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데미의 검술 강사가 되었다 (23)
기준은 내가 정한다
갑자기 주인공의 이름을 듣게 돼서 잠깐 당황했지만 내색하지 않고 그런 애가 있냐며 그래서 어떻게 했냐고 물었다.
"뭘 어떡하긴 어떡해요. 그놈 아빠가 화신전자 사장이고 할아버지가 화신그룹 회장인데. 뒤에서 다 손을 썼는지 피해 학생도 고소 안 하고 그냥 넘어가서 저만 바보 됐다니까요."
"학교에서 처벌 같은 것도 안 하고?"
"우리 학교 후원하는 회사 중에 가장 규모가 큰 곳이 화신그룹이잖아요. 다들 넘어가자고 하는데 저 혼자 뭘 어쩌겠어요. 조금 알아보니까 그 자식 자질 테스트 결과도 별로 안 좋아서 7학교 입학도 간당간당한 수준이었는데 집안 백으로 들어온 거예요. 그러면서 수업 태도는 얼마나 불량한지. 진짜 성격 같아선 콱 어떻게 해 버리고 싶다니까요."
당연히 알고 있던 사실이다.
2년 후 빙의 전까지 소설 제목처럼 주인공은 하루가 멀다 하고 사건·사고를 일으키는 망나니 열등생이니까.
원작에서도 최서라가 주인공을 상당히 싫어하던데 이래서였구나.
"너무 열 내지 마."
"선배는 화 안 나요?"
"그렇다고 당장 어쩔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아직 어리니까 시간이 지나면 좀 나아지겠지."
어차피 2년이 지나고 빙의 후엔 주인공이 바뀐다.
알맹이는 이기적이고 독선적인 놈이지만 그동안 자신이 쌓아 올린 악명을 바로잡으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결국 성공한다.
사실 몇 년간 망나니로 살다가 뒤늦게 착하게 행동한다고 해서 주변 평이 쉽게 바뀔 리는 없겠지만 이곳은 소설 세계니까.
망나니인 인물에 빙의해서 조금만 착하게 행동해도 주변에서 ‘오오’ 이러면서 좋게 봐주고 치켜세워 주는 건 빙의물에서 흔히 쓰이는 클리셰다.
"흥, 그런 쓰레기들이 나이 먹는다고 바뀌겠어요? 절대 안 바뀔걸요."
"미래는 모르는 거니까 잘 좀 대해 줘 봐. 혹시 알아? 지금 당장은 답이 없어 보여도 더 관심을 가지고 잘 보살펴 주면 달라질 수도 있지."
빙의한 주인공도 소설을 읽었기에 최서라가 안타스의 일원이라는 걸 알고 있다.
그래서인지 빙의하고 주변을 대하는 태도를 싹 바꾸지만 최서라에게는 예전처럼 버릇없이 군다.
어차피 2학년 때 테러를 일으키는 걸 주인공이 막고 쫓아내니까.
주인공도 빙의한 본체의 기억을 전승하니까 지금 잘 챙겨 주면 나중에 분명 도움이 될 거다.
"걔는 완전히 악질이라니까요? 자기 일 아니라고 너무 속 편하게 말하는데, 2년 후 그 자식이 고등부 가서 선배네 반이 되기라도 하면 제 심정을 아시겠죠."
여우처럼 눈을 흘기며 악담을 퍼붓는데 안타깝지만 소설 내용대로라면 나는 주인공의 담임을 단 한 번도 맡지 않는다.
그래도 아직 어린 학생이라고 말하며 조금 더 거들어 줄까 했지만, 괜히 반감만 더 살 것 같으니 화제를 바꿔야겠다.
"방학 땐 뭐 해? 특별한 계획 없으면…."
"잠깐만요, 지금 데이트 신청하는 거예요? 안타스가 걱정된다고 문자 한 통 안 하던 사람이?"
"데이트 신청 아니니까 김칫국 마시지 말고. 특별히 계획 없으면 부업이나 같이 할까 했지."
보통 일반 공무원은 겸직이나 다른 소득 활동이 허용되지 않지만 헌터 학교 선생들은 예외다.
매년 1,400명이라는 헌터가 새롭게 배출되고 있지만 포탈이 생겨나는 속도 또한 꾸준히 상승하고 있다.
포탈이 줄어들수록 시민이 안전해지니 정부에서도 오히려 방학 때 사냥 참여를 독려하기 위해 세금도 무려 일반 헌터보다 10% 공제를 더 해 준다.
보통은 원래 있던 길드에 들어가거나 다른 길드들과 단기 계약을 하지만 나는 임시 공격대를 꾸릴 생각이다.
"난 또 뭐라고. 그런데 저랑 같이 하면 기록 다 남잖아요. 안타스에서 알면 이상하게 생각할걸요."
