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데미의 검술 강사가 되었다 (125)
오래 보고 싶다
―난 중앙에 가 있을 테니까 넌 저쪽에서 내가 손 들어서 신호 보내면 마법진에 마나 불어넣어 줘.
루시엘이 가리키는 위치로 가서 손을 대고 대기하고 있는데 녀석이 마법진 일부를 지우고 손을 들어 신호를 보냈다.
신호에 맞춰 내공을 주입하는데… 뭐지?
완전히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느낌이다.
나뿐만 아니라 루시엘도 마나를 주입하는 것 같은데 마법진엔 여전히 변화가 없다.
도대체 무슨 마법이기에….
거의 한계까지 도달해서 무리라고 하려 했는데 마법진이 푸른빛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조금만 버티면 마법이 발동될 것 같아서 이를 악물고 참아 내는데 마법진 중심에 모여 있던 마나가 거칠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콰앙―!
주입을 멈추고 위험하다고 경고하려 했지만, 폭발이 한발 빨랐다.
굉음과 함께 흙먼지가 휘날린다.
다행히 바로 손을 떼고 호신 강기를 일으켜 보호를 해서 피해를 입지 않았다.
마법진 중앙에 있던 루시엘 녀석은 괜찮으려나?
바람 마법으로 먼지를 날려 보니 루시엘 녀석, 멀쩡하긴 한데 표정이 아까보다 더 창백하다.
"야, 괜찮냐?"
―마나는 충분했는데 이론이 잘못됐던 것 같네.
"도대체 무슨 마법인데?"
내가 녀석에게 배운 마법 중에 가장 강력한 공격 마법도 이 정도로 마나를 많이 잡아먹진 않는다.
―설명은 나중에 해 주겠다고 했잖아. 다시 수정되면 부를 테니까 좀 떨어져서 마나나 다시 채워.
누가 들으면 마나 맡겨 놓은 줄 알겠네.
이런 식으로 나오면 협력 안 한다며 재차 물어봤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들은 체도 안 하며 바닥에 도형과 룬 문자들을 지우고 쓰고를 반복한다.
혼자서라도 알아보려고 마법진을 살펴봤지만 영 모르겠다.
나도 루시엘에게 마법을 배우긴 했지만 이런 식으로 마법진을 사용하는 마법은 배우진 않았으니까.
처음 보는 룬 문자도 있고 수식도 상당히 복잡하다.
포기하고 운기를 하는데 10분도 안 돼서 녀석이 다시 나를 툭툭 건드린다.
재차 시도했지만 또 실패, 실패, 실패.
도대체 몇 번을 실패한 건지 모르겠다.
하아…. 죽을 것 같다.
한 번 시도할 때마다 내공을 거의 한계까지 불어넣어야 하고 실패할 때마다 폭발을 하니 여유가 없다.
사부가 떠난 뒤 무형검까지 자유롭게 쓸 수 있게 되며 기존의 경지에서 한 단계 더 발전하긴 했지만 내 내공은 루시엘처럼 무한이 아니니까.
루시엘의 상태도 그리 좋지 않다.
나는 가장자리에서 내공을 불어넣는데 루시엘은 마법진의 중앙, 폭발의 중심점에 있으니까.
게다가 나는 중간중간 운기라도 했지 녀석은 한 번도 쉬지도 않고 수정을 하고 수정이 끝나면 바로 시도를 했다.
"루시엘, 안 힘드냐? 좀 쉬었다 하자."
내공은 계속 회복이 되고 있긴 하지만 정신적으로 한계다.
그래도 몸이 힘들면 오히려 정신이 맑아진다더니 아까부터 세진이 고백 때문에 복잡했던 머리가 조금은 가벼워진 느낌이다.
―난 괜찮으니까 말할 시간에 마나나 채워.
저 독한 녀석 또 들은 체도 안 하고 마법진만 보고 있다.
"지금 안 쉬면 더는 협력 안 할 거야. 너도 좀 쉬어."
―난 괜찮다니까.
보지도 않고 이야기하는데 도저히 안 될 것 같아 허리를 숙이고 마법진을 수정하는 루시엘에게 다가갔다.
집중을 해서 그런지 내가 접근하는 것도 모르는 것 같았는데 그대로 녀석을 뒤에서 껴안았다.
―뭐, 뭐 하는 거야?
몸을 부르르 떠는 걸 보니 많이 놀란 눈치다.
그래도 밀쳐 내지 않는 게 역시 루시엘도 상당히 지친 것 같다.
"너도 힘들잖아. 무슨 마법인지 모르겠지만 그만해. 네 날개 새카매진 거 안 보여?"
루시엘이 마계수의 수호자이긴 하지만 마계수가 루시엘에게 아무런 대가 없이 마력을 제공하는 건 아니다.
루시엘이 마계수의 수호자가 되며 타락하긴 했지만, 완벽히 타락한 건 아니니까.
완벽하게 타락하면 마족과 똑같… 아니, 마족보다 더 심각하다.
아예 대화 자체도 통하지 않는, 그저 살육의 화신이 되니까.
