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 내가 재갈이라도 물릴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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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 내가 재갈이라도 물릴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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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 내가 재갈이라도 물릴 테니까
2023.05.25.
가출한 승원에게서 걸려온 전화에 선우연은 괜히 가슴이 덜컥했다.
참으로 공교로운 타이밍이었다.
그간 몇 번이나 전화를 해도 받질 않더니, 왜 하필 지금?
주원에게서 뭔가 언질을 듣고 전화를 한 건 아닐까 짐작하며 그녀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엄마, 어디예요?
승원의 목소리는 조금 잠겨 있었다.
선우연은 걱정스러운 마음을 티 내지 않으려 노력하며 대답했다.
“약속이 있어 청담동 나가는 길이야. 점심 먹으려고.”
-엄마 친구들이랑 자주 가던 레스토랑이요?
“아니. 청예 한정식이라고, 나도 처음 가보는 데야. 주원이랑 만나기로 했거든.”
-아…….
“너 어디니? 별일 없는 거야?”
승원은 잠시 대꾸가 없었다.
채근할수록 더 깊이 숨어버리는 아들의 성격을 아는 선우연은 최대한 평정심을 유지하려 애썼다.
그렇게 몇 초가 흘렀다.
-말씀드릴 게 있어요.
“무슨 말?”
-만나서 얘기할게요.
“승원아.”
-그럼 끊어요.
너 진짜 괜찮은 거야? 내가 도와줄 건 없니? 어려운 일 있으면 엄마한테 얘기하라고 했잖아.
입에 머문 말은 한가득인데 뭐가 그리 바쁜지 승원은 인사도 없이 끊어버렸다.
‘얘가 진짜 무슨 일이 있기는 한 모양이네, 후…….’
선우연은 한숨을 내쉬며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고운 미간에 시름이 가득했다.
*
잠시 후 검은 세단이 한정식집에 도착했다.
“문 열어드릴까요, 사모님?”
“아니에요. 좀 기다리죠.”
도착하고 보니 약속 시간보다 20분이나 일렀다.
가뜩이나 어려운 자리에 어른이 먼저 도착해 기다리면 불편해할 게 뻔해서 선우연은 차에서 조금 기다리기로 했다.
‘설레는 마음에 너무 서둘렀나 보네. 나도 참.’
선우연은 살짝 웃음을 지으며 운전 기사에게 잠시 쉬다 와도 좋다고 말했다.
단풍이 곱게 물든 정원 안쪽으로 고풍스러운 기와집이 디귿 자 모양으로 서 있었다.
오가는 직원들은 색이 고운 개량 한복을 입고 부지런히 정원을 가로지르고 있었는데 한결같이 단정하고 기품이 있었다.
처음 와본 곳이지만 퍽 마음에 들었다.
‘이다음에 강 교수랑 같이 한 번 와야겠네. 맛보다 분위기를 좋아하는 양반이니 틀림없이 좋아할 거야.’
필연을 떠올린 그녀의 입가에 옅게 미소가 덧그려졌다.
그녀의 눈에 정원을 가로지르는 여자 하나가 들어온 건 그때였다.
“어? 저 아가씨는 그때 그……?”
며칠 전 커피숍에서 주문을 하지 못해 애먹고 있었을 때 도와줬던 아가씨였다.
반가운 마음에 선우연은 얼른 차 문을 열고 내렸다.
“저기!”
다급한 부름에 상대가 얼른 뒤를 돌아보았다.
“어? 안녕하세요?”
기억을 못 하면 어쩌나 불러놓고도 내심 쑥스러웠는데 다행히 알아보는 눈치였다.
의외의 장소에서 맞닥뜨린 것에 놀랐는지 두 눈이 토끼처럼 동그랬다.
“나 기억나요? 지난번에 카페에서 만났었는데.”
“당연히 기억하죠! 어떻게 잊겠어요.”
오해의 소지가 있다고 생각했는지 그녀가 얼른 덧붙였다.
“아, 보기 드물게 예쁘셔서…… 어어, 제가 너무 주책이었죠? 죄송합니다.”
그녀는 며칠 전과 다름없이 밝고 상큼했다.
예쁘단 말이 제일 감흥 없는 선우연이지만 수줍어하는 얼굴로 그 말을 하는데 귀여워 쓰다듬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겨우 두 번 본 사이인데 왜 이렇게 친근한 기분이 드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때 경황이 없어 고맙단 인사도 제대로 못 했어요.”
“어유, 고작 그런 일로 인사는요. 괜찮습니다.”
“고작 그런 일을 그쪽 빼고는 아무도 안 도와주던데?”
선우연의 칭찬에 상대가 쑥스러운 듯 목덜미를 긁적였다.
“정말 별일도 아니었는데.”
“그쪽이 도와준 덕분에 주문할 수 있었어요. 하마터면 사람들 많은 데서 늙은이라고 창피당할 뻔했거든.”
