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데미의 검술 강사가 되었다 (84)
사장실에 들어오니 머리가 희끗희끗한 마른 남자가 보인다.
"거기 앉지."
대뜸 반말을 하는 게 약간 거슬렸지만, 아까 그놈들처럼 바로 처리할 수는 없다.
허름한 건물이지만 들어오면서 입구와 엘리베이터에도 CCTV가 있었고 지금 밖엔 직원도 있으니까.
일단 어머님 채권 서류부터 받는 게 우선이라 시키는 대로 순순히 앉았다.
"얼마나 빌리려고?"
"빌리러 온 게 아니라 갚으러 왔는데."
"왔는데? 거, 젊은 친구가 말이 많이 짧네."
"반말은 그쪽이 먼저 하지 않았나?"
"뭐? 하여간 요즘 젊은이들은 겁이 너무 없어. 그러다 훅 가면… 그래. 뭐, 돈 갚으러 왔다니까 내 그냥 넘어가지. 누구 빚 갚으러 왔나?"
"윤미정."
"미정 씨? 미정 씨는 내가 잘 알지. 그쪽은 애인인가?"
애인은 무슨 얼어 죽을 애인.
김도현과 친해지려고 접근하긴 했지만, 새 아빠가 될 생각은 전혀 없다.
길게 끌고 싶지 않아 미리 지갑에서 빼 둔 헌터증을 꺼냈다.
"A… A 랭크 헌터 강신혁? 아니, 헌터였으면 진작 말을 하지 그랬나."
태도가 바뀌긴 했는데 이름이 아니라 랭크를 보고 바뀐 것 같다.
아까 밖에 직원도 그렇고, 생각보다 내가 그리 유명한 건 아닌 것 같다.
하긴 매스컴 좀 타긴 했어도 내가 유명 연예인도 아니고 WHCU가 끝난 지도 벌써 2주가 넘었으니까.
그래도 명색이 A 랭크 헌터라 그런지 군말 없이 원금만 받겠다고 하며 서류를 가져왔다.
"원금이 4억? 내가 알기로 이자는 한 달에 50씩 냈다고 하던데, 말이 안 맞네?"
"아, 그게… 미정 씨가 여력이 없다고 해서 50만 원만 받았던 겁니다. 못 갚은 이자들은 원금에 계속 더했고요."
"그럼 4억이 진짜 원금이 아니란 소리네? 어이, 영감탱이, 아까도 말했지만 난 불법 이자 낼 생각 하나도 없어."
"저… 저희가 저축은행에서 처음 넘겨받았을 때 금액은 8천이었습니다."
하, 진짜 기가 찬다.
도현이 어머님 이야기로는 도현이 아빠가 죽은 게 5년 전이라고 들었다.
서류에 있는 날짜를 보니 이 자식이 채권을 인수한 건 대략 3년 전.
3년 만에 8천짜리 빚을 5배인 4억… 아니지, 그동안 낸 이자도 있으니 5배가 넘는데 이 정도면 사탄도 울고 가겠다.
"8,000이면 800이면 되지?"
"800이라니요? 아니, 아무리 가격을 후려쳐도 그렇지… 10%는 너무하지 않습니까?"
"어디서 개수작이야. 너희가 은행에서 가져올 때 제값 주고 안 사 오는 거 모를 줄 알아?"
웹 소설은 물론 웹툰과 드라마, 영화까지 여러 매체에서 사채업자는 악역으로 자주 등장하는 소재다.
전생에 나도 글을 쓰려고 알아본 적이 있어 놈들의 생리는 대충이나마 알고 있다.
물론 다른 세상이니 다를 수도 있지만, 당황한 표정을 보니 그리 다르진 않은 것 같다.
"우리도 사 올 때 20% 주고 사 왔습니다."
"그래도 1,600이잖아? 네놈들이 3년간 처받아먹은 이자만 해도 그것보다 많을 텐데? 그렇게 따지니까 800도 많네. 현금으로 줄 테니까 500으로 하지."
"아니…."
"싫으면 법대로 하던가."
결국, 500을 주고 어머님의 채권 서류를 받아 냈다.
이체를 할 수도 있었지만 일부러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고 현금을 찾아서 줬다.
4억짜리 빚을 500으로 탕감했으니 엄청나게 후려치긴 했지만, 그냥 넘어가 줄 생각은 전혀 없으니까.
호텔이랑 이곳도 거리가 꽤 돼서 다시 오기도 귀찮으니 기다렸다가 나오는 대로 처리할 생각이다.
차에 탄 채 입구를 주시하며 어머님께 전화를 걸었다.
―강 선생님? 아, 아까는 제대로 인사도 못 드리고… 정말 죄송해요.
"괜찮습니다. 급한 일은 잘 해결하셨나요?"
