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데미의 검술 강사가 되었다 (86)
새 학기
눈을 뜨니 익숙한 천장이 보인다.
어제 꽤 늦게 잠들었던 것 같은데 몸도 가볍고 햇살도 아주 포근하고 새소리마저….
잠깐, 새소리?
빠르게 휴대폰을 찾아 켜 보니 박 선생님을 비롯해 몇몇 선생님들에게 부재중 전화가 와 있다.
시간은 9시 반.
지각이다.
대충 얼굴만 씻고 최대한 빠르게 옷을 갈아입고 전력을 다해 교무실로 달렸다.
신년 첫 출근부터 지각이라니….
어제 알람을 맞춰 둔다는 걸 깜빡했다.
그나마 선생들만 출근하는 운영협의회 기간이라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가려는데 문이 벌컥 열린다.
"응? 강 선생, 설마 지금 출근하는 건가?"
젠장, 다행이라고 한 거 취소다.
운도 지지리 없지, 하필 마주쳐도 교감이랑 마주치다니.
"알람을 깜빡해서…. 죄송합니다."
"뭐, 그럴 수도 있지. 다음부터는 조심하게."
"네? 아, 네. 다음부터는 절대 이런 일 없게 하겠습니다."
최소 10분은 잔소리 들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렇게 가볍게 넘어갈 줄이야.
세진이를 우승시킨 효과가 아직 남아 있는 건가?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자리에 오자 주변 선생님들이 다가온다.
"강 선생, 오랜만. 전화해도 안 받아서 혹시 그만두는 건가 싶었는데… 늦잠?"
"네. 알람 설정을 한다는 걸 깜빡해서… 죄송합니다."
"강 선생, 정말 안 그만두는 거야? 나였으면 바로 그만뒀을 텐데."
"연금 받을 때까지 할 겁니다."
"쳇, 있는 사람이 더하다더니."
"정말?"
정말 안 그만둔다고 하니 선생님들이 투덜대며 만 원짜리 한 장씩을 꺼내더니 박 선생님에게 넘긴다.
이제 보니 내기를 한 모양인데 박 선생님만 빼놓고 다들 내가 그만둔다는 데에 걸으셨나 보다.
"강 선생, 오늘 퇴근하고 소주에 삼겹살 어때? 강 선생 덕분에 짭짤하게 벌었으니 강 선생 몫은 내가 내 줄게."
"아… 오늘 지각도 했는데 술은 좀…."
"평소엔 안 그랬잖아. 어차피 오늘은 수업도 없는데. 아, 이제 건물주니까 우리 같은 서민들이랑은 안 어울리겠다는 거야?"
"그럴 리가요. 알겠습니다. 오늘 버신 거 고깃값으로 다 나가게 해 드리죠."
"무한 리필 갈 건데?"
"그럼 술값으로 탕진시키겠습니다."
"얼마든지."
"내일은 내가 사지."
"최 선생님이요?"
최 선생님은 아내분이 용돈을 늘 너무 적게 줘서 힘들어하시던 분인데, 웬일이지?
"자네만큼 번 건 아니지만 우리 전부 세진이에게 배팅했거든."
"나야 우리 강 선생을 믿었으니까."
"진짜로 믿었으면 1,000달러 다 걸었어야지. 80만 원밖에 안 걸었다며?"
"그것도 비상금 탈탈 털어서 건 거야. 그리고 박 선생, 자넨 이틀은 사야 하는 거 아니야? 와이프랑 처남에 큰딸까지 전부 걸었다며."
"까짓거 이틀 사지."
"저기, 선생님들, 제 의견은…."
"이번 주는 수업 없잖아!"
이번 주는 간이 고생을 좀 많이 할 것 같다.
내가 돈 많이 벌었다고 좀 거리를 두거나 고깝게 생각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괜한 걱정을 했나 보다.
물론 속마음은 다를 수도 있지만 그래도 대놓고 배척하지는 않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
그러고 보니 민 선생님도 고맙다며 밥을 사신다고 했는데 시간이 겹칠 수도 있으니 점심때 한번 물어봐야겠다.
