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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 혜주랑은 이제……상관없어 (104/121)


#104. 혜주랑은 이제……상관없어
2023.05.28.



 
혜주는 송곳 같은 선우연의 질문이 오늘 만남의 진짜 이유라는 걸 알아챘다.

잠깐 호의를 베푼 일로 밥까지 사겠다고 나설 만큼 혜주를 좋게 보던 사람이 갑자기 저런 날카로운 질문으로 찔러댈 땐 이유가 있을 것이다.


‘들은 바가 없다면 초면에 승원의 얘기를 꺼내진 않았을 거야.’

혜주는 선우연이 승원에게서 뭔가를 들었다고 확신했다.

그렇다면 확인하고 싶겠지.

똑같이 배 아파 낳은 두 아들 사이에서 이 여자가 분탕질을 했는지 이간질을 했는지 삽질을 했는지 한 번은 짚고 넘어가야 할 거다.

짧은 사이 생각 정리를 끝낸 혜주는 지금이야말로 가장 솔직해야 할 타이밍임을 직감했다.


“오랜 시간 친구로 지내며 마음이 늘 한결같지만은 않았습니다. 친구 이상의 감정을 느낀 적도 있었고 친구 이상으로 의지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처음엔 타이밍이 맞지 않아 인연이 되지 않았다 생각했는데 돌이켜보니 그냥 마음이 딱 거기까지였던 것 같습니다.”

“마음이 딱 거기까지였다?”

선우연이 팔짱을 끼며 등받이에 허리를 기댔다.

뜯어보는 눈초리는 여전했으나 아까처럼 날카롭지는 않았다.


‘역시 솔직하게 대답하기로 한 건 잘한 결정이었어.’

혜주는 스스로를 다독이며 다부진 음성으로 대답했다.


“마음이 충분했다면 언제, 어떤 상황에서 알게 됐더라도 결국엔 이어졌을 테니까요.”

“음.”

선우연은 눈을 지그시 감은 채 방금 혜주가 내뱉은 말을 곱씹었다.

주원이 눈치 없게 끼어들었다.


“우리처럼 말이지.”

두 여자의 눈초리가 동시에 홱 찢어졌다.


“강주원, 낄 데 안 낄 데 분간 못 하니?”

“아, 왜 그래요. 부끄럽게.”

깨갱.

살벌한 두 쌍의 눈동자에 드물게도 주원이 시무룩해졌다.

나 지금 실수한 거야? 그런 거야?


“가만히 좀 있어요.”

혜주가 옆구리를 쿡 찌르자 주원이 시큰둥하게 항변했다.


“왜, 뭐.”

불굴의 주원이 이번엔 선우연을 쳐다보았다.

눈치 밥 말아먹은 포지션을 고수하기로 결심한 채.


“어머니가 뭘 우려하시는지 알겠는데 그 얘긴 나중에 저랑 따로 하시죠. 숨길 것도 없으니 다 말씀드릴게요.”

“얘가 안 떨던 주접을 다 떠네.”

“사랑에 빠진 남자 처음 본 것도 아니시면서.”

선우연은 다섯 살짜리 꼬마를 보는 표정으로 픽 웃어버렸다.


“됐다, 얘. 내가 니들 연애 미주알고주알 들어서 뭐 하니? 삼각관계가 현재진행형만 아니면 됐어.”

“잘 생각하셨습니다.”

이후의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주문한 음식이 나오자 선우연은 혜주가 잘 먹는 반찬을 유심히 봐두었다가 슬쩍슬쩍 그쪽으로 밀어주었다.

그러면서 가끔 질문을 던지기도 했는데 그 질문이란 것이 참 묘했다.

부모님은 뭐 하시냐, 학교는 어디 나왔냐, 형제 관계는 어떻게 되냐 대충 그런 질문을 예상했는데.

아니면 드라마에서 본 것처럼 결혼하면 회사는 계속 다닐 생각이냐, 아이는 몇 명 낳을 생각이냐 취조하거나.

선우연의 첫 질문은 바로 이거였다.


“저 목석이 속은 안 썩여요?”

혜주는 그만 풉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어머니, 목석이라뇨. 저 목석이 얼마나 말랑말랑하고 간질간질한지 모르셔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알고 보면 댕댕이 목석이랍니다.’

그렇게 대답하고 싶은 걸 꾹 참으며 혜주는 조신하게 대답을 올렸다.


“속은 제가 더 썩이는 편이에요. 좀 무심한 면이 있어서요.”

선우연은 꼬숩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잘했네. 저 잘난 맛에 살더니 이참에 좀 기어봐야지.”

“기, 기어요?”

