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 혹시 태동 느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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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 혹시 태동 느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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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 혹시 태동 느꼈어?
2023.07.09.
“얘 뭐야. 진짜 초음파 사진 구하고 있잖아?”
집으로 돌아온 혜주는 심각한 표정으로 휴대폰을 들여다보았다.
화면 안엔 아까 찍은 사진이 가득 들어 있었다.
베이지색 원피스에 흰 운동화를 신은 다희가 누군가를 기다리는 모습이었다.
초음파 사진을 구한다는 카페 글을 봤을 때만 해도 백 퍼센트 확신하진 못했는데, 약속 장소에 어김없이 등장한 그녀를 보곤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다희의 임신은 거짓이다.’
다희와 나눈 채팅에는 그녀의 인상착의를 설명한 내용도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혜주가 찍은 사진과 정확히 일치하는 옷차림이었다.
약속 장소에 나타난 다희를 보고 사실 그 자리에서 알은 체를 해볼까 잠깐 생각도 했었다.
[설마설마했는데 진짜였네. 카페 글 네가 올린 거 맞지? ‘사랑은쟁취’님 너 맞잖아.]
그렇게 얘기했으면 다희 표정이 어땠을까.
꽤 볼만 했을 거 같은데.
혜주가 그러지 않은 건 좀 더 확실하고 화끈하게 다희를 조져주기 위해서였다.
아빠의 가게에 악성 리뷰를 단 사람이 다희란 걸 알게 된 후 혜주는 바짝 독이 오른 상태였다. 게다가 그녀로 인해 결혼도 물 건너갔지.
옛 친구고 나발이고 이제 남은 건 전쟁뿐이다.
“뭘 그렇게 골똘히 봐?”
침대에 앉아 있던 주원이 쑥 고개를 내밀었다.
“아, 이거요.”
오춘택 그 웬수가 집에 들어앉은 후 하루가 멀다 하고 혜주의 원룸을 노리는 그가 가여워 일주일에 딱 하루만 재워주기로 했다.
대궐 같은 집 놔두고 왜 자꾸 남의 집에 기웃대냐고 했더니 ‘남’ 소리에 꽂혀서는 주 1회 원룸 숙박권을 주지 않으면 차라리 노숙을 하겠다 딜을 해왔더랬지.
그때 선택된 날짜가 바로 화요일이었다.
“오빠, 나 왕건이 하나 건진 거 같아요.”
“뭔데. 나 말고 그런 게 또 있어?”
“오빠도 왕건이이긴 하지만 이게 더 대박이에요.”
혜주는 휴대폰 화면을 보여주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한데 아뿔싸. 시선의 높이가 참 거시기했다.
침대 밑에 쪼그려 앉은 혜주의 눈에 직통으로 보인 건 침대에 걸터앉은 주원의 다리 사이였다.
“나 왕건이인 건 아는데.”
지진 난 듯 흔들리는 혜주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주원이 정수리를 흐트러뜨렸다.
“왜. 알면서도 또 확인하고 싶어?”
씩 웃는 그의 미소에서 자신감이란 게 폭발했다.
어, 물론 그럴 만하지.
인정은 하는데 지금 중요한 건 그의 물건이 왕건이인지 아닌지가 아니다.
혜주는 아득해진 시선을 갈무리하며 진지하게 말문을 열었다.
“턱도 없는 음모론일 수도 있는데 일단 한번 들어봐요. 다희 임신했다는 거 뻥인 거 같아요.”
“뭐?”
그답지 않게 놀란 표정이었다.
“일단 증거를 보여줄게요. 이거 한번 봐봐요.”
혜주는 지금껏 수집한 정보를 주원에게 보여주었다.
박소희의 아이디로 다희가 구한 물건들, 초음파 사진을 구하려던 정황, 혜주를 보고 몹시도 당황하던 반응까지.
“이 정도면 거의 빼박인데.”
“오빠 생각도 그렇죠?”
“재밌네.”
주원의 눈이 이글이글 타올랐다.
“살면서 누군가를 찢어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든 건 처음이야.”
짙은 눈썹이 사납게 꿈틀댔다.
혜주 앞에서 험한 말을 하지 않으려 입술을 꾹 다물고 있지만 속으로 쌍욕을 하고 있다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어떻게 하려고요.”
혜주는 잔뜩 구겨진 주원의 미간을 살살 펴주었다.
다희의 임신이 거짓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었을 때 치밀었던 분노를 생각하면 주원의 이런 반응은 오히려 점잖은 편이었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곱게 찢어주긴 힘들지.”
