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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 천다희와 가족으로 지낼 수 있냐고 (107/121)


#107. 천다희와 가족으로 지낼 수 있냐고
2023.06.08.



‘강승원이 어떻게 여길?’

다희는 얼른 눈을 감고 자는 척을 했다.

파리한 안색으로 누워 있는 다희를 본 승원이 머리를 쥐어뜯었다.


“너 왜 이러고 있어…… 대체 왜 이렇게 된 거야……!”

믿을 수 없는 현실 앞에서 그는 패닉에 빠져들었다.

혜주에게 해코지를 한 일로 다희를 추궁하긴 했지만, 설마하니 스스로 생을 저버릴 줄은 몰랐다.


“환자에게 손대지 마세요. 위세척을 끝낸 직후라 절대적으로 안정이 필요합니다.”

링거액을 조절하고 있던 간호사가 황급히 그를 말렸다.

승원은 얼른 물러서며 간호사의 팔을 붙들었다.


“선생님, 태아는 무사한가요?”

“네? 태아라니 그게 무슨…….”

간호사가 어리둥절한 눈으로 되물었다.


“다희가 지금 임신 중이거든요. 아이는 괜찮냐고요.”

절박한 승원의 물음에 간호사가 허둥지둥 차트를 뒤졌다.

이제 입사한 지 3일 차인 그녀는 오늘만 해도 여러 번의 실수를 저질렀다.

업무가 손에 익지 않아 빠뜨린 기록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녀는 적잖이 당황했다.


‘어떡해, 나 또 실수한 거 아니야? 수간호사 쌤이 아시면 불호령이 떨어질 텐데……!’

그때였다.

짜아악!

눈앞에 별이 반짝이나 싶더니 승원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자네가 무슨 자격으로 그딴 걸 물어! 내 자식새끼도 모자라 손주까지 버리려던 놈이!”

난데없이 뺨을 후려친 여자에 승원이 당황하여 눈을 끔뻑였다.


“어? 아주머니는 그때 회사에서 마주쳤던…….”

“다희 엄말세.”

“예?”

승원이 멍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자신이 다희의 엄마라고 말하는 귀녀의 말을 선뜻 납득하기 어려웠다.

워낙 인상이 독특해 마주친 일을 떠올리는 건 어렵지 않았으나 그때 다희는 분명 그녀를 ‘아주머니’라고 불렀었다.


‘그럼 그것도 거짓말이란 거야?’

대체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인지 가늠할 수도 없었다.

혼란스러운 승원을 귀녀가 몰아붙였다.


“짐승도 그렇게 모질지는 못한 법이네! 제 애를 가진 사람을 어찌 그리 내칠 수가 있어!”

“……죄송합니다.”

“다행히 복용한 양이 많지 않아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고 하네. 배 속 태아도 마찬가지고. 내가 조금만 늦었더라면 정말 큰일 날 뻔했어! 그렇죠, 선생님?”

새끼를 지키기 위해 눈을 벌겋게 물들인 짐승처럼 귀녀는 절박했고 또 간절했다.

완전히 금이 가버린 인연을 꿰어줄 수 있다면.

그리하여 내 딸이 행복해질 수만 있다면 못 할 짓이 없었다.


“아, 그 부분은 확인을 해보고…….”

간호사가 어리바리하게 말끝을 흐렸다. 귀녀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간호사 선생님! 이놈이 제 애를 밴 여자를 버린 놈이에요. 그래놓고 배 속 아기의 안부를 묻다니요! 이게 사람 새끼입니까?”

“아휴, 어떻게 그런…….”

“이제 대답해보세요. 태아의 안부를 제가 이놈한테 말해줘야 합니까? 정말 그래요?”

“어휴, 저런…….”

간호사는 안타까움에 혀를 찼다.

그건 승원에게 확신이 되었다.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어 그는 연신 고개를 떨구며 사죄했다. 그러곤 간호사에게 절박하게 물었다.


“선생님, 정말 괜찮은 거겠죠? 임부도, 태아도 무사한 거 확실하죠?”

“아…… 네. 자세한 건 담당 선생님께 확인해 보고 말씀드릴게요.”

신입 간호사가 얼버무리며 황급히 병실을 나섰다.

그제야 안심한 승원이 조금 비틀거리며 침대를 붙잡았다.

귀녀는 굳은 얼굴로 승원의 팔을 홱 끌었다.


“자네 나랑 얘기 좀 하지.”

차트를 확인한 간호사가 다시 돌아오기 전에 승원을 빼내야 했다.

*

다희는 무사히 깨어났다.

제일 사랑하는 사람에게 제일 못난 모습만 보이는 게 창피해서, 돌이킬 수 없는 관계에 절망해서 죽으려 했다는 그녀의 얘기를 들은 승원은 견딜 수 없을 만큼 괴로웠다.

평생 무난하게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세상에서 제일 나쁜 놈이 되어버렸다.

갈팡질팡하는 마음으로 다희를 흔들어놓고 일방적으로 이별을 통보했다. 자신의 아이를 가졌다는 다희를 의심했고, 거짓말을 추궁하며 그녀를 괴롭게 했다.

