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데미의 검술 강사가 되었다 (77)
대련을 시작한 지 10분이 지났다.
분명 시작 전에 비앙카는 마법을 전부 쓰기로 했지만 내 발언에 자존심이 상한 건지 계속 검만 고집하고 있다.
사용하는 검술은 전형적인 서양 검술 느낌인데 막으면서도 베기가 되는 식으로 공수가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연속해서 공격하면서도 밸런스가 흐트러지지 않는 게 원래 마법사라는 걸 몰랐다면 검만 배운 검사라고 생각이 될 정도다.
가르치는 사람이 세계 최강의 검사인 걸 감안해도 단기간에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수준이라 진심으로 감탄했다.
마법도 멀린의 재림이라고 불릴 정도인데 검까지 이렇게 잘 다루다니.
역시 세계적인 기대를 한 몸에 받는 유망주다운 재능이다.
"저 사람 큰소리치며 올라간 것 치곤 방어만 하네요."
"제수씨도 콘래드에게 검을 배웠다고 들었는데, 안목은 좀 더 키워야겠어요."
"제가 잘못 본 거라고요? 우리 비앙카는 계속 공격하고 저 신혁이란 사람은 막기만 하잖아요."
"선배님 말이 맞아. 수준 차이가 이렇게 많이 날 줄은 몰랐는데…."
하지만 유망주는 어디까지나 유망주.
또래 사이에서는 충분히 대단하겠지만 내게는 그저 귀여운 수준이다.
솔직히 결승에서도 비앙카가 지금처럼 검만 고집한다면 세진이가 쉽게 이길 거라 생각한다.
콘래드의 검술도 정교하고 꽤 까다로운 건 사실이지만 결코 무공에 비할 바는 못 되고.
검에 대한 재능이라면 우리 세진이도 결코 부족하지 않으니까.
콘래드의 검술이라 그런지 완성도는 꽤 좋지만 결정적인 약점이 공격과 방어의 밸런스를 중요시하는 느낌이다.
어느 정도 파악이 됐으니까 슬슬 공격을 해 봐야겠다.
날아오는 찌르기를 칼로 비껴 막자 예상대로 베기가 들어온다.
휘익―.
슬쩍 비켜 피하며 약간 힘을 줘 녀석의 검을 베는 방향으로 밀어 버리자 그대로 중심이 무너진다.
바로 검을 목에 겨누면 끝나겠지만 일부러 시간을 줬다.
아직 비앙카는 마법을 쓰지 않았으니까.
"되지도 않는 고집은 그만 부렸으면 좋겠네요."
내 경고가 통했는지 비앙카가 자세를 고치며 거리를 벌린다.
이내 허공에 어린아이 머리 크기 정도 되는 화염구 수십 개가 나타났다.
간단한 마법은 보통 메모라이즈 해 두지 않으니 고속 영창을 했다는 건데, 그 짧은 시간에 이만한 숫자라니 놀랍다.
고속 영창이 아니라 마법 복제라고 부를 정도다.
하지만 이런 마법은 숫자가 아무리 많아도 의미 없다.
펑, 펑, 펑, 펑!
검에 내공을 주입해 검기를 만들어 횡으로 한 번 그으며 흩뿌리자 날아오던 불덩이들이 모조리 터져 나간다.
비앙카가 살짝 놀란 표정으로 이번에는 얼음의 창을 수십여 개 만들어 내 쏘아 보냈지만 이번에도 검기를 뿌려 전부 터뜨렸다.
원래 마법을 이런 식으로 강제 캔슬시키면 마나 역류가 일어났을 텐데, 바로 반격을 하는 걸 보니 정신력도 상당히 좋은 편인 것 같다.
하지만 정신력도 한계가 있는 법.
창백한 안색을 한 비앙카를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조금 더 높은 수준의 마법을 쓰는 걸 기다려 줄까 생각도 했지만 역시 지금 끝내는 게 맞다.
이런 상태로 고위 수준의 마법을 쓰게 놔두면 비앙카는 내상을 입을 테니까.
결승전에서 세진이와 만날 테니 지금 내상을 입혀 두면 도움이 될 수도 있지만 그런 식으로 비겁하게 승리하는 건 나는 물론이고 세진이도 바라지 않을 테니까.
다가가는 동안 계속 마법이 날아왔지만 전부 쳐 내며 비앙카의 앞에 도착했다.
비앙카가 다급하게 검을 휘둘렀지만 소용없다.
검마저 날려 버리고 그대로 검으로 목을 겨눴다.
"거기까지 하지. 정말 멋진 솜씨였어. 익숙하지 않은 검인데도 그 정도라니."
과찬이라고 대답하며 검을 갈무리했다.
비앙카 녀석, 상당히 분한 표정을 짓더니 말도 없이 자리를 떴다.
하긴 아까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이길 것처럼 나댔으니.
내가 비앙카였어도 창피해서 도망갔을 것 같다.
"우리 딸이 패배의 충격이 꽤 컸나 보군. 당신이 가서 좀 달래 줘. 미안하네. 내가 너무 오냐오냐 키워서."