확실히 그 부분은 나도 생각은 했는데 최서라말곤 딱히 같이 할 동료가 없다.
혼자 하는 게 제일 편하겠지만 그렇게 하기엔 문제가 좀 있다.
포탈 등급의 종류는 드물게 나타나는 S 랭크를 포함해 A, B, C, D, E, F 이렇게 7가지 등급으로 나뉘고, 입장 인원 제한이 있다.
임시 공격대가 갈 수 있는 포탈은 길드에 배분되고 남은 포탈들로 주로 수익성이 떨어지는 소규모 포탈이다.
단 1인 포탈은 워낙 사망자가 많아 특별법이 만들어져 무조건 길드에 배당되고 숙련된 헌터들이 도맡아 처리한다.
따라서 실제로 갈 수 있는 건 2인부터 4인까진데 포탈 규모에 따른 입장 제한 말고도 법적인 제한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E 등급 2인 포탈을 가려면 E 랭크 이상의 헌터가 최소 1명, 3인 포탈은 최소 2명 이렇게 포함되어야 한다는 식이다.
헌터들이 등급에 맞지 않는 포탈에 무리하게 들어가 목숨을 잃는 일을 방지하기 위해 만들어진 법인데, 다행히 이 조건만 충족시키면 인원은 굳이 다 채울 필요가 없다.
나 혼자 솔로로 활동하면 C 등급 2인 포탈 혹은 D 등급 3인, E 등급 4인 이렇게 네 곳밖에 못 가지만 최서라의 헌터 랭크가 C고 내가 B니 함께하면 B 등급 2인 포탈까지 갈 수 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포탈 등급에 따라 나오는 몬스터 수준에 차이가 있고 수익 차이도 크다.
포탈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면 양으로 밀어붙이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으니까.
"어차피 방학 땐 봉사 활동 하느라 시간 없어요."
"응? 봉사 활동?"
"방학 때마다 가는 보육원이 있거든요."
지난번에 사정을 듣기도 했고 같이 돌아다니면서 인식이 좀 바뀌긴 했지만, 국제 범죄단체 조직원이 방학 때마다 보육원 봉사 활동이라니.
의외다.
"선배도 방학 내내 포탈만 다닐 거 아니면 올래요? 애들 다 귀엽고 너무 착해요."
"글쎄, 포탈 말고 따로 계획도 있고 연수도 있어서 난 좀 힘들 것 같네."
"아, 연수… 신입이니까 가시겠네요. 그거 괜찮으시겠어요? 가면 헌터들밖에 없는데."
"잘하면 안 갈 수도 있는데, 아직 확실한 건 아니라서."
연수는 교감과 내기에서 이기면 면제니까.
하지만 면제여도 봉사 활동은 별로 가고 싶지 않다.
"어떻게요? 신입 연수는 무조건 참석일 텐데."
"우수 교사가 되면 면제라던데? 교감 선생이 제안을 해서 받았지."
"무슨 제안이요?"
대련과 관련해서 간단하게 설명을 했다.
"가능하겠어요? 고등부 교감이면 김만동이잖아요. 유효한 공격 한 대만 들어가면 이기는 거라고 해도 힘들 것 같은데."
"우리 후배님은 나 너무 무시하는 거 아니야?"
살짝 기분이 상해 하마터면 나 절정 고수라고 말을 할 뻔했다.
"지난번에 창술 선생인가? 명예 결투 한 건 저도 들었어요. 투타 글도 봤고. 하지만 이번 상대는 김만동 이잖아요."
"그래도 한 대 정도라면 할 만한 것 같은데? 나 중국 가서 열심히 했어."
"망신만 당할 것 같은데…."
"어허, 아직 싸우지도 않았는데 벌써 초치기 있냐?"
"확실히 선배는 좀 변한 것 같아요. 예전이라면 그런 제안 같은 거 안 받았을 텐데. 학교 유튜브 촬영도 그렇고."
"좋은 의미지?"
"네. 응원할게요. 이겨서 연수 면제받으면 같이 봉사 활동 해요."
"그건 좀…."
애초에 서라가 가는 보육원에서도 직접 와서 도와주는 것보다 서라가 돈 벌어다 주는 걸 더 좋아할 것 같은데.
말을 할까 하다 괜히 한 소리 들을 것 같아 그냥 참았다.
* * *
"좀 진지하게 들어 주라니까요? 아니, 접시는 왜 핥아요? 나중에 또 사 드릴게요."
사부에게 교감에게 대련 제안을 받았다고 설명을 하는데 이놈의 사부는 팔보채에 정신이 완전히 팔렸다.
"너는 밥을 귀로 먹냐? 먹으면서 다 들었다."
