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2. 예쁘고 착한 여자라고 했다 (102/121)


#102. 예쁘고 착한 여자라고 했다
2023.05.21.



 
직장인들의 꿀 같은 점심시간.

선우연 여사는 빌딩이 빽빽한 사거리의 한 커피숍에 앉아 있었다.


[점심에 잠깐 보자꾸나. 회사 앞 커피숍에 있을 테니 별일 없으면 오렴.]

 
그녀가 이렇게 불쑥 주원을 찾아온 일은 처음이었다.

아들 회사가 어디인지도 모르고 살다가 부랴부랴 남편에게 물어 처음으로 찾아왔다.

미리 약속하고 찾아온 게 아니라 어쩌면 만나지 못하고 돌아갈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지만 상관없었다.

‘목마른 사람이 우물 파는 거지. 어차피 남아도는 게 시간인데 오랜만에 콧바람도 쐬고 좋네.’

선우연은 창밖으로 분주하게 돌아다니는 인파를 응시하며 미소를 머금었다.

그녀가 불쑥 주원을 찾아온 건 어제 아들에게서 받은 메시지 때문이었다.


[소개하고 싶은 사람이 있어요. 이번 주 토요일 시간 좀 내주시죠.]

 
안부도 묻지 않고 대뜸 약속 날짜부터 박아버린 아들을 보고 직감했다.


‘드디어 데려오려나 보네.’

그 연락을 받는데 제일 먼저 떠오른 건 승원이 가슴앓이하던 모습이었다.


‘하필이면 두 녀석이 같은 여자를 좋아한다지.’

예쁘고 착한 여자라고 했다.

당연히 그렇겠지. 다 큰 아들놈들 취향까지 간섭할 생각은 없지만 여자 보는 안목이 형편없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누구 아들인데. 나 선우연이 배 아파 낳은 자식들이다.

물론 하나는 모지리, 하나는 목석이라 변변한 연애 한 번 하는 꼴을 못 봤지만 제 아비 닮았으면 여자 보는 눈은 있겠지. 그렇게 믿고 기다렸다.

몇 달 전 승원이 찾아와 형과 같은 여자를 좋아하고 있다는 얘길 했을 때 속으로 놀라긴 했다. 어쩌다 그렇게 된 걸까 안쓰럽기도 했고.

아주 솔직한 심정으로는 이러다 두 녀석 의가 상할까 걱정이 되기도 했다.

어제 주원에게 연락이 왔을 때 마냥 반갑지만은 않았던 건 어쩔 수 없이 두 녀석의 엄마이기 때문이었다.


‘최근 승원이 녀석이 또 잠수를 탔다지. 이것 역시 그 여자와 관련이 있는 걸까?’

가뭄에 콩 나듯 간간이 살아 있단 것만 알려오는 주원과 달리 승원은 일주일에 한두 번 전화를 걸어오곤 했다.

아들이 둘이면 그중에 딸 노릇하는 아들이 하나 있다더니 승원이 딱 그랬다. 가끔 잠수를 타거나 가출을 할 때만 빼면 살갑고 정나미 넘치는 아들이었다.

특히나 엄마를 끔찍이 생각해서 잠수를 타더라도 선우연이 먼저 전화를 걸면 메시지 정도는 보내주곤 했기에 승원과 연락이 안 된다는 주원의 말을 들었을 때도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엔 뭔가 달랐다.


‘이 정도면 멘탈이 아예 나가버린 모양인데 그냥 두어도 괜찮을까?’

승원이 그럴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여자 문제.

인생은 각자도생이라는 생각으로 최대한 자유로이 아들들을 풀어놨지만 이제는 개입할 순간이 된 것 같았다.


‘주원이가 내게 그 아이를 소개하겠다고 했지. 승원이와는 깔끔히 정리가 된 건가? 내가 받아들여도 아무 문제 없는 건지 모르겠네.’

주원에게 물어볼 것이 많았다.

어떻게 만나게 된 여자인지, 삼각관계는 어느 정도로 심각했는지, 가족이 되어도 서로 불편하지는 않을지.

제일 궁금한 건 모지리와 목석이 하나같이 목을 매는 여자가 과연 누구일까였지만.


“손님, 주문하셨어요? 아까부터 앉아계시던데 음료 주문 없이 테이블만 차지하시면 안 돼요.”

창밖을 지나다니는 인파를 구경하던 선우연에게 점원이 말을 걸었다.

