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 진료 예약했습니다. 천다희요.
(105/121)
105. 진료 예약했습니다. 천다희요.
(105/121)
#105. 진료 예약했습니다. 천다희요.
2023.06.01.
-두 줄이야.
그 말을 들었을 때 처음 든 심정은 절망감이었다.
이미 헤어진 사이. 그것도 좋게 헤어진 것도 아니고 밑바닥까지 본 사이에 생명이 생겼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다희에게서 테스트기를 받아든 순간 승원은 삶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듯한 충격을 맛보았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잠깐 사귀는 것만으로도 버거웠는데 그 감정을 평생 가지고 살아야 한다니 끔찍했다.
믿을 수 없는, 아니 믿기 싫은 현실 앞에서 승원은 또다시 도망쳤다.
주위와 연락을 끊고 아무도 없는 곳에서 잠적한 그는 며칠이나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그러다 보니 자신에게 환멸이 들었다.
‘그래, 다희 너라고 원해서 이런 상황을 만든 것은 아닐 텐데. 어쩌면 나보다 네가 더 힘들 텐데…….’
자신의 아이를 가졌다는 여자의 말에 처음 느낀 감정이 절망이라는 게 치가 떨릴 정도로 구역질이 났다.
그 밤 다희를 안은 것도, 그녀 앞에서 흐트러진 것도 자신이었다.
술에 취해서라는 변명을 하기에 책임은 너무나 무거웠고 도망치기엔 많이도 늦었다.
모든 건 제 불찰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그걸 인정하니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해졌다.
‘누가 등 떠밀어 일어난 사고도 아닌데 누굴 탓하겠어.’
그래, 다희 말이 맞다. 실수가 반복되면 고의고 습관이다.
제가 벌인 일은 제 손으로 수습하는 게 인지상정이다. 그 대가로 감정을 거세한 채 오롯이 책임을 위한 삶을 살게 된다 해도 어쩔 수 없었다.
“뭐해?”
입덧 약을 먹고 잠들었던 다희가 깨어났다.
마음의 결정을 내린 승원이 돌아온 후 두 사람은 같이 살고 있었다.
입덧이 심해 거의 먹지 못하는 다희를 돌보기 위해서였다.
“죽 좀 쑤고 있었어. 오늘 아무것도 안 먹었잖아.”
“괜찮아. 하루 이틀 일도 아닌데, 뭐.”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다희의 표정엔 한없이 행복한 빛이 어렸다.
승원은 앞치마에 손을 쓱쓱 닦으며 둥근 접시를 꺼내 죽을 담았다. 마땅한 국자가 없어서 숟가락으로 옮겨 담느라 여기저기 흘렸지만 그래도 제법 구색을 갖춘 상차림이었다.
“고마워. 잘 먹을게.”
흰죽과 장조림, 잘게 썬 오징어 젓갈로 차려진 상을 보고 다희가 미소를 지었다.
어설픈 이 상차림이 승원의 최선이란 걸 안다. 그가 처음으로 제게 최선을 다해준다는 사실이 기뻐서 다희는 목이 멨다.
“내일 정기검진 날이지?”
다희가 한 숟가락을 막 입에 떠넣었을 때 승원이 물었다.
“어? 어…… 맞아.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네.”
다희가 급히 물을 들이켰다.
지난번 병원에 같이 가서 확인해보자는 승원을 만류하며 적당한 날을 찍어 정기검진이라 둘러댔는데, 벌써 그날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승원은 빈 컵에 다시 물을 따라주었다.
“같이 가자.”
“……꼭 그래야겠어?”
“꼭 그래야겠냐니 무슨 뜻이야? 같이 책임지겠다고 했잖아.”
“아니, 같이 가기 싫어서 그러는 건 아니고…… 산부인과 진료라는 게 너도 알다시피 남한테 보여주기엔 좀 그렇잖아. 특히 너랑은 사귀는 사이도 아니고 남편도 아닌데.”
다희는 어색해 보이지 않으려 애쓰며 갖은 핑계를 댔다. 하지만 승원은 흔들리지 않았다.
“병원 다녀오고 나선 많은 게 달라지겠지. 사귀는 사이도 되고 남편도 될 거야.”
“그렇지만, 아직은…….”
“죽을힘을 다해 책임질게. 그러기 위해선 내게도 확신이 필요해.”
승원의 눈동자가 여느 때보다 뚜렷했다.
