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 그 여자 죽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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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 그 여자 죽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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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 그 여자 죽었대
2023.07.23.
몇 시간 전 새벽녘.
귀녀는 목욕재계를 한 후 신당에 홀로 앉았다.
경건한 표정으로 향을 사른 후 무릎을 꿇고 책상 앞에 자리한 그녀의 앞에는 황색 괴황지 한 장이 놓여 있었다.
경면주사로 부적을 쓰던 평소와 달리 오늘은 직접 새끼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냈다.
신령한 공력이 깃들게 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뚝뚝 흐르는 핏물로 적어 내린 부적은 다름 아닌 업보소멸부(業報消滅符).
자식이 저지른 모든 죄를 자신이 짊어지겠다는 비장한 뜻을 하늘에 전하는 것이었다.
물 흐르듯 부적을 적은 귀녀는 그것을 깨끗이 불태워 정화수에 섞었다. 그러곤 망설임 없이 모두 들이켰다.
씁쓸하고 알싸한 맛이 났다. 축축이 젖은 입가를 닦은 귀녀는 슬픈 눈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갈 시간이로군.”
그녀는 마지막으로 보았던 다희의 눈을 떠올렸다.
죽음을 각오한 눈이었다. 분노와 적개심으로 가득한 그 눈빛엔 어떤 말로도 돌릴 수 없는 결단이 서려 있었다.
이대로 돌아가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뻔했다.
무고한 사람을 해하면 죽어서도 편히 쉴 수 없다는 것을 잘 아는 귀녀는 딸이 살생을 저지르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다.
막아야 했다.
붕!
허공으로 몸이 떠오른 순간 귀녀의 머릿속엔 지나온 삶이 벼락처럼 스쳤다.
철없던 어린 시절. 가정을 꾸렸고 소중한 아기를 가졌다.
웃을 일 많으라고 다희라는 이름을 지어주고선 힘든 줄도 모르고 키워냈지.
어느 날 날벼락같이 찾아든 신병으로 너를 보내고, 하루의 절반은 울음으로 나머지 절반은 비명으로 버텼다.
살면서 후회되는 일이 어디 한두 개일까마는 지금 이 순간 떠오르는 건 오직 어린 딸을 품에서 떠나보냈던 그날 뿐이었다.
‘아가. 괜찮으니 울지 말렴.’
어차피…… 어차피 이렇게 될 운명이었다.
도 씨의 부탁으로 해서는 안 될 짓을 해버린 후 언젠가는 살을 맞을 수 있다고 생각해왔으니 두렵지도 아쉽지도 않았다.
주름진 눈꼬리를 타고 굵은 눈물 방울이 툭 떨어졌다.
쿵!
이윽고 그녀의 몸이 차디찬 아스팔트 위로 떨어져 내렸다.
가물가물해지는 시야에 비명을 지르는 다희의 모습이 들어왔다.
“엄마!!!”
귀녀는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온몸으로 짓쳐 들던 고통마저 사라지니 귀가 멍해졌다.
마지막으로 네 웃는 얼굴을 보고 싶었는데.
날 때도 그랬듯 갈 때도 우는 모습밖에 보지 못하는구나.
오로지 그것만이 아쉬웠다.
*
사고가 나던 순간, 주원은 길 건너편에서 혜주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먼저 도착한 혜주에게 손을 흔들어주곤 신호가 바뀌자마자 걸음을 옮겼다.
그때 빠른 속도로 차가 돌진했다.
“!”
신호를 무시하고 달려오는 흰색 경차를 봤을 때 제일 먼저 든 생각은 ‘술 처먹었나?’였고, 그 안에 탄 사람이 다희라는 걸 알아챘을 때는 욕설이 튀어나왔다.
그 목표가 혜주란 걸 알아챈 순간 사고의 회로가 정지했다.
몸이 먼저 반응했다.
“피해!”
무지막지한 속도로 달려온 주원이 혜주를 껴안고 나뒹굴었다.
차가 그대로 돌진했다면 그 자리에서 죽었을지도 모르는 아찔한 순간이었다.
다행히 십여 미터 앞에서 멈추는 바람에 차에 치이진 않았지만 혜주를 껴안고 뒹굴면서 살갗이 아스팔트에 갈렸다.
“오혜주, 괜찮아?”
혜주의 안위를 확인하느라 통증은 느낄 새도 없었다.
“내가 문제가 아니잖아요! 오빠, 피가…….”
놀란 눈으로 혜주가 가리킨 팔꿈치에서 피가 뚝뚝 흐르고 있었다. 여기저기 찢기고 쓸린 슈트 아래 살갗이 화끈했다.
