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 팽 당하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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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 팽 당하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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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 팽 당하는 건가
2023.06.22.
주원은 이게 미쳤나 하는 표정으로 필립을 쳐다보았다.
반면 필립의 눈동자는 꽉 막힌 바둑판에서 묘수를 찾아낸 것처럼 반짝거렸다.
“저 밥 잘해요.”
기도 안 차서 한숨만 푹 내쉰 주원이 빈 잔에 위스키를 채웠다.
독한 술을 한 모금에 털어 넣자 금세 눈이 가물가물해졌다.
“우리 혜주는 내가 해준 밥 잘 먹어줘.”
“청소는 나름 자신 있어요. 안 해서 그렇지 팔 걷어붙이면 아주 반짝반짝 광까지 낸다니까요?”
“우리 혜주는 잘 어질러 주는데.”
“결정적으로 저 말 잘 들어요. 형님이 하지 말란 건 다 안 하잖아요.”
“우리 혜주는 참 강단 있지. 단칼에 결혼도 무른 여자라니까. 멋있는 우리 혜주…….”
자꾸만 눈앞이 흐려지는 건 취기 때문일 거다.
보고 싶다. 보고 싶다. 미치게 보고 싶었다.
달려가면 그녀가 나와주리란 걸 안다. 내가 부르면 지금 당장이라도 와줄 거란 것도 알았다.
하지만 선뜻 그럴 수 없는 것은 그녀가 벌린 거리가 너무나 크게 느껴진 탓이다.
네가 한 걸음만 뒤로 가도 미친 듯이 불안해지는 나를 들키기 싫어.
그 작은 걸음에 여유를 잃는 내가 너무 하찮아 보여서.
‘……누가 보면 헤어진 줄 알겠네, 젠장.’
주원은 뜨거워진 눈가를 손바닥으로 꾹 누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들어간다.”
높은 의자에서 내려온 주원의 몸이 순간 균형을 잃고 비틀거렸다.
기우뚱!
“으악, 형님!”
주원은 반사적으로 식탁을 손으로 짚었다.
그런데 아뿔싸, 하필이면 짚은 곳이 닭볶음탕 냄비였다.
“아씨, 진짜 가지가지…….”
반도 먹지 않은 냄비 안으로 완벽히 골인한 손바닥이 온통 시뻘겠다. 주원은 양념이 뚝뚝 떨어지는 손을 한참 바라보았다.
진득하고, 불결했다.
마치 제 기분처럼.
“괜찮아요?”
사방으로 비산한 닭볶음탕 국물을 닦으며 필립이 물었다.
주원은 양념 범벅이 된 반지를 손끝으로 빼며 돌아섰다.
닭볶음탕이 쏘아 올린 작은 공이 어디로 튈지는 그때까지만 해도 까맣게 몰랐다.
*
다음 날 아침, 혜주는 퀭한 눈으로 출근했다.
어제 거의 잠을 자지 못했다.
주원과 그렇게 헤어졌으니 마음 편히 꿀잠을 자는 것도 이상했지만 동이 터올 때까지 아예 눈을 붙일 수가 없었다.
밤새 생각했다.
누군가를 이렇게 미워할 수 있는 사람이었나, 내가.
수철의 가게에 악플 테러를 한 범인이 다희라는 걸 알게 된 후 혜주는 처음으로 누군가가 죽이고 싶게 미웠다.
그럴 이유가 있었다고 해도. 설령 내가 진짜로 네게서 승원을 빼앗았다고 해도 가족은 건드리면 안 되지.
‘왜 우리 아빠를 건드려. 평생 성실하게 일궈온 아빠의 가게를 네가 뭔데 망가트려!’
한때 죽고 못 살았던 친구는 이제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홧홧하게 불길이 이는 원수가 되었다.
눈가가 뜨거웠다.
혜주는 무릎을 웅크리고 앉아 멍하니 생각을 곱씹었다.
“하루가 참 길다.”
선우연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던 게 아득히 먼일처럼 느껴졌다.
‘참 따뜻한 분이었는데.’
엄마 없이 자랐다는 고백에 손을 꽉 잡아주던 그녀의 온기가 떠올랐다.
사랑하는 남자를 꼭 닮은 여자. 아니, 그가 속한 세상의 시작인 사람.
한껏 긴장했던 게 무색하게 따뜻한 시선으로 자신을 대해준 그녀로 인해 용기를 얻었었다.
감당할 수 없는 벽처럼 높아 보였던 그의 세상에 어쩌면 나도 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
들어가고 싶다. 복받치는 열망 속에 처음으로 용기를 내보려 했었다.
