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데미의 검술 강사가 되었다 (26)
명예로운 패배
"사부 친구가 진짜 천마라고요?"
"그럼 가짜 천마도 있느냐? 그런데 네가 그 녀석은 어떻게 아느냐?"
무협 소설을 몇 번만 읽어 봤다면 누구나 알 거다.
천마는 정파와 사파로 나누어지는 무림을 양분하는 하나의 축.
마교 혹은 천마신교라 불리는 곳의 절대자니까.
한창 내 작품이 연재될 때도 천마는 꽤 핫한 소재였다.
기존 무협 소설뿐만 아니라 판타지 세계에 넘어가 드래곤을 때려잡기도 하고, 현대에 환생해서 조폭 두목이 되거나, 환생해서 빵집을 차리기도 하고, 심지어 애를 키우는 소설도 있었으니까.
"자세하게 기억은 안 나는데 옛날이야기를 찾아보다 봤던 것 같습니다."
"하긴 그놈이 무림에서 꽤 유명하긴 했지. 그래도 내게는 한 번도 못 이겼다."
용까지 때려잡았으니 나름 강할 거라 생각하긴 했지만, 친구가 천마일 줄이야.
"친한 친구가 두 명이시랬죠? 그럼 다른 한 명은 누구예요?"
"장씨 성을 가진 삼봉이라고, 맨날 태극이 어쩌고 구시렁거리는, 술 좋아하는 말코 도사 녀석이 하나 있다. 모당인가 무당인가 문파 하나 만들었는데. 걔도 아냐?"
자… 장삼봉?
* * *
교감은 피하면 그만이라는 생각이었는지 날아오는 검을 피해 몸을 왼쪽으로 움직였지만 소용없는 행동이다.
쾅! 콰앙! 쾅! 콰앙!
대부분의 검강 파편은 교감 쪽을 향해 날아갔지만, 일부는 배리어에 부딪혀 폭발을 일으켰다.
기존 결투장에 설치된 마석으로 만들어진 배리어에 선생 둘이 만든 배리어까지 무려 세 겹이나 결투장을 감싸고 있었지만, 마지막 한 겹을 제외하곤 모조리 박살이 났다.
마지막 배리어도 꽤 위태로워 보이는데…. 파편 대부분이 교감에게 향했는데도 이 정도라니. 만약 내 검강이 완벽했다면 사고가 벌어졌을지도 모르겠다.
연습에서는 이 정도까지 내공을 불어넣은 적이 없어서 몰랐는데, 역시 사부 말대로 순간 파괴력 하나만큼은 진짜 최고다.
하지만 대부분의 파편을 맞은 교감은 여전히 서 있다.
물론 상태가 그리 좋아 보이진 않는다.
옷이 군데군데 구멍이 났고 찢어진 옷 사이로 피까지 스며 나오고 있으니까.
오러소드까지 견뎌 낸다는 교감의 강철 육체도 역시 검강까진 막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생각했던 것 이상이군. 검을 이용해서 이런 식으로 공격이 가능할 거라는 건 전혀 예상 못 했어."
사부가 예상했던 그대로다.
교감이 아무리 실전 경험이 많아도 무공이 없는 이 세계에선 절대로 나올 수 없는 방식이니까.
"기발하긴 했지만 이제 자네는 검이 없군. 약속했던 선공도 끝났고 말이야."
그래, 이젠 검도 없고 저 양반도 공격을 시작하겠지.
하지만 이미 승부는 결정 났다.
"지금 상태를 보시죠. 설마 유효한 공격이 아니었다고 우기실 작정은 아니시겠지요?"
교감의 낯빛이 급격히 어두워진다.
"아니…."
"아니 뭐요? 아까 동의하지 않으셨습니까?"
아주 쌤통이다.
만약 교감이 선공을 양보한다면 처음부터 나는 이럴 작정이었다.
