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 배도 별로 안 나와 보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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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 배도 별로 안 나와 보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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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 배도 별로 안 나와 보이고
2023.07.06.
다희는 요즘 꽃밭에서 외줄을 타는 기분이었다.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지천이 호사스러운데 조금만 삐끗하면 천 길 낭떠러지로 굴러떨어질 것처럼 아슬아슬했다.
입덧하는 다희를 위해 잘하지도 못하는 요리를 낑낑대며 해내는 승원을 볼 때면 눈물이 날 것처럼 벅찼다. 비록 절반의 허락이지만 그의 부모님께 인정도 받았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오늘과 같은 날이 내일도 계속되기를.
바람은 오직 그 한 가지뿐인데 누가 뒤통수에 활을 겨냥하고 있는 것처럼 불안이 가시지 않았다.
“시간 맞춰 오셨네요. 어머, 신부님이 정말 미인이세요!”
오늘은 결혼식 때 입을 웨딩드레스를 피팅하는 날이었다.
슬슬 배가 불러올 시기라 아랫배에 복대를 한 다희는 긴장한 표정으로 숍으로 들어섰다.
“안녕하세요.”
“네, 신부님. 이쪽으로 오세요. 신랑님도요.”
신랑, 신부라.
두 귀로 듣고도 믿기지 않는 꿈같은 단어였다.
한 편에 쫘르르 걸린 눈부신 웨딩드레스를 보니 현기증이 날 것 같았다.
조금 비틀거리는 다희를 승원이 가볍게 부축했다.
“괜찮아?”
“기분이 이상해.”
그토록 바라 마지않던 곳에 왔는데 왜 이렇게 눈물이 나지.
다희는 눈물샘을 꽉 잠그며 직원의 안내에 따라 이동했다.
“선우연 사모님께 말씀 전해 들었습니다. 2주 후 결혼식인데 아마도 컨디션이 완벽하진 않으실 거라고.”
아아, 내가 임신한 사실을 귀띔해두신 거구나.
다희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조금요.”
“허리 쪽이 너무 붙는 드레스는 피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하시더군요. 몇 벌 골라두긴 했는데 신부님 보니 제가 다 아쉽네요. 몸매가 이렇게 좋으신데! 여성스러운 곡선을 잘 드러낸 머메이드 라인 입으셨으면 잘 소화하셨을 텐데요.”
“칭찬 감사합니다. 제가 입어볼 드레스는요?”
“뭘 입어도 아름다우시겠지만 저희 숍 드레스 중에서도 최상급 라인으로 골라뒀으니 마음에 드실 거예요. 이쪽으로 오세요.”
드레스 숍 직원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남발하며 다희를 안내했다.
조금 전 혼수이불을 고르러 백화점에 갔을 때도 극진히 대접을 받은 걸 떠올리면 이상하지도 않았다.
이 모든 게 선우연의 입김 덕분이겠지.
‘돈이 좋긴 좋네. 가만히 있어도 설설 기어주고.’
제 비위를 맞추려 혈안이 된 사람들을 보니 괜히 우쭐해졌다.
다희는 어깨를 당당히 편 채로 드레스가 걸려 있는 룸으로 들어섰다.
“오늘 보여드릴 드레스는 올해 F/W 신상으로 베리왕 디자이너가 한 땀 한 땀 수를 놓아 제작한 라인이랍니다. 신부님이 조금 아담한 스타일이셔서 입었을 때 늘씬하게 보일 수 있는 엠파이어라인 위주로 준비해보았어요. 배를 가리기에도 좋구요.”
“와…….”
피팅룸 안에 걸린 화려한 드레스에 다희의 턱이 쩍 벌어졌다.
예뻤다. 아니, 아름다웠다.
태어나서 이렇게 반짝거리는 옷을 본 건 처음이었다.
날개만 달면 곧장 날아갈 것처럼 아름다운 드레스는 꼭 공주님이 입는 옷 같았다. 보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뛰었다.
“어때? 마음에 들어?”
“마음에 드는 정도가 아니야. 이건…… 흐윽!”
다희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을 글썽였다.
그간 그녀의 마음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는 걸 아는 승원은 묵묵히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예쁘게 입어 봐. 기대하고 있을게.”
신랑분은 나가 있으라는 직원의 말에 승원은 다희에게 손수건을 건넨 후 휘장을 나섰다.
“신부님은 이쪽으로 오세요. 일단 머리부터 조금 만져 드릴게요.”
직원은 능숙한 손길로 다희의 머리카락에 핀을 꽂았다.
조그만 진주가 달린 실핀이었는데 쓱쓱 대충 꽂는 것 같은데도 순식간에 우아한 헤어가 완성되었다.