‘영 바보는 아니구나.’
다희는 속으로 생각했다.
진짜 임신이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토록 간절히 원하던 승원이 남편이 되어주겠다는데 마음 편히 웃을 수가 없다.
며칠간 물심양면으로 수발을 드는 승원의 모습에 잠시 달콤한 꿈을 꿨다.
어떻게든 될 거라고, 이제 나도 행복할 수 있을 거라고.
거짓 위에 쌓아 올린 희망이 얼마나 위태로운지도 모르고 그렇게나 좋았다.
“응…… 알았어. 그럼 그렇게 하자.”
“아침까지 푹 자. 아무 걱정하지 말고.”
승원이 조용히 문을 닫고 나갔다.
다희는 이불을 끝까지 끌어올린 채 숨죽여 울었다.
내일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헛된 바람에 목구멍이 따끔거렸다.
*
태양은 어김없이 밝았고 약속한 시간이 되었다.
오후 두 시가 지났을 무렵 다희는 승원과 함께 병원을 찾았다.
진료 예약을 해두긴 했지만 막상 병원에 가면 어떻게 해야 할지 아무리 골몰해도 답을 찾을 수 없었다.
‘그냥 진료실 앞에서 까무러쳐버릴까?’
생각나는 거라곤 오직 그 방법뿐이어서 어떻게 하면 그럴싸하게 쓰러질 수 있을까 미리 연습도 했다.
입맛이 없다는 핑계로 식사를 두 끼나 거른 다희의 안색은 창백했다. 입술에 퍼프를 두드리며 한결 낯빛을 죽인 다희는 힘없이 걸음을 옮겼다.
“괜찮아? 좀 잡아줄까?”
“응, 고마워. 아침부터 기운이 없네.”
“밥을 그렇게 못 먹으니 그렇지. 입덧 약 먹어도 효과가 없는 거야? 오늘 병원 가면 의사한테 그것부터 물어봐야겠다.”
입덧 약이랍시고 다희가 챙겨 먹은 것은 하얀 알약 제형의 수면유도제였다.
불면증이 있어 종종 복용하던 건데 그 약을 먹으면 병든 닭처럼 꾸벅꾸벅 졸게 되니 진짜 임산부처럼 보일 수 있었다.
문제는 나름 꼼꼼한 승원이 병원에 가며 그 약을 챙겼다는 사실이었다.
다희는 콱 혀를 깨물고 싶었다.
“오늘 진료 예약했습니다. 천다희요.”
승원이 수속을 밟는 걸 보며 다희는 아랫입술을 질겅질겅 깨물었다.
‘어떡하지? 이대로 진료실에 들어가면 임신이 뻥이라는 거 다 알게 될 텐데…….’
초조하다 못해 피가 식어버리는 듯했다.
식은땀을 흘리는 다희를 승원이 걱정했다.
“안색이 정말 안 좋네. 임산부한테 처방 가능한 영양제라도 있는지 물어볼게.”
“응…….”
“진료가 조금 밀려서 30분 정도 기다려야 한대. 괜찮겠어?”
승원은 연신 다희의 식은땀을 닦아주었다.
걱정스러운 눈빛이, 그 다정한 목소리가 다희를 더욱 초조하게 만들었다.
어쩌다 여기까지 온 걸까.
처음 승원에게 임신이라고 거짓말을 했을 땐 그저 그를 붙잡아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임신테스트기를 보여주면 믿어줄 거라고, 그 후엔 적당한 때를 봐서 유산했다고 둘러댈 생각이었다.
설마하니 승원이 이렇게까지 강경하게 나올 줄은 몰랐다. 미리 알았더라면 어떻게든 수를 썼을 텐데.
‘차라리 지난주쯤 유산했다고 둘러댈 걸 그랬어.’
그러지 못한 건 아직 승원과 결혼이 결정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결혼식장에 들어가기도 전에 아이를 유산했다고 하면 떠나버리겠지. 홀가분하게.
어떻게든 결혼부터 해치워버린 후 유산했다고 둘러댈 계획이었는데, 신중한 승원의 성격은 하필 이럴 때 빛을 발했다.
‘짜증 나, 진짜.’
점점 줄어드는 대기 줄을 보며 다희는 타이밍을 쟀다.
