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데미의 검술 강사가 되었다 (107)
흔히 소설에 나오는 타락 천사는 천계에서 죄를 짓고 쫓겨나 마족들의 편이라는 이미지지만 루시엘은 다르다.
…선택을 받은 자, 모든 걸 얻어 멸망의 위에 우뚝 서리라.
가장 영광스러운 자는 멸망을 저지하기 위해 스스로 타락의 길을 택했다.
전 세계의 언어학자들이 유일하게 해석해 낸 이 2개의 문장은 복선이다.
멸망은 최종 보스인 마왕을 가리키며 선택을 받은 자는 당연히 주인공이다.
선택을 받은 자가 있다면 당연히 선택을 하는 자도 있다.
주인공을 선택하는 자이자 또 다른 문장에 있는 스스로 타락의 길을 택한 가장 영광스러운 자.
그게 바로 루시엘이다.
* * *
바깥에 인기척이 느껴지는데 우리엘 녀석인 것 같다.
"루시엘, 나 가브리엘에게 조금 전에 네가 마계로 간다는 이야기를 들었어.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이야?"
"말 그대로인데, 왜?"
"너 지금 제정신이야? 지난 전쟁에서 죽은 천사들의 수가 얼마나 많은지 너도 알잖아! 우린 전쟁할 여유가 없어. 쳐들어갈 게 아니라 대비를 해야 한다고!"
우리엘 이 자식, 가브리엘의 이야기를 제대로 듣지도 않고 뛰쳐나온 모양이다.
얼굴은 참 잘생겼는데 역시 성격이 너무 급하다.
"나도 알아. 우리가 여력이 없다는 걸. 그래서 가는 거야."
"지금 나랑 장난해? 그걸 아는 녀석이 지금 마계로… 뭐, 최선의 방어는 공격이다 이거야?"
"전쟁을 하러 가는 게 아니야. 전쟁을 막으러 가는 거지. 가는 건 나 혼자야."
"뭐라고? 루시엘 네가 아무리 대천사장이라고 해도 혼자서 어떻게…."
"대천사장은 가브리엘이 맡게 될 거야. 너랑 가브리엘이랑 둘 중에 고민했는데, 지금 이러는 걸 보니까 너한테 안 맡기길 잘했네."
"그건 또 무슨 소리야?"
"타락하면 이곳에 올 수 없잖아."
"타, 타락? 네가 드디어 미쳤구나. 마족 놈의 편에 서겠다면 여기서 내 손으로 널…."
"진정해. 마족의 편에 설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어."
"그럼 도대체 왜…."
"마계수의 수호자가 될 거야."
"어?"
"너도 직접 싸웠으니까 알 거 아니야. 이번에 마과를 먹은 마왕의 힘이 얼마나 어마어마했는지. 대천사 열이 달려들어서 여섯이 죽고 우리 넷만 남았지. 그리고 죽이지도 못했어."
"미안…. 내가 천 년 전에 신계수만 잘 지켰어도…."
"그걸 탓하려는 게 아니야. 마족 놈들이 영악하게 머리를 잘 쓴 거지. 아무튼 천 년 뒤 다음 마왕이 다시 마과를 먹는다면 우리가 막을 수 있을까?"
"무슨 의미인지 이해했어. 하지만 마기에 완전히 잠식당하면 너도…."
"마계수의 수호자가 된 뒤에 바로 공간을 분리해 마기의 침식을 늦출 거야. 우리 넷 중에선 정신력은 내가 제일 낫잖아? 적어도 1만 년은 버틸 거야. 그 시간이면 우리 신계수도 다시 자라겠지."
"하지만 1만 년 뒤에는 네가 적이 될 텐데…."
"마기에 완전히 잠식될 것 같으면 스스로 목숨을 끊을 테니 걱정하지 마."
* * *
"나는 네 제자 같은 거 할 생각 없는데?"
못생긴 사람들에겐 못생겼다고 하는 건 정말 잔인한 일이고 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하지만 잘생긴 사람들은 못생겼다는 소리를 들어도 웃으며 넘어가는 사람이 많다.
본인들도 실제로는 못생기지 않았다는 걸 아니까.
루시엘은 내가 기준 미달이고 못생겼다고 했지만 나는 절대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처음에 주인공이 아니라 강신혁이 되어서 멘털이 터졌을 때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이유 중의 하나가 강신혁의 잘생긴 외모였으니까.
강신혁으로 살면서 어디 가서 못생겼다는 소리를 들어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저 자식 눈이 비이상적으로 높은 거지, 결코 내가 잘생기지 않은 게 아니다.
하지만, 나는 다른 잘생긴 사람들처럼 웃고 넘길 수가 없다.
내가 처음부터 잘생긴 건 아니었으니까.
그래도 학창 시절에 나랑 짝이 됐다고 우는 여자애는 없었으니 주변 사람들에게 혐오감을 주는 외모는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모태 솔로도 아니었고….