―아… 괜찮아요.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거짓말에는 소질이 없으신지 전화로 들어도 목소리가 떨리는 게 그대로 느껴진다.
"저기… 어머님, 사실 아까 이야기 못 드린 게 있는데, 어제 학교에 다녀오면서 어머님이 혹시 연락을 안 주실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지인분에게 알아봐 달라고 부탁을 드렸습니다."
―그게 무슨…. 뒷조사를 하셨다는 건가요?
"나쁜 뜻으로 그런 게 아니라 그냥 정말 도움을 드리고 싶어서… 어머님께 연락이 왔을 때 취소했어야 하는 건데, 제가 깜빡 잊고 있다가 방금 연락이 와서 생각났네요. 죄송합니다."
―조금 당황스럽긴 하지만 나쁜 뜻으로 그러신 게 아니시니 괜찮습니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기, 그런데 제가 지인분께 부탁했던 건 전화번호나 주소 정도였는데 지인분이 오해를 했는지 조사를 조금 깊게 하셨나 봐요."
―네?
"사채 빚이 있으시다던데. 아까 어머님에게는 전혀 못 들었던 이야기라…."
―아… 남편이 사업을 하다가 은행에 돈을 빌렸는데, 남편이 그렇게 되고 은행이 망하면서 채권이 그놈들에게 넘어가서….
"그런 일이 있으면 아까 말씀을 해 주시지 그러셨어요."
―오늘 처음 뵙는 분에게 그런 부분까지 말씀드리는 건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해서…. 제가 어떻게든 해결할 테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그건 좀 힘들 것 같네요. 이미 제가 처리를 해 버렸거든요."
―처리하다니요? 그게 무슨….
"제가 조금 전에 놈들을 만나 채무 변제를 했습니다."
―저, 정말이신가요? 한두 푼이 아닐 텐데, 그걸 왜 선생님이….
"도와드리겠다고 했잖아요."
―이미 200이나 주셔서 이렇게까지 도움을 주실 줄은 생각도 못 했는데….
"저기, 이런 말씀 드리면 조금 재수 없다고 생각하실지도 모르지만, 제가 보기보다 돈이 좀 많거든요. 제가 뒷조사를 부탁했던 게 죄송하기도 하고 어머님이 생각보다 너무 적은 금액을 말씀하셔서 어떻게 더 도와드릴 수 없을까 생각하던 찰나에 알게 돼서 도와드린 거니 너무 마음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고맙습니다, 정말… 이 은혜를 도대체 어떻게 갚아야 할지…. 정말 너무 감사합니다.
목소리에서 물기가 느껴지는데 상당히 감격하신 모양이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어머님과 아드님이 여유가 생겼을 때 다른 사람에게 베푸시는 거로 충분합니다. 그리고 사채업자들이 말도 안 되는 이자를 붙여서 금액이 늘어난 거라 실제로 원금은 얼마 안 되더라고요. 잘 합의해서 처리했으니 앞으로는 그쪽에서 연락 올 일은 없을 겁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괜찮습니다. 참, 그리고 지인분이 지금 사시는 곳이 재개발 예정이라 곧 이사를 가셔야 한다고 하던데 그 부분도 도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까 엿들었을 때부터 이미 다 생각을 해 뒀다.
집 한 채 사서 학교에서 생활하느라 잘 안 들어가니 사시면서 관리해 달라고 하면 되겠지.
관리비로 쓰시라고 매달 돈도 좀 드리는 건 좀 오버인가?
확실히 돈까지 주면 조금 부담스러워하실 것 같은데, 직장 같은 걸 알아봐 드리는 편이 낫겠다.
청소업체에서 일하셨다고 하셨으니 우리 건물 청소업체에 취직을 시켜 드리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신탁을 맡겨서 관리는 은행이 하긴 하지만 명색이 건물주인데 그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을까?
정 안 되면 목 좋은 장소에 편의점 같은 거 하나 차려 드려도 그만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괜찮습니다. 빚까지 해결해 주셨는데 저희도 염치가 있지, 어떻게 그것까지 선생님께 부탁을 드리겠어요. 괜찮습니다.
"부담 가지실 거 없어요. 이게… 어? 저기, 어머님, 제가 지금 일이 좀 생겼네요. 어차피 채권 서류도 전달해 드려야 해서 제가 내일 점심때 댁으로 찾아뵐 테니 그때 이야기 나누시지요."
―집으로 오신다고요? 아니, 정말 그렇게까지는….
대답을 끝까지 듣지 않고 바로 전화를 끊었다.
어머님이 거절하실 것 같아서 그런 것도 있지만 사채업자 놈이 건물 밖으로 나왔으니까.
* * *
"벌써 다 돌렸다고? 어디다 버린 거 아니야?"
