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데미의 검술 강사가 되었다 (96)
한눈에 봐도 위험해 보여 속도를 줄이며 다가갔는데, 안개 너머로 애들 전부와 판수라는 헌터가 쓰러져 있다.
고동혁 헌터는 아예 보이지도 않고.
도대체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이대로 저쪽에 몬스터들을 몰고 가면 안 될 것 같다.
마침 반대쪽에서 재현이가 달려오는 게 보여 그쪽으로 향했다.
"반장! 너 미쳤어? 왜 이쪽으로 와?"
"지금 저쪽으로 가면 안 돼. 다들 쓰러졌어."
"쓰러지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나도 모르겠어. 이상한 초록색 안개가 있는데 다들 그 안에 쓰러져 있고 의식도 없고… 상태도 안 좋아 보였어. 고동혁 헌터는 아예 안 보이고."
"뭐? 그럼 어떡해?"
"어떡하긴 뭘 어떡해. 일단 우리 둘이라도 싸우는 수밖에 없지."
"우리 둘이서 싸우자고? 너 몇 마리 몰아왔는데?"
"내 쪽은 4마리. 넌?"
"난 6마리야. 10마리를 우리 둘이 어떻게 잡아…."
나도 안다.
아무리 느리고 약한 병든 오크라지만 몬스터는 몬스터.
2마리… 아니, 잘하면 3마리까지는 어떻게 해 볼 수 있을 것 같지만 5마리는 절대 무리다.
"반장, 아직 뛸 수 있지? 우리 안전지대까지 뛰자."
"뭐?"
"저 자식들 느리잖아."
"안전지대로 들어가면 어그로 풀리잖아. 저놈들이 돌아가다 쓰러진 사람들 발견하고 공격하면…."
다 죽는다.
"어쩔 수 없잖아. 다들 상태 안 좋아 보였다면서. 이미 죽은 걸지도 모르고. 우리라도 살아야지."
"이재현, 너 무슨 말을 그딴 식으로 해?"
"그럼 어떡해? 이대로 싸우면 우리 둘 다 죽는다고. 난 죽기 싫어."
나도 죽고 싶지 않다.
안전지대까지 거리가 꽤 돼서 확신할 순 없지만 아직 체력이 있으니 재현이 말대로 도망치면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러면 모두가….
"빨리 결정해. 놈들 거의 다 왔어."
"그래. 일단 가자."
재현이와 함께 포탈 입구 쪽을 향해 달렸다.
점점 숨이 가빠지고 거리도 계속 좁혀졌지만, 드디어 저 멀리 안전지대가 보인다.
이젠 슬슬 이야기해야겠지.
"야, 이재현."
"반장, 말할 여유 있으면 뛰어! 저기 안 보여? 조금만 더 가면 안전지대야."
"잘 들어. 난 안 들어갈 거니까 넌 포탈 나가서 바로 지원 요청해."
"그, 그게 무슨 소리야? 애써 여기까지 왔는데… 힘 다 썼어? 조금만 더 가면 되잖아. 말할 힘 아껴서 뛰다 진짜 못 뛸 것 같으면 말해. 내가 도와줄게."
"누가 누굴 도와? 구보할 때 맨날 뒤로 처지는 주제에. 너보다 여유 있어."
"뭐? 그럼 왜 안 들어간다는 건데?"
"왜긴, 이 바보야. 아까 말했잖아. 우리 둘 다 안전지대로 가 버리면 남은 사람들 다 죽는다고."
애초에 나는 안전지대에 갈 생각이 없었다.
* * *
"반장, 일어나."
"헐? 지금 몇 시야?"
"7시 50분. 출석 체크 때문에 반장이 먼저 나간 줄 알았는데, 신발이 있길래 혹시 해서 봤더니…. 뭐야, 반장이 늦잠을 다 자고. 별일이네."
"민하 반장 되고 바뀐 거지, 원래 1학년 때는 종종 늦잠 잤어."
"맞아. 덕분에 살았어. 고마워."
첫 실습이라 잠이 안 와서 늦게 잤더니 이런 불상사가 벌어졌다.
오늘 선생님도 안 나오셔서 출석체크 하려면 8시 반까진 운동장에 가야 하는데….
아무래도 아침은 걸러야겠다.
부랴부랴 준비하고 아침도 거르고 운동장에 가 보니… 어? 선생님이다.
