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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 이 오빤 어디까지 야해질 작정인가 (101/121)


#101. 이 오빤 어디까지 야해질 작정인가
2023.05.18.



 
강주원 인생에 이렇게 매운 걸 들이부은 적은 처음이었다.

불낙에 불곱에 불갈비에 아무튼 앞에 ‘불’ 들어간 건 다 먹은 것 같다.

주원은 평소 매운 음식을 즐겨 먹는 편이 아니었다.

선천적으로 매운 걸 잘 못 먹을뿐더러 예전에 떡볶이 잘못 먹었다가 배탈을 심하게 앓은 후 제 돈 주고 사 먹지 않게 되었다.

하긴, 심심한 닭가슴살과 샐러드에 익숙해진 위장에 맵고 짜고 자극적인 음식이라니 탈이 안 나는 게 이상했다.


“젠장, 속이 또 난리네.”

주원이 배를 쓰다듬으며 일어났다.

저녁 내내 먹은 ‘불’ 뭐시기가 위장에서 춤을 추는 듯했다.


“오혜주는 이런 거 먹고 어떻게 사냐. 죽겠네, 진짜.”

호텔 프런트에 연락해 소화제를 얻은 주원이 물과 함께 알약을 들이켰다.

그러고도 모자라 응접실을 30분이나 뱅뱅 돌았다.

잠시 후 약발이 들었는지 속이 잠잠해졌다.

새벽 한 시를 가리키는 시계를 흘깃 바라본 주원이 소파에 깊게 몸을 묻었다.


“하아…… 이제 좀 살겠네.”

혜주는 베드룸에 정신없이 곯아떨어져 있었다.

매운 거 때려 붓고 푹 자고 싶다더니 소주도 같이 때려 부었다. 역시 무서운 여자.

매운 혀를 달래기 위해 주원이 쿨피스를 마실 때마다 속도 맞춰준답시고 소주를 들이켤 때부터 알아봤지.

그 지역에 몇 개 없는 5성급 호텔도 급히 예약했는데 도착하기 전부터 잠들어버리는 무심함이란.

문틈 사이로 얼핏 보이는 하얀 종아리에 괜히 아쉬워진 주원이 입맛을 다시며 창가로 향했다.

통창 밖으로 보이는 새벽의 빛은 여전히 분주했다. 거주하는 집이 워낙 고층이라 뷰에는 크게 감흥이 없는 주원이지만 도로에 깔린 불빛은 좋았다.

치익.

캔맥주를 따며 휴대폰을 확인하니 기다리던 연락이 와 있었다.

[요청하신 부분은 내일모레 중으로 확인해 보겠습니다. 하지만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강제성 있는 행동은 할 수 없어요. 알고 계시겠지만 요즘 경찰 권한이 예전 같지 않아서…….]

국밥집 사건을 담당하고 있는 경찰관이었다.

사실 아까 경찰서를 나오기 전 주원은 따로 그를 만났다.

악플을 남긴 범인으로 추정되는 사람이 있는데 따로 조사를 해줄 수 있냐고 물었더니 범인을 특정할 수 있는 증거가 있는 게 아니라면 사실상 조사가 힘들다고 했다.

흔하디흔한 맞춤법 실수 정도로는 ‘의심’ 축에도 들 수 없다며 손사래를 치는 그에게 몇 번이나 부탁을 했다. 유용하게 써먹었던 아빠 찬스도 시의적절하게 쿡 찔러줬고.

방금 온 문자는 담당 경찰이 고심 끝에 다희를 한번 만나보겠다고 전해온 것이었다.

증거랄 게 전무한 상황이라 만나봤자 별 소득이 없을 거라고 했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이 기회에 다희를 흔들어놓으면 뭐든 그쪽에서도 움직임이 있을 테니까.


“오빠 왜 여기 있어요? 식탁 위에 약봉지 있던데 어디 안 좋아요?”

잠에서 깬 혜주가 눈을 비비며 걸어 나왔다.

잠옷 대신 걸친 호텔 가운에 부스스하게 헝클어진 머리, 술에 취한 건지 잠에 취한 건지 헷갈릴 정도로 맹한 눈동자였다.


“매운 걸 너무 많이 먹었나 봐.”

토끼처럼 귀여운 모습에 주원이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혜주는 다가와 앉으며 주원을 걱정스럽게 쳐다보았다.


“매운 거 잘 못 먹어요?”

“응.”

잠이 덜 깬 눈동자가 찌르르 진동했다.


“매운 걸 못 먹는다고요?”

“그렇다니까.”

“그걸 왜 이제야 말해요!”

