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 땅콩이는 X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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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 땅콩이는 X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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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 땅콩이는 X랄
2023.07.13.
이튿날 다희는 혜주를 불러냈다.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하루라도 빨리 처리하는 게 낫겠어.’
그녀는 오늘을 디데이로 잡았다.
배 속의 아이를 유산하는 날. 그리고 그 모든 걸 혜주에게 덮어씌우는 날.
‘준비할 시간이 부족하긴 했지만, 뭐 괜찮아. 오혜주 은근히 단순한 성격이라 살살 긁으면 바로 화부터 낼 거야.’
그녀의 계획은 이랬다.
혜주를 식사 자리에 불러내 쭈야국밥 리뷰 테러를 한 것에 대해 전혀 죄책감이 없다며 뻔뻔하게 나가는 거다.
혹시 오혜주 그 앙큼한 계집애가 녹음기 같은 걸 가지고 나올 수도 있지만 리뷰 테러의 범인이 자신인 건 이미 밝혀진 사실이니 딱히 거리낄 것도 없고.
아빠를 끔찍이 생각하는 혜주라면 불같이 화를 내겠지. 그럼 지지 않고 맞서 싸우는 거다. 몸싸움이 일어나면 제일 좋겠지만 그게 아니라도 상관없었다.
‘한 대 맞은 척하고 넘어지면 되잖아? 사람 많은 식당이니 누구라도 달려오겠지.’
혜주를 불러낼 핑계는 충분했다. 변호사가 합의를 종용하니 만나서 얘기를 해보자고 슬슬 구슬리면 될 것 같았다.
만반의 준비를 마친 다희는 그날 오후에 혜주를 불러냈다.
[오늘 좀 보자.]
혜주는 떡밥을 순순히 물었다.
[그래. 지난번에 강승원이랑 쳐들어왔던 한정식집에서 4시에 만나.]
[장소를 왜 네가 정하는데?]
[조용한 장소 필요한 거 아니었어?]
생각해보니 그 말이 맞기는 했다.
어차피 딱히 떠오르는 곳도 없던 터라 다희는 별 의심 없이 수긍했다.
[알았어. 4시. 늦지마.]
이윽고 약속 시간이 되었다.
다희와 혜주는 선우연 여사와 함께 있었던 한정식집 룸에 마주 앉았다.
잘 있었니? 같이 식사하는 거 오랜만이네. 그런 말은 피차 뱉지도 않았다.
협상이라도 하듯 치열하게 서로를 탐색한 두 사람은 한참을 아무 말 없이 노려보기만 했다.
긴 침묵을 깬 건 다희였다.
“어제 사거리엔 왜 있었던 거야?”
떠보듯 묻는 말에 혜주가 천천히 물을 마시며 대꾸했다.
“지나는 길이었어.”
그녀가 물잔을 탁 내려놓았다.
“넌 약속 있었다며. 만나기로 한 사람은 잘 만났니?”
“응. 만났지.”
“그랬구나. 난 또.”
“난 또 뭐?”
“아니. 바람맞았을까 봐.”
혜주가 픽 웃으며 하는 말에 다희의 심장이 불안하게 뛰었다.
쟤 왜 저렇게 의미심장하게 말하지?
마치 어제 내가 바람맞은 걸 아는 사람 같잖아!
“바람은 무슨, 별걱정을 다 하네.”
다희는 일부러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
혜주는 여유로운 태도로 응수했다.
“합의서 써달라고 징징대러 왔니?”
“그럴 리가! 내 변호사 말로는 합의 안 해도 실형까지는 안 산다더라. 그깟 리뷰 몇 개 남긴 걸로는 벌금형이 고작이래. 네 변호사는 그런 것도 안 알려주디?”
“글쎄. 네가 남긴 리뷰가 단순한 악플은 아니었잖아? 가게 하나를 말아먹을 정도로 심각했지. 그거 업무방해죄에도 해당하는 거 알아?”
“그래 봐야 벌금형이라니까. 난 하나도 겁 안 나.”
다희는 초장부터 세게 나가기로 마음먹었다. 혜주를 자극하려면 최대한 뻔뻔한 태도를 고수해야 했으니까.
“솔직히 말해서 혜주야.”
다희가 두 손으로 턱받침을 하며 방긋 웃었다.
“난 네 합의서 같은 거 필요 없거든. 그거 쓰려면 반성한다 어쩐다 꾸며대야 하는데 사실 그다지 미안하지가 않아서.”
“와…… 너 어쩌다 그 지경까지 갔냐. 뭐? 미안하지가 않아?”
“바른말로 말해 솔직히 네 아빠 국밥 별로 맛도 없더라. 실력 없어서 손님 떨어진 걸 내 탓으로 돌리는 거 아니니?”