자신이 해온 모든 행동은 끔찍한 결과를 낳았다.

퇴원한 후로도 기력을 회복하지 못하는 다희를 보며 승원은 더욱 자책했다.

결론을 내야 했다.

다희를 온전히 지킬 것인가, 천하의 개쓰레기로 남을 것인가.

고민은 길지 않았다. 자신의 아이를 임신한 여자를 저버릴 정도로 모진 사람은 못 되었으니.


“다희 임신했어요!”

선우연에게 다희를 소개한 것은 자신의 결심에 못을 박기 위한 첫걸음이었다.


“……뭐?”

“책임질 일을 했으면 책임지는 게 맞잖아요. 엄마가 그렇게 가르쳤잖아! 그러니까 허락해주세요. 제발…….”

놀라 입술만 벙긋거리는 선우연을 보며 승원은 가슴이 무너지는 듯했다.

하늘이 무너져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을 것 같던 엄마가 곧 주저앉을 사람처럼 휘청인다.

변변한 효도 한 번 안 해본 아들이지만 이토록 실망시킨 적은 없었는데.

디딘 곳이 벼랑 끝이라 물러설 수도 없었다.


“미친놈 아니야, 이거.”

차디찬 침묵을 깨뜨린 건 주원이었다. 조소를 흘리며 다가온 그가 승원의 앞에 섰다.


“천다희가 얼마나 상것인지는 너도 겪어봐서 알겠고.”

분노를 꾹 눌러 삼킨 듯 그르렁대는 목소리가 그의 잇새에서 흘렀다.


“천다희 엄마가 누군지 알아, 몰라.”

“……알아.”

“날 죽이려 한 여자가 낳은 게 쟤야. 그런데 내가 저딴 거랑 가족이 된다고? 이딴 개소리나 씨불이려고 그동안 숨어 있었냐?”

“말이 너무 심하잖아, 형!”

“심한 얘기는 아직 시작도 안 했어!”

와락.

주원과 승원이 서로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누구 하나 찔러 죽일 듯 형형한 눈빛 속에 오롯이 두 사람만 있었다.

둘 사이에 흐르는 날카로운 공기에 누구도 침범할 수 없었다.


“다희 임신 중이야. 말 가려서 해.”

승원이 어금니를 씹으며 경고했다. 주원은 비릿하게 웃었다.


“네 애인 건 확실하고?”

“무슨 말을 그따위로 해! 또다시 다희를 모욕하면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

“같잖게 역성을 드네. 무당 딸이랑 언제부터 한 편 먹었냐? 응?”

“다희는 그 일과 상관없어. 다희 어머니 단독으로 저지른 일이고 그 일에 대해 충분히 미안해하고 계셔.”

“사람 모가지 따놓고 사과만 하면 다야? 그럼 나도 네 대가리 한 번 깨도 되냐? 어차피 맛탱이 간 거 같은데.”

“빈정거리지 마! 다시 말하지만 다희는 형 일과 상관없어. 다희 어머니는 다희를 키운 적도 없고 서로 연락도 안 해. 어찌 보면 다희도 피해자라고!”

“X랄하네. 피해자?”

주먹질만 안 했지 누구 하나 죽일 기세였다.

험악한 기세로 으르렁대는 형제 사이에서 선우연은 거의 뒤로 넘어갔다.


‘이게 다 무슨 소리야. 승원이가 데려온 여자가 그 무당의 딸이라고?’

다희의 존재조차 모르고 있던 그녀는 충격적인 진실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들으셨죠. 전 이 결혼 절대 허락 못 합니다.”

“누가 형 허락 필요하댔어? 엄마, 다희가 임신했어요. 다희 배 속에 제 아이가 자라고 있다고요!”

주원과 승원이 뱉어낸 말들이 화살처럼 심장에 꽂혔다.

제 배로 낳은 두 녀석이 서로를 할퀴고, 갉아내는 모습은 차마 지켜보기 힘들 정도로 참담했다.


“그만!”

선우연은 굳은 얼굴로 일갈했다.


“여기서 한마디라도 입 벙긋거리면 죽을 줄 알아.”

머리가 지끈거리는 듯 선우연이 이마를 짚었다.

살벌한 소음이 거짓말처럼 가라앉았다.

꾹 닫힌 아들들의 입을 한 번씩 노려본 그녀가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주원이랑 혜주는 나가보렴.”

그러곤 다 식어버린 찻잔 앞에 다시 자리했다.


“승원이 넌 이쪽으로 앉아.”

 

*



“미친놈이 진짜, 하…….”

가게에서 나온 후로도 주원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말 한마디 없이 앞만 노려보며 운전하는 그의 모습에 혜주는 섣불리 말을 붙일 수가 없었다.


‘오빠 많이 힘든가 보네. 왜 안 그렇겠어. 승원이랑 그렇게 각별한 사이였는데…….’

거친 운전에 혜주의 몸이 휘청거렸다.

혜주는 손잡이를 꽉 쥔 채 주원의 눈치를 살피다 결국 말을 붙이는 걸 포기했다.

끼익-

얼마 후 차가 혜주의 집 앞에 도착했다.

