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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 결혼을 깨기라도 하겠다는 거야? (109/121)


#109. 결혼을 깨기라도 하겠다는 거야?
2023.06.15.



 
의외의 만남에 당황한 승원은 어느새 주원을 부르는 다희의 호칭이 바뀐 줄도 몰랐다.


“왜 오셨지? 좋은 소리 하진 않으실 거 같은데.”

“만나보면 알겠지.”

“분명히 엄마 얘기를 할 거야. 결혼을 반대하러 온 게 틀림없어.”

“나도 알아.”

“아주버님이 어떤 소릴 해도 흔들리지 않을 거지?”

“흔들리면 안 되지. 안 흔들릴게.”

승원은 자신에게 다짐하듯 대꾸했다. 다희가 불안한 얼굴로 승원의 팔을 꽉 잡았다.


“우리 아이를 생각해.”

“……응.”

차가 주차장 입구로 미끄러지듯 들어갔다.

차를 발견한 주원이 몸을 일으키는 모습에 승원의 목구멍으로 마른침이 넘어갔다.

*

주원은 집 앞 벤치에 앉아 있었다.


“연락도 없이 웬일이야? 형이 집 앞까지 오고.”

주차를 마치고 나오는 승원을 본 그가 담배를 비벼 껐다.


“연락하고 오면 튈 거 같아서.”

“내가 왜 튀어.”

“지은 죄를 알 테니까.”

주원은 돌려 말하는 법이 없었다.

만나자마자 푹푹 쑤셔대는 말투에 승원은 목구멍이 까끌까끌했다.


“미안해, 형. 나도 일이 이렇게 커질 줄은 몰랐어.”

“네가 천다희 편을 들고 나서는 순간 약점을 잡혔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은 했어. 대체 언제 사고 친 거야?”

“몇 달 전에…….”

“네 애는 확실하고?”

“확실해. 왜 자꾸 같은 걸 묻는 거야?”

승원의 음성에 날이 섰다.

주원이 다희를 싫어한다는 건 알고 있지만 자꾸만 부정한 여자 취급을 하니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건 다희를 욕보이는 것과 동시에 자신을 무시하는 것이었다.

승원은 기분 나쁜 티를 팍팍 내며 주원을 노려보았다.


“할 말 있으면 하고 가. 다희 저녁 챙겨줘야 해.”

하. 머저리 같은 놈.

주원은 속에서 열불이 뻗쳤다. 삐딱하게 선 채, 그만큼 삐딱한 목소리로 승원에게 말했다.


“적당히 합의하고 끝내. 돈이 필요하면 줄 테니까.”

“뭔 개소리야. 아이를 지우란 뜻이야?”

“상황 파악이 안 되는 것까진 이해할 수 있어. 하지만 이 이상 얼빠지게 굴면 가만 안 있을 거다.”

“형 진짜 잔인하다. 엄연히 생명이 달린 일인데 어떻게 그렇게 간단하게 말할 수 있어?”

“잔인? 너 지금 잔인이라 그랬냐?”

또다시 멱살잡이라도 할 태세로 주원이 성큼 다가섰다.


“날 죽이려던 무당 딸을 가족으로 받아들이라 들이민 너는 잔인하지 않고?”

“그건 정말 미안하게 생각해. 하지만 형, 다희 임신했잖아…….”

“천다희가 임신을 했든 X랄을 했든 내 알 바 아니고.”

주원은 차갑게 돌아섰다.


“알아서 정리해. 당분간 부모님은 만날 생각 말고.”

이 정도로 정리됐으면 좋겠다.

실현될 것 같지 않은 바람을 되뇌며 한걸음이나 옮겼을까.


“싫어.”

고집스러운 대꾸가 들려온 순간 주원은 이성의 끈이 툭 끊어지는 걸 느꼈다.


“이 X끼가 진짜!”

말보다 주먹이 먼저 나갔다.

퍼억!

단단하게 뭉친 주먹이 승원의 턱을 강타한 순간 둔탁한 소음이 울렸다.

승원 역시 맞고만 있지는 않았다.


“형이면 다야? 부모도 아니면서 왜 끼어드는데!”

퍼억! 퍽!

형제는 어느새 뒤엉켜 서로에게 주먹질을 하고 있었다.

중학교 이후로 한 번도 한 적 없던 몸싸움.

오랜만에 맛본 형의 손맛에 승원의 입가에 가느다란 피가 흘렀다. 그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씩씩거렸다.


“좀 더 솔직해져 봐, 형. 형이 내 결혼을 반대하는 이유가 오로지 다희 엄마 때문이야? 혜주와 결혼하는 데 내가 걸림돌이 될 거 같아 그러는 건 아니고?”