“어유, 늙은이라니요. 너무 곱고 예쁘신데! 어지간한 20대는 다 발라버릴 만큼 예쁘세요.”
“!”
“……죄송합니다.”
거듭 사과하는 상대의 모습에 선우연은 그만 웃음이 나와버렸다.
“고맙단 말 하려고 불렀는데 자꾸 사과만 하게 하네. 식사하러 왔어요?”
“아차, 네! 맞아요! 중요한 약속이 있어서요.”
“실례가 안 된다면 내가 아가씨 테이블 계산해도 될까? 그때 고마웠던 거 갚고 싶은데.”
“아뇨! 아뇨! 괜찮습니다.”
선우연의 제안에 상대가 펄쩍 뛰었다.
“왜. 부담스러워서?”
빈말로 던져본 게 아닌지라 선우연은 조금 아쉬웠다.
그녀는 눈눈이이를 철칙으로 삼는 사람이었다. 은혜든 복수든 갚을 건 열 배로 갚는 성격이라 친구로 삼으면 덕을 보고 적으로 삼으면 모가지가 날라갔다.
썩어나는 게 돈인 입장에서 이깟 밥 한 끼 사는 게 뭐 대수라고.
하지만 상대의 생각은 다른 모양이었다.
“마음만 감사히 받을게요. 보답을 받을 만한 일이 아니었어요.”
그러면서 속삭였다.
“그리고 여기 엄청 비싸요.”
속닥거리는 목소리가 귀엽게 느껴진 선우연의 눈매가 곱게 휘었다.
그때 등 뒤에서 낯익은 음성이 들려왔다.
“둘이 벌써 귓속말하는 사이예요? 뭔가 선수를 뺏긴 기분인데.”
긴 다리로 쭉쭉 정원을 가로질러 온 주원이었다.
두 여자의 시선이 동시에 그를 향했다가 다시 동시에 서로의 얼굴을 향했다.
‘……그쪽이?’
‘……네가?’
말은 하지 않았지만 놀라움으로 물든 눈동자가 같은 말을 했다.
어버버한 표정으로 눈도 깜빡이지 못하는 혜주를 보던 선우연의 눈매가 먼저 부드럽게 호를 그렸다.
인연이 되려면 이렇게도 만나지는구나.
첫 끗발이 개 끗발인 경우가 태반인 세상사에서 선우연이 유일하게 신봉하는 게 첫인상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오혜주는 일단 합격이었다.
*
몇 분 전.
혜주를 태우고 약속 장소에 도착한 주원은 차에서 내리기 전 휴대폰에 전화가 걸려온 것을 보았다.
“먼저 들어가 있어. 나 전화 한 통만.”
부재중 전화에 떠 있는 이름은 승원이었다.
약속 시간까지 20분이나 남은 데다 선우연이 도착했다는 연락도 없었기에 주원은 혜주를 먼저 내려준 후 승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가을 햇살이 강렬했다.
주원은 손갓으로 눈썹 위를 가린 채 주차장을 조금 서성였다.
“이 X끼 또 안 받네.”
전화가 온 게 몇 분 전인데 대체 왜 안 받는 거냐.
반복되는 발신음이 지루해질 때쯤 그의 눈에 멀리 두 사람의 실루엣이 들어왔다.
“뭐야, 저 그림은?”
휴대폰이 스르륵 귓가에서 떨어졌다.
발신음이 계속되는 휴대폰을 손안에 둔 채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어머니랑 혜주가 왜 같이 있는 걸까.
그런 의문이 들기도 전에 가슴이 울렸다.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두 사람이 웃고 있다.
한쪽은 싱그러운 풀밭 같고, 한쪽은 만개한 꽃 같아서 의외로 잘 어울리는 두 사람은 뭐가 그리 즐거운지 눈매를 반달처럼 휜 채 미소 짓고 있었다.
원래 잘 웃는 성격인 혜주야 그렇다 치고 선우연이 저렇게 웃는 모습은 오랜만이었다.
예쁘다.
무슨 대화를 나누는지, 어떻게 아는 사이인지 전혀 알 수 없지만 한 가지만큼은 분명했다.
‘이건 운명이다.’
오혜주는 완벽한 그림에 마지막으로 새겨넣는 낙관이었다. 강주원이란 마스터피스를 완성시키는 최후의 한 수라고나 할까.
그녀가 저기 서 있는 자체가 운명처럼 느껴져 저 자신이 꽉 찬 화폭처럼 풍요로워진다.
전화를 거는 것도 잊은 채 한참을 바라보던 주원이 흠흠 헛기침을 하며 다가섰다.
“둘이 벌써 귓속말하는 사이예요? 뭔가 선수를 뺏긴 기분인데.”
“응?”
두 여자의 동공이 지진을 일으켰다.
주원은 알 만하다는 얼굴로 씩 웃었다.
“어머니가 말했던 참한 아가씨가 이쪽이었군요.”