"쌤? 오늘 행사 있어서 안 나오신다고 했잖아요."
"그거 10시 시작이거든. 사실 오랜만에 늦잠 좀 자 볼까 했는데 아침 일찍 가는 거 아니면 배웅이라도 하라고 누가 갈구더라고."
"혹시 교감 선생님?"
"정답. 역시 반장이야. 그런데 반장도 늦잠 잤다며?"
"네?"
"시치미 떼기는, 연수한테 다 들었거든. 밥도 안 먹고 온 거지?"
"아… 괜찮아요."
"괜찮긴, 첫 실습인데 그럼 안 되지. 쫄쫄 굶고 포탈 공략을 어떻게… 그렇지! 잠깐만 기다려. 아, 우리 반 애들은 민철이랑 규환이 빼고 다 왔어."
"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기숙사 쪽으로 엄청난 속도로 뛰어가신다.
5분 정도 지나자 웬 검은 비닐 봉투를 하나 들고 돌아오셨다.
"어휴, 숨차다. 아침부터 뛰려니 힘드네. 여기."
비닐 봉투를 건네시는데 안에 샌드위치와 커피 우유가 있다.
"어떻게 사 오신 거예요? 아침에 매점 문 안 열 텐데. 교직원 매점은 여나요?"
"아니, 거기도 아침엔 안 열어. 오늘 아침으로 먹으려고 어제저녁에 사 둔 건데, 가면서 차에서라도 먹어."
"어… 그럼 선생님은요?"
"선생님은 이따 협회 가면서 사 먹으면 되지."
"어, 쌤! 왜 민하만 챙겨 줘요. 저도요."
"저도…."
"어허, 이것들이 어디서. 너희들은 아침 먹었을 거 아니야."
"쌤! 저는 늦잠 자서 안 먹었는데요."
"자랑이다. 이진수, 넌 우리 반도 아니면서 어딜 감히 우리 반장 걸 넘봐. 저리 가."
"와, 자기 반 학생만 편애하는 편향주의 교사. 우우."
"우리 진수, 벌점 받고 싶구나?"
"아, 아닙니다."
"선생님 잘 먹을게요. 고맙습니다."
"고맙긴. 평소에 민하가 반장으로 선생님 잘 도와주고 애들 잘 챙겨 주는 거에 비하면 별것도 아니지."
"네? 그건 반장이니까 당연한 건데…."
"그래도 고마운 건 고마운 거지. 6조에 우리 반 애들 3명이나 있지? 오늘 선생님 없으니까 애들 좀 잘 부탁할게."
"네. 걱정하지 마시고 행사 잘하고 오세요."
"민하가 반장이라서 참 든든하다니까. 민하도 잘 다녀와."
* * *
쓰러진 사람들 중엔 연수도 있는데, 선생님에게 자신만만하게 걱정하지 말라고 해 놓고 이대로 도망칠 순 없다.
만약 연수까지 같이 도망칠 수 있었다면… 아니, 애초에 그럼 재현이가 저쪽에 쓰러져 있었을 테니 못 나갔겠구나.
"박민하…."
"너 우냐? 야, 이재현… 재수 없게 울지 마. 나 2학년 10반 반장 박민하야. 내가 어떻게든 시간 끌어 볼 테니까 넌 빨리 나가서 주변에 있는 헌터 중에 회복 마법 쓸 수 있는 가장 강한 마법사 불러 달라고 해."
"아, 알았어."
혹시 나처럼 무모하게 남겠다고 할까 봐 걱정했는데, 이기적인 놈이라 다행이다.
어느새 안전지대 바로 앞까지 도착했다.
"반장, 조금만 버텨. 다… 다시 올게."
"바보 같은 소리 그만하고 얼른 뛰기나 해. 난 앞에서 바로 꺾을 거니까!"
누굴 자기 같은 바보로 아나?
이곳은 10인용 포탈.
저 녀석이 다시 오면 지원 온 헌터는 들어오지도 못할 텐데, 다시 오긴 뭘 다시 온다는 건지.
재현이가 안전지대로 들어가고 나는 왼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뒤를 돌아보니 다행히 어그로가 무사히 넘어왔는지 흩어지지 않고 나를 계속 쫓아온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하나도 다행이 아니다.
아까 그 바보에게 여유가 있다고 말한 건 거짓말이니까.
심장이 미친 듯이 뛰는 게 느껴지고 숨은 턱 끝까지 차올랐다.
