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9. 죽여 버릴 거야. 오혜주 (119/121)


#119. 죽여 버릴 거야. 오혜주
2023.07.20.



 
한바탕 폭풍이 몰아친 후 상황은 빠르게 정리되었다.

다행히 작은 결혼식이라 수습은 어렵지 않았다.

미리 청첩장을 돌린 사람들에게 결혼식이 취소되었다는 사과 문자를 보내고 계약금을 물어내고 식장을 취소했다.

그 밖의 자잘한 것들은 필연의 비서가 알아서 처리했다.


“어이구, 낯 뜨거워서 원.”

필연은 고개를 들고 다닐 수가 없다며 창피해했고 선우연은 긴 침묵에 빠져들었다. 날카로운 그녀의 분위기에 집안 사람 모두가 눈치를 보았다.

주원은 살벌한 집안 분위기에 기가 질려 아예 발길도 하지 않았다.

여러모로 심란한 일요일 오후.

혜주의 팔에 물린 잇자국에 연고를 발라주며 주원이 혀를 쯧 찼다.


“하는 짓도 개 같네. 감히 누굴 물어. 빡치게.”

그는 아직도 분을 참지 못해 씩씩거렸다.

병원에서 임신이 아닌 걸 확인하자마자 목덜미를 끌고 철창에 가뒀어야 한다고 몇 번이고 후회했다.

물론 경찰에 끌고 가도 철창에 갇히진 않았겠지만 혜주도 어느 정도 동의하는 바였다.


“다희가 그 정도일 줄은 몰랐어요.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거짓말을 하는데 무슨 트루먼쇼에 들어가 있는 것 같더라고요.”

“천다희 거짓말에 모두가 속아 넘어갔어. 강승원 그 등신이야 그렇다 쳐도 부모님까지 속인 건 용서가 안 돼.”

“그건 나도 그래요.”

지금쯤 다희는 뭘 하고 있을까.

떠올리기만 해도 골치가 지끈거려 혜주가 입술을 옹송그렸다.


“참, 승원이한텐 얘기해줬어요?”

“응. 안 놀라더라.”

“진짜요?”

“알고 있었던 것 같아.”

“오늘 안 온 것도 그래서…….”

“응, 아마도.”

스멀스멀 걱정이 올라왔다.


“승원이 지금 제정신 아니겠네요. 뭐라도 해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놔둬. 지가 싼 똥은 지가 치워야지.”

“와, 냉정해.”

“그 자식 이참에 버릇 좀 고쳐야 해. 고집 피워서 안 되는 일도 있다는 걸 알아야지.”

늘 그랬듯 주원은 단호했다.

일견 냉정해 보이기도 하지만 그의 판단은 늘 옳은 편이었다. 따라서 혜주는 토를 다는 대신 고개만 주억거렸다.


“그래도 다행이에요. 이쯤에서 멈춰서.”

“네 덕분이야.”

주원이 처치가 끝난 팔을 꾹 누르며 혜주를 바라보았다.


“네가 알아차리지 못했다면 꼼짝없이 결혼식 올렸을 거 아니야. 천다희 유산했다고 부모님이 몸에 좋은 보양식이며 뭐며 사다 날랐을 생각하니 피가 거꾸로 솟네.”

“그러셨을 거 같아요?”

“안 그래 보여도 되게 잔정 있는 스타일이라니까.”

“누구랑 똑같네.”

혜주가 실없이 웃자 주원이 손가락으로 제 가슴팍을 가리켰다.


“설마 그게 나는 아니겠지.”

“아니, 오빠 맞는데.”

“진심 닭살 쫙 돋았어. 사람 잘못 보셨습니다, 오혜주 씨.”

“아뇨. 똑바로 봤어요.”

혜주가 까칠한 주원의 턱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그러곤 눈꼬리를 싱긋 접었다.


“잔정 없는 사람이 오갈 데 없는 한량을 집에 거둬 주진 않죠.”

“그건 네 동생이라서.”

“멀쩡히 잘 돌아가는 컴퓨터를 버린 척 내어주지도 않고요.”

“컴퓨터가 많으니까.”

“편의점 사장님한테 알바 추천을 해주지도 않았을 거고요.”

“어떻게 알았어?”

주원의 눈꺼풀이 조금 커졌다.


“춘택이한테 들었어요.”

혜주는 사랑스러운 눈길로 웃으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얼마 전 혜주는 춘택이에게 믿기 힘든 얘기를 들었다.