안 그래도 언제 주문받으러 오나 기다리고 있던 선우연이 선뜻 대답했다.


“메뉴판 갖다 줘요. 주문할 테니까.”

점원이 어이없다는 듯 미간을 찡그렸다.


“저희 가게는 메뉴판 따로 없고요. 매장 앞에 메뉴 적혀 있으니 그거 보세요. 주문은 키오스크로 직접 하시면 됩니다.”

짜증스러운 점원의 반응에 선우연은 조금 당황했다.


‘메뉴판이 없어……? 키오스크……?’

그도 그럴 것이, 그녀가 주로 가는 고급 카페에선 매니저가 직접 주문을 받고 테이블에 세팅까지 해주는 게 기본이었다.

똑같은 커피를 마시더라도 원두의 종류, 뜨거운 정도, 시럽의 양과 곁들일 디저트까지 매니저가 전담해주니 고객은 자리에 앉아 있기만 하면 됐다.

직장인이 바글거리는 프랜차이즈 커피숍에서 그런 것까지 바랄 수야 없지만 익숙지 않은 냉대를 당하니 기분이 퍽 상했다.

키오스크인지 뭔지, 한 번도 해본 적은 없지만 오기가 생겨서라도 보란 듯 주문을 해야겠다 생각한 그녀가 가방을 두고 일어섰다.


‘까짓거 해보지, 뭐.’

키오스크 앞에는 점심 식사를 마치고 온 직장인들이 길게 줄을 서 있었다.

선우연은 맨 뒤에 줄을 서고 차분히 순서를 기다렸다.


‘다들 금방금방 주문하는 거 보니 어렵진 않겠네. 메뉴 누르고 카드 넣으면 되는 거겠지?’

나이 많은 사람에겐 키오스크 주문이 꽤나 어려운 일이라고 얼마 전 뉴스에서 본 기억이 났다.

하지만 선우연은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그간 나름 젊게 산다고 노력해왔는데 이깟 키오스크가 뭐 대수라고.’

앞선 줄이 금방금방 빠지고 드디어 그녀의 차례가 되었다.

선우연은 심호흡을 한 후 커다란 기계를 바라보았다.


‘다행히 메뉴가 사진으로 되어 있네.’

담담한 표정으로 화면을 바라보던 선우연의 눈매가 흠칫 굳었다.


‘근데…… 메뉴가 이게 다야?’

평소 그녀는 차를 즐기는 편이었다. 녹차나 우롱차보다는 향이 좋은 국화차나 허브티를 즐겨 마시는 편이어서 이번에도 차를 주문할 생각이었다.

키오스크 메인 화면에는 온통 커피뿐이라 선우연은 조금 당황해 계산대 뒤편의 커다란 메뉴판을 쳐다보았다. 그곳엔 분명 여러 종류의 허브티가 있었다.

선우연은 화면을 넘기기 위해 손가락으로 액정을 밀어보았다.

그러자 줘도 안 먹을 법한 칼로리 폭탄 카라멜 마끼아또가 떡하니 선택되어 계산 화면으로 넘어가는 게 아닌가!

선우연은 취소 버튼을 눌렀다. 화면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갔다. 멘탈도 함께 녹아내렸다.

그러기를 몇 차례.

어느덧 그녀의 등 뒤로 줄이 길게 늘어섰다.

왜 이렇게 줄이 안 빠지냐며 투덜대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선우연의 이마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어렵다, 어려워…… 그냥 아무거나 주문해야겠네.’

누군가에게 눈총을 받는 일은 정말이지 오랜만이었다. 선우연은 뒷줄의 사람에게 미안하다는 제스추어를 보낸 후 주문을 시작했다.

제일 첫 줄의 아메리카노를 선택한 후 결제 버튼을 눌렀다.

그런데 아뿔싸.


‘카드가 어디 있지?’

아까 자리에 두고 온 가방에 카드가 들어 있는 게 떠오른 선우연은 울고 싶어졌다.


‘젊은 사람들 노는데 오는 게 아니었어…….’

매일 다니던 살롱이나 다닐 걸 후회가 막심했다.

그녀가 주문을 포기하고 전체 취소 버튼을 누르려던 순간이었다.


“저기…… 혹시 제가 좀 도와드려도 될까요?”

 

 
재촉하는 줄 알고 돌아본 선우연의 눈에 상냥한 인상의 여자가 비쳤다.

