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 딱 걸렸어, 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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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 딱 걸렸어, 너
2023.07.02.
한 시간 후.
호텔에 도착한 주원이 샤워부터 하고 오겠다며 욕실로 들어간 후 혜주는 스위트룸 응접실에서 땅콩을 까먹고 있었다.
그녀의 손엔 조금 전 주원이 툭 던지고 간 서류가 들려 있었다.
그건 10 페이지 가량의 보고서로, 요새 주원이 진행 중인 아주 사적인 프로젝트였다.
다희의 만행으로 타격을 입은 국밥집을 내내 안타까워하던 그는 특단의 조치를 내놓았다. 그의 전문분야인 마케팅과 경영전략을 활용해 가게를 되살리겠다는 전략이었다.
이름하여 [망해가는 쭈야국밥집을 살리기 위한 전략 보고서]
처음 그가 제안했을 때 혜주는 적잖이 감동했다.
망해가는 가게를 보며 가슴 아파할 줄만 알았지 심폐 소생을 해볼 생각은 하지 못했다.
이렇게까지 생각해주는 그가 무척 고마웠다.
울컥한 나머지 아무 말이나 뱉다가 “결혼할 것도 아닌데 뭘 우리 집까지 신경 쓰냐”고 헛소리도 했더랬지.
주원은 입이 댓발이나 나와서는 무려 다섯 시간이나 메시지를 씹었었다.
“어때, 마음에 들어?”
샤워를 마친 주원이 머리를 털며 나왔다.
헐렁하게 허리끈을 묶은 샤워 가운 안으로 탄탄한 가슴팍이 비쳤다. 언제 봐도 시선을 강탈하는 자태에 혜주는 실실 웃음을 흘렸다.
“으흥, 좋다…….”
“보고서 읽어봤냐니까 왜 침을 흘리고 있어. 이 음란마귀가.”
주원이 귀엽다는 듯 혜주의 정수리를 벅벅 쓰다듬었다.
혜주는 그대로 주원의 허리를 끌어안고 벽돌 같은 복근에 뺨을 비볐다.
따뜻하고, 단단했다.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단어가 조합되니 견딜 수 없이 매혹적이었다. 혜주는 복근 사이 움푹 파인 고랑을 손가락 끝으로 긁었다.
“어머, 여긴 수건으로 닦이지도 않나 봐. 아직 촉촉하네요.”
나긋나긋한 손길에 가운 아래쪽이 서서히 일어났다.
그 웅장한 기운이 혜주를 뿌듯하게 했다.
복근 좀 만졌다고 이럴 일인가.
손끝만 갖다 대도 반응하는 남자의 몸이 신기해 마치 마법사라도 된 것 같았다.
“밥 먹기 싫은가 보지?”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장난질 치는 혜주를 내려다본 주원이 힐끗 눈썹을 들어 올렸다.
혜주는 반짝반짝 빛나는 눈동자로 새침하게 대꾸했다.
“밥이야 굳이 지금 먹을 필요는 없죠.”
“그건 나도 동감이야.”
주원이 느른하게 샤워가운을 풀었다.
그대로 내려앉은 입술이 축축이 섞이려는데 현관 벨이 울렸다.
딩동! 딩동!
“룸서비스입니다!”
혜주는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주원이 어깨를 내리누르자 그대로 누워 있을 수밖에 없었다.
“두고 가요.”
혜주의 눈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주원이 싱긋 웃었다.
음식을 두고 갔는지 벨은 다시 울리지 않았다.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의 목을 감쌌다.
*
“이야, 맛있겠다. 잘 먹겠습니다!”
오늘의 메뉴는 가지를 얹은 도미 조림과 북엇국이었다.
어젯밤 회식 후 아직까지 해장을 못 한 주원을 위해 혜주가 특별히 선택한 메뉴였다.
연기가 모락모락 올라오는 북엇국을 주원의 앞에 밀어주곤 혜주가 도미 조림을 맛보았다. 매콤달콤한 양념이 일품이었다.
“참, 아까 천다희 봤어요.”
밥을 우물거리며 혜주가 얘기를 꺼냈다.
“어디서?”
“호텔 커피숍에서 오빠 기다리고 있을 때. 급한 일이 있는지 막 뛰어가더라고요.”
“눈 씻어. 지지야.”
커다란 손이 혜주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훑어내렸다.
그의 손바닥에 밴 바디워시 향기에 안구가 정화되는 기분이었다.
“근데 이상하지 않아요?”
“뭐가.”
“천다희가 뛰었다니까요. 임신한 사람이 그렇게 뛰어도 되나? 보는 내가 가슴이 다 철렁하더라고요.”
주원은 숟가락으로 천천히 북엇국을 뜨며 대꾸했다.