하지만 그런 상처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웅성대는 주변의 소음도, 난리통이 된 사고 현장도 그에겐 먼 나라 얘기였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주원은 오로지 그 말만을 반복하며 혜주를 꽉 끌어안았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기도는 한참 후에야 터져 나왔다.
*
예기치 못한 사고로 오후 스케줄을 모두 취소한 주원은 곧장 병원에 입원했다.
사고가 났을 땐 몰랐는데 막상 벗어보니 온몸이 상처투성이였다.
백 미터를 12초대에 주파하는 달리기 실력이 이럴 땐 참 과하단 말이지.
달려온 속도에 혜주의 무게까지 더해져 주원이 받은 충격은 상당했다.
몸의 오른쪽 측면이 아스팔트에 싹 갈렸고 손목엔 살짝 금이 갔다. 얼마 전 승원과 몸싸움을 하며 다쳤던 손목이라 부상이 더 큰 듯싶었다.
혜주는 부랴부랴 연차를 쓴 후 주원의 곁을 지켰다.
다행히 넘어질 때의 충격을 주원이 거의 흡수한 덕에 그녀의 부상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귀녀의 사고에 충격을 받은 듯 오전 내내 넋이 나가 있었다.
‘당연히 그렇겠지. 한때 누구보다 친했던 사람이 자길 죽이려 한 것도 믿기 힘든 일인데, 그걸 막으려다 그 엄마가 사고를 당했으니.’
그 마음을 이해하면서도 걱정이 돼서 주원은 한시도 그녀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사람의 질투심이란 게 이렇게 무서울 줄은.
부러워하다 탐을 내고, 가질 수 없음에 분노하고, 결국엔 스스로를 파괴하고 마는 괴물 같은 감정에 참 많은 사람이 다쳤다.
다희가 그런 사람이란 걸 알았을 때 뭔가 조치를 더 취했어야 했다. 혜주를 그렇게 위험에 빠트려서는 안 되는 건데.
주원은 그게 후회스러워 미칠 것 같았다.
“혜주야.”
밖에서 잠깐 통화를 하고 돌아왔을 때 혜주는 여전히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깊은 상념에 잠겨 있던 혜주가 고개를 들었다.
“네?”
주원은 이 말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잠시 고민했다.
“그 여자 죽었대.”
아는 경찰에게 부탁해 사고 후의 일에 대해 소상히 들었다.
귀녀는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도착했을 당시 심폐소생술이 의미가 없을 정도였다고.
사고 가해자인 다희는 경찰에서 짧게 조사를 받은 후 귀가 조치 되었는데 사고 당시 음주 상태였고 고의로 차량을 돌진한 정황이 의심되어 살해의 고의가 있었는지 여부에 대해 더 조사가 필요한 상황이라고 했다.
다만 피해자가 혈연관계인 까닭에 우선 장례를 치른 후 소환 조사를 한다고.
“그랬군요.”
혜주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가슴에 먹구름이 꽉 들어찬 듯 답답했다.
주원에게 위해를 가했던 여자가 죽었고 다희가 살해 용의자가 되었다.
‘날 죽이려고 차를 돌진한 애가 나락으로 떨어졌는데 왜…… 어째서 홀가분하지가 않지?’
기분이 우울하다 못해 더러웠다.
글쎄.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끓어오른 분노가 오갈 데 없어진 기분이었다.
아끼던 금붕어를 죽이고, 아빠 가게에 위해를 끼치고, 거짓 임신으로 온 가족을 속인 대가를 다희가 합당하게 치렀으면 했다.
천벌이 아니라 정당한 벌로.
지금 두 손에 받아든 게 부고 소식이 아니라 판결문이었다면 혜주는 진심으로 웃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식은 아니었다.
“누군가의 죽음 앞에서 마냥 기뻐할 수가 없네요. 뭔가 마음이 무거워요.”
“그건 나도 그래.”
주원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잠 못 자고 괴로울 땐 누군지 진짜 가만 안 두겠다고 했는데 막상 이렇게 되고 보니 찜찜하네.”
“승원이는 어떻게 하고 있어요?”
“방금 소식 들었을 거야.”
“빈소에 갈까요?”
“가서 좋은 꼴 못 볼 거 같아서 일단은 말렸어.”
주원은 무겁게 가라앉은 혜주를 꽉 안아주었다.
“너무 신경 쓰지 마. 다 자업자득이지.”
“다희는…… 정말 날 죽이려고 했던 걸까요?”
