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 아이만 아니면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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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 아이만 아니면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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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 아이만 아니면 진짜……
2023.06.04.
성실히 조사에 임하겠다던 태도와 달리 경찰과 둘만 남게 되자 다희는 신경질적으로 돌변했다.
“내가 그랬다는 증거 있어요? 내가 범인이라고 확정된 것도 아닌데 사람들 득시글거리는 병원까지 찾아오는 건 좀 아니지 않나요?”
경찰은 돌연 공격적인 그녀의 태도에 난색을 표했다.
“그 부분은 일단 죄송하게 됐습니다. 경찰서로 부르면 더 곤란할 거 같아 직접 찾아왔는데 실례가 많았습니다.”
“그러니까 증거 있냐고요.”
“조사 중인 증거가 있으니 찾아온 거 아닙니까. 천다희 씨가 조사에 성실히 임해주시면 금방 밝혀질 것 같습니다. 그러니 협조해주시죠.”
경찰은 쭈야국밥집에 남겨진 악플을 쭉 프린트해 보여주었다.
“여기 이 글자 맞춤법 보이시죠? 조사 중, 천다희 씨가 같은 부분을 빈번하게 틀린다는 내용을 입수했습니다.”
“하, 맞춤법 틀리는 사람이 나뿐이에요? 어디 말도 안 되는 걸 증거라고 들이밀어요?”
“그뿐만이 아닙니다.”
경찰은 흐릿한 CCTV 사진을 내밀었다.
그걸 본 순간 다희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화면에 찍힌 파충류 숍 내부가 익숙했다.
“알아보니 쭈야국밥에 들어 있었다던 벌레 사체가 귀뚜라미더군요. 그것도 보통 귀뚜라미가 아니고 파충류 먹이용으로 쓰이는 종인데요.”
“……그런데요?”
“조사를 좀 하다 보니 천다희 씨로 추정되는 인물이 찍힌 CCTV가 있어서요. 본인이 맞는지 확인해주시겠어요?”
“저 아니에요.”
“지금 입고 계신 옷, 그때 입은 거랑 같은 옷 맞죠?”
“!”
경찰 조사가 끝난 후 다희는 멍하니 커피숍에 앉아 있었다.
매섭게 추궁해오는 경찰에게 끝까지 발뺌했지만 그는 흐릿한 CCTV 화면에 찍힌 범인의 키와 성별, 옷차림과 헤어스타일로 다희를 범인으로 확신하는 듯했다.
‘그 가게에 CCTV가 있을 줄 몰랐어…….’
최대한 조심했다고 생각했다.
가게에서 벌레 몇 마리를 구입한 후 천안으로 내려갈 때 현금으로 버스 티켓을 구매했고, 행여 조사가 들어올 것을 대비해 아이디도 제 것을 사용하지 않았다.
악플을 남긴 계정을 비밀리에 사들일 때도 현금을 사용했고 계정을 판 사람과 직접 마주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이렇게 걸린다고?
“다희야.”
잠시 후 커피숍으로 들어온 승원이 다희의 맞은편에 앉았다.
한 모금도 마시지 않은 다희의 허브티를 벌컥벌컥 들이켠 그가 잔을 탁 내려놓았다.
“정말 너야?”
무겁게 가라앉은 그의 눈동자는 깊이를 알 수 없을 만큼 침잠해 있었다.
“나 아니라니까.”
“거짓말 그만해! 쭈야국밥집이면 혜주 아버지가 운영하는 식당이잖아. 정말 너와 관련이 없어?”
“너도 봐서 알겠지만 변변찮은 증거도 없잖아! 경찰이 날 찾아온 건 리뷰를 남긴 사람이 틀린 맞춤법이 내가 쓴 거 같다는 이유에서였어. 그걸 누가 말해줬겠어? 오혜주잖아. 걔가 날 모함하는 거잖아!”
“혜주가 왜.”
“날 싫어하니까!”
다희가 울음을 터트리며 고함을 질렀다.
어깨를 들썩이며 우는 그녀를 승원은 고요히 내려다보았다.
“CCTV는 어떻게 된 건데.”
“…….”
“아까 그 경찰과 잠시 대화를 나눴어. 사진 보여주더라.”
“…….”
“그거 너 맞아. 너잖아.”
“흐윽……!”
다희는 더 이상 변명할 의지를 잃어버렸다.
승원이 그 사진을 봤다면 자신을 못 알아볼 리 없었다. 친구로 지낸 세월이 몇 년인데.
