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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 묫자리도 너랑 같이 쓸 건데 (108/121)


#108. 묫자리도 너랑 같이 쓸 건데
2023.06.11.


다희와 가족이 될 수 있냐고?


“그건…….”

혜주는 섣불리 답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지워버리고 싶은 사람이었다.

마주할 때마다 상처가 나서, 함께한 모든 날이 모독당하는 것 같아서.

한 대를 맞으면 두 대를 돌려주고 싶어지는 자신이 어느 때는 무섭게 느껴지기도 했다.

주원의 말을 곰곰이 곱씹을수록 혜주의 표정이 어둑해졌다.

다희와 명절마다 모여 오순도순 전 굽고 나물 무치는 상상을 하니 아찔했다.

가족 행사가 있을 땐 세상 다정한 동서 사이인 양 연기를 해야겠지. 천다희가 낳은 아이는 내 조카가 될 거다.


‘나중에 내게도 아이가 생긴다면……?’

혜주는 눈을 질끈 감았다.

내 아이와 다희의 아이가 사촌이 된다니 너무 끔찍하잖아!

가족이 된다는 건 그런 의미였다.

친구로도 지낼 수 없는 사람과 형님, 동생 하며 지낼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뒷골이 당겼다.

혜주가 묵묵히 고개를 저었다.


“그건 좀 어렵겠네요. 천다희와 가족이 되느니 평생 독신으로 살고 말지.”

실망할 법도 한데 주원은 그저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담담한 태도였다.


“해외로 나가는 건 어때?”

“잘못한 건 천다희인데 왜 우리가 도망을 가야 해요? 싫어요.”

“그럼 방법은 하나겠네.”

주원이 혜주의 눈을 진지하게 바라보았다.


“결혼 깨자.”

“……헤어지자고요?”

허!


“뭔 소리를 하는 거야, 이게.”

못 들을 걸 들었다는 듯 주원이 혜주의 입술을 찰싹 때렸다.

그래 봐야 바람이 내려앉은 듯 가볍게 스친 정도라 아프지도 않았지만 혜주의 입술이 반사적으로 쭉 튀어나왔다.

붕어처럼 뾰족해진 입술을 손끝으로 가볍게 쥐었다 놓으며 주원이 말했다.


“우리 거 말고 천다희 거 깨자고.”

코끝에 은은한 향수 냄새가 번졌다. 이 와중에 향기가 참 좋아서 혜주는 그의 팔을 끌어다 코를 폭 파묻고 싶어졌다.


“어떻게요?”

“강승원 정신머리부터 돌려놔야지. 어머니와 얘기도 해보고.”

마음이 급한 듯 주원이 바로 일어섰다.


“딴생각 말고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 할 수 있지?”

“네.”

주원이 혜주의 어깨를 다독여준 후 돌아섰다.

비장한 걸음으로 뚜벅뚜벅 걸어가는 그를 보는데 혜주의 가슴이 이상하게 요동쳤다.

그가 걷는 한걸음, 한걸음이 파문을 일으켜 그녀를 진동시켰다. 발밑에 동그란 그림자가 일어 먼 곳으로 물결치는 것 같았다.

그건 뭐랄까.

멀어지는 기분이었다.

함께 하기 위해 지금은 가야만 한다는 걸 아는데, 이상하게 붙잡고 싶어졌다.


“오빠.”

달려간 혜주가 와락 그의 등을 껴안았다.


 
막 차에 타려던 주원은 조금 놀란 얼굴로 멈춰 섰다.

쿵쿵 진동하는 심장 소리에 그녀의 불안감이 묻어 있다.

승원을 설득하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 두 사람이 정말 결혼해 아이를 낳는다면 우린…… 우린 어떻게 되는 거지?


“안 하던 짓을 하네. 불안해서 그래?”

“아니, 그냥…… 한번 안아보고 싶었어. 오빠가 너무 좋아서.”

복잡한 속내를 들키지 않으려 혜주는 일부러 밝게 말했다.


“그렇게 묻는 거 보니 오빠가 불안한 거 아니에요?”

주원이 돌아섰다. 테가 짙은 눈동자로 혜주를 빤히 바라본다.


“난 하나도 안 불안해, 혜주야.”

주원은 커다란 손으로 혜주의 어깨를 잡았다. 살짝 고개를 숙여 시선을 맞춘 그의 입술이 열렸다.


“무슨 일이 있어도 네 손 절대 안 놓을 거거든.”

“오빠…….”

“평생 같이 살 거고, 죽을 때까지 안 놔줄 거야.”

혜주의 머리칼을 가볍게 헝클어뜨린 그가 장난스레 덧붙였다.