"아니에요. 전부 다 돌렸어요."
"다섯 시간도 안 됐는데 그새 천 장을 다 돌렸다는 건 믿기 힘든데."
"제가 헌터 학교 다니고 있어서 체력이 좋은 편이에요. 못 믿으시겠으면 가서 확인해 보셔도 돼요."
"미성아파트는 붙였어? 아까 배달 갈 때 보니까 안 보이던데."
"그럴 리가 없어요. 거긴 맨 처음에 붙였는데."
"여보, 다른 데는 봤어요?"
"금화아파트랑 호성아파트 쪽에는 붙어 있던 것 같기도 한데 자세히 안 봐서 잘 모르겠네."
"그래요? 아예 다 버린 건 아닌가 보네. 여기."
"왜 3만 원이에요? 아까 장당 50원이라고 했잖아요."
"우리 남편이 배달 갔을 때 붙어 있는 거 못 봤다고 그러잖아. 전부 버린 건 아닌 것 같아서 이거라도 주는 거야."
"아니, 저는 진짜 다 붙였는데…."
"그럼 다 사진을 찍어 오던가. 받기 싫으면 말아."
너무 억울했지만 결국 3만 원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혼자 고생하시는 엄마를 조금이나마 돕고 싶어 16살이 되자마자 아르바이트를 알아봤다.
인터넷에서는 16살부터는 보호자 동의만 받으면 가능하다고 했으니까.
하지만 전화를 하는 곳마다 16살은 안 된다며 다들 거절했고, 직접 찾아갔을 땐 이야기가 잘되는 것 같다가도 나이만 밝히면 다들 너무 어리다며 안 된다고 말했다.
그나마 전단지 알바는 가능해서 나올 때마다 하고 있는데, 내가 어려서 그런지 다 돌리고 오면 이런 식으로 알바비를 덜 주는 경우가 은근히 많다.
그래도 아까 오전에 300장 길에서 나눠 준 건 제값을 받아서 다행이다.
오늘 번 건 45,000원.
아까 점심에 컵라면 사 먹은 것과 차비를 빼면 4만 원이 남는데, 개학 전까지는 그래도 100만 원 정도는 모아서 드릴 수 있을 것 같다.
버스를 타고 집에 돌아왔다.
오면서 보니 이사를 갔다는 표시인 붉은 동그라미가 쳐진 집이 더 많아진 것 같다.
엄마가 아직은 괜찮다고 알아보고 있다고 하시긴 했지만….
사실 며칠 전에 엄마가 집주인과 통화하시는 걸 들었다.
이사비도 받았으면서 왜 이사를 안 가냐고….
문을 열고 집에 들어왔는데 세상 모르게 자고 있는 연지가 보인다.
들어 올 때 엄마 신발이 있었던 것 같은데… 부엌에 계시나?
연지 이불을 덮어 주고 부엌 쪽으로 가니 어머니 목소리가 들린다.
"집으로 오신다고요? 아니, 정말 그렇게까지는… 선생님?"
전화가 끊긴 것 같아서 부엌문을 열었는데 엄마가 울고 있다.
"엄마!"
"아들? 언제 왔어."
급히 손으로 눈가를 훔치시지만 이미 다 봤다.
아무래도 얼마 전에 찾아왔다던 나쁜 놈들과 통화하신 게 분명하다.
"울지 마요. 며칠 전에 찾아왔던 나쁜 놈들이죠? 또 찾아온다고 협박한 거예요?"
"그걸 어떻게… 아니야, 그런 거 아니야."
"아니긴 뭐가 아니야. 연지에게 다 들었어요. 예전에 찾아왔던 그 나쁜 사람들 얼마 전에 왔었다면서요."
며칠 전 알바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니 연지가 깨어 있으면서도 이불 속에서 안 나온 적이 있었다.
어린이집에서 애들이랑 싸워서 그런 줄 알았는데, 연지는 엄마가 출근하면서 어린이집에 데려다주는 길에 무서운 아저씨들이 와서 무슨 돈 어쩌고 하며 엄마를 괴롭혔다고 이야기했다.
연지가 제대로 이야기를 한 건 아니지만 단번에 무슨 뜻인지 바로 알 수 있었다.
예전에도 몇 번 빚쟁이들이 집에 찾아와 행패를 부린 적이 있었으니까.
"도현아, 정말 아니야. 이제 걱정할 필요 없어."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며 말씀하신다.
"저 이제 애 아니니까 그런 말로 넘어가려 하지 마세요. 엄마는 내가 지킬 거예요."
"우리 아들 다 컸네. 그런데 정말 이제 괜찮아. 엄마 슬퍼서 운 게 아니라 기뻐서 운 거야."
"네? 기뻐서 울었다고요? 그럼 방금 통화한 사람은 누군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