이젠 나도 거의 한계다.
놈들도 좀 지치지 않았을까 싶어 다시 한 번 뒤를 돌아봤는데… 하아.
놈들은 처음과 거의 똑같은 속도로 따라오고 있다.
병든 오크라더니 뭘 저리 잘 뛰는 건지….
이대로 도망치다 멈추게 되면 아예 칼질 한 번 못 하고 당할 것 같은데, 차라리 싸울까?
아니, 조금이라도 시간을 더 벌려면 뛰어야 한다.
칼질 한 번 못 하고 죽더라도 놈들이 내 시체를 먹는 동안은 어그로가 유지 될 테니까….
* * *
반장이 뛰자고 말했을 땐 안 그런 척하더니 역시 반장도 죽고 싶지 않았던 거구나, 생각하며 합리화를 하고 있었는데….
거의 다 와서 그런 말을 할 줄은 정말 상상도 못 했다.
진짜 내가 너무 한심해서 스스로 죽여 버리고 싶… 아니, 지금은 이런 생각을 하는 것도 사치다.
빠르게 안전지대를 통과해 포탈을 빠져나왔다.
"응? 학생, 왜 혼자 나와?"
"헉, 헉… 코드 레드예요. 이 주변에 있는 회복 마법이 가능한 가장 강한 마법사 불러 주세요."
"뭐라고? 숨 좀 쉬고 천천히 말해."
"코드 레드라고요! 회복 마법이 가능한 가장 강한 마법사 불러 주세요!"
있는 힘 없는 힘 다 써서 소리를 지르니 그제야 알아먹었는지 군인들이 빠르게 전화를 한다.
"학생, 지금 하사님이 전화 걸었어. 정확히 무슨 상황이야?"
"안에 사람들이 다 쓰러져서 반장이 혼자서… 아니, 그냥 회복 마법 쓰는 마법사 빨리 불러 달라고요!"
"하사님, 진짜 급한 것 같습니다. 얼마나 걸린답니까?"
"나도 말하고 있잖아. 네, 코드 레드입니다! 이 근방에 있는 회복 마법이 가능한 마법사 중에서 가장 강한… 아니, 가장 가까운 마법사로… 네, 알겠습니다."
"얼마나 걸린대요?"
"여기서 12~13분 거리에 사체 정리 중인 파티가 있다고 하니까 연락하고 출발하면 15분 안에 올 거야."
"15분이요? 더 가까운 곳은 없대요?"
"회복 마법 가능한 마법사는 그 거리가 제일 가깝다는데."
15분은 너무 길다.
반장이 검술반에서 상위권이긴 하지만 솔직히 나랑 그렇게 큰 차이가 나는 건 아니니까.
"군인 아저씨, 휴대폰… 아니, 그 차고 있는 시계 좀 빌려주세요."
"시계? 갑자기 왜… 아니, 이거 나 여자 친구한테 선물받은 거라 조금 그런데…."
"망가지면 똑같은 거로… 아니, 돈 모아서 더 좋은 거로 보상할 테니까 제발 빌려주세요. 저 다시 들어가야 되니까!"
"학생, 그게 무슨 말이야? 다시 들어간다니, 그럼 지원 오는 헌터는 어떻게 들어가라고."
"10분… 아니, 12분 지나면 다시 나올 거예요. 시간 없어요. 우리 반장 죽을 수도 있단 말이에요! 제발 빌려주세요…."
"김 하사님, 얼른 빌려주시죠. 사람이 죽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알아… 지금 풀고 있잖아."
시계를 차는 시간도 아까워 그대로 들고 시간을 확인하고 바로 포탈 안으로 들어왔다.
빠르게 안전지대를 지나쳐 아까 민하가 꺾었던 방향 쪽으로 달리자 저 멀리서 오크들을 끌고 뛰고 있는 민하가 보인다.
"반장! 나 다시 왔어!"
* * *
"반장! 나 다시 왔어!"
너무 힘들어 환청을 들은 건가 싶었는데 소리가 나는 쪽을 보니 이재현이 내 쪽으로 뛰어오고 있다.
나도 바보 같은 선택을 했지만 저 녀석은 정말 구제 불능의 바보다.
지원 요청은 했어도 10인 포탈이라 사람이 더 못 들어올 텐데 어쩌자고 다시 들어온 건지….
둘 다 죽자는 건가?