주원이 청혼하면 못 이기는 척 받아주려 했던 혜주의 계획은 십 분도 지나지 않아 부서졌다.
승원의 손을 잡고 들어온 다희에 의해.
-다희 임신했어요!
그 말을 듣는 순간 한껏 부풀었던 단꿈이 느물느물해졌다.
다희와 가족이 될 수 있겠느냐고?
아니, 그건 불가능했다.
아주 솔직한 심정으로는 다희를 도려내고 싶었다.
완벽히 짜인 주원의 세상에 오물과 함께 들어가고 싶지 않았으니까. 단호하게 나가면 뭔가 변화가 있지 않을까, 그런 기대도 했던 것 같다.
일 년에 얼굴 한 번 안 보고 지낸다 해도 가족이란 이름으로 묶이는 것 자체가 싫다고, 주원에게 선을 긋고 돌아오는데 경찰에게 전화가 왔다.
국밥집 리뷰 테러 사건의 범인이 다희인 것 같다는 확신에 찬 목소리에 혜주는 다시금 마음을 굳혔다.
‘아, 이건 안 되는 일이구나. 다희와 나는 결코 한 데 묶일 수 없는 사이구나.’
당장 고소장 양식을 작성하며 혜주는 들끓는 마음을 정리했다.
그까짓 결혼, 안 하면 그만이지.
내가 결혼에 목매는 사람도 아니고 지금 당장 시집가지 않으면 궁둥이를 차버릴 거라고 으름장 놓는 집안이 있는 것도 아니고.
결혼 문제를 떼어놓고 보면 크게 변하는 것도 없었다.
남들 다 하는 연애.
‘언젠가는 결혼하겠지’ 하는 막연한 기대만 버리면 사실상 지금과 달라지는 것도 없지 않은가.
눈 뜨자마자 시작하는 모닝 인사, 가끔 함께하는 저녁 식사, 주중의 허기를 채워줄 주말 데이트, 그리고 서로를 온전히 취하는 밤.
우린 앞으로도 지금과 같을 거다. 그렇게 생각하니 어수선한 마음이 조금 정돈되었다.
혜주가 예상하지 못한 건 주원의 반응이었다.
-멋대로 해, 그럼.
결혼을 멈추자는 말에 그는 마치 차인 것처럼 불같이 화를 냈다.
-나중 말고 지금만 생각하면 안 돼요? 헤어지자고 한 거 아니잖아. 달라질 것도 없잖아요.
몇 번의 메시지에도 끝내 답이 없었다.
간밤을 홀딱 지새운 혜주는 멀리서 동이 터올 무렵에야 그런 생각을 했다.
‘내가 너무 일방적이었나?’
같은 결론을 내릴지언정 상의하는 시늉이라도 했어야 하나 싶다.
덮어놓고 결혼은 불가능하단 소리만 했으니 주원 입장에선 당혹스러울 만도 했다.
‘회사에서 얘기해봐야겠다.’
혜주는 출근을 서둘렀다.
안타깝게도 주원은 오전부터 풀로 미팅이 잡혀 있어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온종일 찜찜한 기분으로 하루를 보낸 혜주는 오후 늦게야 주원을 볼 수 있었다.
그것도 퇴근하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안녕하세요.”
다른 직원이 함께 타 있어 별다른 말은 하지 못하고 짧게 인사만 건넸다.
“네.”
주원 역시 단답으로 대답했다.
그의 곁엔 총무팀장이 함께 있었는데 일 얘기를 하고 있었는지 분주한 모양새였다.
혜주에게 살짝 눈인사를 한 총무팀장이 줄어드는 엘리베이터 숫자를 흘깃 보며 보고를 이어갔다.
“하던 얘기 마저 드리겠습니다, 대표님. 호텔 멤버십 확장에 대한 것인데요. 아시다시피 우리 데이터스 코리아와 멤버십 체결을 한 호텔은 현재 두 곳으로 회사 규모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실정입니다. 회사의 큰 행사나 공식 일정이 있는 경우를 제외하면 직원들이 누릴 수 있는 혜택은 전무하다고 봐야 하고요.”
주원이 계속하란 의미로 고개를 까딱하자 총무팀장이 따발총처럼 덧붙였다.
“총무팀 회의 결과 호텔 멤버십을 추가로 계약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예산은.”
“문제없습니다. 올해와 같은 성장률이 계속된다면 추가 계약도 가능하고요.”
“음.”
“일단 수도권 내의 호텔 중 예산 규모에 합당한 곳을 다섯 곳 정도로 추려봤는데 검토해주시겠습니까?”
총무팀장이 옆구리에 끼고 있던 서류를 척 건넸다.