보인다, 보여. 부글부글 끓는 오혜주 표정!
“그리고 내가 악플 몇 개 남긴 건 네가 한 짓에 비하면 별것도 아니잖아?”
“내가 무슨 짓을 했는데!”
“회사에서 날 개망신 줘서 쫓아냈잖아! 강주원이랑 짝짜꿍해서 소송까지 준비 중인 거 다 알아! 네가 먼저 엿 먹였으니 나도 그런 건데 뭐 잘못됐어?”
“엿 같은 소리 하네.”
“꺅!”
혜주가 다희 앞의 물잔을 들어 확 얼굴에 끼얹었다. 다희는 두 팔로 얼굴을 가리며 속으로 웃었다.
‘역시 오혜주, 열 받으니 눈에 뵈는 게 없지?’
이제 거의 다 왔다. 조금만 더 살살 긁으면 뺨이라도 한 대 치겠어.
“이,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우리 땅콩이 놀라잖아!”
다희는 최대한 놀란 척하며 배를 감쌌다.
혜주의 입가에 비릿한 웃음이 걸린 건 그때였다.
“땅콩이는 X랄.”
살벌하게 웃어 보인 그녀가 검지로 아랫배를 척 가리켰다.
“그 배 속에 든 게 똥밖에 더 있냐?”
“!”
의심도 아니고 떠보는 것도 아닌 확신의 한마디.
“너 임신 안 했잖아.”
“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하는 거야? 나 임신했어! 배 나온 거 보면 몰라?”
다희는 소스라치게 놀라 입가를 파르르 떨었다.
혜주는 말하기도 귀찮다는 듯 턱짓으로 배를 가리켰다.
“애쓴다. 너 지금 복대 다 보이거든? 어떻게든 배 나와 보이려고 발악하는 게 애잔하네.”
다희의 시선이 절로 아랫배로 향했다.
‘제기랄.’
물에 직격당한 옷이 축 들러붙어 있었다. 하필이면 하얀 원피스를 입은 터라 복대를 찬 흔적이 적나라했다.
‘하지만 복대만으로 임신 여부를 알 수는 없는 거잖아! 보아하니 오혜주 저 계집애 증거 없어서 어떻게든 날 떠보려는 모양인데 어딘가 녹음기 같은 걸 숨겨놨을 수도 있어. 이럴 때일수록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해!’
다희는 아랫입술을 꾹 깨물어 피를 냈다.
“말도 안 되는 모함하지 마! 병원에서도 인정한 임신을 네깟 게 뭔데 아니라고 해?”
“조작했겠지.”
“병원 기록을 어떻게 조작해! 너 진짜 망상이 너무 심한 거 아니야?”
“임신테스트기도 조작한 애가 뭔들 못할까!”
타악!
벼락같이 고함을 지른 혜주가 테이블을 내리쳤다.
다희는 심장이 벌렁벌렁하다 못해 밑바닥으로 추락하는 것만 같았다.
“똑바로 봐. 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내가 뭘……!”
허둥지둥 변명하려던 다희의 눈에 혜주의 손바닥 아래 깔린 사진 몇 장이 들어왔다.
그건 어제 사거리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자신의 모습이었다.
“이딴 게 다 뭐라고-”
사진을 집어 던지려던 다희의 손이 그대로 굳었다.
“이건…… 네가 이걸 어떻게……!”
사진 바로 아래 깔려 있는 건 초음파 사진을 구하기 위해 몰래 걸었던 채팅 내역과 두 줄짜리 임신테스트기를 구한 기록이 고스란히 프린트된 종이 몇 장이었다.
“왜. 그렇게 어마어마한 거짓말을 할 땐 당당하더니 탄로 나니 쫄려?”
“이, 이건 내가 한 거 아니야. 그, 그래! 그 아이디 내 거 아니잖아. 박소흰가 걔 아이디야! 걔가 한 짓이라고!”
“약속 장소에 나타난 건 너였어.”
“그건 우연히-”
“깔끔하게 가자, 다희야.”
혜주는 흔들림 없는 눈으로 다희를 노려보았다.
“정말 당당하다면 배 한번 보여주라.”
“!”
다희는 본능적으로 배를 감싸며 주춤거렸다.
스르륵, 자리에서 일어서는 혜주의 모습이 꼭 저승사자 같았다.
“정말 임신한 게 맞다면 내가 무릎 꿇을게. 악플 고소도 취하하고 회사에서 준비 중인 소송도 그만두라고 할게. 어때? 이 정도면 거래 조건으로 충분하지 않나?”
“싫……어.”
