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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외전 13화 (244/279)

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외전 13화

황태자 궁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새벽을 넘어 동이 트고 있었다.

‘망할 거울 속에서 오래도 있었구나…….’

복도 창문 밖으로 비치는 희미한 여명을 바라보며 멍하니 생각할 때쯤이었다.

문득 정신을 차리니, 황태자가 이미 내 방문을 지나친 채 자신의 침실이 있는 곳까지 끌고 가는 중이었다.

동틀 녘의 황태자 궁은 텅 빈 것처럼 고요했다.

그러나 칼리스토는 꼭 누가 쫓아오는 것처럼 나를 제 침실에 마구 욱여넣은 후 문까지 철저히 걸어 잠갔다.

“전하.”

“손 내밀어.”

내게로 곧장 걸어 온 그가 대뜸 말했다. 그런 그의 낯빛이 여전히 썩 좋지 못했다.

굳이 묻지 않아도, 밤새도록 나를 찾아다닌 게 분명했다.

밝은 데서 보니 잔뜩 흐트러진 채 흙먼지가 묻어 있는 머리칼과 피곤이 거멓게 내려앉은 눈가가 선명했다.

그것만 봐도 칼리스토가 얼마나 절박하게 나를 찾아다녔는지 알 수 있었다.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래서 반항 없이 순순히 끌려 온 거긴 하지만…….’

물론 조금의 망설임 없이 포박하란 그의 말에 충격받아 반항할 새도 없었다.

“뭐 해, 손 안 내밀고. 계속 그렇게 개처럼 묶여 있을 건가?”

미동 없이 가만히 서 있기만 하자, 그가 삐딱하게 재촉했다.

‘말하는 본새 하곤…….’

나는 속으로 투덜거리며 쓱 손을 내밀었다.

어쨌든 풀어는 준다니 빨리 씻고 잠이나 자고 싶었다.

칼리스토는 곧장 시동어를 외워 손목을 묶은 마도구를 풀었다.

피곤해서 그런지 이게 무슨 짓이냐며 화를 낼 마음도 별로 들지 않았다.

둘둘 묶여 있는 밧줄을 직접 풀어 주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중얼거렸다.

“피곤해서 그런데, 전 그만 제 방으로 가고 싶은데요.”

“아무 말 하지 마.”

내 말에 멈칫 움직임을 멈춘 그가 이내 밧줄 풀기를 재개하며 덤덤히 읊조렸다.

“그대는 지금 죄인 신분이니까.”

“제가 왜요?”

“제가 왜요……?”

내 말이 심기를 건드렸는지 칼리스토의 눈썹이 사납게 꿈틀거렸다.

마침내 밧줄을 모두 풀어 낸 그가 이내 짓씹듯 내 죄를 내뱉었다.

“그대는 곧 황후 위에 오를 사람이다. 본인의 처지도 망각하고 멋대로 행동한 것, 그래서 오밤중에 애꿎은 황실 일원들에게 피해를 입힌 죄가 엄중하지. 얌전히 죗값을 치르도록 해.”

“전 전하랑 결혼 안 한다고 했어요. 그러니 죄를 지은 것도 아니죠.”

“헛소리 그만해.”

“너나 그만해. 아까부터 계속 헛소리하는 게 누군데?”

“……뭐?”

피곤해서 좋게 넘어가려 했더니, 꼭 좋게 넘어갈 수 없게 만든다.

평온한 목소리로 불쑥 받아치자 황태자가 입을 떡 벌렸다.

“……허! 이제 아주 막 나가기로 했나?”

“전하가 먼저 막 나갔잖아요?”

“내가 뭘?”

“레이디의 팔을 우악스럽게 묶고, 사람들이 보든 말든 개 끌 듯이 끌고 왔지 않습니까.”

“내가 언제……!”

심드렁하게 대꾸하자 칼리스토가 퍽 억울한 얼굴로 소리치다가 대뜸 입을 다물었다.

그러더니.

“……아픈가? 어디 다쳤어? 봐 봐.”

금방 낯을 달리하고 내 손목을 살피는 손길이 조심스러웠다.

“살살 묶는 시늉만 하랬더니, 이 개 같은 놈들이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안 다쳤어요.”

당장이라도 칼 빼 들고 뛰쳐나갈 것처럼 흉흉하게 중얼거리는 그를 보다 못해 뚱하게 대꾸했다.

‘참나, 이럴 거면서 묶긴 왜 묶어?’

안 다쳤다는 말에도 칼리스토는 묶였던 자리를 계속해서 살살 매만졌다.

“그만 놔요. 괜찮으니까.”

“좀 붉어진 것 같은데. 당장 의원을 부르지.”

“전하가 자꾸 문지르니까 그런 거잖아요.”

그렇게 얘기해도 요지부동이었다.