"아, 참… 오후에 이사한다니까 오전에 대충 정리해 놓는 게 좋을 거야."
"학년 배정 나왔어요?"
"나왔지. 업무 연락 들어가 보면 나와 있어. 자네는 올해 2학년이던데."
교사가 어떤 학년을 담당할지 배정은 교감과 교장이 상의해 결정하지만 무작위로 이뤄지는 건 아니다.
작년 12월에 내년에 어떤 학년을 맡고 싶은지 2지망까지 써서 지원서를 내는데, 나는 1지망으로 2학년을 썼다.
2학년은 2학기부터 실습을 나가서 1학년보다 바쁘긴 하지만 내년에는 무조건 1학년을 맡아야 하니까.
물론 3년 연속 같은 학년을 담당하는 게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선생님들 대부분 힘든 3학년을 회피하고 1학년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어 경쟁이 좀 세다.
뭐, 나도 가르치던 아이들을 이어서 가르치는 게 편하고 애들에게 정도 많이 들었으니까.
세진이의 WHCU 우승이라는 성과를 냈으니 어쩌면 3학년으로 가게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다행이다.
"1지망대로 됐네요. 선생님들은요?"
사실 2학년을 1지망으로 선택한 가장 큰 이유는 따로 있다.
바로 수학여행.
1학년 학생들이 수련회로 매년 강원도를 가는 것처럼 2학년 학생들의 수학여행도 매번 같은 장소로 간다.
장소는 일본인데 물론 일본 내에서도 도쿄로 갈 때도 있고 오사카나 후쿠오카로 가기도 한다지만 절대 빠지지 않고 들르는 곳이 있다.
‘검은신전’.
나고야 근교에 위치한 세계 최대 규모의 고정형 포탈로 제주도 절반 크기인데, 지금은 제한이 없지만 공략 전에도 무려 천 명까지 입장이 가능했다고 한다.
전부 황량한 모래사막 지대라 자원 가치는 없지만, 중앙에 거대한 신전이 있다.
전부 검은색의 암석으로 지어져 있어 검은신전이라는 이름이 붙었는데, 신전 내부엔 갖가지 벽화와 더불어 알 수 없는 언어들이 발견됐다.
지구 어디에도 발견되지 않던 완전히 새로운 언어였지만 세계의 유명한 언어학자들이 오랜 연구 끝에 2개의 문장을 해석해 냈다.
원작에서 주인공들은 그곳에서 두 번째 기연을 얻는다.
해석된 문장을 보면 뭔가 대단한 비밀이 숨겨져 있는 분위기라 일본 정부 입장에서 외국인은 물론 내국인의 출입도 엄격히 통제하고 있지만 예외가 있다.
처음 포탈이 발견됐을 때 당시 일본에서 최상위권의 길드 넷이 모여 공략을 시도했지만 처참히 실패했다.
공략에 참가했던 인원의 절반이 죽고 S 랭크 헌터도 넷 중 셋이 죽었다.
이후에 한 번 더 시도했지만 또다시 막대한 희생자를 내며 실패했고 자국의 힘으로 공략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일본은 결국 세계헌터협회에 SOS를 쳤다.
세계에서 난다 긴다 하는 헌터들이 모였고 희생자가 꽤 많이 나왔지만 결국 한 달 만에 공략은 성공했다.
공략 후 고정형이라는 게 밝혀지며 공략에 큰 활약을 했던 헌터들에게는 포탈의 지분을 받았는데 그 헌터 중에 1명이 우리 교감이다.
그 덕에 우리 학교 학생들은 수학여행으로 일본을 가면 무조건 검은신전은 1회 방문한다.
"나는 2학년 3반 담임이고 최 선생은 4반 담임, 정 선생은 7반 담임이야. 연 선생은 3학년으로 가게 됐고."
"나도 2학년 지원했는데…."
"아쉽네요. 그래도 2학년으로 가면 아는 분들이 없을까 봐 걱정했는데 같이 가시는 분들이 세 분이나 계셔서 다행이네요."
"별걸 다 걱정하네. 강 선생은 우리 학교 최고 인기남이잖아."
"제가 인기는 무슨…. 다들 올해도 잘 부탁드립니다."