마계수에게 마력을 뽑아 쓰면 쓸수록 그 잔재가 루시엘의 육체를 침식해 타락을 가속한다.
물론, 지난번에 내가 치료해 준 마왕이 남긴 상처만큼 위협적인 건 아니다.
하지만 마계수로 인한 타락의 침식은 내가 해결해 줄 수 없다.
외전까지 보진 못하고 이곳에 왔지만 《헌터 학교의 망나니 열등생이 되었다》는 일단 해피 엔딩으로 끝난다.
주인공과 주변 모두 행복하게 끝나기에 이 세상을 택했지만, 주인공 편임에도 딱 1명 불행한 녀석이 있다.
그게 바로 루시엘이다.
애초에 예정된 불행이었다.
루시엘은 김도현을 보고 첫눈에 반한다.
도현이를 만날 때마다 추파를 던져 대며 애정 표현을 하지만 도현이 그 자식은 일편단심 민들레니까.
에필로그였나?
거의 완결 부근에서 이지성이 루시엘에게 찾아가 마왕을 물리쳤다고 말하고 대련을 하다가 루시엘에게 된통 깨지는 장면이 나온다.
실력으로는 안 되니 루시엘이 김도현을 좋아한다는 걸 아는 이지성이 김도현이 곧 결혼을 한다는 소식으로 루시엘을 약 올린다.
그 소식을 들은 루시엘은 한동안 말이 없다가 김도현을 불러 달라고 하고.
이지성은 찝찝해하지만 루시엘이 마지막이라며 간곡히 부탁하자 결국, 불러 준다.
이지성의 우려와 달리 루시엘은 김도현에게 구차하게 매달리진 않는다.
결혼을 축하하며 김도현에게 한 가지 부탁을 한다.
자신이 완전히 타락했을 때 죽여 달라는.
물론 죽는 장면은 나오지 않고 이 이야기는 아주 짧게 언급된다.
같은 주인공이긴 하지만 원작의 진짜 주인공은 김도현이 아닌 이지성이니까.
―지금 날 걱정하는 거야?
"그래. 도대체 뭐 때문에 이렇게 무리하는진 모르겠는데 너 무리하면 할수록 마계수 마력의 침식이 빨라지잖아."
―그, 그걸 네가 어떻게….
루시엘 녀석, 상당히 놀란 표정이다.
"어떻게 알긴, 지난번에 네 상처를 치료한 게 누군지 잊었어?"
―아, 그랬지. 이 정도는 괜찮으니까 얼른 이거 놔.
풀어 내려고 발버둥을 치지만 어림없지.
오히려 더 꽉 끌어안았다.
―아… 아파.
검강을 맞고도 멀쩡했던 녀석이 엄살은.
"아프기는. 무리하지 않겠다고 약속해. 약속하면 풀어 줄게."
―내, 내가 왜 그런 약속을….
"그야, 난 너 오래 보고 싶으니까."
―그… 그게 무슨 뜻이야?
무슨 뜻이긴. 이렇게 급하게 무리하다가 만약에 2년 뒤 주인공들이 찾아오기 전에 완전히 타락해 버리면 미래가 없으니까.
"바보냐? 방금 말했잖아. 오래 보고 싶다고."
앞선 이유도 있지만 역시 가장 큰 이유는 오래 보고 싶어서다.
사부를 그렇게 갑자기 보내고 나니 자연스럽게 주변을 돌아보게 됐다.
화기애애할 때보다 티격태격할 때가 훨씬 많고 때로는 귀찮다고 생각도 하지만 루시엘과는 정이 상당히 많이 들었다.
미운 정도 정이라더니….
이 녀석은 사부처럼 허망하게 보내고 싶지 않다.
물론 루시엘이 사부처럼 말도 없이 등선을 하진 않겠지.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녀석이 완전히 타락해서 나를 못 알아보는 날이 온다면….
그때는 정말 슬플 것 같다.
뭐, 내가 먼저 늙어 죽을지도 모르지만….
―아, 알았어. 약속할 테니까 풀어 줘.
포옹을 풀어 주니 내게 다가와 어깨를 누른다.
"약속하겠다더니 복수하는… 악!"
퍽!
루시엘 녀석 갑자기 정강이를 걷어찼다.
공격을 할 거라곤 전혀 예상 못 해서 제대로 얻어맞았더니 뼈가 부러진 것 같은 느낌이다.
바로 허리를 굽혀 정강이에 회복 마법을 쓰려는데 이마에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진다.
―약속하라며. 너도 얼른 해.
눈을 질끈 감고 얼굴을 들이민다.
자기는 아무렇지도 않게 해 놓고서 내 입술이 자기 이마에 닿는 건 그렇게 싫은지 얼굴이 완전히 빨갛다.
진짜, 웃기는 녀석이다.
딱!
바로 딱밤을 먹였다.
―아악! 뭐 하는 거야?
이마를 부여잡고 눈을 홀긴다.
