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 쪽팔려서 그랬다,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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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 쪽팔려서 그랬다, 왜
2023.07.16.
“일어나, 천다희.”
문밖에 서서 비스듬히 내려다보고 있던 주원이 움직인 순간 게임은 끝났다고 봐도 무방했다.
“안 가! 절대로 못 가!”
다희는 병원에 끌려가지 않으려고 한사코 발버둥 쳤지만 벗어날 수가 없었다.
주원은 이번에야말로 확인 사살을 하겠다는 듯 기어이 다희를 병원으로 끌고 갔다. 다희는 몇 번이고 도망치려 했으나 4대 1이다 보니 빠져나갈 구멍이 없었다.
‘독한 인간들!’
운전석에 주원이, 보조석에 필연이, 뒷좌석 양옆으로 선우연과 혜주가 앉았다. 뒷좌석 중간에 꽉 끼인 다희는 마치 경찰에 호송되는 죄인처럼 압박감을 느꼈다.
기적이란 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다희는 믿지도 않는 하나님을 찾으며 눈물을 줄줄 흘렸다. 그러나 씨도 뿌리지 않았는데 꽃이 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월경 중인데 어떻게 임신을 합니까?”
산부인과에서 진료를 마친 의사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다른 가능성이라곤 조금도 없는 단호함에, 충분히 예상했던 혜주와 주원도 안색이 하얘졌다.
필연 부부는 두말할 나위도 없었다. 주원에게 언질을 듣고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를 하긴 했으나 정말로 모든 게 거짓이었다니.
선우연은 너무 어이가 없어 실소했다.
“하…… 나 참.”
짧은 한마디에 모든 감정이 담겨 있었다.
실망과 분노, 회한과 후회.
너 따위에게 화내는 것조차 아깝다는 듯 외면해버린 선우연을 보며 다희는 차라리 뺨을 맞는 게 더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저는…… 저는…… 죄송합니다, 으흑!”
뒷걸음질 치던 다희가 등을 홱 돌리고 달아났다.
사위가 침중했다.
드러난 진실 앞에서 누구도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
“으흑…… 흐흑…….”
얼마나 울었는지 모르겠다.
정처 없이 걷다가 보니 어느새 집 앞이었다.
‘지금쯤이면 승원이도 다 알았겠지?’
뿌예진 눈으로 빌딩을 올려다본 다희는 차마 집으로 들어갈 용기가 나지 않아 한 시간을 서성였다.
짐을 챙겨와야 하는데.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승원에게 쫓겨나는 건 시간문제였다.
아이가 생겼다고 했을 때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괴로워했던 승원이니 오히려 이 상황에 대해 홀가분해 할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너무 비참해…….’
그냥 모든 걸 놓고 사라지고 싶었다.
휴대폰에 신용카드가 꽂혀 있으니 그걸로 며칠이라도 벌어볼까. 잠깐 고민하던 다희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노트북이며 지갑이며 몇 안 되는 가방이며 놓고 온 게 너무 많았다. 언제라도 한 번은 해결을 봐야 했다.
“후우.”
현관 앞에서 크게 심호흡을 한 다희가 조심스레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갔다. 다행히 도어록 비밀번호는 바뀌어 있지 않았다.
어두컴컴한 거실. 외부와 차단된 듯 적막한 실내.
다행히 승원이 없는 것 같았다.
다희는 조용히 신발을 벗고 들어섰다.
머리 위 자동 센서가 탁 켜지자마자 아일랜드 식탁에 앉아 있는 커다란 인영이 보였다. 승원이었다.
“!”
다희는 화들짝 놀라 우두커니 멈춰 섰다.
승원은 인기척을 듣고도 돌아보지 않았다. 긴 의자에 다리를 뻗고 앉아 있는 그의 뒷모습이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묵직했다.
“나 왔어…….”
혹시나 해서 말을 걸었으나 대답이 없었다.
‘이미 들은 모양이네. 어떡해…… 정말 이제 어쩌지?’
다희는 두려운 마음에 자리를 서성이다가 얼른 방으로 들어갔다.
이 집에 들어올 때 가지고 온 캐리어에 꼭 필요한 물건들을 꽉꽉 채워 담는 동안 거실에선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게 더 다희를 미치게 했다.
‘왜 아무 말도 안 하는 거야! 차라리 화를 내지!’
소름 끼치도록 차가운 이 적막이 견딜 수 없이 두려웠다.
드르륵, 드르륵.
