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0. 성격파탄자 (110/121)


#110. 성격파탄자
2023.06.18.



“결혼을……깨겠다고?”

너무 어이가 없으니 헛웃음이 나왔다.

입술 끝에 묻은 비소에 혜주는 다닥다닥 가시가 붙은 듯 심장이 아팠다.


“엄밀히 말해 결혼을 깬 건 아니죠. 식장을 정한 것도 아니고 상견례를 한 것도 아니고요. 어머님께 우선 인사만 드린 거였으니까.”

“그럼 이번 주말에 시간 내. 우리 아버지 만나자.”

“오빠.”

“일요일엔 천안 가자. 아버님께 정식으로 허락받을 거야.”

“아뇨, 난…….”

“그다음 주엔 식장 잡을 거고 그다음 주엔 드레스 고르러 갈 거야. 괜찮지?”

“아뇨. 안 할 거예요. 오빠, 내 말 이해 못 하겠어요?”

“이해 못 해서 이러겠어?”

주원이 고함을 치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솜뭉치로 틀어막힌 듯 가슴이 답답했다. 눈에 보이는 건 죄다 걷어차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제가 지금 얼마나 독단적으로 굴고 있는지 안다. 급한 나머지 필터링 하나 없이 그녀를 몰아붙이고 있는 것도 안다.

도망치려는 그녀를 보니 머리가 새하얘져서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저 붙잡아야 한다는 것밖에는.


“헤어지자는 말이 아니에요. 잠시 멈추자는 뜻이에요.”

“결혼 깨는 거 아니라더니 이제 와 딴소리네. 누구 마음대로 멈춰. 누구 좋으라고?”

“결혼은 두 사람이 하는 거죠. 한쪽이 멈추면 다른 쪽도 멈출 수밖에 없죠. 내가 멈추고 싶어요.”

“오혜주.”

“내게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요! 다른 문제도 아니고 다희와 가족이 되는 문제잖아!”

“얼굴 안 보고 살게 해줄게. 평생, 어떤 소식도 네 귀에 들어가지 않게 해줄게. 그걸로 안 되겠어?”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데!”

흐윽.

혜주가 얼굴을 감싸고 울음을 터트렸다. 일그러지는 그녀의 얼굴을 보는데 세상의 빛이 꺼진 것만 같았다.


“똑바로 말해.”

대체 무슨 일이기에 오혜주가 회까닥 돌아버린 건지.


 
주원은 자신이 모르는 새 혜주에게 큰일이 생겼음을 직감했다.


“아까 경찰한테 전화가 왔어요.”

혜주가 벌게진 눈으로 주원을 바라보았다.


“우리 아빠 가게에 악플 단 거 천다희 맞대요.”

“그게 뭐.”

“우리 아빠 망하게 한 사람이 천다희라고요!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요? 난 천다희 용서 못 해요. 정식으로 고소하고 콩밥도 먹일 거야.”

“해. 누가 뭐래?”

예상 못 했던 일도 아니고 이제 와 왜 이러는 건지 주원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말 같지도 않은 이유로 자신을 밀어내는 혜주에게 화도 났다.

하지만 이어진 혜주의 말에 주원은 뒤통수를 맞은 것처럼 멍해졌다.


“정말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는 거 맞아요?”

“뭐?”

“내가 그렇게 한다면 오빠 집안에서 가만히 있을까?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혜주의 목구멍에서 갑갑한 숨이 터져 나왔다.


“오빠와 결혼하면 난 천다희와 가족이 돼요. 동서지간에 법정 싸움까지 한다고 하면 오빠 부모님이 뭐라고 하실까. 나한테 포기하라고 하겠지. 한 번 봐달라고 하겠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야. 부모님이 그렇게 반응할 거라 예단하는 건 너무 앞서가는 거 아닌가?”

“다희 임신했어요! 강씨 집안 귀한 손주를 품은 며느리라고요! 그런데 가만히 보고만 계시겠어요?”

주원은 말문이 턱 막혔다.

누구보다 영민한 그이지만 최근 파도처럼 밀려 닥친 일들에 치여 거기까진 생각하지 못했다.

그는 혜주가 가정한 상황을 떠올려 보았다.

임신한 천다희와 오혜주.

어느 한쪽의 편을 들어야 한다면 부모님은 어떤 선택을 하시려나.

암담하게도 한참이나 앞서 나간 혜주의 가정이 아예 허황된 것이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처음부터 내쳤다면 모르되, 만약 다희를 가족으로 받아들인다면 어떻게든 지키려고 할 것이다.


“난 끝까지 갈 거예요.”

혜주는 타협의 여지가 없다는 듯 힘주어 말했다.


“우리 아빠를 건드렸잖아. 난 절대 천다희 용서 못 해요.”

주원은 지친 눈꺼풀을 꾹꾹 눌렀다.

우리가 멈출 수밖에 없는 이유.

이해는 하지만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그 이유 앞에서 마지막으로 물었다.