“항상 갑으로만 살면 버릇없어져서 안 돼요. 을도 되어보고 병도 되어보고 데굴데굴 바닥도 굴러봐야 철이 들지.”

열심히 혜주의 수발을 들던 주원이 발끈하여 끼어들었다.


“그러는 어머니는요.”

“난 날 때부터 철들어 있었어.”

턱을 치켜들고 하는 말에 혜주는 웃음을 터트렸다.

강주원 자뻑 유전자의 출처를 알게 되는 순간이다.

똑 닮은 모자지간을 보니 이 자리가 어렵지만은 않게 느껴졌다.


“네 아버지도 같이 나왔으면 좋았을걸. 이렇게 예쁜 여자친구 데리고 나온 줄 알면 엄청 배 아파하겠네.”

“다음에 인사드리면 되죠.”

“응. 혜주 집안 어르신들께는 인사드렸니?”

“네. 정식으로는 아니지만 인사를 드리긴 했어요.”

“잘했네. 뭐라셨어?”

“첫 만남에 점수를 대판 까여서 만회 중이에요.”

“나중에 혜주 어머니 만나면 얘깃거리가 많겠구나.”

선우연이 여상하게 뱉은 말에 혜주의 젓가락질이 멈추었다.

아. 아직 그걸 얘기 안 했네.

엄마가 없다는 게 그녀의 잘못은 아니지만 어떤 경우에서는 약점이 되기도 한다. 혜주는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엄마는 안 계세요. 어렸을 때 돌아가셔서 안 계시거든요.”

“아.”

“아빠 혼자 절 키워주셨는데 요즘은 만나는 아주머니가 있어서 왕래하며 지내고 있습니다. 좋은 분이세요.”

말하다 보니 자신이 너무 부족하게 느껴져서 염치가 없었다.

살면서 그다지 결핍이 있다고 생각하진 않았는데 객관적으로 나열된 상황들이 어쩜 이다지도 초라한지.

엄마 몫까지 사랑해주는 아빠가 있다는 것은 어쩌면 이런 자리에서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살아온 세월이 어떤 색으로 채워졌든, 알알이 걸어온 날들이 어떻게 꿰어졌든 어떤 이에게는 그녀의 상황이 ‘편부가정’ 딱 한마디로 정의될 수도 있으니까.

선우연은 가만히 혜주를 바라보다가 따스하게 손을 잡았다.


“혼자서 딸 키우시느라 고생 많으셨겠구나.”

혜주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왜 그 한마디에 눈물이 나는지 모르겠다.

엄마 없이 키운 티를 내지 않으려고 남들보다 두 배로 애썼던 수철이 떠올라서였을까.


“잘 자라주느라 애썼어.”

눈시울이 붉어진 혜주의 손등을 선우연이 토닥거렸다.

어느덧 선우연의 눈가도 촉촉해지자 기겁한 건 주원이었다.

놔뒀다간 둘이 부둥켜안고 울 것 같은 분위긴데, 이거.


“어머니, 평소대로 하세요, 평소대로. 처음 만나는 자리라고 너무 이미지관리 하시는 거 아닙니까?”

맥 커터의 역할을 충분히 이행한 덕에 선우연은 금세 감정을 추스렸다.


“요샌 이미지메이킹이 필수인 시대야. 너처럼 대책 없이 굴면 점수밖에 더 까이니?”

“만회 중이거든요.”

“그거야 네 생각이지.”

“아버님이 양주도 꺼내주셨다고요. 30년산 꺼낸 거면 얘기 끝난 거예요.”

“네가 선물한 건 아니고?”

“…….”

“하여간 손은 작아가지고. 기왕 선물할 거면 40년산 정도는 하지 그랬니.”

두 사람이 티격태격하는 모습에 혜주의 입가에 미소가 감돌았다.

거침없이 서로를 까 내리는데 어쩜 저렇게 사랑이 찰랑이는지.

처음으로 강주원의 가족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혼하고 싶다.

그가 열어준 문으로 들어갈 용기가 생겨버렸다.

……확 저질러버려?

그렇게 결심이 섰을 때 장지문이 벌컥 열렸다.

문틈으로 비친 낯익은 얼굴에 혜주는 심장이 철렁할 정도로 놀랐다.


‘강승원?’

느닷없는 등장에 놀란 게 아니다.

정작 혜주가 놀라버린 건 그의 몰골 때문이었다.


‘헉.’

한 달은 굶은 사람처럼 살이 쫙 빠져버린 얼굴과 퀭한 눈가, 이발 한 번 못한 듯 덥수룩한 머리를 하고 들어선 그는 지금껏 보아온 어떤 모습보다 힘겨워 보였다.

놀란 건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둘째, 네 꼴이 대체…….”