제 몸만 한 캐리어를 끌고 거실로 나온 다희는 그대로 현관으로 향했다.
신발장에 캐리어를 세워놓고 구두를 신는 내내 승원은 이쪽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현관을 나서려던 다희가 그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작별 인사도 안 해?”
정말 인사를 하려고 한 건 아니었다.
그저 그의 반응이 궁금했다.
모든 걸 알게 된 지금 너는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많이 괴로워하고 있을까? 화가 날까? 그것도 아니면…….
“끝까지 잘 좀 숨겨보지 그랬어.”
“?”
“계속 속아줄 의향 있었는데.”
다희의 심장이 끼이익 멈추었다.
‘지금 강승원이 뭐라는 거야? 계속 속아줄 의향이 있었다고?’
혼란스러웠다. 아니, 소름이 끼쳤다.
“……너 알고 있었니?”
다희는 꽉 막힌 목구멍으로 겨우 말을 뱉었다.
“알면서도 모른 척한 거야? 왜? 어째서?”
손이 덜덜 떨려왔다.
말하는 투를 보아하니 오늘 일을 전해 들은 것 같지는 않았다.
이미 오래전부터 모든 걸 알고 있었다는 묘한 뉘앙스에 다희는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언제부터 알고 있었어?”
“그게 중요한가.”
“중요해! 언제부터야? 대체 언제부터 알고 있었냐고!”
임신이 거짓이란 걸 승원이 알고 있을 거라곤 추호도 의심하지 못했던 다희는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
돌아앉은 승원의 등을 수없이 때리고 쥐어뜯으며 다희가 울부짖었다.
“너한테 이미 들켰다는 걸 알았다면 오늘 자리엔 나가지도 않았을 거야! 너도 혜주한테 연락받았지? 오늘 걔가 나 엿 먹일 거 알고 있었지? 알고도 아무 말 안 한 거지!”
“…….”
“대체 어떻게 그래. 아무리 내가 싫어도 이렇게까지 할 건 아니잖아! 왜 말 안 했어? 대체 왜!”
다희가 승원의 어깨를 흔들며 고함을 질렀다.
아무 반응이 없는 그를 꼬집고 때리며 오열하던 다희가 무너지듯 주저앉자 승원이 천천히 돌아보았다.
그는 울고 있었다.
“쪽팔려서 그랬다, 왜.”
“야, 강승원!”
몇 시간 새 시커멓게 죽은 눈자위로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너무 등신 같잖아. 너 같은 애한테 속아서 이 난리를 쳤다는 게.”
그의 목소리가 몹시도 떨렸다.
가슴에 꽉 찬 응어리가 요동쳤다.
“혜주인 줄 알고 너랑 잤던 날 애가 생겼다고 했지. 혜주가 아니라서…….”
숨을 쉬기 곤란한 듯 크게 등을 들썩인 그가 말을 이었다.
“혜주가 아니라서 다행이다…… 그렇게 생각하기까지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어.”
“어떻게…….”
“실수가 아닌 선택이라고, 나 자신을 속여가면서 지키고 싶었어. 임신이 아닐지도 모르겠다고, 그 생각 안 해본 거 아니야. 하지만 믿고 싶었어.”
다희의 임신이 가짜라는 걸 알게 된 건 불과 이틀 전이었다.
습관처럼 초음파 사진을 들여 보던 그의 눈에 사진 귀퉁이에 프린트된 병원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너무 작은 글씨라 이전엔 미처 인지하지 못했는데 이제 보니 ‘BONG DAM WOMEN’S CLINIC’이란 글자가 쓰여 있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글자를 바라본 승원은 이내 그것이 다희가 평소 다닌다던 산부인과와 이름이 다르다는 걸 눈치챘다.
‘뭐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병원에 전화를 해보았다.
다른 걸 물어봐야 환자 개인 정보 보호라며 알려주지 않을 게 뻔해서 그저 산모 정기검진 예약을 하러 전화를 걸었다고 말했다.
다희의 이름을 댔더니 그쪽에서 청천벽력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저희 병원에 천다희 산모님 기록은 없는데요?
머리에 번쩍 천둥이 쳤다.
부랴부랴 봉담 산부인과를 검색해보니 서울에서 두 시간이나 떨어진 곳에 위치한 곳이었다.