“화내는 거 이해해요. 내가 이렇게 화가 나는데 오빠는 오죽하겠어요.”
그에게 천다희는 하나 있는 동생을 빼앗아간 여자였다.
승원의 결혼식 불참을 선언한 건 사실상 절연할 각오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주원은 그게 제일 가슴 아팠다.
“지금껏 강승원만 등신인 줄 알았는데 나도 별다른 거 하나 없는 놈이었네. 천다희 세 치 혀에 놀아난 걸 보면.”
“아직 백 퍼센트 확실한 건 아니에요. 물론 증거도 있고 확신에 가까운 짐작도 있지만 섣불리 터트리긴 위험해요.”
“위험할 거 뭐 있어.”
주원의 입술이 비스듬히 치켜 올라갔다.
“그 임신이 진짜이길 바라는 사람은 천다희 하나밖에 없어. 만에 하나 정말 임신이라면 잠깐 쪽팔리면 그만이야. 하지만 거짓이라면.”
그가 사납게 짓씹었다.
“대가는 천다희가 감히 치르지 못할 정도로 가혹해야지.”
혜주도 그 말에는 동의했다.
문제는 아무리 짱구를 굴려도 방법이 도통 떠오르지 않는다는 거지.
“승원이한테 직접 확인해보라고 하면 어떨까요?”
“그건 너무 쉽잖아.”
“그건 그래요.”
“좀 더 극적으로 가자. 다신 우리 주변에 얼씬도 못 하게 개망신을 줘야지.”
“음.”
낮게 깔려 있던 침묵을 비집고 주원이 불현듯 웃었다.
“왜 웃어요?”
“이기적인 X끼인 거 아는데, 혜주야.”
그가 쿡쿡 웃으며 이마를 문질렀다.
“좀 웃음이 나오네.”
헐, 이중인격인가 봐!
조금 전까지 다 때려 부술 기세로 분노하던 강주원 어디 있음?
“미친 듯 화가 나는데 한편으로는 안도가 돼서.”
“아. 그런 의미였군요.”
오빠 지금 좀 미친놈 같아요…… 라고 생각했던 혜주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어떤 마음인지 이해가 돼요. 승원일 제자리로 돌려 놓을 수 있는 기회이니 그런 감정 드는 것도 당연하죠.”
“아니, 강승원 말고 오혜주.”
“네?”
“내가 돌려놓을 사람은 넌데.”
주원이 낮게 웃으며 혜주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혜주는 그의 손바닥에 가만히 뺨을 비볐다.
“난 항상 오빠 옆에 있었어요.”
“내 욕심껏은 아니었지.”
“내가 오빠를 불안하게 했어요?”
큰 눈을 깜빡이자 주원이 눈꺼풀에 입을 맞췄다.
“되게 예쁜 꿈을 꿀 때, 혜주야.”
듣기 좋은 음악처럼 저음의 목소리가 스몄다.
“어떤 사람은 행복해하고 어떤 사람은 깰까 두려워해. 불행히도 난 후자 쪽이고.”
부드럽게 머리를 쓸어내리며 그가 속삭였다.
“넌 나한테 예쁜 꿈이야. 어떻게 붙들어도, 설령 너와 결혼한다고 해도 내 불안은 해소되지 않아. 좋으면 좋을수록, 더 가깝고 깊어질수록 불안해지겠지.”
“그럼 안 좋은 거 아닌가? 오빠 신경쇠약 걸려요.”
“치료제가 하나 있긴 한데.”
주원이 혜주의 고개를 꺾으며 제 입술을 내렸다.
침대에 앉은 주원과 달리 혜주는 침대 아래에 앉아 있었기 때문에 서로의 입술이 반대로 맞물렸다.
부드러운 곡선을 그린 혜주의 뒷목을 그의 손바닥이 단단히 지탱했다.
“상비약이 아니라 좀 아쉽긴 하네.”
거의 눕다시피 한 혜주의 얼굴 위로 짙은 숨이 내려앉았다.
평소와 달리 위에서 내리누르듯 키스한 탓에 그의 콧날이 턱 아래를 꾹 눌렀다.
그의 아랫입술이 윗입술을, 그의 윗입술이 아랫입술을 폭 덮듯이 머금었다. 푸딩처럼 섞인 입술이 한없이 달고 촉촉했다.
“하루 걸러 하루씩 먹는 거면 상비약이나 다름없죠.”
“집에 갖다 놔야 상비약이지, 바보야.”