"반장, 교대하자!"
"교대는 무슨 교대야, 이 멍청아! 죽기 싫다며!"
"약속했잖아. 지원도 불렀어. 15분 정도 걸린다니까 교대하면서 시간 끌다가 시간 맞춰서 나가면 되잖아."
"너 15분 버틸 수 있어?"
"당연히 안 되지. 하지만 반장도 15분은 무리잖아. 그니까 서로 교대하다 14분 되면 1명이 나가면 되잖아."
"시간은 어떻게 잴 건데? 나 시계 없어."
"시계 빌려서 안전지대에 놔뒀어. 1시 8분 되면 나가면 돼. 그럼 이번엔 반장이 안전지대로 가는 거야."
구제 불능의 바보라고 생각했는데… 바보가 아니었다.
"안전지대에서 왼쪽으로 뛰다가 오른쪽 능선 가기 전에 꺾어서 삥 돌아. 오르막 없으니까 그게 제일 편할 거야."
"확인."
안전지대에 들어와서 그대로 주저앉았다.
진짜 죽는 줄 알았다고 생각하며 주위를 둘러보니 시계는 다행히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최대한 체력을 덜 쓰려고 기어가 확인하니 이제 겨우 12시 55분이다.
앞으로 13분을 더 버텨야 한다.
재현이가 3분 정도는 버텨 주지 않을까 싶었는데 상당히 위태로워 보인다.
하긴 저 녀석도 안전지대를 왔다 갔다 하고 설명까지 해야 했을 테니까 제대로 쉬진 못했겠지.
"반장! 교대!"
12시 57분.
충분히 회복되지 않아 온 근육이 비명을 질러 댔지만 조금만 버티면 모두를 구할 수 있을 테니 억지로 몸을 일으켜 안전지대 밖으로 나왔다.
"지금 57분이니까 1시 2분 되면 교대해."
"헥, 헥… 5분이나 더 버틸 수 있겠어? 아니, 잠깐… 나머지 6분은 나 혼자 버티라고?"
"지금도 겨우 2분 버텨 놓고 6분은 무슨. 그래도 5분 쉬면 3분은 뛸 수 있지? 1시 5분 되면 다시 교대해 줄 테니까 네가 8분에 나가."
"아, 알았어."
어련히 알아서 바꿔 줄 텐데 말을 많이 하게 만들어 짜증이 나지만 꾹 참고 5분을 버텨 내고 다시 교대를 했다.
진짜 5년 같은 5분이었다고 생각하고 한숨 돌리려는데, 저 녀석 다리를 절뚝인다.
아까 달리다 삔 것 같은데… 삐었으면 삐었다고 말을 할 것이지.
저런 식이면 금방 따라잡힐 것 같아 시계를 확인하니 이제 막 1시 4분이 됐다.
지금 교대하고 저 녀석을 내보내면 지원이 올 때까지 내가 버틸 수 있을까?
겨우 1분 쉬고 5분… 아니, 헌터가 도착하지 않았다면 5분 이상을 버텨야 하는 건데….
몸은 천근만근이고 진짜 죽을 것 같았지만 어쩔 수 없다.
"이재현, 교대할 테니까 너 지금 나가!"
"후욱… 벌써 5분 됐어?"
"이 등신아. 다리 다쳤으면 말을 해야지! 힘든데 말 많이 하게 만들지 말고, 지원이 빨리 왔을 수도 있으니 지금 나가."
"그, 그럴 수도 있겠네. 괜찮겠어?"
"괜."
…찮다고 이 세 음절 말할 힘도 아껴야 한다.
* * *
"제가 더 뛰었어야 하는 건데… 그랬으면 반장이 그렇게 되진 않았을 텐데…. 전 머저리 등신이에요."
이야기를 하던 재현이는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이재현, 왜 울어? 반장 안 죽었어."
"팔이… 팔이… 없었단 말이에요."
아, 이 녀석도 봤겠구나.
"네 잘못 아니니까 울지 마."
"아니에요…. 저 때문에, 제가 바보 등신이라서…."
"누가 그래? 넌 등신도 아니고 바보도 아니고 머저리도 아니야. 네가 아니었으면 팔이 아니라 목숨을 잃었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잖아. 너 때문에 민하가 팔을 잃은 게 아니라 네가 민하의 목숨을 구한 거야.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네 잘못 아니야."
내 잘못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