제가 생각해도 심했다 싶었는지 칼리스토는 내 손목을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나는 내 눈 밑에 흐드러진 먼지 묻은 황금색 머리칼을 바라보다, 이내 한숨 쉬며 말했다.

“……별일 아니었어요. 산책하다가 우연히 거기까지 가게 됐고, 거울에서 빛이 나서 살펴보다가 그렇게 된 것뿐이에요.”

“…….”

“오늘이든 나중이든, 어차피 한 번쯤은 겪었을 일이었다고요.”

“적어도 시종에게 산책을 간다고 언질은 하고 나갔어야지.”

잠잠히 내 말을 듣던 그가 숙였던 고개를 슬쩍 들며 고요하게 읊조렸다.

“너와 관련된 일이면 황태자 직분이고 뭐고 눈 까뒤집고 미친놈처럼 구는 내게…….”

“…….”

“말은 하고 갔어야지, 페넬로페 에카르트.”

나를 바라보는 새빨간 눈동자가 갈피를 잃고 흔들렸다.

그제야 아직 나를 붙들고 있는 그의 손이 간헐적으로 떨리고 있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보내 줄 때 가라고도 했으면서.

막상 내가 남자 그는 매번 불안으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물러터진 나는 그래서 이번에도 순순히 사과할 수밖에 없었다.

“그 점은……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퍽이나 죄송해 보이는군.”

진심인데 별로 진정성 있게 들리지 않았는지 그가 코웃음 쳤다.

그리고 음산하게 덧붙였다.

“내일 그 물건 부숴 버릴 거야.”

“뭘…….”

뭘 말하는지 몰라 갸웃거리던 나는, 이내 설마 하는 심정으로 되물었다.

“혹시, 진실의 거울 말하는 거예요?”

“그래.”

“그걸 왜…… 힘들게 복원시켜 놓은 걸 왜 부십니까?”

복원하느라 마리엔느랑 그간 얼마나 개고생을 했는데!

나는 오만상을 찌푸린 채 단호하게 말했다.

“연구 자료로라도 쓸 수 있게 그냥 내버려 두세요.”

“그대가 그것 때문에 두 번이나 사라졌었는데 어떻게 내버려 둬. 싹을 잘라 내서 미연에 방지해야지.”

“전하.”

원래부터 그럴 작정이었다는 듯 지체 없이 돌아오는 대꾸에 나는 조금 당황스러워졌다.

“……저 아무 데도 안 간다고 벌써 수십 번은 더 말했어요.”

“난 눈뜬 병신이 아니야, 공녀.”

칼리스토가 부드럽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뇌까렸다.

“그 거울이 그대가 돌아가려던 곳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어.”

“…….”

“그게 멀쩡히 존재하면 그대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언젠간 돌아갈 수도 있겠지.”

그가 그런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나는 내심 놀랐다.

‘……이놈이 이렇게 집착 캐였나?’

그러나 한편으론 칼리스토에게 그만큼 믿음을 주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레일라와 관련하여 일정 부분 비밀들을 그와 공유했지만, 내 현생과 게임 시스템에 관해서 모두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

털어놓는다고 그가 이해할 수 있는 범위도 아니었거니와, 이미 다 끝난 일을 다시 들출 필요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나는 다급히 입을 열어, ‘진실의 거울’을 철천지원수 취급하는 칼리스토를 만류했다.

“이제 그럴 일 없어요. 다 끝났다고요. 전 이제 돌아가고 싶어도 못 돌아간다니까요?”

“그럼 그게 부서져도 상관없는 거 아닌가? 그리고, 오늘도 그게 발동될 줄 알고 간 건 아니라며?”

“그건…….”

그건 그렇지.

요상한 논리에 휩쓸려 나도 모르게 수긍하던 순간이었다.

“어차피 이제 후작인지 악령 씐 미친놈인지 살아 있는 것도 확인했으니, 더 할 일도 없겠군.”

“…….”

“대관식 날까지 여기 박혀서 결혼 준비나 해. 선생을 붙여 줄 테니 황실 예법도 대강 배워 두고.”

놈이 잠시 미뤄 뒀던 감금과 결혼 얘기를 다시 꺼냈다. 결국 원점이었다.

나는 곧바로 차갑게 응수했다.

“싫어요.”

“싫어도 어쩔 수 없어. 황태자의 명을 누가 거부할 수 있겠어.”

“가두기만 해요. 마법 써서 도망갈 거니까.”

“쓰든지. 그런데 애석하게도, 황궁엔 정체불명의 마력을 무력화하는 마법이 걸려 있는데 어쩌지?”

놈이 히죽 나를 비웃으며 얄밉게 어깨를 으쓱였다.

나는 그런 놈에게 비웃음을 되돌려 주며 말했다.