혜주가 주원의 어깨를 찰싹 때렸다.

이거야말로 아닌 밤중에 홍두깨 아닌가!

그간 먹었던 닭발에 불막창이 몇 접시야. 생각해 보면 그와 데이트하며 먹었던 음식 중 맵지 않은 것이 없었다.

매운 음식에 진심인 혜주가 메뉴를 딱 고르면 주원은 군말 없이 따라나섰기에 당연히 그도 매운 걸 좋아하는 줄 알았다.


‘그러고 보니 오빠는 좀 깨작댔던 거 같기도 하고…….’

혜주는 미안한 눈길로 주원을 쳐다보았다.


“왜 말 안 했어요? 난 오빠도 매운 거 좋아하는 줄 알았어요.”

“요령껏 먹었어. 걱정하지 마.”

“요령껏 먹어서 배탈까지 나요? 힝, 나 되게 나쁜 여자 된 거 같아.”

문득 항상 배려하는 쪽은 그였다는 게 실감이 난다.

먹고 싶은 거, 사고 싶은 거, 가고 싶은 곳, 듣고 싶은 음악까지 그는 혜주의 취향에 오롯이 맞춰주었다.

이제야 느끼는 건데 그에 대해 별로 아는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빠가 뭘 좋아하지? 음악 취향은 나처럼 가요인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 뭐더라.

깊은 연애를 안 해봐서 그렇다는 핑계를 대기엔 그 역시 마찬가지라 혜주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미안해요. 매운 거 못 먹는 줄도 모르고 계속 먹여서…… 매번 아팠겠네.”

“분위기 엄하게 할래? 매번 아픈 거 아니라니까.”

“아무튼 내 입맛 맞춰주느라 그런 건 맞잖아요. 오빠한테 늘 받기만 하네요, 나는.”

주원이 축 처진 혜주의 정수리를 손바닥으로 흐트러뜨렸다.


“뭐라는 거야. 강주원 숨 붙어 있는 게 누구 덕분인데.”

“그거야 얻어걸린 거고.”

혜주는 시무룩하게 입술을 내밀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친히 고문을 선사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무거웠다. 초딩 입맛 주제에 매운 거 같이 먹어준다고 땀을 뽈뽈 흘렸을 그를 생각하니 절로 숙연해졌다.

잠시 고개를 숙이고 있던 혜주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좋았어! 나도 이제부터 오빠한테 잘해줄 거예요.”

주원은 한쪽 손으로 턱을 괴고 흐뭇하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잘해줄 건데?”

“재촉하지 맙시다. 구체적인 건 생각 좀 해보고요.”

“내가 알려줘?”

혜주는 반짝거리는 눈망울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잘 들어. 정답 들어간다.


“넌 딱 하나만 해주면 돼.”

주원이 고른 치아를 드러내며 씩 웃었다.


“그게 뭔데요?”

“허락.”

혜주가 짧게 호흡을 들이켰다.

무엇에 대한 허락인지는 알고 있었다.


‘결혼 얘기구나.’

만난 지 한 달 만에 결혼하자고 조르는 남자들이 간혹 있다고는 하는데 그게 강주원일 줄은 몰랐다.

겉보기에 시크하다 못해 냉기가 뚝뚝 흐르는 남자가 댕댕이처럼 따라다니며 결혼, 결혼 노래를 부를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지.

처음엔 당황했는데 지금은 흔들렸다. 아니, 솔직한 심정으로는 이미 넘어갔다.

승원의 형이라서, 집안 차이가 너무 많이 나서, 사계절도 못 만나본 사이라서…… 거절할 이유는 여럿 있는데 모든 이유를 합쳐도 그를 사랑하는 마음만 못 했다.

무너지기 위해 망설였던 것처럼 혜주는 선선히 대답했다.


“나 오빠 어머니 만나보고 싶어요.”

“언제가 좋겠어?”

히익?


“아무래도 주말이 낫겠지. 다음 주엔 골프 모임 있다고 하셨으니 이번 주?”

헉, 이 남자 뭐가 이렇게 빨라…….


“이번 주 토요일로 하자. 약속 없지?”

“약속은 없는데…….”

“지금 어머니한테 여쭤볼게.”

“지금 새벽 한 시인데요?”

“너 마음 바뀔까 봐.”

주원이 도장을 찍듯 휴대폰 메시지를 꾹꾹 눌렀다.

지잉-

이내 답장이 도착했다는 알림이 울렸다.

주원이 메시지를 확인하곤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이번 주 토요일로 확정.”

“세상에. 나 진짜 오빠 어머니 만나요?”

