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2. 십 분 (112/121)


#112. 십 분
2023.06.25.



 
그날 저녁, 혜주는 루비와 술을 마셨다.

도저히 혼자 있을 기분이 아니라 누구든 걸려라 했는데 마침 껄렁껄렁 퇴근하는 루비를 발견한 것이다.


“언니, 대표님이랑 싸웠죠? 마빡에 완전 대문짝하게 그려놨는데?”

노릇노릇한 삼겹살을 집게로 구우며 루비가 물었다.

혜주는 종잇장처럼 느껴지는 고기를 씹으며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어, 싸웠어.”

“왜요. 사랑 싸움?”

“사랑 싸움으론 커플링 안 빼지?”

“헉, 커플링 뺐어요? 누가? 대표님이?”

혜주는 대나무 숲을 만난 듯 그간 있었던 일을 털어놓았다.

임신한 다희의 등장부터 결혼을 두고 다투었던 일, 그리고 오늘 있었던 일까지.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는 얘기지만 모든 걸 알고 있는 루비에겐 말할 수 있었다.


“와, 서사 미쳤다.”

한풀이하듯 한바탕 쏟아낸 얘기에 루비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서, 결혼 멈추자고 하자마자 반지를 빼버린 거예요? 우리 대표님 실행력 갑이네.”

“칭찬하는 거야?”

“아뇨. 욕하는 건데요.”

앞에 놓인 술잔을 목구멍에 때려 넣은 루비가 분개한 표정으로 외쳤다.


“뭐 그런 어이없는 놈이 다 있어? 따지고 보면 다 지 동생 때문에 일어난 일인데 보듬고 달래줘도 모자랄 판에 반지를 빼? 자존심만 살아가지고 이런 유치한 X끼!”

“X끼는 좀…….”

“이 와중에 남친 편들어요?”

“너도 그랬잖아.”

“그건 그렇죠. 그래도 필립은 커플링은 안 뺐다고요.”

“커플링이 없었던 거 아니고?”

“그것도 그렇죠…….”

주거니 받거니 하다 보니 한순간에 울적해진다.

혜주는 턱을 괸 채로 나직이 읊조렸다.


“실수로 뺀 건 아니겠지?”

“누가 실수로 반지를 빼요. 이거 봐요. 붙잡고 빼도 안 빠지는 걸 무슨 수로.”

“……그렇겠지.”

“못 됐어, 정말. 먼저 사과할 때까지 절대 연락하지 마요.”

“그래야지.”

“사과해도 절대 순순히 받아주지 말고요. 다른 건 몰라도 커플링을 빼버린 건 너무했다. 시위하는 거야 뭐야.”

제 일처럼 광광거리던 루비가 이내 시무룩해졌다.


“말하다 보니 좀 웃기긴 하네요. 내가 언니한테 연애 조언할 처지는 아니잖아요. 언니 앞에서 호구 인증 제대로 했는데.”

“헤어진 후로도 잘 지내는 거 같아 다행이야. 춘택이랑 헤어지고 많이 힘들어하면 어쩌나 걱정했거든.”

“걔도 잘 지내는 거 같은데 내가 왜요. 잘 먹고 잘 자는지 아주 살이 통통하게 올랐더만.”

“춘택이 만났어?”

“아, 아뇨? 누가요?”

당황하는 걸 보니 수상한데.


“그런데 살이 오른 걸 어떻게 알아?”

“어…… 꿈에서 봤어요. 히끅!”

수상쩍게 바라보는 혜주의 눈빛에 루비가 더듬더듬 변명했다.


“진짜예요. 엊그제 낮잠 자는데 필립이 나와서 랩으로 고백을 하더라고요. 절대 안 받아준다고 선을 딱 긋고 돌아서는데 뒤에서 걔가 갑자기 디스랩을…… 아무튼 꿈에서도 그렇게 강단 있다니까요, 내가?”

“개꿈이네.”

“개꿈이죠.”

루비와 술잔을 기울이다 보니 어느새 울적함이 조금 가셨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먹구름이 가득 끼었던 가슴이 조금은 가벼워져 종종 웃음도 나왔다.

마지막 병을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나니 어느덧 열 시.

혜주는 루비를 택시 태워 보낸 후 버스에 올랐다.

차창에 휙휙 지나가는 불빛이 어지러이 시야를 수놓는다.

몸은 휘청거리는데 정신은 또렷해 더욱 괴로운 밤.

편의점에 들러 딱 한 병만 더 사 가야겠다고 생각하며 차창에 머리를 기댔다.


‘보고 싶다…….’

퇴근 시간이 훌쩍 지난 무렵이라 버스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마침 기사가 틀어놓은 라디오에서 ‘봄날의 고백’이 흘러나왔다.