주원이 핀잔하며 혜주를 침대 위로 들어 올렸다.
그러곤 그녀의 온몸을 정성스레 들이켜기 시작했다.
기회가 있을 때 미리 먹어둬야 한다는 듯이.
*
그날 밤, 다희는 자정이 넘도록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어떡하지?’
오후에 혜주를 마주친 게 영 찜찜했다.
‘왜 하필 거기에서, 왜 하필 오혜주가 나와?’
우연이라면 다행인데 기민한 촉은 그게 절대 우연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그날 다희는 생리 중이었다.
그 기간이 되면 다희가 습관처럼 체리블러썸 향수를 뿌린다는 걸 혜주는 알고 있었다. 야외라 향수 냄새를 못 맡았을 거라 생각은 하지만 얘기 중 살짝 콧잔등을 찡그린 게 신경이 쓰였다.
‘혜주는 나에 대해 너무 많은 걸 알고 있어. 고작 향수 냄새로 날 모함할 순 없을 테지만…….’
한번 걱정이 들기 시작하니 온갖 것이 근심이었다.
‘그러고 보니 걘 그때 왜 웃은 거야? 의미심장한 얼굴로 웃은 게 영 꺼림칙해!’
뭔가 켕기는 게 있는 거 아니냐며 떠보듯 말하던 얼굴이 떠올랐다. 다희는 시시각각 목이 조여오는 기분이었다.
“다희야, 잠깐 이리 와 봐.”
이불을 덮어쓰고 초조하게 입술을 씹고 있던 다희가 승원의 부름에 스르륵 일어났다.
“왜?”
불안한 기색을 숨기고 방긋 웃어 보이는 다희에게 승원이 뜻밖의 말을 했다.
“나 뭐 하나 물어볼 게 있는데. 혹시 태동 느꼈어?”
“어…… 살짝?”
얘는 갑자기 왜 이런 걸 물어.
거짓말을 하니 괜스레 가슴이 쿵덕거렸다. 승원은 다희의 눈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말했다.
“나도 한번 느껴보고 싶어.”
“뭐?”
“책에서 봤는데 부드럽게 마사지해 주면 아기가 반응할 수도 있다고 하더라. 배 한번 만져봐도 돼?”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갑자기 배를 만지겠다고?
지금껏 승원은 한 번도 다희의 배를 까보거나 만진 적이 없었다. 자연스러운 스킨십이 가능할 만큼 살가운 사이가 아니라 그런 것도 있지만, 왠지 터부시하는 느낌도 있었다.
그런 게 가끔 서운하긴 해도, 가짜 임신을 유지하기엔 턱없이 좋은 환경이라 다희는 애써 모른 척 해왔다.
그런데 이제 와서 갑자기 왜?
“아니, 안 돼.”
다희는 배를 감싸며 멀찍이 물러섰다.
승원의 눈동자가 한층 짙어졌다.
“안 된다고?”
“으응, 그게…… 임신하면 배에 그 임신선이라는 게 생기거든. 보기 흉하기도 하고 좀 부끄러워서.”
“며칠 후면 우리 부부야.”
“알아. 하지만 부끄러운 걸 어떡해.”
다희의 심장이 두방망이질했다.
거짓말을 한두 번 하는 게 아닌데도 그랬다. 속을 모르겠는 승원의 표정을 보며 다희는 점점 확신이 들었다.
‘승원이가 날 의심하고 있어!’
어디서 실수가 있었지? 내가 뭘 놓친 거야?
설마 오혜주가 그사이 입이라도 놀린 거 아니야? 하지만 걔도 확실히 아는 건 없을 텐데…….
“나 배고파. 계란후라이라도 하나 먹어야겠어.”
다희는 대충 얼버무리며 방을 빠져나왔다.
등 뒤로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으나 절대 돌아보지 않았다.
‘안 되겠어. 가짜 임신이란 걸 들키기 전에 하루 빨리 유산해야겠어.’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른 다희가 빠르게 생각을 정리했다.
결혼식 전에 유산하면 모든 게 무산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지금껏 꿋꿋이 버텨왔는데 더 이상은 무리였다.
‘그럴싸하게 유산하려면 사고가 필요한데…… 기왕이면 혜주에게 덮어씌울 방법 없을까?’
새카만 눈동자가 음험하게 반짝였다.
같은 시각, 승원이 한 산부인과 병원의 전화번호가 적힌 종이를 매섭게 노려보고 있다는 건 까맣게 모른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