“그럼 이제부터 차례대로 피팅해 보시겠습니다.”
다희는 수줍은 얼굴로 동그란 단상 위에 섰다.
삼면이 거울로 된 피팅룸 한가운데에 속드레스만 입고 서 있자니 부끄럽기 짝이 없었다. 직원이 다가와 말했다.
“이제 속드레스 벗으시고 저희가 준비한 걸로 갈아입으셔야 해요.”
다희는 불안하게 눈동자를 굴렸다.
“꼭 벗어야 해요? 좀 부끄러울 것 같은데…….”
“드레스용 브라와 속바지로 갈아입으셔야 해요. 웨딩드레스는 노출되는 부위가 많아서 안에 다른 걸 입으면 티가 많이 나거든요.”
어쩔 수 없이 하얀 끈 나시 원피스를 벗었다.
“이걸로 갈아입으시면 됩…… 어어? 복대 하셨네요?”
드레스용 속옷을 건네던 직원의 시선이 다희의 배로 향했다. 납작한 배를 조금이라도 부풀리기 위해 이주 전부터 착용한 복대였다.
다희는 반사적으로 아랫배를 가리며 미리 준비한 말을 떠들었다.
“네. 유산기가 있다고 해서요. 복대가 문제가 되나요?”
“딱히 그런 건 아니지만 복대를 착용한 상태에선 코르셋을 조이기 힘들거든요. 잠시 풀어도 될까요?”
“아뇨. 괜찮습니다.”
“태가 예쁘지 않을 텐데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괜찮다고요! 아이가 흘러내릴 수도 있다는데 그깟 코르셋이 중요해요?”
저도 모르게 말이 뾰족하게 튀어 나갔다.
괜히 신경을 거슬렸다 싶었는지 직원이 금세 수긍하며 물러섰다.
“네, 알겠습니다. 그럼 코르셋은 따로 착용하지 않는 걸로 하고 피팅하실게요.”
다희는 빈정이 상해 묵묵부답으로 몸을 내맡겼다.
곧이어 하얀 드레스가 그녀의 몸매를 타고 차르르 떨어졌다.
얼음꽃이 핀 듯 반짝거리는 비즈와 풍성하게 펼쳐진 레이스. 시원하게 뚫린 목선과 허리 위로 올라간 절개선 때문에 키가 오 센티는 커진 듯했다.
“아…….”
제 모습이 공주처럼 어여뻐 다희는 하염없이 거울만 바라보았다.
드레스 매무새 점검이 끝나고 직원이 박수를 두 번 쳤다.
“신부님 나오십니다!”
차르륵.
휘장이 걷혔다.
맞은편 소파에 앉아 있던 승원이 시선을 들어 올렸다.
머리끝부터 천천히 떨어지는 시선에 다희의 뺨이 사과처럼 달아올랐다.
그는 어떤 반응일까? 지금 내 모습을 보고 예쁘다고 생각할까? 예뻐죽겠다는 호들갑스러운 반응까지는 아니더라도 조금 놀란 표정은 지어줬으면.
“예쁘다, 다희야.”
승원이 짧게 읊조렸다.
분명히 칭찬인데, 옆에 서 있던 직원이 움찔할 정도로 영혼 없는 목소리였다.
“정말 예뻐. 눈이 부실 정도로.”
엄한 분위기를 눈치챈 그가 다시 한번 힘주어 말했다. 아까보다 한 톤 이상 올라간 목소리로 물개박수까지 동원한 칭찬이었다.
하지만 다희는 그의 진심을 조금도 느낄 수 없었다.
‘눈이 부시긴 개뿔…… 엎드려 절받기도 이보다 궁색하진 않겠어!’
사과처럼 익은 볼이 더욱 붉어졌다.
“아아, 신부님이 너무 아름다우셔서 신랑님이 혼이 쏙 빠지셨나 보네요. 부끄러움 많은 신랑님이 종종 계세요. 상상보다 훨씬 아름다운 모습에 많이 놀라신 모양인데 어쩌죠? 다음 드레스는 더 놀라울 예정이라.”
노련한 직원이 서둘러 분위기를 수습했다.
다희는 울지 않기 위해 핑크빛 입술을 꽉 깨물었다.
다시 휘장이 드리웠다.
드레스는 눈을 떼기 힘들 정도로 아름다웠으나 다희의 미간에 내려앉은 시름은 어둑하기만 했다.
*
드레스 피팅이 끝난 후.
환복을 마친 후 휴대폰을 확인하는데 채팅이 와 있었다.
[카페 글 보고 연락드려요. 21주 차 초음파 사진 있어요. 어제 찍은 거고요.]