그가 일하고 있는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주원이 구해줬다는 것이었다.

강주원 인맥이 좋아도 무슨 편의점까지 미치냐며 말도 안 된다고 고개를 젓는 혜주에게 춘택이 그랬다.


-진짜야. 원래 내가 구한 데는 집에서 40분쯤 떨어진 곳이었는데 형이 바로 집 앞으로 구해줬다니까. 편의점 사장님이 그러는데 형님이 직접 부탁했대.

-오빠가 편의점 사장님을 어떻게 알고?

-담배 피울 때 쥐방구리처럼 드나들었던 모양이던데? 나도 일주일 지나서야 들었어. 누나도 모른 척해. 형이 비밀로 하라고 했다니까.

 
혜주는 눈물이 핑 돌았다.

알고 있었던 사실이지만 새삼 따뜻한 남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장 달려가 끌어안고 싶은데 하필이면 결혼 문제로 다툰 다음 날이었다. 절절 끓는 가슴을 냉수 몇 잔으로 달래느라 하얗게 밤을 지새웠었지.


“항상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요. 강주원의 존재 자체가 나한텐 행운이야.”

그때 아껴둔 키스를 주원의 입술에 꾸욱 남기며 혜주가 뺨을 비볐다.


“일백 번 고쳐 태어나도 다시는 오빠 같은 남자 못 만날 거 같아.”

그럼 데리고 살래?

주원은 하마터면 그 말을 뱉을 뻔했다.

평생 오혜주 부적 해주고 싶다. 네게 행운으로 남고 싶다. 네가 고마워할 짓만 골라서 하고 싶다.

목구멍으로 치달은 말을 꾹 씹어 삼키느라 목이 따끔거릴 정도였다.

얼마 전까지 결혼 문제로 크게 스트레스를 받은 혜주를 재촉하긴 싫었다. 그녀에겐 시간이 필요했고, 이젠 그녀가 원하면 얼마든지 줄 수 있게 되었다. 조금 더 기다리는 건 일도 아니었다.


“알면 잘해.”

주원은 시크하게 혜주의 정수리를 흐트러뜨리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배고픈데 뭐 좀 먹을래?”

“나는 알아서 먹을 테니 오빠는 부모님께 가 봐요.”

“알아서 잘 계실 거야.”

“그래도.”

아침부터 몇 번이고 했던 말을 혜주는 다시 한번 반복했다.


“이번엔 내 말 들어요. 본가 가서 하루 자고 내일 회사에서 봐요.”

“굳이?”

“응, 굳이.”

집안 분위기가 어떨지 안 봐도 훤했다.

선우연의 가슴이 얼마나 쓰릴지, 뼈를 갈아 키워낸 아들의 절망에 얼마나 속이 상할지.


“부모님 위로해 드려야죠. 낯뜨겁게 애교 피우란 말 아니고요. 가만히 소파에 앉아 있어도 되니 허전하지만 않게 해드려요.”

얼굴도 예쁜 게 마음 씀씀이도 기특하지 뭐야.

주원은 두 팔을 벌려 혜주를 꽉 끌어안았다.


“사랑해.”

담백한 진심에 혜주가 온 힘을 다해 주원의 등을 껴안았다.


“나도 사랑해요. 이따만큼 많이.”

두 사람은 한참이나 그렇게 붙어 있었다.

한쪽은 발길이 떨어지지 않아서, 한쪽은 그저 이 순간이 너무나 애틋해서.

*

이른 아침, 대로변에 흰색 경차가 한 대 서 있었다.

출근 시간 전이라 아직 도로는 한적했고 한겨울이라 사위는 어둑어둑했다.

차 안엔 다희가 타 있었다.


‘오혜주 너 때문에…… 네가 기어이 나를 망쳤어!’

밤새 한숨도 못 잔 그녀의 눈에 핏발이 가득 섰다.


‘이제 다 왔는데. 너만 아니었으면 나도 행복해질 수 있었는데!’

보조석엔 다 비운 소주병이 두어 개 굴러다녔고 눈빛은 몽롱하게 풀려 있었다.

지금 자신이 제정신이 아니라는 건 누구보다 잘 알았으나 그렇기에 지금 제가 해야 할 일을 또렷이 인식했다.


“죽여 버릴 거야. 오혜주.”

거품 낀 잇새에서 그르렁거리는 분노가 새어 나왔다.

승원의 부모님 앞에서 개처럼 끌려나가 산부인과에서 검사를 받았다. 그 치욕스럽고 고통스러운 순간에 다희는 오로지 혜주만 떠올렸다.