"괜찮습니다. 아직 애일 텐데 이해합니다."
"이거 팔만 멀쩡했으면 내가 대련하는 건데, 타이밍이 참…. 아! 자네가 직접 상대한 감상을 듣고 싶네. 우리 비앙카 검이 어떻던가?"
"괜찮은 수준이죠. 단기간에 급하게 배운 건 아닌지 기본기도 꽤 좋고…."
"기초적인 검술 수련은 8살 때부터 시키긴 했지만 자질 검사에서 마법사 적성이 나오고 나선 아예 안 했네. 최근에 두 달 정도 가르쳤는데… 역시 우리 딸은 최고야."
이 사람 엄청난 팔불출이다.
아직 말 안 끝났는데 제멋대로 끊고 딸 자랑이라니….
"제 생각으로는 본인이 더 잘할 수 있는 쪽을 집중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콘래드가 살짝 인상을 찌푸린다.
원래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야 하는 법이다.
"우리 딸이 검에는 재능이 없다는 소린가?"
"따님이 검술에 재능이 없다는 소리가 아니라 제가 직접 상대했을 땐 그나마 마법이 조금 더 위협적으로 느껴졌거든요. 두 개를 다 잘하려면 단순히 노력을 두 배 하는 게 아니라 그 이상의 노력이 필요할 테니 선택과 집중을 하는 게 더 효율적이지 않을까 싶어서 한 말입니다. 오해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원작에서도 비앙카는 마법만 사용한다.
아까 생각했던 것처럼 연구가 실패해서 그런 걸 수도 있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원작 후반부에는 몬스터 수준이 확 올라가기 때문에 지금은 희귀한 재료라도 얼마든지 다시 구할 수 있다.
그런데도 연구를 다시 하지 않고 마법만 사용하는 건 본인도 검술을 같이 배우는 것보다는 마법에 전념하는 게 더 났다고 판단해서 그런 걸 테니까.
"그래, 이놈아. 좋게 조언을 해 주는데 뭘 인상을 쓰고 그래? 어설프게 이것저것 건드리는 것보단 한 우물 파는 게 낫다는 뜻이지."
교감마저 나를 거들자 표정 관리를 하는데 아까랑은 느낌이 약간 다른 게 기분이 상한 것 같다.
"신혁 씨와 선배님의 말도 일리가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일반적인 기준에서나 그렇지. 우리 비앙카라면 둘 다 잘할 수 있다고 저는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세진이 상대이지만 저녁 식사가 마음에 들어서 좋은 마음으로 조언해 준 건데… 어이가 없다.
누가 팔불출 아니랄까 봐.
주인공인 이지성도 검과 마법을 같이 쓰긴 하지만 그 녀석조차 메인은 마법 한 가지다.
뭐, 됐다.
애초에 조언을 받아들이고 안 받아들이고는 내가 결정할 일은 아니니까.
* * *
"승자는 한국의 김세진!"
오늘은 WHCU 대회의 마지막 날로 4강과 결승전 경기가 있다.
그리고 방금 심판의 우렁찬 외침과 함께 4강 경기는 끝났다.
이번 상대였던 이탈리아 학생은 역대 최대인 1분을 버텼지만, 다른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세진이의 상대는 아니었다.
결투장에서 내려오자마자 세계 각국의 취재진들이 밀려들어 축하 인사도 제대로 못 할 것 같다.
김대찬은 어느새 취재진을 뚫고 세진이 옆에 서서 인터뷰에 끼어드는 게 진짜 다른 의미로 대단하다.
점심 먹고 오후에 결승전만 남았는데 당연히 상대는 비앙카다.
세진이 경기보다 앞서 치러진 4강 A 조 경기에서 비앙카는 중국 학생을 10초라는 경이로운 속도로 꺾고 올라갔다.
오늘 경기만 그런 게 아니라 비앙카는 대회 둘째 날부터 누구보다 빠르게 경기를 끝냈다.
첫째 날에는 그래도 상대에게 먼저 공격할 수 있게 여유도 주고 어느 정도 합을 겨뤘지만 둘째 날부터는 얄짤이 없이 압도적으로 빠르게 끝내는데 아무래도 나 때문인 것 같다.
콘래드의 집에 초대됐을 때 나는 검과 마법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으려 하기보단 잘하는 마법에 집중하는 게 좋겠다고 조언했다.
정말 좋은 뜻으로 조언한 건데 이렇게 시위하는 걸 보면 받아들이는 쪽은 아니었던 것 같다.
솔직히 우리 입장에서는 나쁠 게 없…는 게 아니라 오히려 좋다고 말할 수 있다.
비앙카의 검술이 뛰어나긴 해도 세진이에게 절대 안 될 테니까.
"강 선생, 인터뷰 어제보다 더 길어질 것 같은데 우리끼리 먼저 밥 먹지."
"아, 네. 알겠습니다."
세진이를 기다렸다가 같이 먹을까 했지만 인터뷰가 끝나면 꼴 보기 싫은 김대찬도 같이 먹어야 할 것 같아 교감과 함께 구내식당으로 향했다.