“그냥 눈 딱 감고 나만 생각해줄 수는 없어?”

혜주는 묵묵히 고개를 저었다.


“멋대로 해, 그럼.”

주원은 더 머무를 이유가 없다는 듯 휙 돌아섰다.

몹시도 피곤했다.

*

같은 시각.

필립은 컴퓨터 앞에 앉아 있었다.


“히야, 이 집이 레알 컴퓨터 맛집이네. 사양 후져서 버린 거라더니 개 좋은데?”

그는 몇 주 새 휘황찬란하게 변한 자신의 공간을 뿌듯하게 바라보았다.

주원이 원격 회의를 할 때 종종 사용했던 데스크톱과 카메라, 불면증 때문에 샀다가 방치한 헤드셋 등 지금 내다 팔아도 꽤 비싸게 받을 수 있을 것 같은 고급 사양의 장비는 평소 필립이 꿈도 꿀 수 없었던 것이었다.

물론 거저 얻지는 않았지. 필립의 부탁을 들어줄 때마다 주원은 한 가지씩을 요구했다.

매일 아침 8시에 기상하기. 매일 열 통씩 이력서 쓰기. 주원이 귀가하기 전에 집 안 환기하기 등등.

그 덕일까. 저도 모르게 생활 습관이 안정된 필립은 최근 일자리도 구했다.

비교적 쉽게 구할 수 있는 편의점 아르바이트이긴 하지만 돈을 벌 수 있다는 게 어딘가!

낮에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밤엔 가사를 쓰면서 필립은 나름 성실히 하루를 채워갔다.

물론 혜주가 아직도 래퍼가 되겠다는 헛꿈을 꾸냐며 구박하긴 했지만.


“어디 시작해볼까.”

필립은 흠흠 목을 가다듬은 후 인터넷 방송을 틀었다.

래퍼 데뷔를 준비할 때부터 운영하던 채널인데 구독자 수가 거의 없어 사실상 일기장처럼 쓰는 곳이었다.

채널 이름은 망랩.

원래는 Fly_high 어쩌고 하는 이름이었는데 최근 새 걸로 바꿨다.

‘망한 래퍼’라는 자조적인 뜻이었다.

채널명을 바꾼 이유는 별 거 없었다. 망한 게 사실이니까.

겉멋 잔뜩 든 이전의 이름보다 지금이 자신과 훨씬 잘 어울렸다.


“Yo, 여러분 반가워요. 망랩지기가 왔습니다.”

필립은 텐션을 끌어올리며 방송을 시작했다.

방송을 시작하기 무섭게 시청자 한 명이 입장했다.

전체 구독자가 백 명도 안 되는 인기 없는 방송을 꾸준히 시청해주는 단 한 사람이었다.

구독자 이름은 [김순이]

여자인지 남자인지, 어디에 사는지 모르는 사람이지만 눈물 나게 고마운 사람이었다.


“어제 제가 망하는 가사 유형을 정리해드렸죠? 첫 번째, 라임. 초보 래퍼가 흔히 하는 실수인데요. 무조건 라임을 맞추려고 억지로 가사를 끼워 넣는 거죠. 예를 들면…….”

 

그대는 나의 눈물샘

이별의 깊인 옹달샘

닳아버린 샘처럼 흘러버린 삶처럼

달아나버린 끈처럼, 상처로 덮인 너처럼

셈을 못 해 망친 셈

돌이킬 수 없는 셈

네가 없는 현실은 사방이 막힌 콜로세움

그리움이 줄줄 새 오늘도 밤을 꼴딱 새움

[샘]이란 제목의 자작랩을 흥얼거리며 필립은 힘차게 방송을 시작했다.

뜨내기 시청자 몇몇이 방송을 들락거렸다.

그 와중에 끝까지 자리를 지킨 건 김순이뿐이었다.

인터넷 방송을 끝낸 필립이 거실로 나왔을 때 주원은 아일랜드 바에 앉아 위스키를 마시고 있었다.


“형님 뭐 해요? 안주도 없이.”

마침 목이 마르던 필립이 냉큼 맞은편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평소 같으면 꺼지라고 면박을 줬을 주원이 오늘은 웬일인지 말이 없었다.


“회사에서 안 좋은 일 있었어요? 우리 형님답지 않게 새우 모드네.”

“새우 모드가 뭔데.”

“등이 굽었다고요. 완전 축 처져서 불쌍해요.”

제기랄.

오춘택한테 불쌍하단 소리를 듣다니 강주원 진짜 갈 데까지 갔구나.


“실없는 소리 하지 말고 먹을 거면 앉고 아니면 꺼져.”

“38년산 위스키를 두고 꺼지긴 왜 꺼져요. 잔 꺼내올게요.”

필립이 뽀로로 달려가 위스키 잔을 꺼내왔다. 꼴에 보는 눈은 있어서 제일 비싼 잔이었다.