‘간호사가 부르면 일어나는 척하며 쓰러져야겠어. 임신부 중에 기립성저혈압 같은 거 앓는 사람 많다고 했으니 의심하지 않을 거야. 아차, 그런데 여기 병원이잖아. 응급실로 옮겨졌다 가짜 임신이 들통나기라도 하면 어쩌지?’
불안이 머릿속을 가득 메운 사이 시간은 착실히 흘렀다.
“천다희 님, 들어오세요.”
이윽고 다희의 진료 순서가 되었다.
쿵. 쿵.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어떡해…… 진짜 어떡하냐고……!’
“들어가자, 다희야.”
승원이 다희를 부축했다.
멍하게 앉아 있던 다희는 기절할 타이밍을 놓치고 그의 손에 이끌리고 말았다.
한걸음, 한걸음 가까워지는 진료실이 지옥문처럼 보였다.
저기 끌려 들어가면 다시는 빛을 보지 못할 거야.
도망치고 싶은데 숨을 곳이 없다.
드르륵.
진료실 문이 열렸다.
“저기, 승원아…….”
나 화장실이 너무 급해서 그런데 진료 좀 미루면 안 될까?
다급한 대로 둘러대려던 찰나였다.
“천다희 씨 되십니까?”
제복을 입은 경찰 한 명이 그녀를 불렀다.
“무슨 일이시죠?”
진료실 문 안쪽에 서 있던 승원이 경계하는 눈빛으로 다희를 막아섰다.
“천안 쭈야국밥 리뷰 테러 사건으로 수사 중에 있습니다. 잠시 말씀 좀 나누고 싶은데.”
“천안…… 쭈야국밥이요?”
승원이 눈을 부릅떴다.
뭔가 있다고 생각한 경찰이 떠보듯 수사 내용을 흘렸다.
“쭈야국밥집에서 신고가 들어왔어요. 최근 악성 리뷰어로 추정되는 인물이 쭈야국밥에 여러 번 비슷한 내용의 댓글을 달았다고 하더군요.”
“그게 다희랑 무슨 상관이죠?”
“아직 수사 중이라 자세한 얘기는 드릴 수 없습니다. 정식 조사는 아니니 몇 마디만 해주시면 돼요.”
“다희랑 상관있는 거냐고요.”
“상관이 없으면 제가 여기 올 이유도 없었겠죠?”
……하아.
쭈야국밥 얘기가 나온 순간부터 날이 서 있던 승원은 뭔가 찔리는 게 있는 사람처럼 초조해하는 다희를 보고는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정말 네가 한 짓인 거야?’
경찰이 언급한 사건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면 천다희 성격에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경찰이면 다냐고, 왜 생사람 잡냐고 난리를 쳤겠지.
“지금은 진료를 봐야 해서 수사에 응하기 힘들 것 같습니다.”
승원은 뒤틀리는 속을 간신히 잠재우며 경찰에게 말했다.
어찌 됐든 지금 다희의 보호자는 자신이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쳐다보는 시선이 쏟아지는 화살처럼 날아드는데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그럼 진료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
“아뇨.”
승원은 단호하게 경찰을 막아섰다.
“다희는 현재 절대적으로 안정이 필요한 상황입니다. 다희가 범인으로 특정된 상황인가요?”
“그건 아닙니다만 일단 조사를 해 봐야…….”
“특정된 상황이 아니라면 돌아가 주시면 좋겠습니다. 건강이 회복되면 연락드릴 테니 명함 한 장 주세요.”
첨예한 대립 한가운데에서 다희는 이도 저도 못 하고 눈치만 보았다.
선택해야 했다.
경찰에 협조할지, 진료실로 끌려갈지.
‘어쩌면 이건 기회야. 일단 이 상황부터 모면하자.’
차악과 최악 사이에서 빠르게 판단을 내린 그녀가 머리를 짚으며 가냘프게 승원의 팔을 잡았다.
“승원아…….”
곧 쓰러질 것처럼 휘청인 그녀가 애처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진료는 나중에 봐야 할 거 같아.”
“무슨 소리야.”
“나 때문에 너무 많이 지체됐잖아. 기다리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눈치 보여.”
승원이 만류할세라 얼른 진료실 문을 닫고 나온 다희가 경찰에게 말했다.
“수사에 협조할게요. 대신 조용한 곳에서요.”
“그러시겠습니까?”
수첩을 탁 접으며 앞장서는 경찰을 따라가며 다희는 속으로 되뇌었다.
차라리 잘 됐어.
이참에 스트레스로 유산했다고 하지,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