물론 그래도 잘생겼다고 하기엔 무리가 있다.
전생에 만났던 애인 중에 먼저 좋아한다고 고백한 사람은 한 명도 없으니까.
잘생겼으면 방구석에 틀어박혀 글만 쓰다 죽진 않았겠지.
심지어 염라대왕에게 부탁까지 해서 얻은 외모다.
그런데, 뭐?
기준 미달에 못생겼다고?
자기가 뭔데 날 평가해.
짜증이 확 치솟는다.
홧김에 즉석에서 내뱉은 말은 아니다.
애초에 루시엘이 나를 보고 푹 빠져서 흔쾌히 마법을 가르쳐 준다고 해도 루시엘을 스승으로 모실 생각은 전혀 없었다.
같은 하늘에 태양이 2개일 수 없는 것처럼 2명의 사부를 섬길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웃기는 녀석이네. 어차피 거둘 생각도 없지만 제자도 아닌 녀석한테 내가 마법을 가르쳐 줄 것 같아?
외모로 호감을 샀다면 좀 더 쉽게 이야기를 진행할 수 있었을 텐데… 그 부분 약간 아쉽지만 나는 충분히 루시엘을 설득할 수 있다.
내공을 끌어올려 발산해 허공에 얽혀 있던 기운들을 소멸시켜 마법을 해제했다.
일단 제대로 이야기를 하려면 나도 어느 정도 실력이 있다는 걸 보여 줘야 할 테니까.
―말도 안 돼…. 내 마법을 해제했다고?
그리 어렵지 않았는데 루시엘은 상당히 놀란 표정이다.
"말이 안 되긴 왜 안 돼? 마법이 주력도 아니라면서. 거래를 제안할게. 네가 마법을 가르쳐 준다면 난 네 문제를 해결해 주겠다."
―무슨 문제? 그딴 거 없는데?
"다 알고 있으니 억지로 숨길 필요 없다. 마왕에게 당한 부상, 아직 회복되지 않았잖아?"
원작에서 주인공들에게 루시엘은 300년 전에 마왕과 싸웠고 그때 입은 부상을 치료하기 위해 잠들었다가 깨어난 거라 말했다.
주인공들과 깨어났을 때는 거의 치료가 끝난 상태였고, 김도현이 내공을 이용해 남아 있던 마왕의 마기를 몰아내 치료한다.
―그, 그걸 어찌 네 녀석이…! 인간이라 아닐 거라 생각했는데, 네 녀석은 역시 마왕의 끄나풀이었구나!
"마왕이랑은 관련 없다."
―속지 않아! 어차피 네 녀석을 해치우고 다시 치료하면 그만이야. 하등한 인간 주제에 누가 누굴 돕겠다고.
살짝 짜증이 나지만 민하를 생각해 참았다.
원작에서도 루시엘은 자기가 마음에 든 김도현에게만 꼬리를 살랑살랑 흔드는 강아지였지. 이지성에겐 하등한 인간이라며 마법을 가르치는 내내 엄청나게 구박하고 무시했다.
따지고 보면 자기가 그렇게 좋아하는 김도현도 인간인데….
아무튼, 마음에 안 드는 대상에게는 엄청나게 까다롭게 구는 녀석이라는 건 알고 있기에 당연히 이렇게 나왔을 때 핑곗거리도 준비해 뒀다.
"너 스스로 치료하는 건 시간이 꽤 걸릴 텐데? 그전에 마왕이 다시 오면 감당할 수 있겠나?"
아까보다 훨씬 더 당황한 표정이다.
사실 마왕은 이곳에 올 수 없다.
검은신전은 이미 지구로 넘어온 상태니까.
나중에 지구로 마왕이 강림을 하긴 하지만 대충 계산해도 10년은 남았으니, 이곳의 시간으로는 300년도 넘게 남은 거다.
어차피 60년 뒤엔 주인공들이 올 테고 녀석이 자가로 치료해도 100년 정도면 전부 치료를 할 수 있겠지만 이 사실을 아는 건 오직 나뿐이다.
혹여 루시엘이 이 공간을 벗어나 조사를 한다면 알아차릴 수도 있겠지만 그럴 일은 없다.
마계수의 수호자는 마계수 근처를 벗어날 수 없으니까.
마왕의 능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루시엘이라면 내 제안을 거절할 수 없다.
"원한다면 내가 먼저 치료를 해 줄 수도 있다. 마법은 네가 회복되면 가르쳐 주는 거로 하고. 어때?"
다짜고짜 나를 죽이려던 녀석이니 먼저 치료해 줬다가 입 닦고 모른 척하는 뒤통수를 맞을 가능성도 있지만 루시엘의 성격을 생각하면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다.
심각한 얼빠에 성격도 조금… 아니, 상당히 지랄 맞긴 하지만 한번 신뢰를 하면 끝까지 믿는 성격이다.
