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 수절하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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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 수절하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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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 수절하려고요
2023.06.29.
혜주의 눈가는 눅눅한 밤을 담아 젖어 있었다.
쭈쭈바를 빨던 입술은 몹시 차가웠고 베어 무는 순간 아랫배가 시큰할 만큼 달았다.
그녀에게서 나는 옅은 샴푸 냄새가, 뺨을 스치는 보드라운 머리칼이, 격렬히 섞인 숨에 배어있는 열기가 주원을 함락시켰다.
너 하나 품에 넣었다고 세상의 빛깔마저 바뀔 일인가.
그녀를 안는 순간 하루를 꽉 채웠던 시름이 녹아버린 기분이었다.
파란색 아스팔트에 내려앉은 어둠이 반짝반짝했다. 드리운 그늘보다 달빛이 눈이 부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놓치고 싶지 않다는 듯 목을 꽉 끌어안은 그녀의 손이 마치 구원처럼 느껴졌다.
사실은, 원하는 것이 많지 않았음을 깨닫는다.
너만 있으면 돼.
어떤 형태로든 너만 곁에 있으면 세상은 이리도 풍족하다.
“네가 원하는 대로 해.”
뒤엉켰던 입술이 살짝 틈을 벌렸다.
주원은 뜨거운 진심을 나직이 밭아냈다.
“이대로 연애만 해도 좋아. 평생 수절하라고 하면, 그렇게 할게.”
“오빠…….”
“보채지 않을게. 멀어지지만 마.”
단숨에 쏟아진 고백이 온몸에 차올랐다.
어떤 변명이 이다지도 달콤할까.
혜주는 그에게 서운했던 마음이 눈 녹듯 풀리는 기분이었다.
“멀어진 게 누군데.”
나 역시 마찬가지라고.
강주원만 있으면 다른 건 상관없다고.
넘실대는 마음을 꾹 누르고서 혜주는 주원의 가슴을 퍽 후려쳤다.
나 오혜주, 짚을 건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는 여자.
“여자랑 술 마시니 좋았어요?”
날카로운 추궁에 주원이 조금 움찔했다.
“여자 아니고 서베리아 대표야. 지난번에 술 사기로 약속한 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나간 거야.”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당황하는 모습을 보니 조금 놀리고 싶어진다.
혜주는 뾰로통하게 주원을 흘겨보았다.
“그건 셋이 보기로 한 거 아니었나?”
“그럴 상황이 아니었잖아.”
“아, 불가피한 상황엔 이성이랑 단둘이 술 마셔도 되는 거구나.”
“그게 아니라.”
“좋은 거 배웠네요. 새로운 룰이 생겼으니 조만간 써먹어야겠네.”
“잘못했어.”
주원은 가타부타 변명하지 않고 냅다 사과부터 했다.
“이제 안 그럴게.”
“말로만?”
강주원답지 않게 꼬리를 내린 모습이 썩 마음에 드나…… 했는데.
“몸으로도.”
씩 웃으며 허리를 끌어당기는 손길 한 방에 혜주는 전세가 기울었음을 알았다.
“몸……이요?”
“복종할게, 혜주야.”
웃는 입매가 귓가에 닿았다.
“마음껏 갖고 놀아.”
내리깔린 숨결이 위험하게 귓바퀴를 감싸 올렸다.
정념 가득한 눈빛이 뇌리를 쨍하고 울렸다.
말로는 저를 통째로 갖다 바치겠다는데 타는 듯한 눈빛은 오히려 그녀를 잡아먹을 듯했다.
순식간에 귓불이 달아올랐다.
‘하여간 틈을 보일 수가 없다니까.’
혜주는 어색한 눈으로 주위에 사람이 있나 없나부터 살폈다.
“복종이고 뭐고…… 설마 여기서 받으란 소리는 아니죠?”
“어디서든.”
나붓한 시선이 혜주의 자취방을 타고 올라갔다.
“올라갈까?”
“아빠한테 들키면 나 죽어요!”
“안 들키게 잘할게.”
덥석 허벅지를 안아 올린 그가 웃음기 어린 음성으로 속삭였다.
“너만 입 다물면 돼.”
*
자취방에 들어선 두 사람은 불을 켤 틈도 없이 엉겨 붙었다.
툭, 툭.
혜주의 발에 달랑달랑 매달려 있던 슬리퍼가 떨어졌다.
구두를 벗고 그대로 들어선 주원이 키스를 하며 방을 가로질렀다.
주원의 집 화장실보다 작은 원룸은 일주일 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너저분한 모습이었다.
발에 채이는 옷가지를 발끝으로 밀어 침대에 다다른 주원이 혜주의 목을 감아쥔 채 침대에 내려놓았다.
“집이 너무 더러운데…….”
뒤늦게 집 상태를 인지한 혜주가 볼을 붉혔다.
주원은 민망해하는 혜주의 입술을 깊게 빨아당겼다.
“하고 나서 치워줄게.”
그런 의미가 아니잖아요!
혜주의 항변은 금세 주원의 입안으로 먹혀들어 갔다.