“아직 배가 안 나와서 그런 거 아닐까.”
“모르는 말씀! 원래 배 나오기 전이 더 위험하댔어요. 지금 한창 조심해야 할 시기라고요.”
“진짜 급한 일이 있었나 보지.”
“그런가……?”
문제는 둘 모두 임신에 관해선 무식자란 거였다.
대수롭지 않은 주원의 반응에 혜주는 좀전의 의심을 지워버렸다.
“결혼식은 진짜 안 갈 거예요?”
“내가 거길 왜 가.”
“그래도 하나뿐인 동생 결혼식이잖아요. 나는 상관없으니 다녀와도 돼요.”
최근 주원은 승원의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겠다고 집안에 선언했다. 그딴 결혼식에 갈 이유가 없다는 게 요지였는데, 소식을 들은 승원은 무척이나 화를 냈다.
형 생각해서 다희의 엄마도 부르지 않았는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며, 끝까지 오지 않겠다면 인연을 끊겠다는 의미로 받아들이겠다고 했다.
물론 주원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오혜주.”
근심하는 혜주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주원이 나직이 입술을 열었다.
“나 너한테 평생 수절할 몸이야. 네가 가라면 지옥불도 걸어 들어갈 수 있지만 거긴 안 가.”
“하지만 부모님이 서운해하실 텐데.”
“내가 더 서운했거든? 경중으로 따지면 내 쪽이 한참 밑졌다고.”
“못 말려, 진짜.”
혜주는 그만 픽 웃고야 말았다.
“이제 천다희 얘기 그만해.”
주원이 반쯤 비운 밥상을 물렸다.
“놀자.”
마침 혜주도 식사를 끝낸 터라 눈빛을 반짝반짝 빛내며 되물었다.
“뭐하고요?”
주원의 시선이 쓰윽 탁자 위를 쓸었다.
아까 혜주가 먹다 남긴 땅콩 캔을 발견한 그가 입매를 끌어올렸다.
“마침 땅콩이 있네. 빼빼로 게임 하자.”
“땅콩으로 빼빼로 게임을 어떻게 해요?”
“하면 다 돼.”
주원이 땅콩 한 알을 물었다.
“자, 먹어.”
붉은 입술 사이로 쏙 튀어나온 앙증맞은 자태에 혜주는 기가 막혔다.
“한 판 하면 게임 끝나겠는데요.”
“어차피 길게 할 생각은 없었어.”
못 말리겠다는 듯 땅콩 끝을 베어 문 혜주의 입술을 주원이 단숨에 삼켰다.
물고 빨기 딱 좋게 도톰한 입술이 디저트처럼 달콤하게 입안을 감돈다.
살짝 내리깐 속눈썹이 자잘히 떨리는 모습에 주원의 아랫배가 뭉근해졌다.
‘예뻐 죽겠다. 땅콩처럼 입안에서 굴리고 싶어.’
서로의 입에서 입으로, 공을 주고받듯 땅콩이 오갔다.
느릿하게 들어온 그가 땅콩을 휘감았다. 녹진해진 땅콩이 목울대로 유유히 사라졌다. 그가 혜주의 허리를 감싸 그대로 허벅지 위에 올렸다.
“아.”
벌어진 가운 사이로 느껴지는 부드러운 감촉에 인내심은 금세 동이 났다.
“입술 줘.”
고개를 젖힌 주원의 입술 위로 혜주의 입술이 내려앉았다. 주원은 한 손으로 그녀의 목덜미를 더욱 잡아 내렸다.
가까이 밀착할수록 숨이 가빠졌다. 주원은 허리끈을 풀어 가운을 벗어 내렸다. 짓눌린 가슴에서 느껴지는 고동 소리가 적나라했다.
빈틈없이 맞물린 육체가 같은 속도로 오르내렸다.
점점 거칠어지는 움직임 속에 의자가 삐걱삐걱 비명을 질러댔다.
*
고소장을 접수한 후 경찰에게서 연락이 왔다.
국밥집에 악성 리뷰를 남긴 게 천다희라는 건 확인됐는데 이 정도 악플로는 기껏해야 벌금형이 전부라고, 그쪽에서 합의를 원하니 기왕이면 원만하게 해결을 보라는 내용이었다.
물론 혜주는 경찰의 권유를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다.
“음, 뭔가 증거가 더 있으면 좋겠는데.”
그녀는 다희가 싸지른 똥을 찾아내느라 분주했다.
“가게 하나를 말아먹었는데 고작 벌금형이라니, 진짜 법이 왜 이 모양이야.”
그녀는 뚫어져라 휴대폰을 검색하며 투덜댔다.
경찰에 말에 따르면 악플로 고소를 할 때는 증거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고 했다.