―네가 나를 치료할 수 있다고? 치료하겠다고 접근해서 허튼수작 부리려는 거 아니야?
아오, 진짜 답답해 죽을 것 같다.
"그럼 어떡하라고? 먼저 치료도 해 주겠다고 했는데. 좀 믿어 주지?"
―난 못생긴 인간의 말은 안 믿는다는 주의야. 그리고 거래도 격이 맞아야 하는 법이니 증명해.
"무슨 증명?"
―네 녀석이 나와 싸워 이긴다면… 아니, 이건 말도 안 되는 조건이니까… 그래. 네가 딱 세 번만 내게 공격을 성공시킨다면 널 믿어 볼게.
살짝 당황스럽다.
루시엘은 강하다.
원작의 설정에 따르면 루시엘은 타락하기 전에 천계의 실질적 우두머리라고 할 수 있는 대천사장이었다.
마계수의 수호자가 되며 타락했지만 오히려 힘은 더 강해졌다.
비록 부상을 당하긴 했지만 마과를 노리던 최종 보스인 마왕까지 물러나게 만들 정도니까.
무엇보다 그녀의 제자이자 소설의 주인공인 이지성 또한 그녀와의 대련에서 단 한 번도 이기지 못한다.
2학년 때만 그런 게 아니라 원작 후반부 기연을 다 챙기고 성장까지 마친 상태의 이지성이지만 루시엘에게는 전혀 상대가 안 된다.
그런 사실을 알기에 루시엘과 싸운다는 건 아예 생각도 안 하고 지금까지 열심히 이야기를 했던 건데….
그래도 단 세 번이라면 가능하지 않을까?
"저기… 싸우는 거하고 치료하는 건 상관없지 않아? 거기다 넌 지금 부상을 입은 상태고 혹시라도 싸우다 부상이 악화되면…."
―누가 누굴 걱정하는 거냐? 못생기고 하등한 인간 주제에. 내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더라도 네깟 놈 하나쯤은 문제없어."
"하지만…."
―주제도 모르고 거래 운운하더니. 이제 보니 조금이라도 더 살아 보려고 거짓말을 한 거였어?
하… 웬만하면 참으려고 했는데, 실은 아까부터 계속 참고 있었지만 이젠 한계다.
바닥에 떨어져 있던 나뭇가지를 하나 주워 들었다.
아까부터 나를 죽이겠다고 했으니 처음부터 다른 선택지는 없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그런 썩어 비틀어진 나뭇가지로 날 상대하려고? 아! 마계수의 나뭇가지라 무슨 특별한 효과라도 있는 줄 알았어? 푸풉, 말라 비틀어진 나뭇가지에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잖아. 검이라도 하나 줄까?
그딴 건 기대도 안 했다.
"필요 없으니까 시작하지."
말과 동시에 루시엘을 향해 쇄도했다.
내 멋대로 시작을 했지만 정정당당하게 싸워선 이길 수 없을 테니까.
루시엘에게 도달해 어깨를 향해 나뭇가지를 휘둘렀다.
―뭐 하자는 거야? 데미지가 없으면 맞아도 공격이라고 안 칠….
서걱.
팔이 잘리며 하얀 피가 쏟아진다.
한 번은 너무 쉽게 따냈다.
그대로 어깨까지 베어서 두 번째 공격을 성공시키려 했지만 걸리는 느낌이 없다.
블링크인가?
잘린 팔은 바닥에 남아 있지만, 녀석은 재생 마법을 쓸 수 있으니 큰 상처는 아니다.
위치를 추적하기 위해 내공을 퍼뜨리려는데 뒤쪽에서 살기가 느껴진다.
―이 자식이 감히!
쿵!
루시엘이 아니라 카이나칸이다.
거대한 발을 내가 있던 자리에 내려찍어 크레이터를 만들었지만, 한발 먼저 앞으로 굴러 피했다.
―너 특이한 기술을 쓰네.
"특이한 기술이고 나발이고, 2:1은 비겁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마과가 아깝긴 하지만 2:1은 정말 승산이 없어 카이나칸 먼저 처리하려 했는데, 갑자기 녀석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지며 루시엘이 나타났다.
하아, 어이가 없다.
팔을 자른 지 아직 1분도 안 됐는데 그새 재생했는지 멀쩡하다.
―미안, 방금 건 그 녀석 독단이었어. 하지만 너도 마음대로 시작했잖아.
무시하고 다시 루시엘을 향해 쇄도했지만 도착한 순간 또다시 사라졌다.
거지 같다.
추적보다는 자세를 잡고 기습에 대비하는데 아까처럼 몸이 무거워지는 느낌이다.
바로 해제하려 했지만 왼쪽에서 살기가 느껴져 그대로 몸을 옆으로 굴러 피했다.
콰앙!
내가 있던 자리의 땅이 깨끗하게 갈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