주원이 주머니에서 손을 꺼내 서류철을 받았다.
무심코 그 모습을 본 혜주의 눈동자가 일순 싸하게 굳었다.
‘반지가…… 없네?’
주원의 왼손 네 번째 손가락이 휑하니 비어 있었다. 커플링을 맞춘 후 한 번도 반지를 뺀 적이 없는 그였다.
‘와, 쪼잔해. 그거 조금 다퉜다고 반지를 빼버렸어?’
혜주의 눈에 불길이 활활 타올랐다.
그 시선을 느꼈는지 주원이 힐끗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이내 시선이 차분히 서류로 내려앉는다.
반지를 빼버린 걸 들켜 당황한다거나 놀라는 기색도 없었다.
반지 같은 건 애초에 없었던 사람처럼.
‘와…… 강주원,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혜주는 서운하다 못해 배신감이 들었다.
결혼하지 말쟀지 누가 헤어지쟀나? 연인 사이에 의견 다툼이 있을 수도 있는 거지 그때마다 반지를 빼버릴 거야? 그럴 거면 선물은 왜 한 거람?
부글부글 끓은 혜주가 주머니에 넣은 손을 꿈틀거렸다. 쭉 딸려 내려온 반지가 손가락 끝에 걸렸다.
‘반지는 너만 뺄 수 있냐, 나도 이딴 거 필요 없거든?’
혜주는 힘껏 반지 낀 손을 쥐었다.
그러나 끝내 뺄 수 없었던 건.
-나중에 끼게 되면 평생 빼지 않을게요.
반지를 빼는 순간 그와 속삭였던 수많은 밀어가 물거품이 될 것만 같아서.
-사랑해요.
그에게 한 약속이 아무 무게도 없이 흩어지는 게 싫어서, 그래서.
[딩동! 1층입니다!]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총무팀장이 주원에게 꾸벅 허리를 숙이고 내리자 어느덧 엘리베이터엔 두 사람만이 남게 되었다.
일 층에서 지하 3층으로 내려가는 짧은 시간. 억겁 같은 정적이 찾아들었다.
“왜 안 내리고.”
평소 늘 일 층에서 내리던 혜주에게 주원이 짧게 물었다.
차를 갖고 다니지 않는 내가 여기까지 내려온 이유를 정말 몰라서 묻는 거야?
저 뻔뻔한 낯짝을 한 대 때리고 싶어졌다.
‘당신과 얘기를 하고 싶어서 왔어.’
혜주는 준비한 말 대신 싸늘하게 되물었다.
“나한테 할 말 없어요?”
“없는데.”
빠직. 혜주의 미간에 금이 갔다.
자존심 싸움이라 이건가? 유치하게.
“할 말 없으면 됐어요. 괜히 내려왔네.”
먼저 사과하려고 했었다.
일방적으로 결혼을 멈추자고 해서 미안하다고, 이 문제는 시간을 두고 천천히 생각해보자고 다독이려 했다.
하지만 휑하니 비어 있는 주원의 손가락을 본 순간 무척 기분이 더러워졌다.
정리당하는 기분이랄까.
발밑에 굴러다니는 쓰레기만 치우고 싶었는데 침대며 소파까지 뒤집어 엎어버린 느낌.
‘그래, 당신 청소 잘한다고 했지. 그 실력을 이런 데까지 발휘할 줄은 몰랐네.’
문득 지나간 연인은 제게 아무 의미도 갖지 못한다던 주원의 말이 떠올랐다.
설마, 나 팽 당하는 건가.
아니, 뭐 결혼이 지상 과제인 것도 아니고 한 발 뺐다고 이렇게까지…….
[딩동! 지하 3층입니다!]
문이 열리고 주원이 먼저 내렸다.
가만히 엘리베이터 안에 서 있는 혜주를 보고 그가 눈썹을 힐끗 올렸다.
“안 내릴 거야?”
혜주는 붙박이처럼 서서 어금니를 사려 물었다.
“진짜 할 말 없어요?”
그건 그녀가 주원에게 베풀 수 있는 마지막 아량이었다.
주원은 잠시 고민하는 듯 시계를 힐긋 보고는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약속이 있어서.”
약속이 있어서 나랑 얘기할 시간이 없다 이거지.
약속이 있어서 이렇게 날 바람맞힌다 이거야.
뭐 얼마나 대단한 약속이라고!
“그래요, 그럼.”
스르륵.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시야가 닫히자마자 혜주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흐윽!”
참았던 서운함이 눈물로 쏟아졌다.
강주원 진짜 밉다.
정말 미워죽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