“묫자리도 너랑 같이 쓸 건데.”

“와…… 그건 좀 무서운데. 죽어서는 떨어집시다, 좀.”

“싫어.”

그가 혜주를 꽉 껴안았다.

다정하게 머리를 쓸어내리는 손길에 혜주는 울컥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확신을 주는 분명한 말에도 불안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그의 말을 믿는다.

우린 그렇게 될 거고, 끝까지 함께 할 거라고.

어쩔 수 없이 다희와 가족이란 이름으로 엮이게 된다면…….


‘나중에. 그건 나중에 생각하자.’

혜주는 울렁이는 가슴을 다독이며 애써 주원을 밀어냈다.


“얘기 잘하고 와요.”

“그래야지.”

주원이 손가락 관절을 툭툭 꺾으며 대꾸했다.

대화하러 가는데 손가락은 왜 꺾는지 모르겠지만 혜주는 더 캐묻지 않고 주원을 보냈다.

*

승원이 아이를 만들어 돌아왔다는 소식에 필연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학회도 마무리하지 못한 채 급히 뛰어온 그의 눈에 싸하게 가라앉은 공기가 들어왔다.

한정식집엔 세 사람이 앉아 있었다.

허리를 곧게 편 채 앉아 있는 선우연과 맞은편에서 고개를 떨군 승원과 다희였다.


“이게 다 무슨 소리야? 누가 애를 가졌다고?”

승원은 천군만마를 얻은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세상 둘도 없이 다정한 아버지라면 다희를 내치지 않을 거라 믿었다.


“소개해드릴게요. 이쪽은 제 여자친구 천다…….”

“여보, 괜찮아?”

필연은 승원과 다희를 투명인간 취급하며 곧장 선우연의 안부를 살폈다.

와이프의 말이라면 껌뻑 죽는 그에게 일 순위는 어디까지나 선우연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지만 승원은 무척 섭섭하게 느껴졌다.


“……아빠.”

“이놈의 자식! 그런 일이 있으면 아빠한테 먼저 귀띔이라도 했어야지! 네 엄마 마음 약한 거 알면서 이딴 짓을 벌여?”

누가 마음이 약하다는 건지 승원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여기서 더 따지고 들 일은 아니라 승원은 대충 죄송해하며 말했다.


“놀라게 해드려 죄송해요. 저도 예상하고 저지른 일은 아니었어요.”

“이쪽은…….”

“천다희예요. 제 여자친구고, 허락해주시면 이번 달 안에 결혼하고 싶습니다.”

필연은 뒷목이 뻣뻣해지는 걸 느꼈다.

오는 길에 다희의 엄마에 대한 얘기를 들었다.

평소 감정 기복이 거의 없는 선우연의 목소리가 무척이나 혼란스러워 필연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주원이를 해코지한 무당의 딸이라니.’

결코 허락할 수 없는 결혼이었다.

필연은 작게 한숨을 쉬며 다희를 바라보았다.

살짝 고개를 숙인 그녀는 한눈에 보기에도 유약하고 가냘픈 인상이었다. 조막만 한 얼굴, 겁이 많아 보이는 커다란 눈동자, 얇은 입술…….

조목조목 예쁜 얼굴이었지만 어딘지 우울해 보였다.

필연과 눈이 마주치자 다희가 머뭇머뭇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아버님.”

아직 허락을 받지 못한 처지라 끝말을 흐리는 모습이 안쓰러웠다.

필연은 약해지려는 마음을 다잡으며 근엄하게 말했다.


“오면서 대충 얘기는 들었습니다. 일단은 미안하게 됐습니다. 아들을 잘못 가르친 탓에 책임지지도 못할 일을 덜컥 저질러버렸으니 사과부터 하는 게 맞는 것 같아요.”

“책임지지 못할…… 일이요?”

“승원이 엄마와 나는 이 결혼을 허락할 수 없어요. 이유는 아가씨도 알겠지요.”

“아빠!”

승원이 사색이 되어 소리쳤다.


“아빠까지 그러면 어떡해요! 우리가 어떤 마음으로 여기까지 왔는지 알아요?”

믿었던 필연마저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다.

강씨 집안은 대대로 손이 귀한 집안이었다.

필연만 해도 그 시대에 드물게 딱 형제 둘뿐이었는데, 막내 삼촌이 해외로 이민을 간 이후로 실질적으로 혼자나 다름없게 되었다.

게다가 막내 삼촌은 아이도 없었다. 이제 와 필연 내외가 늦둥이를 낳을 수도 없는 노릇이니 강씨 집안 핏줄을 잇는 건 주원과 승원을 통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했다.