배운 지 얼마 안 됐고 불완전한 검강이라지만 무려 천마의 검법을 받아 내고도 서 있는 저런 괴물과 제대로 싸운다면 무조건 필패니까.
공격은 단 한 번이었지만 교감의 옷에 난 구멍은 5개… 아니, 10개도 충분히 더 된다.
비록 엉덩이를 걷어차 주진 못했지만, 사부에게 말했던 열 번은 이미 이룬 거나 마찬가지다.
정말 운이 좋았다.
"부… 분명 그런 말을 하긴 했지만 난 아무것도 안 했는데 이렇게 끝내기엔…."
"제가 먼저 선공을 양보해 달라고 했습니까? 양보하신 건 교감 선생님이셨습니다."
"…."
"할 말 없으시면 이만 심판을 부르죠."
바로 올라올 줄 알았는데 내 검강 파편들이 설치되어 있던 배리어를 많이 부숴 버리는 바람에 수습하느라 정신이 없는 모양이다.
"자… 잠깐만. 그래, 검을 다시 줍게 해 주겠네."
이대로 지면 체면이 구겨질 게 걱정되어서 그런지 아니면 나와 제대로 싸워 보고 싶은 호승심 때문에 그러는진 모르겠지만 너무 구질구질하다.
"싫은데요. 이미 제가 이겼는데 왜 더 싸웁니까?"
"저렇게나 많은 학생이 기다리고 있는데… 그래, 강 선생이 가르치는 학생들도 저렇게 응원하고 있는데 이대로 끝내기엔 아쉽지 않나?"
"우리 선생님 최고!"
"검술이 미래다!"
"잘생겼다, 강신혁!"
내가 선방하자 우리 제자들은 난리가 났다.
그런데 저거 마지막에 외친 건 진수 같은데 응원은 고맙지만… 이 녀석아, 내가 네 친구냐?
너는 2학기 태도 점수 빵점이다.
아무튼, 응원하는 제자들을 보니 마음이 살짝 흔들렸지만 어림도 없지.
"전혀 안 아쉬운데요."
마침 결투장 바깥도 어느 정도 수습이 됐는지 심판이 결투장 위로 올라왔다.
"결투장 배리어를 유지해 주는 마석 손상이 심해서 마법 학과 선생님 두 분이 더 배리어를 쳐 주시기로 했습니다."
"그럴 필요 없어요. 이미 승부는 끝났으니까."
"네? 아…."
심판을 맡은 선생이 교감의 상태를 보곤 당혹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한다.
"그게 무슨 말인가, 강 선생? 아직 안 끝났지."
아니, 이 영감탱이가….
"교감 선생님, 구차해 보이니까 그만하시죠."
쿵―.
김만동이 말과 함께 진각을 밟자 단단한 암석으로 지어진 결투장 일부분이 갈라졌다.
괜히 바닥에 화풀이하는 것 같은데, 그래 봤자 나는 절대 안 싸울 거다.
"분명히 아까 대련 시작 전에 유효한 공격이라고 말하지 않았나? 보다시피 나는 끄떡없네."
지금 당신 상태를 보라고.
옷에는 구멍이 숭숭 뚫려 있고 피까지… 아니, 피가 벌써 멎었어?
아무리 그래도 이건 누가 봐도 억지다.
"교감 선생님이 그러시다면 그런 거겠죠. 그럼 대련은 계속하시는 거로 하겠습니다."
너무 어이가 없어 말이 안 나올 지경이다.
하…. 그래. 내가 잠깐 잊고 있었다.
심판을 맡은 선생도 실기 선생이자 헌터라는 걸.
물론 학교의 실기 선생들은 전부 나를 싫어하니 편파 판정 같은 게 있을지도 모른다고 예상은 했다.
하지만 김만동이 그런 불합리를 가만히 두고 볼 사람은 아니니 괜찮을 거라 생각했는데….