닉네임을 확인해보니 ‘쑥쑥맘’이라는 카페 회원이었다. 기다리던 연락에 다희는 곧장 답변했다.
[오늘 거래 가능할까요?]
[네! 얼마든지요. 사례금 십만 원 맞나요?]
[맞아요. 현금으로 바로 드려요.]
쑥쑥맘이 제시한 장소는 공교롭게도 드레스 숍과 멀지 않은 사거리였다.
나온 김에 잘 됐다 싶어 바로 약속을 잡은 다희가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승원에게 핑계를 댔다.
“승원아. 나 급하게 가볼 데가 있는데 너 먼저 들어갈래?”
“어딘데? 내가 데려다줄게.”
그가 당연히 그렇게 나올 거라 예상한 다희는 당황하지 않고 둘러댔다.
“잠깐 친구 좀 만나기로 했어.”
“친구?”
“응. 근처에서 만날 거라 태워주지 않아도 돼.”
“짧은 거리도 걷기 힘들다며. 정말 괜찮겠어?”
“의사 선생님이 그러는데 극초기 지나면 좀 걸어야 한대. 운동도 할 겸 좀 걸을까 해.”
다희가 그렇게 나오니 승원도 굳이 더 권하지는 않았다.
“약속 끝나면 연락해. 데리러 올 테니까.”
“응. 고마워.”
저를 걱정해주는 게 너무 좋아서 다희가 생긋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승원이 떠난 후, 홀로 남은 다희는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숍에서 약속 장소까지는 걸어서 20분 거리.
복대를 해서 그런가 걸음이 둔했다.
진짜 임산부처럼 조금 뒤뚱거리며 사거리에 도착한 다희가 휴대폰을 손에 든 채 주위를 탐색했다.
‘약속 시간 다 됐는데 어디 있는 거야?’
혹시나 거래 불발될까 봐 부리나케 걸어온 다희는 조금 찡그린 얼굴로 휘휘 주변을 둘러보았다.
[저 도착했어요. 어디 계세요?]
답장은 금세 도착했다.
[아, 저도 거의 다 왔어요. 혹시 지금 무슨 옷 입고 계세요?]
[저 베이지색 원피스에 하얀 운동화요. 2번 출구 쪽인데 사람이 많지 않아서 금방 알아보실 거예요.]
그렇게 30분이 흘렀다.
금방 도착한다던 사람이 모습을 보이지 않으니 다희는 슬슬 스팀이 오르기 시작했다.
‘아, 도대체 왜 안 오는 거야! 이거 사기 아니야?’
다희는 초조한 얼굴로 휴대폰만 바라보았다.
그때 누군가 어깨를 툭 쳤다.
“악, 깜짝이야!”
화들짝 놀란 다희가 홱 째려보았다.
“미쳤어요? 임신부를 그렇게 놀라게 하면……!”
……오혜주?
신경질적으로 쏘아붙이던 그녀의 입술이 잘게 떨렸다.
아, 하필이면.
“네가 여긴 웬일이야?”
적잖이 당황한 다희가 주위를 살피며 입을 열었다. 거래 상대가 언제 나타날지 몰라 초조한 기색이 역력했다.
“지나가는 길에. 너는?”
“남이사. 지나던 길이면 참견 말고 가던 길이나 가.”
초음파 사진을 거래하는 걸 들키기라도 하면 큰일이다.
난데없이 등장한 방해꾼을 떼어내기 위해 다희는 부러 표독스럽게 혜주를 대했다.
“아까부터 여기 서 있던데 누구 기다려?”
“너 나 염탐하니? 내가 누굴 기다리든 말든 무슨 상관이야.”
“하긴, 우리가 이런 데서 한가롭게 말 섞을 그런 사이는 아니지.”
혜주는 어깨를 으쓱하며 다희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얼굴 좋아 보인다? 배도 별로 안 나와 보이고.”
다희는 의식적으로 아랫배를 감쌌다.
“네가 임신을 안 해봐서 모르나 본데 원래 이 시기엔 배 나온 거 티 안 나. 그나저나 안 가니?”
“왜 자꾸 보내려고 해. 꼭 켕기는 게 있는 사람처럼.”
“누, 누가 뭘 숨긴다고 그래!”
정곡을 찔리자 등골에 진땀이 흘렀다.
휴대폰과 혜주의 얼굴을 번갈아 보며 초조해하는 다희를 향해 혜주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래, 그럼. 만나려던 사람 잘 만나 봐.”
빠이, 하며 사라지는 뒷모습에 다희의 불안감이 고조되었다.
쟨 결혼도 파투난 애가 왜 저렇게 기분이 좋아 보이지?
괜히 찝찝한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