다희가 인터넷상에 싸지른 똥이 하나란 법이 없으니 어쩌면 흔적을 더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그 생각으로 혜주는 저녁 내내 휴대폰을 뒤적거리고 있었다.
다행히 혜주에겐 다희가 악성 리뷰를 남길 때 사용한 아이디와 비번이 있었다.
박소희로부터 구입했다는 바로 그 아이디였다.
“비번 아직 그대로일지 모르겠네.”
혜주는 지난번 경찰서에 갔을 때 적어온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포털사이트에 입력했다.
[psh0808님, 환영합니다.]
다행히 비밀번호는 그대로였다.
다희가 악성 리뷰를 남긴 곳은 포털에 등록된 사이트였다. 쭈야국밥에 남긴 리뷰는 임시조치되어 블라인드 된 상태라 지울 수도 없어서 혜주는 다른 곳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악성 리뷰를 또 어디다 남겼을까? 아빠는 배달 앱도 사용하지 않아서 남길 데가 마땅치 않을 텐데…….”
로그인된 아이디로 온갖 곳을 쑤셔봤으나 딱히 나오는 건 없었다.
“천다희 성격에 한 곳에만 남겼을 리가 없는데 이상하단 말이지.”
혜주가 마지막으로 떠올린 것은 카페였다.
다희는 평소 구강청결제 직구 등을 위해 포털사이트 카페를 자주 이용했었다.
그녀가 왕성한 활동을 한 카페 회원에게 수여되는 황금 뱃지도 받은 이력이 있다는 걸 떠올린 혜주는 로그인된 아이디로 카페에 접속했다.
“오, 됐다.”
해당 아이디로 가입한 카페는 열 개에 달했다.
카페 목록을 확인한 혜주가 혀를 끌끌 찼다.
“죄다 임신, 출산과 관련된 거네.”
아이디의 원래 주인인 박소희는 중학생에 불과했으니 확률적으로 카페에 가입한 사람은 다희일 가능성이 높았다.
“지 아이디로 가입했다가 괜히 들킬까 봐 머리 쓴 거 보소. 하여간 천다희 가지가지 한다.”
혜주는 심드렁한 얼굴로 카페에 접속했다.
‘내가 쓴 글’ 목록을 쭉 훑으며 쭈야국밥과 관련된 얘기가 있나 없나 살펴보던 그녀의 눈이 이내 화등잔만 하게 벌어졌다.
“이게 다 뭐야?”
[(급구) 임신테스트기 두 줄짜리 구합니다. 사례금 십만 원.]
[(급구) 최근 날짜 초음파 사진 구합니다. 젤리곰 초음파 원해요.]
두 줄짜리 테스트기와 초음파 사진을 구해……?
‘왜?’
음험한 가정 하나가 뇌리에 가득 찼다.
혜주는 눈을 부릅뜬 채 다른 카페에도 접속해보았다. 열 개에 달하는 카페에 남겨진 글들은 하나같이 똑같았다.
개중엔 댓글이 달린 글도 몇 있었다.
[챗 드려요~] 라는 댓글을 따라가 보니 실제 채팅이 이루어진 흔적이 있었다.
사례금 십만 원에 두 줄짜리 테스트기를 구한 정황, 마찬가지로 초음파 사진을 구한 정황도 있었다.
어지간히 눈치가 없는 사람이라도 이쯤 되면 한 가지 가능성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거. 짓. 임. 신.
그게 아니고서야 굳이 남의 것을 구할 이유가 없었다.
“이게 사실이라면 사기죄로 콩밥 먹어도 안 이상하겠는데? 천다희, 대체 무슨 짓거리를 벌이고 있는 거야?”
꼭지까지 화가 치미니 가슴은 오히려 차갑게 식었다.
짐작이 사실이라면, 천다희는 생각한 것보다 훨씬 무서운 사람이었다.
있지도 않은 아기를 담보로 한 사람의 인생을, 아니 한 집안을 속이고 있는 게 아닌가!
내가 지금껏 알고 지내던 천다희는 누구지?
마치 신기루 같았다. 애교 많고, 질투도 많고, 눈물도 많은. 그래도 힘들 때면 가장 먼저 달려와 주던 그녀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허상이었다.
기대하는 바가 없어서인지 실망스럽지도 않았다.
혜주는 싸늘한 눈매로 화면을 쳐다보았다.
[(급구) 최근 일자 초음파 사진 구해요. 21~22주짜리로, 날짜 박혀 있는 걸로 구합니다. 직거래 요망, 사례금 십만 원.]
psh0808이 가장 최근에 남긴 글을 훑어본 혜주가 어금니를 짓씹었다.
“딱 걸렸어, 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