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데미의 검술 강사가 되었다 (129)
세진이 녀석, 아공간 마법을 써서 내가 음식들을 꺼내는 게 신기했는지 한참을 바라본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치킨과 윤기가 좔좔 흐르는 동파육과 마파두부, 참깨라면과 만두 그리고 감자깡.
사부가 좋아하던 것들로만 준비했다.
제사상치곤 약간 이상한 조합이긴 하지만… 뭐, 진짜 제사는 아니니까.
"절하자."
"앗, 넵. 저기… 선생님, 그럼 절은 몇 번 할까요?"
"글쎄? 그래도 절은 두 번 해야 하지 않을까?"
나도 솔직히 구체적인 순서는 모른다.
제사야 가 봤지만, 순서까지 따로 배운 적은 없으니까.
나이 들면서 사이가 틀어지며 아예 안 가기도 했고.
뭐, 사부가 진짜 죽은 것도 아니고 신선이 된 거니 내 식대로 해도 되겠지.
그래도 대충 기억나는 대로 절을 하고 사부가 좋아하던 죽엽청과 작은 잔을 하나 꺼내 약간 따라 비석 주위에 뿌렸다.
세진이에게도 하게 하고.
"좀 먹을래?"
원래 제사 다 끝나면 제사 음식을 조금씩 나눠 먹었던 기억이 있어 세진이에게 권했다.
하지만 세진이는 고개를 저으며 거절한다.
제사 음식이라 찝찝해하는 느낌인가?
과자를 하나 집어 먹고 나머지는 다시 아공간에 넣으려 하다가 그대로 뒀다.
"그만 갈까?"
"네? 그럼 이 음식들은 어떻게…."
"그냥 둬도 돼. 내가 나중에 와서 치울게."
아까 포탈에서 들어왔을 때 그 광경을 사부가 만든 거라면 혹시 나중에 또 올지도 모르니까.
어쩌면 지금도 와 있는데 내 눈에 안 보이는 걸 수도 있고….
세진이에게 답도 들려줘야 하니 치우는 건 나중에 해야겠다.
"아, 네. 태사부님, 내년에 또 올게요."
"내년?"
"제사는 매년 지내는 거 아니에요?"
"그래."
자주 오면 우울해질 것 같지만 1년에 한 번 정도라면 괜찮을 것 같다.
세진이와 함께 포탈을 빠져나왔다.
사부에게 세진이를 보여 주는 것도 끝냈으니 이젠 답을 줄 시간이다.
"저, 선생님…."
"잠시만 손 좀 줄래?"
"앗, 넵."
이런 첩첩산중에서 이야기하는 건 아닌 것 같아 세진이의 손을 잡고 워프 마법을 사용했다.
시야가 순식간에 바뀐다.
"서, 선생님? 여긴 어디에요?"
"도쿄타워."
도쿄타워 전망대는 아니고 수학여행 때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 올라왔던 메인 데크 위쪽 외부다.
조용하고 분위기 있는 장소가 없을까 생각하다 보니 이곳이 떠올랐다.
"도, 도쿄타워요?"
"혹시 고소공포증 같은 거 있어? 그럼 다른 곳으로…."
"아니요. 도쿄타워면 여기 일본이라는 소리잖아요."
"워프 마법은 아까 설명했잖아."
"이렇게 먼 곳도 갈 수 있는 건진 몰랐어요."
"내가 가 봤던 곳이라면 어디든 상관없어. 별로면 그냥 집으로 갈까?"
"아니에요. 여기 경치 좋은데요. 높아서 그런지 덥지도 않고."
"그래."
확실히 경치 하나는 예술이다.
살짝만 발을 헛디뎌도 위험하지만 세진이도 나름 절정고수 수준은 되니 괜찮은 것 같다.
"저기…."
"저…"
"먼저 말씀하세요."
이젠 정말 답을 해야 할 시간이다.
"그래. 언제부터였어?"
"네?"
"언제부터 나를 선생님이 아니라 이성으로 생각한 거냐고."
"…잘 모르겠어요. 처음에는 그냥 잘생긴 선생님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그게 뭐야? 그럼 그동안 여기저기서 우리 둘이 그렇고 그런 사이라고 오해받아 추궁당했던 거 기억해?"
"아, 네."
"그럼 우리가 뭐라고 해명했는지도 기억하겠네."
"스승과 제자라고…."
"맞아. 그리고 난 해명처럼 세진이 널 단 한 번도 학생이 아닌 이성으로 생각한 적이 없었어."
"그렇군요…."
세진이의 안색이 급격히 안 좋아졌다.
"지난번에도 약간 당황스러웠어. 고양이가 너일 거라곤…."
"그, 그때는 길드에 같은 팀원 언니가 상황을 잘 모르고 조언을 해 준 대로 한 거라… 잊어 주세요."
"음, 그래도 싫은 건 아니었는데? 전혀 생각을 못 했던 거라 반전 매력? 솔직히 귀엽긴 했지."
"어엇…. 놀리지 마세요."
세진이 녀석, 얼굴은 물론 귀까지 빨갛게 물들었다.
처음에는 거절하는 쪽으로 마음이 더 기울었다.