"그럼 좀 들은 척이라도 하던가요. 말도 없이 먹기만 하니까 안 들은 줄 알았죠."
"너희 나라 속담에 먹을 땐 개도 안 건드린다는 속담이 있던데, 모르냐?"
한국말을 배우더니 아주 입이 트였다.
"지난번에 사부가 조금만 노력하면 검강도 쓸 수 있다고 했죠? 대련 전까지 가능합니까?"
검강을 만들 수 있다면 공격 한 번 정도는 충분히 성공할 것 같다.
"대련이 한 달 뒤라 그랬지?"
"정확히는 28일 남았습니다."
"글쎄, 그거야 네가 하는 거에 따라 달렸지. 그런데 고작 한 방이 뭐냐? 세계 유일한 무인이라는 녀석이."
"사부도 있으니 엄밀히 따지면 유일은 아니… 악!"
또 꿀밤이다.
"그만 좀 때려요. 사부는 S 랭크 헌터가 얼마나 강한지도 모르잖아요,"
"그래서 그놈이 나보다 강하냐?"
"그건 아닐 겁니다. 그래도 무공 경지로 비유하면 최소 초절정 이상은 될 겁니다."
아무리 김만동이 한국에 딱 10명 밖에 없는 S 랭크 헌터라고 해도 사부와 붙는다면 아예 상대가 안 될 것 같다.
다른 기연도 있지만, 주인공의 강함의 근본은 무공이다.
심지어 단순히 벽에 있는 내공심법만 익혀도 후반에는 S 랭크 보다 훨씬 강해지는데, 사부는 그 무공을 남긴 사람이니까.
"고작 초절정 나부랭이가 겨우 한 방만 맞으면 자기가 졌다고 인정하겠다고? 아주 자만이 넘치는 놈이구나."
"저는 절정이라면서요? 그리고 초절정 이상이라니까요?"
김만동은 S 랭크 헌터가 된 지 오래됐고 세간에서도 S 랭크 중에서도 상위권으로 평가받고 있으니까.
"초절정이 대수냐? 내가 강호를 활보할 때 초절정 정도 되는 자들은 널리고 널렸다."
"암요, 암요. 그러시겠죠."
무슨 말만 하면 흔하고 널리고 발에 채는데 이러다가 나중엔 초절정 위의 경지도 흔하다고 할 것 같다.
"이 자식이! 중소 문파의 문주 중에 쓸 만한 놈이나 대문파 장로들은 대부분 초절정이었다."
중소 문파 문주에 대문파 장로 정도면 이미 흔한 수준이 아니지 않나?
"언제는 자기 분수를 알라면서요?".
"이놈이 끝까지 말대답을 하네. 어휴, 제자야, 넌 글렀다."
"글렀는지 안 글렀는진 한 달 후에 대련하면 알겠죠. 제가 설마 한 번을 못 때리고 지겠습니까? 얼른 수련이나 시작합시다."
"수련은 해서 뭐 하게? 싸우기 전부터 이미 졌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말을 하고 혀를 끌끌 차는데 어이가 없다.
내가?
전혀 아니다.
이기긴 힘들어도 한 방 정도는 충분히… 아, 혹시 그런 건가?
처음에는 평소처럼 괜한 트집을 잡는다고 생각은 했지만, 이번만큼은 내가 잘못 생각했던 것 같다.
"사부, 제자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오호, 진짜 깨달았느냐? 어디 한번 말해 보거라."
"교감이 한 대만 쳐도 인정한다고 했지만 저는 최소한 다섯 대는 때려 줄 생각입니다."
사부의 말은 내가 자존심이 없거나 단순한 무인으로서 호승심이 부족하다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한 번만 공격을 성공해도 인정해 주겠다는 제안은 교감이 먼저 했다.
나는 그 제안을 받아들여 어떻게든 한 번만 공격하면 이긴다고 생각했었고.
하지만 그건 실제로 이기는 것이 아니고 그저 인정해 주는 것에 불과하다.
"겨우 다섯 대? 50점."
말은 툴툴거려도 굳어 가던 표정이 풀리고 평소의 사부로 돌아왔다.
역시 사부는 남이 정한 기준에 나를 맞춰 한계를 만들지 말고 기준은 내가 직접 정해야 한다는 걸 알려 주고 싶었던 것 같다.
"쩨쩨하게 50점이 뭡니까. 그럼 10대 때린다고 했으면 100점입니까?"
"그래도 50점이다. 때려 패서 눕힌다고 해야 100점을 주지. 이야기는 그만하고 얼른 가서 수련이나 시작하자."
이렇게 먼저 수련을 다 하자고 하고, 역시 내 대답이 꽤 마음에 들었나 보다.
앞서가는 사부를 따라 나도 발걸음을 재촉했다.
"사부, 같이 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