“아이를 가졌다고요. 다희 배 속에 제 아이가 있는데 어떻게 그런 말을 하세요!”

승원이 절규했다.

결혼을 반대할 수밖에 없는 부모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이해하는 것과 납득하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엄마나 아빠나 왜 형만 생각하세요? 다희 어머니가 저지른 일이 엄마 아빠께 용서받기 힘들 거란 거 알아요. 하지만 다희는 모르는 일이라고 했잖아요!”

“둘째야......이놈아!”

“형한테 사과할게요. 용서할 때까지 무릎이라도 꿇을게요. 그러니까 다희 받아주세요. 네?”

필연의 눈가가 축축해졌다.

애교 많은 둘째를 딸처럼 키웠던 그는 못 본 새 반쪽이 된 아들이 불쌍했다.

이 결혼은 절대 안 된다 못을 박은 선우연과 제발 허락해달라고 매달리는 승원 사이에서 그는 머리가 쪼개질 것 같았다.

그때 가만히 앉아 눈물만 뚝뚝 떨구던 다희가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한 번만…… 한 번만 허락해주시면 안 돼요? 제가 잘할게요. 집안에 누가 되지 않게 정말 최선을 다할게요.”

“하지만.”

“제 배 속에 아이가 있어요. 손도 있고 발도 있고 심장도 뛰어요.”

그녀가 내민 건 초음파 사진이었다.

필연은 다희가 무기라도 겨눈 것처럼 흠칫했다.


“이렇게 작은 아이를 어떻게 죽여요, 아버님…… 흐윽……!”

다희는 필연의 손을 붙잡고 울음을 터트렸다.

필연은 고개를 젖힌 채 한참이나 침묵했다.

말없이 앉아 있던 선우연의 잇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

자리가 파하고 함께 집으로 돌아가는 길.

차 안에는 무거운 공기가 감돌았다.


“허락해주실까?”

다희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물었다.

흔쾌히 허락해줄 거라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초음파 사진을 들이밀었는데도 결론이 나지 않을 줄은 몰랐다.

초음파 사진을 보고 머뭇거리던 필연은 아무 말 없이 팔짱을 끼고 있는 선우연의 눈치를 보더니 짧게 결론을 내렸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조금 더 생각해 보자꾸나.

 
승원이 뭐라고 항변했지만 선우연이 휙 나가버리니 그의 외침은 공허할 뿐이었다.


“지금은 부모님도 당황스러우시겠지만 결국엔 허락해주실 거야. 엄마는 몰라도 아빠는 예전부터 손주 보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으니까.”

“그럴까?”

“너무 걱정하지 마. 미안해. 부모님이 환대해주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사과할게.”

“그 부분은 예상하고 있었어. 미안해하지 마.”

승원은 우울한 얼굴로 운전만 했다.

다희의 임신을 철석같이 믿고 있는 그는 부모님의 반응이 몹시 서운했다.

지금껏 큰 사고 한 번 친 적 없이 순종적인 아들로 살았다.

너무 이르다 할 정도로 나이가 어린 것도 아니고, 경제적 능력이 없는 것도 아니고.

물론 다희를 반대하는 이유는 명확했지만 그 명확한 이유가 주원 때문이란 사실이 승원은 섭섭했다. 편애를 당한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컨디션은 좀 어때?”

“그럭저럭 괜찮아.”

“집에 가서 뭐라도 챙겨 먹자. 오늘 한 끼도 못 먹었잖아.”

“입덧이 심해서 음식이 들어갈지 모르겠네.”

“냄새 안 나는 음식은 먹을 수 있을 거야. 정 못 먹겠으면 과일이라도 먹자.”

“응.”

승원은 운전을 하며 다희의 배를 흘끔 쳐다보았다.

다희의 배는 아직 납작했다. 살이 더 빠져서 오히려 예전보다 더 마른 것도 같고.

이따금 그녀의 배 속에 자신의 아이가 자라고 있다는 사실이 실감 나지 않을 때가 있었다.

임신한 여자의 배를 본 적이 없어 원래 그런가보다 어림짐작했지만, 입덧 외에는 평소와 다른 점이 없어 더더욱 그랬다.


‘나도 이렇게 실감이 안 나는데 부모님은 어떻겠어. 배가 좀 부른 후에 찾아뵙는 게 효과적이려나?’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집에 거의 다다랐을 때 주차장 입구에 앉아 있는 사람이 보였다.

화단에 걸터앉은 채 긴 다리를 쭉 뻗은 모습이 익숙했다.


“어? 아주버님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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