-키스할까?

 
어느 여름날. 반짝거리는 눈으로 물어오던 주원이 떠올랐다.

그때 참 좋았었는데.

정말 키스하자는 줄 알고 당황해 내빼다가 발을 조금 접질렀었다.

화끈화끈 올라오던 열기가 발목에서 시작된 건지 심장에서 시작된 건지 아리송하던 나날들.

노래 제목이 사실은 ‘키스할까’가 아니고 ‘봄날의 고백’이라는 걸 알게 되었던 때 차창으로 들어오던 빛이 총천연색으로 산란하는 느낌을 받았었다.

그렇게 내 안으로 들어왔었지. 성큼성큼 겁도 없는 걸음으로.

사랑했다. 사랑한다.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한데 왜 우리가 이래야 해.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던 혜주의 손가락이 어느새 버튼을 눌렀다.

긴 발신음과 함께 혜주의 가슴이 찰박찰박 찰랑였다.


‘보고 싶다, 강주원. 지금 당장 만나고 싶어.’

서서히 고인 그리움이 짙은 숨으로 새어 나왔다.

이깟 전화 한 통을 거는데 용기씩이나 필요하다니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건지 모르겠다.

손에서 자꾸만 땀이 났다.


‘받아라, 제발…….’

간절한 바람 속에 이윽고 발신음이 멈췄다.


-여보세요?

“!”

뭐지, 이 간드러진 목소리는.

난데없이 들려온 여자 목소리에 혜주는 귀에서 휴대폰을 떼고 상대를 다시 확인했다.

강주원 번호가 맞았다.


“강주원 씨 휴대폰 아닌가요?”

-네, 맞는데 지금 잠깐 자리를 비웠어요.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그러나 곰곰이 기억을 뒤적여도 선뜻 떠오르지 않는 음성이었다.

밤 열 시가 넘은 시각에 내 남친의 전화를 대신 받는 여자.

이걸 뭐라고 해석해야 하지?


“그쪽은 누구신데요?”

-누구겠어요. 지금 주원이랑 술 마시고 있는 사람이죠.

여자의 목소리는 무척 당당했다.

마치 강주원을 소유하기라도 한 듯이.

묘하게 긁는 듯한 뉘앙스에 열병처럼 달아올랐던 심장이 싸하게 식었다.


-아, 저기 들어오네요. 바꿔줄까요?

“아니, 됐어요.”

-그래요, 그럼.

그럴 줄 알았다는 듯한 콧소리에 혜주의 미간에 날이 섰다.


“잠깐.”

짜증이 나서 확 끊어버리려던 혜주가 이내 휴대폰을 고쳐 쥐었다.


“뭐죠?”

“강주원 바꿔요.”

“방금 됐다고 하지 않았나요?”

“마음이 바뀌었어요.”

생각해보니 피할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강주원이랑 사귀는 것도 나고 그가 사랑하는 것도 난데.

한 입 거리도 안 되는 도발에 넘어가 봐야 나만 손해지.


“바꾸라고.”

혜주는 목소리를 낮게 깔고 경고했다.


“지금 당장.”

여자는 혜주가 이렇게 세게 나올 줄은 몰랐는지 조금 어버버했다.

1초도 지나지 않아 홱 휴대폰을 낚아채는 소리가 들렸다.


-뭐 하는 짓이야.

짜증이 묻어난 목소리와 함께.

발신인을 확인한 주원이 크게 숨을 들이쉬는 소리가 들렸다.

낮은 호흡이 수화기로 넘어오자마자 혜주가 말했다.


“그 여자가 누군지, 왜 오빠 전화를 대신 받은 건지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확실해.”

-…….

“한 시간 안에 튀어와요. 그 안에 나타나지 않으면 나 오빠 찰 거야.”

주원에게선 대답이 없었다.

얼핏 들으니 낮게 웃는 듯도 했다.


-십 분.

수화기를 뚫고 나오던 음악 소리가 점차 멀어졌다.


-지금 출발해.

달리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그가, 내게로 온다.

*

서베리아의 대표이자 대학원 동기인 그녀와의 약속은 꽤 오래전 잡아둔 것이었다.

다희에 관한 정보를 넘겨받는 대가로 술을 사기로 한 것을, 최근 너무 많은 일이 폭탄처럼 터지는 바람에 까맣게 잊고 말았다.

총무팀장과 회의 중 그녀에게서 도착한 메시지를 보고 나서야 주원은 오늘의 약속을 상기했다.

미리 알았더라면 약속을 미뤘을 텐데.

이미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는 그녀를 바람맞힐 수는 없어 부랴부랴 회사를 나섰다.