“너 뭐 하다가 이제야 나타나? 아까 전화는 왜 안 받고.”

선우연과 주원의 입에서 동시에 터진 말에 승원은 밀고 들어오다 조금 주춤했다.

뭐라 입을 떼려던 그의 시선이 혜주에게 닿았다.

승원의 눈동자가 일순 굳었다. 그러더니 이내 삐뚜름하게 입가가 비틀렸다.


“혜주도 같이 있다는 얘기는 안 했잖아요.”

원망하는 듯도, 체념한 듯도 한 그의 표정은 한없이 어둑해서 그가 지나온 긴 터널이 참 힘겨웠음을 보여주는 듯했다.


“말할 틈을 주지 않았잖아. 여기로 온다는 뜻인 줄은 몰랐지.”

“상관없어요. 어차피 알게 될 거니까.”

“뭘?”

선우연의 물음에 대답하는 대신 승원은 주원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형.”

굳은 표정으로 바라보는 빤히 쳐다보는 시선에 주원은 어금니를 깨물었다.


“왜.”

속에서 욕지기가 치밀었다.

좋은 자리에 초를 쳐서 화가 난 게 아니었다. 연락도 없이 불쑥 찾아온 것에 화가 난 것도 아니었다.

일순간 혜주에게 닿았던 승원의 시선이 지독하리만치 슬퍼서 화가 났다.

그 몰골로 돌아와서는, 너는 왜.


“걱정시켜서 미안해. 아까 전화 다시 걸었는데 안 받더라.”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똑바로 설명해. 네 꼬라지 지금 정상 아니야.”

“알아, 나도.”

승원의 목소리가 까칠했다.

눈이 달린 이상 이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 모를 리는 없을 테고, 머리가 달린 이상 주원이 선우연에게 혜주를 소개한 이유를 모르지 않을 거다.

주원은 말없이 앉아 있는 혜주의 손을 말아쥐었다.


“이 자리에 혜주가 있는 게 불편한 거면 나가서 얘기하고.”

“그런 거 아니야. 혜주랑은 이제…… 상관없어.”

거짓말. 상관없다는 놈이 왜 세상 무너진 얼굴로 서 있는 건데.

자갈 수십 개가 가슴에 달그락거렸다.


“진짜야. 이젠 아무 상관없어.”

승원은 세뇌하듯 되뇌며 선우연을 바라보았다.


“엄마.”

모자의 눈빛이 허공에서 충돌했다. 살얼음이 내린 듯 냉담한 분위기 속에서 승원이 토해내듯 한 문장을 뱉었다.


“소개할 사람이 있어요”

“무슨……?”

불길한 예감이 선우연의 가슴으로 불쑥 치밀었다.


“나 결혼하려고요. 허락해주세요.”

선우연은 그만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작은 일은 아닐 거라 예상은 했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지 않은가!

상대가 누구인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가 누구든 선우연에겐 사랑스러운 둘째를 저 지경으로 망가트린 여자일 뿐이었다.

내게 허락을 구하고 싶었으면 그런 모습으로 오지 말았어야지.

내게 인정받고 싶었으면 그따위로 굴지 말았어야지!

가슴에 불길이 일었다.


“얼빠진 놈 같으니라고.”

“엄마?”

선우연의 눈가가 분노로 파르르 떨렸다. 살벌한 기세에 막 장지문 안으로 들어서려던 다희가 멈칫했다.


“한 달이야.”

“엄마…….”

“어디 처박혀 있는지도 모르게 꽁꽁 숨어 버린 아들을 믿고 기다린 게 꼬박 한 달이라고. 연락 한 통 없는 아들을 그래도 무사히 돌아오겠거니 기다린 엄마에게 한 달 만에 돌아와 한다는 소리가, 뭐? 결혼?”

선우연이 승원의 얼굴에 찬물을 와락 끼얹었다.

촤르르.

차가운 물방울이 승원의 턱을 타고 뚝뚝 흘렀다.


“엄마…….”

“내 아들이 나를 이렇게 실망시키네.”

 

 
선우연이 가방을 들고 일어섰다.

장지문 바깥에 서 있는 다희를 투명인간인 양 스쳐 지나가는 그녀를 흐린 눈으로 바라보던 승원이 고함을 지른 건 그때였다.


“다희 임신했어요!”

우뚝.

선우연의 걸음이 멈추었다.


“……뭐?”

“제 애가 생겼다고요…… 어흑!”

승원이 무너지듯 자리에 주저앉았다.


“책임질 일을 했으면 책임지는 게 맞잖아요. 엄마가 그렇게 가르쳤잖아! 그러니까 허락해주세요.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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