“만나고 싶다며.”

“이렇게 빨리는 아니었죠.”

“우리 엄마 뭐 트롤 같은 거 아니야. 안 물어요.”

“그래도 좀 무서운데…….”

혜주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어버버 하는 사이에 지장 따인 기분이 이럴까.

한번 만나보고 싶다고 말만 꺼냈는데 홀랑 약속이 잡혀버렸다.

물론 언젠가 한 번은 넘어야 할 산이지만 왜 이렇게 겁이 나는지 모르겠다.


‘강승원한테 들은 말이 많아서 그런가?’

승원의 말에 의하면 선우연 여사는 도도, 시크, 우아의 결정체였다. 취미는 시집 읽기, 특기는 투자.

돈 욕심은 딱히 없는데 알아서 돈이 붙는 팔자라 평생 고생 한 번 한 적이 없다고 했다. 다 큰 아들 뒤치다꺼리 귀찮다며 성인이 되자마자 아들 둘을 독립시키기도 했지.

쇼핑이 취미라 아들 둘 옷 사입히는 거 빼고는 먹는 거, 노는 거 신경 안 쓰고 한 달 정도는 가출해도 콧방귀도 뀌지 않는다고 들었다.

얘기만 들어보면 참 정 없는 엄마다 싶긴 한데, 세상 누구보다 엄마를 사랑한다는 승원을 보면 또 좋은 분 같기도 하고.

조각조각 들은 정보들만으로는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나 벌써 긴장돼요. 안아줘.”

“들어와.”

주원이 기다렸다는 듯이 팔을 활짝 벌렸다. 혜주가 옆구리를 파고들자 커다란 손이 등을 어루만졌다.


“따뜻하고 좋네.”

혜주는 금세 안심이 되어 주원의 가슴에 얼굴을 기댔다.

그런데…… 왜 손이 자꾸 야해지는 거 같지?

따뜻함을 느끼기가 무섭게 어깨가 서늘해졌다.

혜주의 가운을 스르륵 내린 주원이 동그란 어깨에 진득하게 입을 맞추었다.

초옥, 닿았다 떨어진 입술의 감촉에 살갗이 민감하게 반응했다.


“저기요. 안아달라고 했지 옷 벗기라고는 안 했는데요?”

“그게 그거지.”

“어떻게 그게 그거가 됩니까!”

“그게 그거야.”

주원은 뻔뻔하게 대꾸하며 하던 짓을 마저 했다.

반대쪽 어깨도 홀랑 벗겨내자 벌어진 가운이 스르륵 내려갔다.

혜주는 앞섶을 두 손으로 꾹 여민 채 눈을 가늘게 떴다.


“속 쓰려서 잠도 못 잤다는 거 뻥이죠?”

“속 쓰려, 혜주야.”

주원이 하나도 안 불쌍하게 불쌍한 척을 했다.


“너무 굶어서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까 저녁 먹……!”

……아, 오빠는 거의 못 먹었겠구나.

불갈비를 떠올리곤 입술을 꾹 다문 혜주는 주원에게 먹잇감이나 다름없었다.


“네 배만 채우면 다냐. 이기적이네.”

“죽 끓여줘요?”

“내 입이 원하는 건 그게 아니야.”

그 입이 원하는 게 뭔지 말 안 해도 알 것 같다.

술도 덜 깨서 힘들어 죽겠는데 대체 이 오빤 어디까지 야해질 작정인가.

혜주는 어디까지 하나 들어는 보자는 심정으로 팔짱을 꼈다.


“그럼 뭐 줄까요.”

“달콤한 거.”

“또?”

“말랑말랑한 거.”

“그리고?”

“촉촉한 거.”

주원이 야릇한 시선으로 아랫입술을 살짝 적셨다.


“주면 되게 야하게 먹을 자신 있어.”

“못 말려, 진짜.”

반쯤 체념한 혜주가 적선하듯 입술을 쭉 내밀었다.

눈을 감고 있으니 얕은 숨이 목덜미를 스쳤다.

곧장 아래로 내려간 입술이 가운 앞섶을 헤집었을 때에야 혜주는 그가 말한 달콤하고, 말랑말랑하고, 촉촉한 것이 입술이 아니란 것을 알았다.


 
당황한 혜주가 가슴을 가리며 소리쳤다.


“거기가 촉촉한 살은 아니잖아요. 이 사기꾼……!”

봉긋하게 솟아오른 곡선을 아이스크림 핥듯 정성스레 빨아먹은 주원이 시선을 올리며 나른하게 웃었다.


“젖었네, 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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