"그래, 올해도 잘해 보자고."
"나도 잘 부탁해, 강 선생. 그런데 괜찮겠어?"
"네? 뭐가요?"
"강 선생 10반 담임이던데?"
"담임이요? 저 이제 1년 차인데요?"
딱히 규정이 있는 건 아니지만 정교사가 되는 2년 차 전에는 담임을 안 시키는 게 관례다.
"듣고 보니 그러네. 강 선생 작년에 들어왔지. 너무 익숙해서 신입인 걸 깜빡한다니까."
"그러게. 뭐, 강 선생이 능력 있으니까 맡긴 거겠지."
"제가 무슨 능력이 있다고…."
"왜 그래, 강 선생 잘하잖아."
"아까 교무부장이랑 교감 선생님 이야기하시는 거 옆에서 들었는데, 교감 선생님이 강력하게 추천했다고 하시던데?"
또 교감이냐….
하여간 그 양반은 무슨 나랑 전생에 원수를 졌나?
"왜 그리 울상이야? 담임이라고 해도 특별한 거 없어."
"그러게, 엄살은. 정말 별거 없어. 그냥 하던 일에서 학급 관리만 추가됐다고 생각해."
"…그 학급 관리가 힘들지 않나요?"
"처음이면 조금 힘들 수도 있지만, 강 선생이라면 충분히 잘할 것 같은데. 담임 되면 수당도 한 20인가 더 나오고."
그깟 20 안 받아도 되니까 안 하고 싶은데….
"애들만 잘 만나면 그리 어려울 거 없으니까 너무 겁먹지 마."
하아… 가서 따질까 생각도 했지만 이미 반까지 나왔으니 안 바꿔 줄 것 같은데….
잠깐, 아까 지각을 너그럽게 넘어간 것도 이것 때문이었나?
하아, 교감 너무 싫다.
* * *
회의가 끝나고 바로 교무실을 나왔다.
예전 같았으면 바로 검술 훈련장으로 가서 커피 한잔하며 느긋하게 수업을 준비했겠지만 올해부터는 그럴 여유가 없다.
담임은 아침에 조회를 해야 하니까.
하필 2학년 교실은 4층이라 조회 시간을 빼도 하루에 최소 15분 이상 손해다.
학기 초라해야 할 업무도 많은데….
그냥 그만둘 걸 그랬나 생각하며 걷다 보니 어느새 교실 앞에 도착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재잘재잘 떠드는 학생들이 보인다.
"다들 그만 떠들고 조회할 거니까 앉아라."
빈자리가 없는 걸 봐서 결석은 없는 것 같지만 한 명 한 명 이름을 불렀다.
출석을 불러야 이름을 외우기가 쉽다고 해서 그런 건데, 어제 개학해서 고작 하루밖에 안 됐지만 한 반에 스무명밖에 안 되다 보니 다 외워서 내일부터는 눈으로 체크해도 될 것 같다,
"다 있네. 그럼 전달 사항. 마법반은 2실습실 내부 공사가 어제저녁에 끝났으니까 오늘부터 2실습실 쪽으로 가고… 아, 이따 8교시 끝나고 5시에 반장 선거랑 학급부장 뽑을 거야. 지원할 사람들은 따로 준비하고."
"네!"
"좋아. 그럼 질문할 사람은 없지? 선생님 간다."
"저기, 선생님! 동아리는 언제부터 신청해요?"
"동아리? 따로 이야기 들은 거 없는데…… 작년에 동아리 했던 사람들은 그대로 하면 될 거고, 새로 가입할 사람들은 가입하고 싶은 동아리에 알아서 문의하면 되지 않을까 싶은데."
"선생님은 동아리 지도교사 안 하세요?"
"저는 선생님 동아리로 갈래요."
"저도요."
오, 나 생각보다 인기가 많…기는 개뿔.
평소에 애들에게 간식 많이 사 준다고 소문나서 그러는 거겠지.
"안 할 건데."
안 그래도 담임 맡아서 바쁜데 그런 거까지 할 여유는 없다.
"우우."
"다른 선생님들은 다 하나씩 하시던데."