“뭐 인마?”

“다희 엄마 때문에 그러는 거면 내가 어떻게든 해볼게. 정말 용서가 안 된다면 형 앞에서 무릎이라도 꿇으라고 할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형 마음이 풀릴까? 내가 보기엔 아닌 거 같은데?”

승원이 비아냥거렸다.


‘저 자식이 진짜.’

주원은 터질 것 같은 심장을 손바닥으로 꾹 눌렀다.

이렇게 막무가내인 승원이 이해되지 않았다.

책임지려는 태도. 생명에 대한 존중. 다 좋다 이거야. 하지만 그 방법이 굳이 결혼이 아니어도 되지 않은가?

천다희를 가족이란 카테고리에 집어넣지 않고서 해결할 방법이 있는데 어쩌자고 그 여잘 부모님께 소개해.

왜 그 여자를 내 눈앞에 들이미냐고!


“무릎을 꿇려? 뭐하러.”

그의 입꼬리가 사납게 말려 올라갔다.


“아예 짓이겨놓으면 모를까.”

“형!”

“십 년이었어!”

주원의 눈에 핏발이 섰다.


“악몽으로 고통받은 세월이 자그마치 십 년이었다고! 괜찮은 적도 있었고, 희망을 가진 적도 있었어. 익숙해지려 노력도 해봤어. 잠드는 게 무서워서 찬물에 몸을 담그고 온 밤을 지새운 적도 있고, 박카스를 때려 부어가며 날밤 깐 적도 있어. 아무것도 안 되더라.”

“그건……!”

“스스로 끝낼 수밖에 없다는 걸 깨달았을 때 내가 느낀 절망감이 얼마나 컸는지 알아?”

“형…….”

“혜주가 없었다면 지금 네 앞에 있는 건 내가 아니라 영정사진일 거다.”

승원이 저렇게 고집을 부리는 이상 마음을 돌리는 건 어렵다는 걸 주원은 알고 있었다.


“혜주와의 결혼. 그래, 그것도 이유가 되겠지. 하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천다희야.”

그럼에도 끝까지 포기할 수 없는 건.


“그 여잔 널 망칠 거야. 하나뿐인 동생이 지옥 불로 걸어 들어가겠다는데, 나더러 그 꼴을 두고 보라고?”

그가 승원을 사랑하기 때문이었다.

뜨겁게 터져 나온 진심에 승원은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그러다 혼잣말을 하듯 되뇌었다.


“난 다희랑 결혼할 거야. 아니, 해야 해.”

하아.

주원은 할 말을 잃은 듯 이마를 짚었다.

설득할 의지조차 잃어버린 주원에게 승원은 우기듯 아무 말이나 쏟아냈다.


“형 입장에서는 잘된 일 아니야? 혜주, 몇 년 동안이나 나 좋아했었어. 말은 안 해도 꽤 거슬렸잖아. 이참에 치워버린다고 생각해. 그럼 되잖아?”

“됐어. 그만하자.”

“형도 받아들여. 아기 태어나면 적당한 시기에 눈앞에서 사라져줄 테니까 좀 참아보든지!”

주원은 허탈한 얼굴로 돌아섰다.

멍이 든 것처럼 심장이 아팠다.

*

혜주를 만나기 전.

주원은 약국에 들러 파스와 붕대를 샀다.

아까 승원과 몸싸움을 하면서 땅을 잘못 짚었는지 손목이 시큰했다.


‘다행히 얼굴은 안 상했네.’

주먹을 비껴 맞으며 턱 부근이 아릿하긴 했지만 멍이 들 정도는 아니었다.

주원은 몇 번이고 거울을 보며 얼굴에 다친 곳이 없는지 확인했다.


‘승원이와 주먹다짐한 걸 알면 혜주가 걱정할 거야.’

가뜩이나 다희 일로 심란해하는 그녀에게 또 다른 걱정거리를 안기고 싶지 않았다.

주원은 벤치에 앉아 손목에 파스를 뿌리고 붕대를 감았다. 그러곤 다친 손을 주머니에 찔러넣었다.


‘만나면 무슨 말을 해야 할까.’

혜주를 만나는데 이렇게 마음이 복잡한 적은 처음이었다.


-그건 좀 어렵겠네요. 천다희와 가족이 되느니 평생 독신으로 살고 말지.

 
아까 혜주가 했던 말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승원을 설득할 수 있을 줄 알았기에 크게 와닿지 않았는데, 이렇게 되고 보니 보통 일이 아니었다.

승원이 이대로 다희와 결혼을 해버리면, 우리는?

우린 어떻게 되는 거지?