모르는 사람이 보고서도 단번에 자신을 짚어낼 정도인데 승원이 알아보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대답 없이 어깨만 들썩이는 다희를 묵묵히 바라보던 승원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어디까지 실망해야 하냐. 아이만 아니면 진짜…….”
한숨에 섞여 흘러나온 진심이 사정없이 다희를 할퀴었다.
그가 사라진 자리는 싸늘한 냉기만 감돌았다.
*
자취방으로 돌아온 다희는 이른 저녁부터 술을 퍼붓기 시작했다.
“다 틀렸어, 이젠.”
임신 코스프레를 하느라 술은 몇 주간 입에도 대지 않았었다.
행여 냄새라도 날까 봐 승원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철저히 금주했다. 하지만 이젠 그럴 이유가 없어졌다.
“승원이는 날 버릴 거야. 더는 날 불쌍하게 여기지도 않을 거야…….”
내가 뭐 많은 걸 원했나.
그녀가 바란 건 오직 강승원 한 명뿐이었다.
그의 마음을 얻기 위해 수없이 거짓말을 하고 친구를 버렸다.
막다른 골목에서 발견한 가느다란 동앗줄을 손에 쥐고 겨우 그에게 한 걸음 다가서나 싶었다.
지금 당장은 책임감으로 곁에 있지만 시간이 흐르면 그도 날 사랑해줄 거라고.
딱 한 번의 기회만 더 주어지면 그의 마음을 잡을 수 있을 거라 오만한 생각을 했다.
하지만 쭈야국밥집에 리뷰 테러를 한 사람이 자신이란 게 밝혀졌을 때 승원의 표정은 글쎄. 참담하다는 말로는 부족할 정도로 오만 정이 떨어진 표정이었다.
차라리 화를 내는 게 나았다.
돌덩이를 보는 듯 무감한 눈빛에 담긴 감정은 분명한 혐오였다.
다희는 손에 쥐고 있던 동앗줄이 툭 끊어지는 느낌이었다.
“어쩌면 다신 내 얼굴을 보려 하지 않을지도 몰라. 배 속의 아이도 같이 버릴 거야…… 나 이제 어떡하지?”
중얼거리던 다희의 목구멍으로 쓴 물이 올라왔다.
하도 거짓말을 하다 보니 이젠 자신마저 속이려 드는 걸까.
저도 모르게 아랫배를 문지르고 있는 자신이 끔찍했다.
승원과 하루 빨리 결혼하려 했던 계획도, 적당한 시기에 유산이라 둘러대려 했던 계획도, 하얗게 부서져 내린 모래성처럼 부질없었다.
‘나를 죽도록 혐오하는 남자와 어떻게 평생을 살겠어. 만약 아이 때문에 돌아온다고 해도…… 내가 유산한 순간 모든 건 원점일 텐데.’
술을 그렇게 마셨는데 잠이 오지 않았다.
억지로 잠을 청하려 입덧 약이라 속였던 수면유도제를 몇 알 삼키니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팠다.
“왜 잠이 안 오는 거야. 왜!”
몽롱한 정신으로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던 다희가 침대에 쏟아진 알약을 한 알씩, 한 알씩 집어삼켰다.
방금 약을 먹었던 것을 까먹은 사람처럼.
*
부르르.
같은 시각, 촛불 하나를 켜놓고 점을 쳐보던 귀녀의 어깨가 떨렸다.
“기어이 변고가 생기고 말았구나……!”
주원의 일로 도 씨와 계략을 꾸민 후 그녀는 매일같이 신점을 쳤다.
신의 힘을 빌리는 자는 그 힘을 사용할 때도 극도로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상식적으로 아무 때나 힘을 남발하면 천기가 어지러워지지 않겠는가.
지나가다 어깨만 부딪쳐도 저주를 걸 수 있다면 그건 무당이 아니라 신일 거다.
사람에게 사술을 쓰는 경우 그 화가 무당 자신에게도 미치는 법이었다.
신기를 남용한 대가는 대개 자신이 쓴 힘보다 곱절은 처절하게 치르게 마련이었다.
발밑에 엎드려 오열하는 도 씨의 기구한 사정을 알고서도 선뜻 나서지 못한 건 그 때문이었다.
“다희에게 변고가 생긴 거야. 틀림없어!”