코딱지만 한 원룸이 제 형편을 대변하는 것 같아 부끄러워하던 혜주의 머릿속에서 금세 상념이 사라졌다.
초옥, 촉.
도톰한 입술이 축축한 마찰음을 내며 살갗을 자극했다.
복종하겠다는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조금씩 조금씩 정성을 더해가자 혜주는 금세 온몸이 노곤해졌다.
발끝에서 시작한 키스가 하나씩, 하나씩 징검다리를 놓으며 올라왔다.
간지러워 허리를 뒤트는 혜주를 두 손으로 꽉 잡자 그녀의 입에서 나직한 신음이 흘렀다.
마실 것을 찾아 며칠을 헤맨 사람처럼 갈급한 입술은 금세 머물 곳을 찾았다.
혜주는 시트를 꽉 움켜쥐었다.
잔뜩 곤두선 피부가 사그작거리며 이불에 마찰했다.
작은 원룸에도 장점이 있다면 소리가 퍼질 공간이 없다는 거였다. 방 안에 잔뜩 고인 숨소리에 가슴이 더욱 가파르게 오르내렸다.
“오빠…….”
혜주가 주원의 머리카락에 손가락을 쑤셔 넣었다.
“괜찮아?”
나직한 물음에 섞인 숨결마저 한없이 자극적이라 혜주의 눈꼬리에 눈물이 고였다.
살짝 고개를 든 그와 눈이 마주쳤다.
번들거리는 입술로 씩 웃어 보인 그가 다시 고개를 묻는 순간 혜주의 허리가 활처럼 휘었다.
목구멍을 긁고 나온 숨이 비눗방울처럼 터졌다.
그 밤, 몇 번씩이나.
*
평탄하던 선우연의 일상에 폭탄이 떨어진 후 며칠이 흘렀다.
겉보기엔 달리 변한 게 없어 보였지만 늘어난 한숨만큼은 숨길 수가 없었다.
오늘 아침 주원이 다녀간 후론 더했다.
“이건 뭔데?”
“고소장이요.”
난데없이 서류를 내밀며 하는 말에 선우연은 크게 숨을 들이켰다.
[피고소인: 천다희] 라는 글자를 보는데 절로 눈앞이 아득해졌다.
“이렇게까지 해야겠니?”
“그 말은 제가 아니라 천다희에게 하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왜 그렇게까지 했냐고.”
종이에 낱낱이 적힌 다희의 만행은 그냥 넘어가기엔 위험한 수준이었다.
평소 같으면 백 번이고, 천 번이고 납득했을 선우연이지만 승원의 문제가 걸려 있다 보니 쉽사리 입을 뗄 수 없었다.
마침 옆에 있던 다희가 울먹이며 사죄했다.
“죄송해요, 아주버님. 그땐 제가 제정신이 아니었어요.”
“아주버님?”
신경을 긁는 단어에 주원의 미간에 고랑이 패였다.
“모든 게 혜주 탓이라고 생각했어요. 다들 혜주 편만 드니까 억울했어요. 그래서 제가 못난 짓을 저질렀습니다.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해요.”
어깨를 파르르 떠는 다희를 필연이 안쓰러운 표정으로 지켜보았다.
가증스러운 그녀의 태도에 주원은 속이 뒤집혔다.
“재주가 참 많네, 천다희 씨. 날 죽이려 한 것도 모자라 이젠 형제지간까지 찢어놓고.”
“엄마의 일은 죄송합니다. 하지만 제가 그런 게 아니잖아요.”
한 공간에 있는 것조차 불쾌해진 주원은 더 이상 말을 섞고 싶지도 않아 고개를 돌려버렸다.
필연은 오만가지 쌍욕이 날아다니는 주원의 표정을 살피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넌 어떻게 할 셈이냐.”
주원은 단호했다.
“이 여자와 혜주를 가족으로 엮을 생각 없습니다.”
“그럼?”
“수절하려고요.”
“뭐야?”
“이번 생에 제 결혼식 보긴 틀리셨어요. 굳이 허락이 필요 없는 결정임에도 이렇게 말씀드리는 이유는 이게 누구 탓인지 똑똑히 알려드리기 위함입니다.”
주원이 저렇게 나올 땐 턱밑에 칼을 대고 협박해도 마음을 바꿀 수 없었다.
선우연의 한숨이 늘어갔다.
‘여태 편하게 키웠다 했지.’
남들의 부러움을 샀던 두 아들이 여자 문제로 이렇게 속을 썩일 줄은 몰랐다.
한숨만 푹푹 내쉬는 부부를 보며 쥐새끼처럼 눈알을 굴리던 다희가 우물쭈물 말을 붙였다.
“어머님, 죄송해요. 제가 부족해서…….”
“그런 말이 필요한 단계는 아니지 않니?”
“제 진심이에요…….”
하아.
선우연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누르며 꿇어앉은 다희를 쳐다보았다.
이른 아침에 찾아온 다희는 몇 시간째 저 자세였다.
임신부에게 좋지 않다고 아무리 만류해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결혼 허락을 받기 위해 승원도 모르게 찾아왔다는 그녀는 허락이 떨어질 때까지 일어나지 않을 태세였다.