“가짜라는 걸 이런 식으로 인정하니?”
“가짜여서 그런 거 아니야! 네깟 게 뭔데 남의 배를 보겠다고 설쳐? 네가 하라면 하고 까라면 까야 되는 사람이야, 내가?”
“그래, 알았어.”
혜주가 테이블 위에 흩어진 사진과 종이를 싹 쓸어 모았다.
“네가 그렇게 당당하면 이거 어머님한테 보여드려도 상관없겠네.”
“야! 돌았어? 그거 내놔!”
눈에 뵈는 게 없어진 다희가 득달같이 손을 뻗었다.
이 방 어딘가에 녹음기를 숨겨놨을 수도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는 생각 따윈 어느새 까맣게 지워졌다.
다희는 방을 나서려는 혜주의 팔을 붙들고 힘껏 깨물었다.
“악!”
혜주가 비명을 지르며 손에 든 것을 놓치자 다희가 필사적으로 그것을 붙들었다.
바닥에 엎드린 채 주섬주섬 종이를 줍는 그녀의 귓가로 드르륵, 하는 소리가 들렸다.
“대체 이게 웬 소란이야?”
헉!
머리 위에서 들려온 중후한 목소리에 다희의 어깨가 그대로 굳었다.
문 앞에 서 있는 건 굳은 표정의 필연과 선우연이었다. 두 사람의 얼굴을 보는 순간 다희는 머리가 새하얘졌다.
“아, 아, 아, 아버님?!”
“뭘 하고 있는 게냐. 우리가 들은 말이 다 진실이야?”
저 사람들이 왜 여기에 있지? 대체 어디까지 들은 거야?
뒤죽박죽이 된 머리로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단 하나. 지금 이 상황을 유리하게 만들려면 모든 걸 혜주에게 덮어씌워야 한다는 것만 떠올랐다.
“아악! 배가!”
다희는 마치 혜주에게 맞기라도 한 것처럼 모로 쓰러졌다.
다행히 사진을 줍느라 수그리고 있어 쓰러지긴 어렵지 않았다.
“어머님! 혜주가 저를 밀쳤어요. 아, 우리 땅콩이가…… 땅콩이가……! 흐윽!”
아랫배를 감싸 쥐고 뒹굴뒹굴 구르는 다희의 연기력은 백 점 만점이었다.
그녀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본 선우연과 필연의 표정이 점차 일그러졌다. 다희는 그게 다 자신을 걱정해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다.
“아버님…… 승원이 좀 불러주세요…… 저 진짜 죽을 것 같아요…… 흐윽…….”
식은땀을 흘리며 혼신의 연기를 펼친 다희가 필연의 바지를 붙들었다. 필연은 필사적으로 매달리는 다희를 차마 내치지 못하고 주춤거렸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필연을 보며 혜주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강승원 우유부단함이 어디서 왔나 했더니…….’
오늘 일어날 상황에 대해 미리 언질을 주고 문밖에서 모든 걸 듣게까지 했는데, 왜 아무것도 못 하는지. 판을 깔아줘도 못 주워 먹으니 내가 나설 수밖…….
“예비 새아가.”
‘!’
한 발을 내디딘 순간 터져 나온 선우연의 한마디에 혜주는 그대로 얼음이 되었다.
찬바람이 쌩쌩 부는 듯 새하얀 피부와 칼날처럼 날카로운 입술.
제게 한 말이 아닌데도 어깨가 움찔거릴 정도로 싸늘한 목소리였다.
그저 한마디 뱉었을 뿐인데 주변의 소음이 완벽하게 가라앉았다. 서슬 퍼런 기세에 다희는 물론 혜주도 그 자리에 못 박혔다.
“아파 죽겠다면서 왜 둘째를 부르니?”
고저가 없는 선우연의 음성에 다희는 차라리 귀를 틀어막고 싶어졌다. 말은 새아가라고 하는데 음성은 완벽한 타인을 대하듯 무감정했다. 아니, 사람이 아닌 것에 말을 건네는 것만 같았다.
“병원 데려다주마. 같이 가보자꾸나.”
“어, 어머님!”
“일어나렴.”
선우연에게 손목을 잡힌 순간 다희는 모든 게 끝났음을 알았다.
억세지도 않은 손아귀를 뿌리칠 수가 없었다.
“모든 게 오해세요. 저는…… 저는…… 으흑!”
망연자실한 채로 주저앉은 다희의 눈꼬리를 타고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해명하고 싶은데 어떤 말도 해명이 될 수 없었다.
도망치고 싶은데 숨을 곳도 없었다.
"힘 빼지 말자, 서로."
단호한 선우연이 손목을 잡아 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