원래대로라면 혜주와 같이 나가려 한 약속이었다. 하지만 바로 어제 혜주와 다툰 까닭에 쉽사리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억지로 끌고 나가봐야 티가 날 테고, 자신에게 눈독을 들이고 있는 여자 앞에서 틈을 보이는 꼴만 될 것이었다.

엘리베이터에서 혜주와 마주쳤을 때 사실 주원은 눈가가 시큰할 정도로 반가웠다.

총무팀장이 같이 있어 표는 낼 수 없었지만 그가 내리고 나면 당장 손목을 끌어당기고 싶을 정도로.

총무팀장과 대화를 나누는 내내 그의 신경은 혜주에게 쏠려 있었다. 총무팀장이 뭐라고 떠들어대는 것 같은데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한데 분위기가 뭐랄까.

싸늘했다.

등 뒤에서 내뱉는 숨결에 서리가 낀 듯했다.

잠깐 눈이 마주쳤을 때 느껴지는 냉기에 주원은 확신했다. 아직 혜주의 화가 다 풀리지 않았음을.

그렇게 생각하니 괘씸했다.


‘화낼 사람이 누군데.’

한없이 일방적이었던 그녀의 선고에 뜬눈으로 지새운 밤이 떠오르자 가슴이 홧홧해졌다.

제 손가락에 반지가 사라진 것도 까맣게 모른 채.


-한 시간 안에 튀어와요. 그 안에 나타나지 않으면 나 오빠 찰 거야.

 
혜주의 협박을 듣는데 심장이 귀 옆에서 뛰는 듯 날뛰었다.

심드렁하게 죽어 있던 거죽에 이제야 피가 도는 것처럼,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었다.

주원은 바로 재킷을 들고 가게를 뛰쳐나왔다.

밤거리는 여전히 활기가 넘쳤고 도로 곳곳을 드리운 불빛은 화려했다. 쭉 뻗은 대로를 전력 질주해 택시를 잡은 주원이 다급하게 주소를 불렀다.

목적지는 혜주의 집. 우리가 첫 키스를 나누었던 그 놀이터.

십 분이 일 년처럼 길었다. 똑딱똑딱 느리게 가는 초침과 달리 심장의 펌프질은 더욱 거세어졌다.

보고 싶다. 너무 보고 싶어서 단물이 나올 만큼.


“기사님, 조금만 더 빨리 가주시죠.”

마음이 급했다.


“급한 일이라도 있나 보죠? 이 밤중에.”

재촉하는 그에게 기사가 허허 웃으며 물었다.

주원은 초조하게 시계를 보며 대답했다.


“2분 남았어요. 늦으면 여자친구한테 차이거든요.”

복잡한 문제는 때론 아주 단순한 진실로 인해 낱낱이 올이 풀리곤 한다. 지금이 딱 그랬다.

오혜주를 사랑한다.

하늘이 뒤집혀도, 땅거죽이 솟아올라도 결코 변할 수 없는 진실 하나.

어떠한 형식으로든 네 곁에 있고 싶다. 굳이 남편이 아니더라도 좋아. 애인, 남자친구, 아니, 세바스찬이라도 좋다.

네게 약속했었지. 발닦개도 되고 도비도 되어주겠다고.

나 이제 그 약속 지키려 해.


“다 왔어요! 서둘러 가봐요.”

제시간에 도착한 것에 주원만큼 안도한 기사가 말했다.


“여자친구한테 차이지 말고, 허허.”

주원은 덕담을 해준 기사에게 감사하단 말을 남기곤 택시에서 내렸다.

가로등 불빛이 고요히 내린 놀이터에 그녀가 있었다.

그네에 걸터앉은 채 쭈쭈바를 먹고 있는 모습이 그때와 똑같았다.

작은 발에서 달랑거리는 슬리퍼 두 짝, 무릎을 살짝 덮은 원피스, 어깨 아래로 흘러내린 머리칼.

가까이 다가설수록 세세하게 각인되는 그녀의 모습에 가슴이 요동쳤다.

저벅, 저벅.

인기척을 느낀 혜주가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쳤다.

붉어진 입술을 살짝 벌려 주원을 바라보던 혜주가 천천히 일어섰다.

아무 말도 필요 없었다.

단 한마디도.

서로를 바라보던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목을 감쌌다.

갈증에 허덕인 입술이 샘을 찾아들었다.

잔뜩 고인 허기에 다른 무얼 할 틈도 없이 서로를 비비고 핥고 거세게 엉키었다.

목구멍을 꽉 틀어막았던 상념이 씻겨가는 듯 이제야 숨이 쉬어져서, 그치지 않는 비처럼 서로에게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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