"네 녀석, 나를 먼저 때려 놓고 안 맞을 줄 알았어? 그리고 저번에 내가 인간들의 약속 방법 알려 줬을 텐데."
―지난번에는 천계 식으로 했잖아.
남의 정강이를 뼈가 부서질 정도로 쳐 놓고 고작 딱밤 한 대 맞았다고 아주 입이 툭 튀어나왔다.
"그러니까 이번엔 인간 식으로 해야지."
새끼손가락을 내밀자 녀석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손가락을 건다.
―그럼 다음에는 우리 식으로 하는 거야.
"알았다. 내공을 하도 썼더니 뱃가죽이 등가죽에 붙을 것 같네. 약속도 했으니까 가서 밥이라도 먹자."
―먹고 와. 난 마법진 좀 보고 있을게.
"쓰읍, 조금 전에 약속해 놓고 그러면 쓰나? 초코바도 한 박스 꺼내 줄 테니까 따라와."
말을 하며 손을 내밀었다.
초코바를 주겠다고 해서 그런지 순순히 내 손을 잡는다.
―두 박스 줘. 츠윅스랑 쿨브레이크.
"맡겨 놨냐?"
* * *
―다음엔 언제 올 거야?
"한 20일쯤? 조금 늦을 수도 있는데 어쨌든 한 달 안엔 올 거야."
―그럼 그때까지 이론 완성해 놓을게.
"혼자 시도하지 말고 이론만 수정해."
―알았으니까 잔소리하지 마. 약속했잖아.
이틀간 밥 먹고 자는 시간을 빼고 루시엘의 마법을 도왔지만, 계속 실패했다.
그리고 여전히 루시엘은 내게 어떤 마법인지 알려 주지 않았다.
성공하면 알려 주겠다는데 도대체 무슨 마법이길래….
뭐, 그래도 녀석의 마법 연구를 도우며 내공을 매번 한계치로 끌어 쓰다 보니 내공 회복 속도가 엄청난 수준은 아니지만 그래도 확실히 조금 빨라지긴 했다.
이런 식으로 내공 회복력을 올리는 건 사부에게도 듣지 못했던 거라 좀 신기하다.
내 수준에서는 작은 발전이라도 엄청 대단한 거니까.
하지만 루시엘을 돕는 데 너무 열중하다 보니 막상 세진이의 고백에 어떻게 답해야 할지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안 가?
뭐, 어떻게든 되는 대로 부딪쳐 봐야지.
"다녀올게."
말과 동시에 나뭇잎을 찢었다.
익숙한 화장실인데 사람은 없다.
하긴, 루시엘과 이틀을 보냈으니 이곳도 대략 한 시간 반 정도는 지났다.
그때까지도 화장실에 계실 리가 없지. 환기가 잘돼서 그런지 냄새(?)도 안 난다.
아직 어머님이 안 가셨을지도 몰라 귀를 문에 가져다 댔다.
"세진아, 엄마 오늘 자고 가도 되지?"
역시, 아직 안 가셨구나.
일단 이 자리에 계속 있으면 안 될 것 같아 워프 마법을 사용해 지하 주차장에 세워 둔 내 차로 이동했다.
운전석에 앉아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일단 껐다 켜 시간부터 초기화 하려 했는데 톡이 몇 개 와 있다.
[선생님, 어디세요?]
[선생님, 혹시 아직 집이세요?]
[선생님?]
[저기, 선생님?]
[왜 아무 말도 안 하세요?]
[어머니 주무시고 가신데요. 혹시 집이시면 어디 계시는지 알려 주세요. 제가 도와드릴게요. 답장 좀 주세요.]
껐다 켜서 시간을 초기화하니 1시간 40분 정도 지났다.
[아, 미안. 블링크로 빠져나왔어. 마나를 너무 썼는지 피곤해서 깜빡 잠들었어.]
답장을 보내 놓고 시동을 걸고 출발을 하려는데 녀석에게 전화가 왔다.
"어… 어머니랑 같이 있는 거 아니야?"
―잠깐 길드 일 핑계 대면서 통화한다고 밖에 나왔어요. 어떻게 나가신 거예요? 저 엄마가 바로 말릴 새도 없이 화장실로 가셔서 십 년 감수했는데.
"아, 뭐… 블링크로 빠져나왔지."
―블링크는 시야가 보여야 쓸 수 있는 거 아니에요? 저희 집 화장실은 창 없는데.
그랬나?
"뭐, 다 방법이 있어."
―선생님은 참 비밀이 많으시네요. 저기 오늘 일은… 선생님? 듣고 계세요?
"응. 듣고 있어."
―오늘은 그냥 아무 일도 없었던 거로 해 주실 수 있을까요?
…뭔가 말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미묘한 심정이다.
굳이 표현하자면 안도하면서도 미안한 마음?
나는 바보가 아니다.
세진이가 어떤 마음으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안다.
게다가 내게는 이미 이틀 전의 일이지만 녀석에게는 2시간도 지나지 않았을 텐데….
이대로 알겠다고 대답을 하는 건 너무 비겁한 것 같다.
―선생님?
잠시 고민을 하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