"그래? 그럼 체력단련부나 하나 만들까? 50분 내내 달리고 팔굽혀펴기하고, 괜찮지?"
"에이… 쌤, 그런 동아리를 누가 가요."
"평소에도 맨날 하는 건데…."
그러니까 나 좀 가만히 놔둬라.
"아쉽네. 다들 수업 잘 받고 이따 보자."
인사를 하고 교실을 빠져나오니 벌써 8시 반이다.
검술 훈련장에 도착하자 40분이 되었다.
야근을 안 하려면 서류 업무를 좀 해 둬야 하겠지만 노트북 켜고 한글 키면 수업 시간이 될 것 같다.
"강 선생님도 커피 한 잔 하세요."
근육이 우락부락한 선생이 캔커피를 건네는데 올해 3학교에서 새로 온 정은식 선생이다.
내 이미지가 180도 달라지긴 했지만 여전히 헌터인 선생들하고는 데면데면한 사인데, 새로 와서 그런지 다른 헌터인 선생들과 달리 내게 거리를 두지 않는 것 같다.
"감사합니다."
"담임까지 하시니까 바쁘시겠어요. 보통 저희처럼 외부 시설에서 수업하는 선생님들은 담임 잘 안 시키는데."
"저를 못 부려 먹어서 안달인 사람이 있거든요. 점심 먹고 저도 사 올게요."
커피를 마시며 잡담을 하다 보니 바깥이 시끄러운 게 어느새 수업 시간이 다 된 모양이다.
밖에 나와 보니 아직 앳된 티가 물씬 풍기는 1학년들이 보인다.
우리 애들도 작년엔 이랬지.
"와, 저 선생님 진짜 잘생겼다."
"그 강신혁 선생님 같은데?"
"맞아. TV에서 봤어. 실물이 훨씬 잘생기신 듯."
자식들, 그래도 사람 볼 줄은 아네.
2학년 훈련 장소는 조금 더 위쪽이라 3분 정도 걸으니 익숙한 얼굴들이 보인다.
지난 1년간 봐 왔으니 칭찬 같은 건 기대도 안 하지만… 이 녀석들, 본 척도 안 하고 자기들끼리 이야기하기 바쁘다.
그냥 1학년이나 계속할 걸 그랬나?
대회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 1학년 담당 안 시켜 주면 그만둘 거라고 했으면 1학년을 맡을 수 있었을 것 같은데….
"다 왔지? 스트레칭 하고 바로 뛸 거니까 다들 준비해."
"쌤, 아직 수업 시간까지 3분 남았는데요."
"선생님 스타일 몰라? 다 왔으면 시작하는 거지. 진수 넌 한 바퀴 추가."
"왜 저만…."
"두 바퀴 더 뛸래?"
2학년 수업도 1학년 때와 별로 다를 건 없다.
2학년부터는 포탈 공략을 나가긴 하지만 실습은 4월 말부터 시작이니까.
생각해 보니 나도 따라가야 되는구나….
으으, 진짜 싫다.
오전 수업을 마치고 점심을 먹으러 가려는데 품속에 진동이 느껴진다.
휴대폰을 꺼내 보니 도현이 어머님이다.
이 시간에 웬일이시지?
"네, 도현이 어머님."
―강 선생님, 통화 괜찮으신가요?
"네. 점심시간이라서 괜찮습니다. 무슨 일 때문에 그러세요?"
―조금 전에 학교에서 연락이 왔는데, 우리 도현이가 친구를 때렸다고….
"도현이가요?"
―그게, 내일 학교로 오라는데 도현이에게 어떻게 된 일인지 물어보려고 해도 연락이 안 돼서요. 매번 도움받는 처지에 이런 부탁까지 드려서 정말 죄송한데… 조금 알아봐 주실 수 없을까요?
도현이 성격에 친구를 때릴… 아, 설마 그건가?
"저기… 어머님, 혹시 도현이에게 맞았다는 친구 이름, 이지성이던가요?"
가장 영광스러운 자는 멸망을 저지하기 위해 스스로 타락의 길을 택했다.
…선택을 받은 자, 모든 걸 얻어 멸망의 위에 우뚝 서리라.
[2-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