물론 헤어질 일은 없을 거다. 모든 사랑의 결말이 결혼이 아니듯 법적으로 맺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당장 문제 될 건 없었다.

평생 연애만 하며 살 수도 있겠지.

문제는 주원이 그린 미래는 그런 게 아니라는 거다.

우리를 반씩 닮은 아이를 낳고 싶었다. 가족이란 이름으로 온전히 그녀와 묶이고 싶었다. 그녀에게 속하고 싶고, 그녀를 소유하고 싶었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누구에게도 눈총받지 않고, 아주 합법적이고 정당하게 그녀의 남자가 될 수 있는 방법은 결혼뿐이었다.

미뤄서 해결될 문제라면 얼마든지 기다리겠지만 이건 시기의 문제가 아니었다. 승원이 이대로 결혼에 골인한다면 주원이 꿈꾼 미래는 평생 미완으로 남겠지.

한참이나 벤치에 앉아 골몰하던 주원이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그냥 밀어붙이자.’

정말 단순히 생각하면 안 보고 살면 그만 아닌가.

아무리 형제지간이라도 결혼하고 나면 일 년에 한두 번 보는 게 전부인 세상이었다.

제사를 지내는 집도 아니고 명절을 각별하게 챙기는 집도 아니니 생각해 보면 딱히 마주칠 일이 없었다.

사정 모르는 사람도 아니고 부모님도 이해해주시겠지.

설령 서운해하신다 해도 문제 될 건 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혜주의 편에 서서 싸울 자신이 있었으니까.

잠시 후 연락을 받은 혜주가 내려왔다.

주원은 의식적으로 손을 주머니에 숨긴 채 그녀를 쳐다보았다.

씻고 나왔는지 편한 원피스 차림이다. 주원을 보고서 가볍게 손 인사를 하며 걸어오는데 아까보다 더 어둑한 얼굴이다.


‘왜 저렇게 죽상이야? 쌩얼이라 그런 것 같지는 않은데.’

주원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새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궁금했지만 혜주가 먼저 입을 열었다.


“어떻게 됐어요?”

“승원이 결심이 확고해.”

“그 똥고집. 어느 정도 짐작은 했어요.”

혜주가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괜히 미안해진 주원이 그답지 않게 주절주절 덧붙였다.


“천다희가 초음파 사진을 보여준 모양이더라. 부모님도 그걸 보고는 차마 지우란 소리를 못 하셨나 봐.”

“그러시겠죠. 나라도 그럴 거예요.”

“아직 확실히 허락하신 건 아니야. 시간을 두고 생각해 본다고.”

혜주는 묵묵히 발끝만 보았다.

주원은 그녀에게서 이질적인 기운을 느꼈다.

뭐랄까. 평소보다 훨씬 차분한데 어딘지 거리감이 느껴지는 그런.

그녀가 의식적으로 만들어낸 거리는 아닐까 덜컥 불안해진다.


“무슨 생각해?”

“우린 이제 어떻게 될까, 그런 생각이요.”

“무슨 소리야, 그게.”

턱에 불끈 힘이 들어갔다.

쿵쿵거리는 심장을 꽉 부여잡은 채 주원은 억지로 침착을 유지했다.


“네가 그렸던 나와의 미래에, 변화가 생긴 거야?”

“변수가 생겼으니까요.”

그러나 그 말에는 참을 수가 없어서 하마터면 욕이 나올 뻔했다.


“변수?”

짙은 눈썹이 매섭게 치켜 올라갔다.

담담한 혜주에 말에 이렇게까지 화가 나는 건 어쩌면 조금 전 승원을 만나고 와서인지도 모른다.

모든 상황이 엿 같다.

그녀를 향해 정성스럽게 이었던 선로가 가위로 싹둑 잘린 기분이었다.

하나하나 공들여 놓은 길 끝에 네가 있는데.

이제 그 길을 지나기만 하면 되는데.


“너 지금 뭐 하자는 거야.”

“오빠.”

“그래, 백번 양보해 썩 내키지 않을 수 있다고 쳐. 하지만 그렇게 모든 걸 결정해버린 얼굴로.”

하아. 주원이 거칠게 머리를 쓸어넘겼다.


“우리 결혼은 그대로 진행될 거야.”

주원은 혜주의 어깨를 움켜쥔 채 똑바로 시선을 맞추었다.

뭐라고 말을 좀 해 봐.

눈빛으로 애원했지만 끝내 묵묵부답이다.


“뭐야, 왜 답이 없어? 결혼을 깨기라도 하겠다는 거야?”

이윽고 혜주가 내놓은 대답이 주원의 가슴을 찢어놨다.


“다희와 가족이 될 수는 없어요.”

쿵.

디딘 자리가 침몰한 듯 사위가 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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