“네가 말한 20대 뺨치게 예쁜 사모님이 어머니셨고.”
이제야 아귀가 딱딱 맞아떨어졌다.
두 사람에게 따로따로 들었을 땐 짐작하지 못했는데 같이 있는 모습을 보니 딱 각이 나왔다.
“이미 만난 사인 줄 알았으면 비싼 밥 산다고 안 했을 텐데.”
능청을 떠는 아들래미의 등짝을 선우연이 찰싹 때렸다.
“없이 키우지도 않았는데 웬 돈타령이니? 밥은 내가 살 테니 군소리 말고 들어와.”
선우연이 먼저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시원시원한 발걸음을 보고서 선우연의 기분을 짐작한 주원이 싱긋 웃었다.
‘역시 우리 선우연 여사, 사람 보는 눈 있다니까.’
주원은 긴장한 혜주의 손을 꽉 잡았다.
“오늘 선우연 여사가 사는 날이니 많이 먹어. 이럴 줄 알고 제일 비싼 걸로 시켜놨어.”
“못 말려, 진짜. 음식이 입에 들어갈지나 모르겠어요.”
“긴장하지 말고.”
그 말을 들으니 더 긴장이 됐다.
딱딱하게 굳은 혜주의 미간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주원이 속삭였다.
“걱정할 거 없어. 어머니가 너 잡아먹으려고 하면 내가 재갈이라도 물릴 테니까 정신 차리고 들어가자.”
“!”
주원이 어벙벙한 혜주의 손을 휙 끌었다.
대망의 고부 만남이 시작되었다.
*
식당 내부는 다리 쪽이 파여 있는 좌식 테이블이었다.
선우연은 등허리를 편 채 자리에 앉아 있었는데 좌식 등받이에 등이 닿지 않을 정도로 자세가 꼿꼿했다.
그녀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혜주를 찬찬히 뜯어보았다.
‘모르는 아줌마일 땐 친근하게 굴더니 예비 시어머니라 긴장했나? 이럴 줄 알았으면 아줌마 코스프레 더 할 걸 그랬네.’
행여 실수라도 할까 싶어 원피스 자락을 붙들고 조심스레 앉는 모습이 퍽 귀여웠지만 너무 긴장을 하니 걱정스럽기도 했다.
‘체할까 싶어 밥도 양껏 못 먹이겠네.’
세월로 얻어지는 건 주름뿐만이 아니다. 사람 보는 눈과 악연을 거르는 눈도 생긴다.
선우연은 혜주의 맑고 선한 눈동자가 마음에 들었다.
짙은 테로 둘러싸인 고동색 눈망울. 별무리가 떠다니듯 반짝거리는 눈동자다.
웃을 때면 반달 모양으로 접히는 눈매는 장난기 가득한 소녀처럼 순수해 보였다.
‘저런 눈을 한 사람치고 나쁜 사람이 없는데.’
겨우 두 번 본 사이라 판단하기엔 이를 수도 있지만 첫인상이 너무 강렬했던 탓인지 이미 작성된 답안지를 보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더욱 확인하고 싶었다.
정말 그녀를 가족으로 받아들여도 되는지.
“반가워요. 정식으로 인사할게요. 주원이 엄마 선우연이라고 해요.”
“안녕하세요, 오혜주입니다.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저도 기뻐요.”
“승원이한테 몇 번 들어본 적 있는 이름이네. 고등학교 동창?”
대뜸 승원 얘기를 꺼내자 혜주의 눈동자가 조금 흔들렸다.
“네. 승원이랑은 고등학교 동창이에요. 대학교는 따로 다녔는데 회사 들어가서 다시 만났습니다.”
“보통 인연은 아니네요.”
선우연은 혜주의 표정 변화를 유심히 관찰하며 의미심장하게 덧붙였다.
“요즘 세상에 남사친, 여사친 다들 두고 산다는 거 알지만 십 년을 넘게 지지고 볶았으면 다른 마음도 생길 법한 시간이네.”
“어머니, 그건!”
“가만 있어, 넌.”
다소 무례하다 싶을 정도로 노골적인 말에 주원이 발끈했다.
선우연은 엄한 눈빛으로 찌그러져 있으라는 제스추어를 보냈다.
‘한 번만 더 끼어들면 너 퇴장.’
엄마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아는 주원은 여기서 나섰다간 본전도 못 찾을 걸 알았다.
걸음마 떼기도 전에 예의범절부터 가르친 어머니가 아무 계획도 없이 승원이 얘기를 꺼낸 건 아닐 거다.
하지만 혜주가 당황하는 모습을 보고 손 놓고 있을 수도 없었다.
진짜 재갈이라도 찾아와야 하나.
움찔거리는 주원의 손을 혜주가 가만히 붙잡은 건 그때였다.
“다른 마음, 생길 법한 시간이긴 했습니다.”
혜주가 담담히 선우연을 마주 보았다.
“그만큼 충분히 긴 시간이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