“그런 걸 죄다 까발리시면 어떡합니까? 어떻게서든 그것부터 파훼하고 도망치겠죠. 명색이 공작가의 고명딸인데, 그 정도도 못 하겠어요?”

“……젠장.”

제가 멍청한 짓을 했다는 걸 깨달았는지 황태자가 제 분에 못 이겨 ‘쿵!’ 하고 발을 한 번 굴렀다.

그러더니 휙 나를 노려보며 소리쳤다.

“대체 뭐가 문제야. 프러포즈인지 뭔지, 그것 때문에 그래?”

물론 그것도 어느 정도 비중을 차지했다.

그런데 그렇다고 답하자니 좀 구차하게 느껴졌다.

궁극적으론 그 이유도 아닐뿐더러, 괜히 말 꺼냈다가 해 주겠답시고 달려들면 더 곤란하지 않은가.

“…….”

말없이 그저 팔짱을 낀 채 마주 노려보고만 있자, 황태자가 슬며시 시선을 회피했다.

그러더니 별안간 침잠된 표정으로 제 품을 뒤적이는 게 아닌가.

“……반지가 아직 세공이 덜 됐어.”

무언가가 불쑥 내 앞에 내밀어졌다.

굳은살 박인 커다란 손바닥 위에 큼지막한 청록색 구슬이 달린 반지 하나가 케이스조차 없이 달랑 들려 있었다.

칼리스토가 다른 손으로 반지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 옆을 모조리 다이아로 덮을 거야.”

그가 가리키는 것은 반지의 링 부분이었다.

황금색의 잎사귀 모양으로 주변을 감싸 마치 꽃봉오리처럼 화려하게 세공된 청록색 구슬과는 달리, 링 부분은 아무런 장식 없이 허전하기만 했다.

‘설마 이걸 프러포즈라고 하는 건가?’

어쩌라는 건지 몰라서 멀뚱히 반지를 바라보고만 있자, 칼리스토가 답답한지 다시금 입을 열었다.

“이건 가스파르 서해에서 전설로 전해지는 인어의 눈물이다. 그대의 눈동자 색과 꼭 닮았지 않나?”

“…….”

“소유한 자에게 영원한 부와 명예를 가져다준다더군.”

“그래요?”

‘오, 그건 좀 혹하는데.’

부와 명예 소리에 티 나게 눈빛이 달라졌는지, 황태자의 안색이 좀 밝아졌다.

“가스파르 왕궁 보물 창고에 숨겨져 있던 건데, 왕족만이 걸려 있는 저주를 풀 수 있어서 공수가 좀 늦었어.”

정복 전쟁 중에 싸그리 몰살해서 피가 섞인 놈을 찾느라 좀 애먹었거든.

그가 어쩐지 조금 신이 난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러나 나는 그의 변명보다 다른 말에 신경이 쏠렸다.

“저주요? 무슨…….”

“이것을 소유한 자의 반려는 영원히 상대에게 속박된다더군.”

그딴 걸 주려 했냐고 타박하기 전, 그가 먼저 선수 쳐 답했다.

“죽음에서조차 벗어날 수 없어. 그래서 가스파르 왕을 베었을 때 왕비도 같이 절명했었지.”

묵묵히 말하는 그의 눈에 묘한 희열이 피어올랐다.

나는 그런 그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내려 다시 반지를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이게 청혼 반지고 공수도, 세공도 늦어서 프러포즈를 못 했다?’

그의 주절거림을 대충 정리하자니, 이 말이었다.

배경을 알고 난 후에 다시 반지를 보니 기분이 이상했다.

‘죽을 때도 한날한시에 같이 죽자는 거야, 뭐야.’

새삼 또 한 번 느껴지는 칼리스토의 집착에 나는 조금 오싹해졌다.

그런 나를 아는지 모르는지, 칼리스토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제국 대대로 내려오는 반지가 있는데 그건 주기 싫었다.”

“…….”

“황비가 끼던 거라 재수 없기도 하고, 황금룡이 크게 음각되어 있어서 촌스러워. 그딴 건 그대와 어울리지도 않으…… 제기랄.”

혼자 잘도 주절거리던 그가 뜬금없이 욕설을 뇌까렸다.

나는 깜짝 놀라 반지에서 시선을 떼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때 정원에서, 그렇게 얘기하려던 게 아니었어. 그 빌어먹을 소문 때문에 네가 신경 쓰는 것 같으니까…….”

착잡한 얼굴로 제 앞머리를 거칠게 쓸어 올리던 황태자가, 불현듯 털썩-.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한쪽 무릎도 아닌, 양쪽 무릎.

그는 말 그대로 죄지은 사람처럼 꿇어앉은 채.

“페넬로페 에카르트.”

“…….”

“제발 나랑 결혼해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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