 아즈씨! 이 은니 좀 뜨줘 봐요. 므츳나 봐!”(아, 경찰 아저씨! 이 언니 좀 떼줘 봐요. 미쳤나 봐!)
혜주는 말리는 주변 사람들에 아랑곳하지 않고 무시무시하게 소희를 노려보았다.
“인터넷에 글을 남길 땐 그 몇 글자가 어떤 무게를 가졌는지 정도는 생각했어야지. 고작 댓글 몇 개에 누군가는 목숨을 끊기도 해. 또 누군가는 생계가 박살 나기도 하지. 너 정말 몰라?”
“느가 그런 거 으니라고요!”(내가 그런 거 아니라고요!)
“아이디 판 사람은 너 맞잖아! 누구한테 팔았는지 말해. 구매한 사람 아이디든, 대화 내용이든 뭐라도 증거가 있을 거 아니야!”
소희의 뺨이 벌겋게 되었을 때에야 경찰이 간신히 두 사람을 떼어놓았다.
혜주는 소희에게 뭐든 증거가 될 만한 걸 내놓으라며 닦달했지만 별 소득은 없었다.
오픈 채팅이라 상대측 정보는 아예 알 수가 없었고 현금을 거래할 때도 직접 대면하지는 않았다고 했다.
돈을 받고 아이디를 판 정도로는 형사 입건이 되지 않아 소희가 그대로 돌아갔다.
기껏 경찰서까지 왔는데 아무 소득이 없자 혜주는 분을 참지 못해 씩씩거렸다.
“아오, 진짜! 새파랗게 어린 중딩이 세상 무서운 줄도 모르고 아이디나 팔고 다니고! 말세다, 말세!”
“워, 오혜주 진정해.”
“어떻게 진정을 해요? 오늘 경찰서 오면 범인 잡을 수 있을 줄 알았다고요. 이게 뭐야, 진짜.”
“그래도 아무것도 못 건진 건 아니잖아.”
혜주는 주원이 건넨 꾸깃꾸깃한 종이를 힐끔 바라보았다.
손바닥만 한 쪽지 안엔 소희가 팔았다는 아이디와 비밀번호가 적혀 있었다.
“이걸로 뭘 할 수 있는데요?”
“파보면 알겠지.”
요즘 세상에 완전범죄는 없다며 주원이 혜주를 토닥였다.
“무조건 잡아. 걱정하지 마.”
너무도 차분하고 침착한 주원의 대응에 혜주는 조금 창피해졌다.
‘순간적인 감정을 참지 못하고 처음 보는 중딩 뺨을 꼬집어 버렸어…….’
뒤늦게 후회가 밀려왔지만 엎질러진 물이었다.
무엇보다 그녀가 괴로운 건 소희에게서 아이디를 사 간 사람이 다희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다희가 정말 그랬을까?’
그랬을 수 있다. 아니, 십중팔구는 그럴 거 같다.
친구가 아닌 건 괜찮아. 평생 안 보고 살아도 할 수 없어. 그래도 누구 하나 죽을 때까지 패는 건 아니지 않나?
그래도 너랑 나, 한때는 친구였는데.
이미 끝난 사이에 미련 같은 건 없다. 다희도 그래 줬으면 했다. 서로 모르는 사람처럼 쭉 다른 길로 걸어갈 수 있다면 그걸로 좋았다.
‘그런데 왜 자꾸 나를 건드려. 네가 그렇게 나오면 나도 되게 밟아버리고 싶어지잖아.’
다희를 떠올리니 핸들을 잡은 두 손에 힘이 꽉 들어갔다.
무거운 혜주의 표정을 힐끗 바라본 주원이 파란색으로 바뀐 신호등을 보며 툭 물었다.
“지금 뭐 하고 싶어?”
“혓바닥에 불날 만큼 매운 거 먹고 아무 생각 없이 자고 싶어요.”
“그러자.”
주원이 혜주의 휴대폰을 찾아 수철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금 서울 올라간다고 말씀드려.”
수화음이 울리기 시작한 휴대폰을 받아들며 혜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서울 가서 먹게요?”
-여보세요?
수화기 너머에서 수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원은 씩 웃으며 소희의 아이디가 적힌 종이 뒷면에 글씨를 휘갈겼다.
[아니. 너 외박시키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