차를 멈춘 후에도 주원은 핸들을 꽉 움켜쥔 채 말이 없었다.

쾅, 쾅, 핸들에 머리를 부딪히며 둔탁한 소음을 낸 그가 낮게 욕설을 짓씹었다.


“씨X, 진짜.”

거친 욕설은 들릴 듯 말 듯 작았다.

혼잣말이라는 걸 알았으나 난생처음 본 거친 모습에 가슴이 철렁했다.

혜주는 막 떼려던 입술을 닫고서 조용히 차에서 내렸다.

근처 편의점에서 생수를 사 온 그녀가 뚜껑을 따서 그에게 내밀었다.


“워워. 오빠 진정 좀 해요.”

주원은 속이 타는지 벌컥벌컥 생수를 들이켰다.

한참이 지난 후에야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가 입을 열었다.


“미안. 너한테 화낸 거 아니야.”

“알아요. 지금 이 상황에서 나한테 화내면 또라이지.”

무거운 분위기를 바꿔보려 장난을 쳐보았지만 주원은 받아주지 않았다.


“귀엽다 귀엽다 했더니 천지 분간을 못하고 날뛰네. 저딴 놈을 동생이라고, 하아.”

혜주는 주원을 자극하지 않으려 노력하며 짧게 대꾸했다.


“다희가 임신했다잖아요.”

“그것부터가 병신같다는 거야.”

뱉어놓고 아차 싶었는지 주원이 두 손으로 혜주의 귀를 감쌌다.


“미안. 우리 혜주 귀 더럽히면 안 되는데.”

화를 낼 대상이 혜주가 아니란 걸 안다. 어쩌면 이 상황에서 더 화가 나는 사람이 혜주일 수 있다는 것도 안다.

평생 곱고 예쁜 말만 듣게 해주고 싶은 여자 앞에서 저도 모르게 욕을 몇 번이나 뱉어버린 주원은 그런 자신이 실망스러워 속에서 또다시 욕지기가 치밀어 올랐다.


‘제기랄, 빌어먹을, 이런 젠장!’

입술을 꾹 봉인한 채 애꿎은 핸들만 부서져라 움켜쥔 그의 모습에 혜주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럴 거면 차라리 시원하게 욕하고 진정하는 게 낫겠어요. 나 어디 좀 가 있을까?”

“그럴래?”

잠시 후.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 있는 혜주의 눈에 덜컹거리는 차가 들어왔다.

해독이 불가능한 고성과 클락션 소리, 간헐적으로 들썩이는 차체까지 그야말로 험악했다.


‘뭔 짓을 하는 거야, 대체.’

잠시 후 진정이 된 주원이 차에서 내렸다. 차오른 울분을 다 쏟아낸 듯 아까완 비할 데 없이 안정된 모습이었다.


“미안해. 못 볼 꼴 보였다.”

조금 쉬어버린 목소리에 속이 상한 혜주가 말없이 주원의 손을 잡았다.

둘은 손을 맞잡은 채 천천히 근처 벤치로 걸음을 옮겼다.


“오늘 진짜 좋았거든. 내가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두 사람이 서로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아서.”

“나도 좋았어요. 걱정했던 게 무색할 정도로 너무 좋은 분이셔서. 작은 인연도 소중히 생각해주시는 분이라 감사하기도 했고요.”

주원이 재킷을 벗어 차가운 벤치 위에 깔았다.

혜주가 자리에 앉자 주원이 가볍게 혜주의 머리를 쓸어내렸다. 잇새에서 흐른 한숨이 바닥에 깔렸다.


“어떻게 될 거 같아요? 어머니가 허락하실까요?”

“절대로.”

“하지만 임신했잖아요.”

“천다희가 다섯 쌍둥이를 임신했더라도 눈썹 까딱 안 하실 분이야.”

주원이 확신하듯 말했다.

선우연은 냉정하기로는 둘째가면 서러울 사람이었다. 칼주원의 기원이자 유래라면 설명이 될까.

놀랄 만큼 비슷한 성격의 두 사람은 대체로 내리는 결정 또한 일치했다. 다희의 엄마가 누군지 알고서도 받아들일 리 없었다.


“문제는 아버진데.”

주원이 턱을 매만졌다.


“아버지는 어떠신데요?”

“법 없이도 사는 분이지.”

필연은 순둥순둥하고 자애로운 사람이었다.

어지간한 일은 허허 웃어넘기는 호인이었고 싫은 소리 한 번 하고 나면 일주일은 끙끙 앓는 소심한 남자이기도 했다.

성격이 정반대인 두 사람이 부부싸움을 하면 대개는 선우연의 승리로 끝난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결정을 두었을 땐 얘기가 다르다.

쇠심줄보다 질긴 필연의 고집을 아는 선우연은 그가 단호하게 나올 땐 대체로 져주곤 했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최악의 경우를 가정하지 않을 수 없어.”

주원이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누르며 혜주를 응시했다.


“너 나랑 결혼할 수 있어?”

“네?”

뜬금없는 물음에 혜주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꿰뚫듯 바라보는 시선이 선명했다.


“천다희와 가족으로 지낼 수 있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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