‘혜주가 없었다면 거짓 임신을 들키지 않았을 테지. 내가 인터넷을 통해 초음파 사진을 구한 것도, 가짜 테스트기로 승원을 속인 것도, 걔만 입 다물었으면 그냥 넘어갈 수 있었어!’

다른 건 다 참겠는데 승원의 부모님 앞에서 개망신을 준 건 도저히 참아지지 않았다. 그건 확인 사살과도 같았다. 더 어찌해볼 마음조차 들지 않게 완벽히, 완전하게 그녀를 몰락시켰다.

모든 분노는 돋보기에 작열한 태양처럼 한 점으로 모였다.

오혜주.

엄지로 쓱 닦아버리고 싶은 제 인생의 오점이었다.

어젯밤 귀녀를 찾아갔었다.

주원에게 썼던 것과 같은 저주를 혜주에게 걸어달라고 했다. 귀녀는 새파랗게 가라앉은 눈으로 고개를 저었다.


-불가능해. 그런 일을 했다간 살을 피해갈 수 없어!

-상관없다고! 죽어도 돼. 그X만 나락 보낼 수 있으면 죽어도 된다니까?

-안 돼. 돌아가.

 
악을 지르고 울어도 보고 애원도 해봤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귀녀가 혜주를 걱정해서 그런 건 아니었다.

산 사람에게 위해를 가할 땐 언제나 반작용이 따르기 마련이었다.

주원의 경우 팬티라는 매개체가 있기라도 했지. 사람을 목표로 바로 부적을 쓰면 그 반작용은 억겁보다 길고 나락보다 깊을 터였다.

다희는 귀녀의 만류를 인정할 수 없었다.


-그러고도 네가 엄마야?

 
고집스럽게 눈을 감아 버린 귀녀를 향해 악다구니를 퍼부었다.


-무당 주제에! 그냥 죽어버려! 부적도 못 쓰는 무당이 대체 왜 사는데!

 
그러곤 그 길로 차에 올랐다.

서울로 올라오는 동안 꼬박 밤을 새웠다.

안전 벨트도 하지 않았다.

반쯤 미쳐버린 그녀에게 이제 제 목숨 따윈 중요치 않았다.

한겨울이라 아직 어둑한 대로변.

잠들어 있던 빌딩이 서서히 눈을 뜨고 옆을 지나치는 차량이 제법 많아졌다.

다희는 마지막 남은 소주병을 따서 벌컥벌컥 들이켜며 전방을 주시했다.

8시.

저 멀리 호호 손을 불며 횡단 보도를 건너는 혜주의 모습이 보였다.


‘나를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고 넌 멀쩡하게 출근한다 이거지?’

발끝부터 차오른 분노가 안개처럼 뇌리에 가득 찼다.


“죽어!!!!!!”

다희는 고함을 지르며 액셀레이터를 밟았다.

부아아앙!

엔진 소음과 함께 차량이 튀어 나갔다.

서행하고 있던 주변의 차들이 깜짝 놀라 주춤거린 사이 신호를 무시한 차량이 횡단보도로 돌진했다.

가까워진다. 가까워진다. 이제 다 왔어!

다희는 눈을 질끈 감았다.

콰앙!

뭔가에 둔탁하게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차량이 회전했다.

본능적으로 왼쪽으로 핸들을 꺾는 바람에 차량이 인도로 처박히며 에어백이 터졌다.

숨도 못 쉬게 가슴이 아팠다.


‘그런데 왜 이렇게…… 가깝게 느껴지지?’

얼핏 혜주와의 거리를 쟀을 때 30초쯤은 걸릴 거라 생각했다. 한데 이건 빨라도 너무 빨랐다.

다희는 가까스로 고개를 들었다.

피눈물이 흐른 눈동자에 룸미러가 비쳤다.

느리게, 아주 느리게 펄럭이는 오색 치맛자락이 보였다.


‘이럴 수가…… 아니, 이러면 안 되는데?’

허공을 수놓은 화려한 한복 치마는 다희가 그토록 창피해하던 그것이었다.

행여 학교 앞으로 찾아오기라도 하는 날엔 담벼락에 숨어 사라질 때까지 기다리던.

엄마가 여기 있을 리가 없는데…… 엄마가 대체 왜?

허공에 잠시 붕 떠 있다가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져 내린 인영에 다희의 목젖에서 피가 터졌다.


“엄마!!!!!”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