그 대가를 치르는 게 자신이라면 별로 문제 될 것도 없었다. 신내림을 받은 후 생사에 초연해진 귀녀였으니 차라리 이참에 신의 곁으로 가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신점에 나타난 불길한 기운은 다희에게 드리워 있었다.
드르륵!
귀녀는 당장 탁상을 밀고 일어났다.
“제발 전화 좀 받아라, 아가…….”
서울로 향하는 길에 내내 전화를 걸었으나 응답이 없었다.
평소에도 전화를 잘 안 받는 딸이긴 했지만 수십 통이나 연거푸 걸었는데도 받질 않으니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귀녀는 택시를 잡아타고 다희의 자취방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축 늘어진 다희를 발견했을 때 귀녀는 정말이지 하늘이 무너지는 듯했다.
“다희야! 정신 차려봐, 다희야!”
딱 봐도 그냥 잠든 상황은 아니었다.
몇 차례 흔들어 보아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자 귀녀는 급히 119를 불렀다.
응급실에 도착하자마자 다희의 눈꺼풀을 뒤집어 까본 의사가 위세척을 진행했다.
다행히 복용한 수면유도제가 소량이라 생명에 지장은 없다고 했다. 파리한 안색으로 잠든 딸을 보며 귀녀는 무너지듯 의자에 주저앉았다.
‘내 딸이 설마…… 죽으려고 했던 걸까?’
귀녀는 핏발 선 눈으로 허공을 노려보았다.
일반 병실로 옮겨진 후 안정을 되찾고 있었지만 다희의 의식은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온기가 도는 다희의 손을 주무르며 귀녀는 자꾸 복받치는 설움에 목구멍에서 피가 날 것만 같았다.
내 딸에게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얼마 전 자신을 찾아와 신점을 봐달라고 했던 다희가 떠올랐다.
올해 결혼 운이 들어와 있다는 소리에 뛸 듯이 기뻐하던 딸. 그러다 귀녀가 해코지한 사람이 주원이란 걸 알게 되었을 때 세상이 끝난 듯 절망하던 딸.
‘강승원이라고 했었지. 그때 회사에서 마주쳤던 남자 이름이.’
다희는 귀녀에게 그를 애인이라고 소개했었다.
다희에게 일어난 모든 문제가 그 남자로 비롯되었다는 걸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으음…….”
잠시 후 다희가 깨어났다.
“정신이 들어? 괜찮니, 다희야?”
느리게 눈꺼풀을 여닫던 다희의 동공이 서서히 또렷해졌다.
“여기가 어디야.”
“병원이야. 너 하마터면 죽을 뻔했어! 대체 어쩌자고 약을 그렇게 먹은 거야?”
다희는 대답 대신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말도 잇지 못하고 흐느끼는 딸을 보는 어미의 가슴은 참담했다.
제 손으로 기른 딸이면 등짝이라도 찰싹 때리며 정신 차리라고 윽박을 질렀을 텐데, 그녀에겐 그럴 자격조차 없었다.
표독스러울 정도로 독하게 굴던 딸이 무너지는 모습에 귀녀는 심장이 뜯기는 듯했다.
한참 후 진정이 된 다희가 입을 열었다.
“죽으려고 먹은 건 아니야. 하지만 뭐…… 죽었어도 나쁘지 않았겠네.”
까끌까끌한 목소리로 다희가 털어놓은 얘기는 얼추 귀녀의 예상과 틀리지 않았다.
한 사람에 대한 집착으로 심신이 무너져내린 딸.
거듭된 거짓말과 돌이킬 수 없는 과거의 갈래들.
승원에게 버림받을 것 같다는 얘기를 하며 다희는 부풀지도 않은 아랫배를 부여잡고 울었다.
절박하다 못해 거짓과 현실을 혼동하기 시작한 딸을 보며 귀녀는 결심했다.
‘내가 돕지 않으면 이 애가 죽겠구나.’
무슨 일이 있어도 다희만큼은 지켜야 했다.
제대로 키우지도 못한 어미는 죄인이다.
자식을 위해 내어줄 수만 있다면 그깟 목숨이 아까울까.
“환자분, 괜찮으세요?”
환자 상태를 살피기 위해 병실에 들어선 간호사가 울부짖는 다희를 보곤 당황해 서성였다.
귀녀는 말없이 다희의 등을 어루만졌다.
그때 병실 문이 벌컥 열렸다.
“다희야, 괜찮아?”
헐레벌떡 뛰어 들어온 이는 승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