"강 선생, 어서 가서 검을 잡아야 하지 않겠나? 내가 그 정도 배려는 해 주지."
진짜 욕이 나올 것만 같다.
원작 작가는 도대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이런 인물을 공평하고 정의롭다고 한 거지?
이런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는 게 뭐가 정의로운 거냐고.
자기의 체면 때문에 이러는 게 아니라 정말 나와 싸우고 싶어서 억지를 부린다고 해도 이건 아니지.
나름 좋게 보고 있던 김만동이란 인간에게 완전 실망했다.
"알겠습니다."
말도 안 되는 억지지만 나는 대답과 함께 바닥에 떨어진 검을 다시 잡았다.
여기서 안 하겠다고 따져 봤자 받아들여지지도 않을 거고 나만 또 이상한 사람이 될 테니까.
다행히 절정에 오른 이후 회복 속도가 빨라져 아까 사용했던 내공은 거의 다 회복됐다.
가능성은 희박해도 이런 억지나 쓰는 사람에게 곱게 질 수 없지.
어떻게든 망신을 주겠다고 생각하며 거리를 벌렸다.
"그럼 재개하겠습니다."
심판이 내려가기도 전에 김만동이 내게 빠르게 달려온다.
지금까지 상대했던 그 누구보다 빠른 것 같지만 반응하지 못할 속도는 아니다.
부웅.
내 얼굴과 거의 비슷한 크기의 주먹이 날아왔지만, 가까스로 몸을 비틀어 피했다.
콰앙!
하지만 이어지는 왼손까지 피할 수 없어 검을 틀어 막았다.
광음과 함께 뒤로 밀려났는데 어이가 없다.
아까처럼 검강은 아니더라도 검기가 어려 있는 검에 부딪친 건 분명 맨주먹인데 상처 하나 없이 멀쩡하다.
한 방 한 방이 묵직함을 넘어 마치 커다란 강철 바위가 날아와 부딪친 느낌이고.
부웅.
방금도 얼굴로 날아오는 주먹을 고개를 꺾어 겨우 피했는데, 뺨을 스쳐 가는 풍압에 등골이 저절로 서늘해진다.
콰앙! 콰앙!
연속해서 공격이 쏟아진다.
반격을 의식해서인지 발은 쓰지 않고 있지만 두 손만으로도 상당히 버겁다.
피할 수 있는 것들은 최대한 피하고 나머지는 막아 냈다. 채 열 번도 충돌하지 않았는데 손목이 부러질 것 같다.
이대로 막기만 해서는 가망이 없을 것 같아 부딪칠 때 생긴 반동을 이용하며 뒤로 물러났다.
바로 따라붙을 줄 알고 대비했는데 승기를 잡았다고 생각했는지 따라붙지 않고 여유를 부린다.
"아까 같은 기술을 다시 쓸 생각인가?"
그럴 리가.
천마 검법은 위력이 폭발적인 만큼 내공이 상당히 많이 소모된다.
무리하면 못 쓸 것도 없지만 이미 한 번 보여 준 기술이 다시 통할 것 같진 않다.
애초에 기다려 줄 것 같지도 않고.
대답하지 않고 그대로 검에 내공을 불어넣는 데만 집중했다.
검기가 점점 짙어지자 역시 시간을 주지 않겠다는 듯 빠르게 쇄도해 온다.
이제는 준비한 비장의 수 같은 것도 없다.
속도만큼은 크게 차이 나지 않아 나름 잘 막고 피하기는 했지만, 내구력에서 차이가 너무 난다.
검기가 어려 있는 검과 수십 차례 부딪힌 영감탱이의 주먹은 완전히 멀쩡한 반면 이제 몇 번 더 막으면 내 손목뼈는 부러지고 말 거다.
솔직히 S 랭크를 상태로 큰 피해 없이 지금까지 버틴 것만으로도 충분히 내 실력은 증명했다.