나이는 스물 중반쯤 되었을까. 눈매가 시원시원하고 입술이 또렷해 상당히 야무진 인상이었다.


“이 카페 키오스크가 좀 사용하기 어렵게 되어있더라고요. 처음에 주문할 때 저도 엄청 헤맸거든요. 결국 직원분이 오셔서 도와주셨지 뭐예요.”

예쁜 아가씨가 말도 예쁘게 하네.

긴장으로 굳었던 선우연의 입매가 일순간 풀어졌다.

어르신 운운하며 도와주려 했다면 창피해서라도 그냥 거절하고 돌아섰을 것이다.

나이가 들어 그런 게 아니라고, 당신 문제가 아니라 기계의 문제라고 말해주는 여자의 배려에 선우연은 조금 감동을 받았다.


“그럼 부탁 좀 해도 될까요?”

“그럼요! 어떤 메뉴로 드실 건가요?”

능숙하게 키오스크를 조작하는 여자를 곁눈질하며 선우연이 대답했다.


“허브티 종류로 하고 싶은데 찾기가 어렵더라고요.”

“아, 티 종류는 맨 마지막 페이지에 있어요. 보자…… 얼그레이랑 차이 티, 히비스커스, 캐모마일, 민트티가 있네요.”

“캐모마일로 할게요. 테이크아웃으로요.”

“아, 바로 나가실 건가 봐요. 따뜻한 거 드시죠?”

주문이 순식간에 끝났다.

가방에서 꺼내 온 카드로 결제를 끝낸 선우연이 고맙단 인사를 하기 위해 돌아섰을 때 주문을 도와준 그녀는 어느새 직장 동료들과 섞여 테이블로 이동하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녀가 생긋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고마움을 담아 마주 눈인사를 한 선우연은 오래도록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주원이가 데려온다는 아가씨가 딱 저랬으면 좋겠네.’

때마침 주원에게서 전화가 왔다.

선우연은 종이컵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

며칠 후 토요일.

주원과 약속한 날이었다.

집에서 멀지 않은 한정식집을 예약해두었다고 주원이 주소를 보내왔기에 선우연은 약속 시간에 맞춰 나서기만 하면 되었다.

베이지색 드레스에 화려한 프린트의 스카프를 매치해 우아하면서도 세련된 감각을 뽐낸 그녀가 기사가 모는 세단에 착석했다.

차창에 비친 매무새를 한 번 확인할 때 마침 필연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다.


[잘 가고 있어요?]

[ㅇㅇ이제 출발.]

[주원이가 소개한다는 아가씨가 누군지 나도 궁금한데 아쉽네요. 학회만 아니었으면 동행했을 텐데.]

필연은 학회에서 좌장을 맡고 있어 짬을 낼 수가 없었다.

아내의 선택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그이기에 사실 동행해도 허허 웃으며 자리나 지키고 있을 테지만 아들의 여자친구를 소개받는 자리에 함께하지 못하게 되어 그는 무척 아쉬워했다.


[걱정 말고 학회 잘 끝내고 와요.]

[어떤 아가씬지 궁금하니 이따 집에서 꼭 얘기해줘요. 알았죠?]

[당신 하는 거 봐서.]

[나야 항상 우리 여왕님께 충성하지. 좋은 와인 한 병 사 갈 테니 집에서 봐요.]

[ㅇㅇ]

마지막으로 도착한 큼지막한 하트 이모티콘에 선우연은 빙그레 미소를 머금었다.

삼십 년을 한결같이 다정한 남편이었다.


“우리 강 교수 같이 못 가서 많이 아쉬운 모양이네.”

선우연이 혼잣말을 하며 싱긋 웃었다.

하긴, 주원이 누군가를 소개하는 게 처음이니 그럴 만도 했다. 소개는커녕 지금껏 변변한 연애 한 번 한 적이 없기에 내심 걱정했었다.

혹시나 과거의 트라우마로 인해 여자를 못 만나는 건 아닐까.

그게 아니면 넘치게 멀쩡한 아들이 연애를 못 할 리가 없었다.

여자를 만난다니 안심이긴 한데 그 여자가 승원과도 얽혀 있다고 하니 조금 찜찜하긴 했다.


‘어떤 애인지 만나보면 알겠지.’

선우연은 복잡한 마음을 가라앉히며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때 우아한 클래식 선율과 함께 휴대폰이 진동했다.

액정에 뜬 발신자의 이름에 선우연의 눈동자가 조금 벌어졌다.


“둘째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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