‘다희가 다니는 산부인과는 강남구에 있는데…… 굳이 서울에서 먼 곳까지 갈 이유가 있나? 그쪽 병원에서도 다희 기록은 없다고 했고. 그럼 이 초음파 사진은 뭐지?’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생각해봐도 이상했다.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그날, 다희에게 배를 한번 만져보고 싶다고 했다. 불에 덴 듯 놀라며 자리를 피하는 다희를 보고 의심은 확신으로 바뀌었다.
‘모든 게 다희의 거짓말이란 건가? 임신했다는 것도 다 뻥이었어?’
그는 정말이지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마음 같아선 당장 모든 사실을 밝히고 결혼을 깨고 싶은데 바락바락 우겨가며, 형과 의절하면서까지 지켜내려 했던 제 선택이 너무 하찮게 느껴졌다.
무기력했다. 저를 덮친 산사태 같은 문제들에 함몰되어 숨이 막혔다.
‘미안해, 형. 이렇게 등신 같은 동생이라서.’
무엇보다 주원에게 미안했다.
부모에게 대못을 박은 것은 어떻게든 빼겠는데 형을 저버린 것은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귀녀가 한 짓을 모두 알고서도 결혼을 하고야 말겠다 우겼던 자신을 보며 주원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서운했을까? 아니, 서운하단 표현은 부족하지.
아마도…… 아마도 가슴이 찢어졌을 거다.
어릴 때부터 그렇게 싸매고 다니던 동생이 저를 버리겠다는데 어떻게 괜찮을 수 있겠어.
면목이 없었다. 너무나 잘못된 선택이라 책임을 질 수조차 없었다.
“어쩌려고 했어?”
“죽고 싶었는데.”
땅속으로 꺼지고 싶다, 그 생각이 들었을 무렵 주원에게서 메시지가 하나 도착했다.
[안 늦었어. 그러니 정신 똑바로 차리고 기다려.]
그가 어떤 의미로 그런 메시지를 보낸 건지 모르겠다.
다만 그 메시지를 본 순간 승원은 그런 기대를 했다.
형이 뭐라도 해주지 않을까.
어쩌면 형은 다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결국 그 순간조차 형에게 기대하고 있더라. 머저리가 따로 없지.”
메마른 입가에 자조적인 미소가 스쳤다.
“너는…… 어떻게 그렇게 담담해? 있는 줄 알았던 애가 없다는데 아무렇지도 않아?”
“잘 됐지, 뭐.”
“……뭐라고?”
“다행이잖아. 안 그래, 다희야?”
“어떻게 그런 말을……!”
“임신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 후로 꽤 고민했어. 되돌리자니 내 선택이 미련했다고 인정하는 꼴이 되는 것 같아서, 너무 창피해서 이대로 발목 잡혀 줄까 싶기도 했어. 그런데 다희야.”
승원의 표정이 우는 듯 웃는 듯 일그러졌다.
“내가 웃고 있더라.”
“!”
“임신이 아니었다고, 형한테 그 말 듣는데 웃음이 나왔어. 흐윽, 내가 웃었어, 다희야…….”
늘 호수처럼 잔잔하던 승원이 격랑처럼 들썩였다.
아이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을 듣는데 홀가분함을 느낀 자신이, 아니 좀 더 정확히는 후련해하는 자신이 괴물처럼 느껴졌다.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아기지만, 그래도.
초음파를 보며 아주 가끔은 얼굴을 그려보기도 했던 존재가 세상에 없다는데 왜 이렇게 웃음이 나는 건지 웃음이 짙어질수록 슬픔이 몰아쳤다.
저를 떠받치는 기둥 한 개가 쑤욱 뽑혀 나간 듯 공허했다.
“승원아, 나 한 번만 용서해줘. 우리 결혼식 고작 열흘밖에 안 남았어. 청첩장도 다 돌렸고 드레스도 맞췄고 혼수이불도 다 샀는데……!”
“이제 다 끝났어.”
“미안해. 미안해, 승원아.”
울면서 웃는 승원을 보며 다희가 손을 모아 싹싹 빌었다.
“내가 앞으로 잘할게. 거짓말 한 거, 가족들 속인 거 평생 반성하며 살게! 나 사랑해주지 않아도 좋아. 제발……!”
“사랑?”
승원은 텅 비어버린 눈으로 다희를 보았다.
“애초에 불가능했잖아, 그건.”
“승원아……!”
“그만 나가줘.”
승원이 현관문을 열었다.
신발장에 놓인 다희의 캐리어를 문밖으로 몰아낸 그가 냉담하게 뇌까렸다.
“다신 보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