“여보, 그만 허락합시다. 임신한 애를 언제까지 꿇려둘 거예요.”
마음이 약해진 필연이 조심스레 의견을 개진했다.
아기 초음파 사진을 보고 진즉 마음이 느물느물해졌던 그는 간절한 다희의 호소를 차마 외면하지 못했다.
“여보.”
“…….”
“연아!”
“잠시만 가만히 있어요. 생각 중이잖아요!”
선우연이 날카롭게 대꾸하며 홱 필연을 노려보았다.
움찔한 그가 눈을 피하자 시선이 자연스레 다희의 정수리로 떨어졌다.
금쪽같은 둘째의 반려로 받아들이기엔 너무도 부족한 아이였다.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죄악을 저지른 여자의 피를 물려받은, 제정신으론 도저히 품을 수 없는 아이.
하지만 죄인처럼 꿇어앉은 채 아랫배를 감싸 쥔 손을 보니 차마 내칠 수가 없었다.
“그쯤 했으면 됐어. 이제 일어나렴.”
차분히 생각을 정리한 선우연이 엄한 눈빛으로 다희를 내려다보았다.
“배 불러오기 전에 결혼식부터 올려라.”
“어머님……!”
“대신 혼인신고는 1년 후에 하는 걸로 해.”
다희는 눈물을 글썽이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네! 그럴게요! 무슨 말씀이든 따르겠습니다!”
“결혼식 이후 3년은 본가에 들어와 살았으면 좋겠다. 미안한 얘기지만 난 아직 너를 믿을 수 없어.”
“네, 충분히 이해합니다. 제가 한 짓이 있으니까요.”
“출산하면 유전자 검사도 해야 할 거야. 난 집안이니 학벌이니 그런 고루한 것은 따지지 않는다. 하지만 내 아들을 불행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아. 널 가족으로 받아들이기 위한 최소한의 확인 절차라고 생각해주면 좋겠구나.”
“당연합니다. 받을게요, 어머님! 무조건 받을 거예요!”
다희는 바닥에 이마가 닿을 것처럼 절을 하며 꺼이꺼이 울었다.
그간의 마음고생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이제 됐다……!’
사실 그녀는 선우연이 내건 조건이 어떻든 상관없었다.
어차피 결혼식이 끝나면 유산할 몸이었으니까.
‘유전자 검사? 실컷 해보라지. 없는 아이를 어떡할 거야.’
바닥을 향한 입가에 슬쩍 미소가 비쳤다.
그러나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그 미소는 처연한 눈물로 바뀌어 있었다.
*
승원과 다희의 결혼식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다.
초스피드로 결정된 데다 혼전임신이었기에 최소한의 하객만 불러 스몰 웨딩을 하기로 했다.
주원에게서 소식을 전해 들은 혜주는 다른 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이미 쏘아버린 화살과 같은 관계를 이제 와서 바꿀 수는 없었다. 그저 앞으로 마주칠 일이 없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그간 혜주의 연애는 똑같았다.
밥 먹고, 커피 마시고, 가끔 노래방도 가고.
주원의 집에 얹혀사는 애물단지 덕에 서울 호텔 구경은 실컷 했다.
금요일 밤이 되면 주원은 가출 소년처럼 집을 버리고 나왔다. 그러곤 혜주와 함께 호텔로 들어가 이틀을 꼬박 붙어 있었다.
옷을 다시 입는 것도 귀찮아 하루 종일 룸서비스만 시켜 먹을 정도이니 말 다 했지.
기약 없는 연애였지만 그것 나름대로 괜찮았다.
‘결혼 안 하면 어때. 이렇게 행복한걸.’
함께 하는 하루하루를 소중히 새기는 것만으로도 벅찬 나날이었다.
한 주가 지나 또다시 금요일이 되었다.
주원과 데이트를 앞두고 혜주는 호텔 커피숍에 앉아 있었다.
오늘 전략 회의가 있어 조금 늦는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를 기다리는 시간은 조금도 지루하지 않아서, 룸서비스 메뉴를 하나하나 훑어보다 보니 금세 시간이 갔다.
‘올 때가 됐는데?’
혜주는 무심코 고개를 들어 통유리 밖을 쳐다보았다.
길 건너편에 보이는 낯익은 인영에 그녀의 눈이 벌어졌다.
“저거 천다희 아니야?”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어떻게 여기서 딱 만나냐.
고소장을 접수한 후 다희에게서 연락이 왔었다.
[내가 잘못했어. 배 속 아기를 봐서라도 선처 부탁할게.]
눈 씻고 찾아봐도 미안하단 말은 없었다.
문자로 띡. 보여주기식의 형식적인 메시지 하나만 던져놓고 뒤로는 변호사를 선임했다지.
당장 달려나가 머리채라도 휘어잡을까. 치열하게 고민하며 그쪽을 쳐다보고 있는데 택시를 잡으러 뛰어가는 다희의 모습이 보였다.
급한 일이라도 있는지 백 미터 달리기를 할 때처럼 걸음이 빨랐다.
혜주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임신한 애가 저렇게 뛰어도 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