“형님 덕에 38년산도 먹어보고 저 출세했네요. 아저씨 찬장엔 안동소주만 있어서 뺏어 먹을 것도 없거든요.”

“아저씨라면, 혜주 아버지?”

“네! 아저씨 완전 안동소주 킬러예요. 휴무일만 되면 가게 셔터 내려놓고 안동소주 까시거든요. 송다인 알죠? 그 트로트 가수. 송다인 음악 딱 틀어놓고 안동소주 마시는 게 아저씨 낙이에요. 취향 완전 구려.”

필립이 TMI를 늘어놓으며 위스키를 홀짝거렸다.

자기같이 힙한 사람에겐 역시 위스키가 어울린다느니, 38년산은 역시 다르다느니 하는 말을 지껄이며 분위기를 돋운 필립 덕에 주원은 한결 기분이 나아졌다.


‘혼자 있는 것보단 낫군. 시끄럽긴 해도.’

오춘택을 집에 들인 후 처음으로 덕을 본 날이었다.

묵묵히 술잔을 기울이는 주원의 뇌리론 아까의 장면이 계속 되풀이되고 있었다.


-뭐야, 왜 답이 없어? 결혼을 깨기라도 하겠다는 거야?

 
흥분해 뱉은 말에 대한 혜주의 대답.


-다희와 가족이 될 수는 없어요.

 
심장의 위치가 단번에 가늠될 만큼 충격적인 선언이었다.

서운했다. 물론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는 건 알지만, 그래도.

너도 나만큼이나 깊다면, 아니, 부부라는 이름으로 온전히 너와 묶이고 싶은 내 마음을 조금이라도 알아준다면 그렇게 단칼에 거절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멈추고 싶겠지. 시간을 갖고 싶겠지.

지금 당장 어떤 절차를 밟아 결혼에 골인할 이유는 없다고 인정하면서도 서운한 것은 혜주의 결정에 자신이 최우선순위가 자신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같은 상황이었다면 나는, 주저 없이 너를 택했을 텐데.

끔찍이 싫은 사람과 가족이 될지언정 너를 놓지는 않았을 거라고.


“형님, 우리 안주 하나 시킬까요? 닭볶음탕 죽여주게 하는 집 있는데.”

눈치 없이 안주 타령을 하는 필립에게 주원은 대충 대꾸했다.


“알아서 해.”

필립은 재빨리 배달앱을 켜서 닭볶음탕과 꼬치구이를 주문했다.


“근데 무슨 일 있어요? 아까부터 완전 저기압이네요. 땅 꺼지겠어요.”

주문한 안주가 도착할 때까지 주원은 대답 없이 술만 마셨다.

빈속에 알코올이 들어가서 그런가. 평소보다 취기가 빨리 올라왔다. 나른해진 눈꺼풀을 꾹꾹 누르니 또다시 한숨이 나왔다.


“왜요. 연애 사업이 잘 안 돼요?”

필립이 닭다리를 오물거리며 물었다. 평소 같으면 무시했을 텐데 누구에게라도 털어놓지 않으면 속이 터질 것만 같았다.

주원은 턱을 괸 채로 가만히 잔을 매만졌다.


“뭐가 이렇게 어렵냐.”

“뭐가요?”

“결혼.”

눈을 꿈뻑꿈뻑하던 필립이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헉, 누나한테 까였어요?”

“멈추고 싶대.”

“뭘요. 결혼을? 와, 오혜주 완전 똥멍청이네. 굴러들어온 복덩이를 아예 니킥으로 보내버렸네?”

“복덩이가 아니었나 보지.”

주원의 입가에 자조적인 미소가 스쳤다. 알딸딸하게 취한 코끝이 뜨거웠다.

당장 헤어지자고 한 것도 아니고 그저 결혼만 미룬 것인데도 이렇게 아픈 걸 보니, 오혜주가 이별 선언이라도 하는 날엔 딱 죽겠다 싶었다.

이렇게 참을성 없는 놈이었나, 내가.


“이유가 뭐래요?”

주원은 대답 대신 위스키를 들이켰다.

이유를 설명하자면 천다희 얘기를 해야 하는데, 기분도 더러운데 입에 올렸다간 사고를 칠 것 같았으니까.


“너무 부자라서 싫대요? 아님 너무 잘생겨서?”

“아니야.”

“그럼 사내 연애라 부담스러운가?”

혼자서 떠들어대던 필립이 깊은 깨달음을 얻은 것처럼 무릎을 탁 쳤다.


“아! 알았다! 성격 때문이구나! 하긴, 뭐만 하면 이건 금지, 저건 금지하는 성격파탄자를 누가 받아줘요?”

“뭐, 성격파탄자?”

취한 와중에도 주원의 미간에 빠직 금이 갔다.

엄마 배 속에서 눈치를 못 챙겨나온 필립이 덥석 주원의 손을 잡았다.


“형님, 그냥 나랑 결혼합시다. 난 다 받아들일 수 있어요.”

“뭐 인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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