기권해도 될 것 같지만 억지를 부려 대련을 다시 시작한 영감탱이의 기를 살려 주고 싶지 않은 마음이 더 크다.
제자들도 모두 지켜보고 있는데 그럴 수는 없지.
날아오는 주먹을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검으로 막지 않고 왼팔로 막았다.
빡! 뿌드득―.
내공을 주입했는데도 뼈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고통이 밀려왔지만 참아 내고 그대로 검을 휘둘러 교감의 왼팔을 사선으로 베었다.
살이 아니라 쇠를 찌르는 느낌이지만 끝까지 칼을 밀어 넣었다.
육참골단(肉斬骨斷), 살을 내주고 뼈를 자른다.
내 실력이 모자라 육참골단이 아닌 골참육단 밖에 안 될지라도.
이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니까.
* * *
눈을 떠 보니 익숙하지 않은 천장이 보인다.
눈을 비비고 주위를 보니 병원은 아닌 것 같고… 아, 예전에 몇 번 왔던 학교 보건실 같다.
기절했던 건가?
마지막에 나는 왼쪽 팔을 포기하고 교감의 왼팔을 베었다.
물론 검강이 아니었기에 결국 튕겨 나왔다.
그리고 이어지는 교감의 공격에 반응하지 못한 것 같은데, 아마 그때 당해서 기절한 모양이다.
그렇게 많은 사람이 지켜보는 앞에서 기절했다는 게 약간 부끄럽지만 나름 만족한다.
내가 교감의 오른팔에 만든 검상.
세 치도 안 될 것 같은 아주 작은 검상이었지만 피가 흘러나오고 있던 걸 분명히 봤으니까.
설마 그것까지 유효하지 않은 상처라고 우기진 않았겠지?
에이… 뭐, 이젠 상관없다.
대련에서 내가 이겼든 졌든 무조건 연수 면제는 받아 낼 생각이니까.
말도 안 되는 억지에 장단을 맞춰 줬는데 양심이 있다면 면제는 당연히 해 주겠지.
"어, 강 선생님 일어났어요?"
내가 뒤척이는 소리를 들었는지 커튼이 걷혔다.
백의를 걸친 보건 선생이 보이는데 역시 보건실이었다.
"아, 네. 제가 얼마나 여기 있던 거죠?"
"네 시간 정도 됐네요."
그럼 지금 시간이 11시는 넘었다는 소린데.
나 때문에 이 시간까지 퇴근도 못 하고 있던 것 같은데 미안하다.
바로 일어나서 돌아갈 생각으로 팔에 힘을 주는데… 어?
팔에 힘이 잘 안 들어간다.
"조금 더 누워 있으세요. 마법으로 치료는 다 했지만 뼈가 완전히 산산조각이 나서 감각이 완벽하게 돌아오려면 두 시간 정돈 더 있어야 할 거예요."
순간 불구라도 된 줄 알고 걱정했는데 보건 선생 말을 들으니 기억났다.
원작에서도 치료 마법으로 웬만한 상처는 다 치료되지만 이런 불편함이 있었다는 게.
"죄송합니다. 괜히 저 때문에 퇴근도 못 하시고."
"아니에요. 저도 어차피 기숙사에 거주하는데요. 그리고 교감 선생님이 깨실 때까지 봐 달라고 특별히 부탁하셨거든요."
병 주고 약 주는 것도 아니고.
내일 연수 면제 안 해 주기만 해 봐라.
"저는 괜찮으니까 이만 기숙사로 가셔도 됩니다."
어차피 보건 선생도 치료 마법을 사용하는 헌터라 나를 그리 곱게 보진 않을 테니까.
게다가 젊은 여자다 보니 괜히 같이 있으면 어색하기만 하다.
"싫은데요?"
"네?"
"사실 아버지도 통금 시간 되면 두고 그냥 가라고 했지만, 일부러 기다렸어요."
일부러 기다렸다니… 아니, 잠깐만. 아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