“그 생각 하니까 없던 동정심도 싹 사라지네. 브레이크도 밟지 않았어. 죽이려는 마음이 없었다면 절대 그렇게 못 하지.”
그 순간 귀녀가 막아서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생각만 해도 끔찍한 결론에 주원은 어금니를 깨물었다.
다희의 의도는 사악하다 못해 악랄해서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다.
비록 귀녀의 죽음으로 혜주는 무사했지만, 그렇다고 다희의 죄가 상쇄되는 것은 아니었다.
“천다희가 노린 사람은 따로 있다고 경찰에 얘기해뒀어. 사고를 조사할 때 그 부분에 더 신경 써달라 부탁해뒀으니 곧 소식이 올 거야.”
“애초에 다희가 노린 게 나였다는 증거가 있을까요?”
“시의적절한 순간 최귀녀가 나타난 건 그전에 오간 얘기가 있다는 뜻이겠지. 최귀녀는 아마 천다희의 폭주를 막으려고 했을 거야. 최귀녀가 사망한 상태라 증언을 들을 수는 없겠지만 조사해보면 뭔가는 나오겠지.”
“무서워요.”
“뭐가.”
“그냥 사람이 누군가를 이렇게까지 증오할 수 있다는 게. 죽이고 싶을 만큼 내가 미웠나? 다희는 지금도 날 저주하고 있겠죠?”
“망할 X.”
쿨럭, 쿨럭!
거침없는 욕설에 혜주는 사레가 들렸다.
“망할 X이요?”
역시 화끈하네, 우리 오빠.
“실컷 저주하라 그래. 남은 생은 감옥에서 썩으라고 맞저주를 퍼부어줄 테니까.”
“방금 불쌍하다고 한 사람 어디 있죠?”
“불쌍하다고 안 했어. 찜찜하다고 했지.”
그래도 사람이 죽었으니까.
낮게 덧붙인 주원이 혜주의 가방을 힐끗 보았다.
“그러고 보니 내가 가져오라고 한 건 가져왔어?”
“아, 네.”
한결 기분이 나아진 혜주가 가방에서 노트북 두 개를 꺼냈다.
하나는 주원의 것이었고 하나는 혜주의 것이었다.
병원에 입원하게 된 주원의 부탁으로 오후에 회사에 들러 가져온 것이었다.
“일할 게 많아서 쉴 수 없다는 건 알겠는데요. 내 노트북은 왜 가져 오라고 한 거예요?”
“선물 주려고.”
“노트북에 내 선물이 있다고요?”
주원은 대답 대신 노트북 화면을 열어 보여주었다.
“짠.”
화면을 본 혜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화면에 뜬 건 재택근무 신청에 관한 관리자 승인 화면이었다.
“작성해.”
“예에?”
이거 지금 무슨 상황이지. 그러니까 재택근무 신청해서 입원해 있는 동안 병수발이나 들라는 그런 의미입니까?
“이게 선물이에요?”
혜주가 떨떠름하게 물었다.
“왜, 너무 과해?”
주원은 뻔뻔하게 턱을 치켜들며 네 마음 다 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렇기도 하겠지. 며칠씩이나 강주원을 독점할 기회를 준다는데.”
“그게 아니고요, 대표님.”
“아니긴 뭘 아니야. 얼른 써. 바로 승인해 줄 테니까.”
자뻑 심한 건 익히 알지만 병수발까지 영광으로 알라니 좀 심한 거 아닌가요.
혜주는 속으로 구시렁대며 픽 웃고 말았다.
“예예, 영광입니다, 대표님. 극진히 모시겠습니다.”
혜주가 제출한 재택근무 신청서에 1초도 안 되어 승인이 떨어졌다.
할 일을 끝내고 노트북을 탁 덮은 주원이 혜주의 얼굴을 감쌌다.
아직 그늘진 눈자위를 손가락으로 쓸어본 그가 다정스레 어깨를 안아 토닥였다.
“삼박 사일 동안 잘 회복해보자. 내가 모실게, 공주님.”
“아…….”
그제야 그의 깊은 뜻을 알게 된 혜주는 가슴이 차올랐다.
귀녀의 죽음으로 오갈 데 없는 분노를 끌어안을 수밖에 없는 혜주를 그가 위로하고 있는 것이다.
‘우울해하지 마. 어디에도 네 잘못은 없어.’
다정스레 쓰다듬는 손길에 눈물이 차올랐다.
“오빠…… 흑…….”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쏟아져나왔다.
혜주는 그렇게 꽉 차오른 감정을 비워냈다.
미움도, 분노도, 후회도, 일말의 동정까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