구내식당에서 밥을 먹다 교감의 지인을 만났다.
미국에서 한 가닥 하는 헌터들이라는데 원작에는 등장하지 않았던 인물들이라 딱히 관심이 생기지 않는다.
대충 상대하다 빨리 대기실로 돌아갈 생각이었는데 다들 세진이 칭찬을 하기에 나도 자랑을 하다 보니 시간이 꽤 지체됐다.
나도 꽤 팔불출 기질이 있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대기실로 돌아왔다.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세진이 녀석, 매트에 눈을 감은 채 누워 있다.
피곤해서 자나 싶었는데 가까이 가 보니 움찔거리며 일어나는 게 내공 수련 중이었나 보다.
"선생님? 언제 오셨어요?"
"방금. 밥은 먹었어?"
"아니요. 생각 없어요."
"어허, 먹어야 힘을 쓰지."
"지금은 뭘 먹어도 체할 것 같아서요."
결승전이라 그런가?
다른 날은 안 그러더니 보기보다 긴장을 많이 한 모양이다.
"긴장을 아예 안 하는 것도 문제지만 너무 긴장할 필요도 없어. 하던 대로만 해."
"저도 알고 있는데…."
"선생님은 세진이가 선생님을 빈털터리로 만들지 않을 거라고 믿어. 그러니까 전 재산에 대출까지 한도를 꽉꽉 채워서 네게 걸었지."
"제가 그러다 지기라도 하면 진짜… 앗!"
심각한 표정으로 말하는 녀석의 이마에 딱밤을 먹였다.
"또또, 쓸데없는 걱정 한다. 선생님은 널 믿는데 세진이는 선생님 안 믿어?"
"미… 믿어요."
"부담 가지지 마. 만에 하나… 아니지, 존재하지 않는 확률이지만 네가 져도 선생님은 괜찮아. 돈이야 다시 벌면 되지. 선생님 능력 알잖아? 뭐, 돈 다시 벌 동안 대출 이자 정도는 세진이가 네가 조금 보태 줘야 할 수도 있겠지만."
"네?"
준우승도 상금 나오는데 이자도 안 보태 줄 생각이었냐며 너스레를 떨자 웃으며 팔을 때리는데 이제야 좀 평소의 세진이로 돌아왔다.
"이 녀석아, 그만 때려. 선생님 팔 부러지겠다."
"엄살은, 저 결승전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전력으로 갈 거예요."
"그래. 최선만 다하면 돼. 아쉬움 같은 게 남지 않게."
그럼 이겨 있을 테니까.
* * *
대련이 끝난 날 밤에 라이언이 내 방에 와서 내가 자리를 뜬 이후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본인이 잘하는 거에나 집중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내가 어떤 마음으로 연구를 시작했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심지어 아버지가 그건 보통 사람의 기준이지 나라면 할 수 있을 거라고 반박하니 아니꼬운 표정으로 쳐다보기까지 했다고 들었다.
겨우 대련 한 번 이겼다고 감히 누구한테… 정말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딸? 갑자기 웬 명상이야. 이번에는 검 안 쓰고 마법 쓰려고?"
"검만 써도 이기겠지만 결승전이잖아요. 이번에는 검만 고집하지 않을 거예요…."
"정말? 첫날 인터뷰했을 때는 검만 쓰겠다고 하더니."
원래는 마법까지 쓰면 너무 시시할 거라 생각해서 그랬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강신혁 그 작자가 지난번에 저는 잘하는 것만 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했다면서요?"
"그건 어떻게… 라이언이 말했구나?"
"네. 대련 이겼다고 기고만장해서 아빠에게 그딴 말이나 하면서 버릇없이 굴었다면서요."
"응? 뭔가 오해한 것 같은데… 그 말은 아빠가 먼저 우리 딸 검술 실력이 어떻냐고 물어봐서 대답한 거야."
"검 실력이 어떠냐고 물어봤는데 그렇게 대답했다는 건 검술은 별로니까 원래 하던 마법이나 하라고 무시하는 거잖아요."
"갑자기 마법까지 쓴다는 이유가 이거 때문이었어? 그런 안 좋은 의미로 말한 건 아닌 것 같은데…."
"뭐가 안 좋은 의미가 아니에요! 라이언이 아빠가 저라면 둘 다 잘할 수 있다고 하니까 그 작자가 아니꼬운 표정으로 쳐다보기까지 했다던데."
"그랬나? 기억이 잘 안 나는데. 설령 진짜 그랬다고 해도 주책맞다고 생각해서 그런 게 아닐까?"
"아빠! 아빠는 도대체 누구 편이에요?"
왜 그런 버릇없는 사람을 감싸 주는 건지.
하여간 아빠는 너무 사람이 착해서 문제다.
"나는 언제나 우리 비앙카 편이지. 너무 신경 쓰지 마."
"어떻게 신경을 안 써요? 저 이번 경기에서 증명할 거예요."
아빠 말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