아까 했던 말처럼 나는 단 한 번도 세진이를 이성으로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세진이가 성인이라고 해도 시작은 학교에서 학생과 선생으로 만났고 계속 주변에 아니라고 하기도 했고.
게다가 내게 고백한 건 세진이 혼자가 아니니까.
하지만 몇 날 며칠 생각을 하다 보니 깨달을 수 있었다.
내가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는 것 자체가 문제였다는 걸.
만약 결혼이라면 이런저런 조건을 따질 수도 있지만, 연애는 서로가 좋으면 그만이다.
내가 연애를 안 한 지가 오래돼서 그런지 너무 어렵게 생각하고 있었다.
연애한다고 다 결혼하는 것도 아니고.
너무 가벼운 마음도 안 좋겠지만 처음부터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으니까.
오빠, 오빠 하다가 아빠, 아빠 된다는 말도 있고.
애초에 나도 스물여섯으로 창창한 나이고, 세진이는 이제 고작 스무 살이니까.
그래서 단순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김 선생이나 세진이 둘 다 이성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지만, 당연히 호감은 있으니 더 좋아하는 사람을 선택하면 된다.
"저기… 아까 싫은 건 아니었다고 하신 거 진심이시죠?"
"어?"
"그, 그런 거라면 제 마음 받아 주시겠다는 거라고 이해해도 될까요?"
잔뜩 기대하는 눈치인데 녀석도 눈치챈 모양이다.
함께한 기간만 따진다면 김 선생과 더 오랜 시간을 보내긴 했다.
작년 여름부터 포탈 공략도 같이 다녔고 세진이 보강도 꽤 많이 도와줬으니까.
하지만 마음이라는 게 단순히 오래 알았다고 더 깊어지지는 않는다.
물론 김 선생은 이번 재생 마법도 그렇고 내게 많은 도움을 줬다.
포탈 공략 초기에 포탈 등급이 올라가 오우거가 나왔을 때 이설 씨가 도망가자고 했는데 그 의견에 따르지 않고 나를 찾으러 온 적이 있다.
오우거 어그로가 끌리는 바람에 도움은커녕 트롤링에 가까웠지만.
김 선생에겐 미안하지만 나는 세진이에게 마음이 더 간다.
세진이 녀석은 나를 위해 죽을지도 모르는데 옥상에서 뛰어내리려고 했다.
게다가 세진이는 무슨 말을 해도 나를 믿어 줬다.
사부를 제외하면… 아니, 어쩌면 사부보다도 더 나를 신뢰하는 게 세진이니까.
그랬기에 무공도 가르친 거고.
수차례 생각을 해 봐도 김 선생보다는 세진이가 훨씬 더 편하다.
그리고 지난번에 고양이도 개인적으로는 아주 취향 저….
크흠흠, 아무튼 '그래, 한번 만나 보자.' 하고 대답하려는데 목이 떨린다.
너무 긴장해서 기분 탓인 줄 알았는데 실제로 진동이 느껴진다.
"선생님?"
루시엘에게 받은 목걸이가 진동한다.
동시에 내공이 뭉텅이로 사라지는 느낌이 들며 하얀 빛이 터져 나온다.
"신혁이가 너처럼 못생긴 애를 왜 만나?"
자… 잠깐만, 이 목소리는 설마?
빛 때문에 눈은 감았지만 너무나 익숙한 목소리다.
다행히 빛은 금방 사라져서 눈을 떴는데… 맙소사.
4장의 회색 날개를 펼친 루시엘이 세진이를 쏘아보고 있다.
"루시엘! 너 여길 어떻게?"
"내가 나가면 알게 될 거라고 했잖아?"
싱긋 웃으며 말하는데 도무지 지금 상황이 이해가 안 된다.
설마 그동안 연구하던 마법이 바깥세상으로 나오는 마법이었던 건가?
하지만 루시엘은 마계수의 수호자라 마계수 근처를 벗어날 수 없다.
원작에서 김도현이 결혼한다는 소리를 듣고도 이지성에게 김도현을 불러 달라고 했던 것도 그래서인데, 도대체 어떻게….
"서, 선생님? 아는 사람…은 아닌 것 같고. 뭐예요?"
"아니, 그게…."
너무 충격이라 이걸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을… 아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네가 알아서 뭐 하게? 신혁인 내 거니까 찝쩍대지 마. 더럽게 못생긴 주제에."
말을 하곤 내게 다가와 팔짱을 끼며 친한 척을 한다.
갑자기 튀어나와서 도대체 뭐 하자는 건지….
진짜 돌아 버리겠다.
* * *
아무리 원시천존이라지만 조롱까진 참을 수 없어 한마디 하려 했는데 말을 하곤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유량, 내가 미안하네. 별 도움이 못 돼서."
늘 허허 웃던 삼봉이 녀석답지 않게 진짜 미안한 표정이다.
"됐네. 아까 그 녀석 말이 완전히 틀린 건 아니지. 어쨌든 내가 거부한 거니."
"그래도… 뭐, 내가 도와줄 건 없겠나?"
"제자에게 나 등선 안 했다고 기별은 못 한다며? 그럼 됐… 아니, 그래. 술이라도 있으면 좀 주게."
"술? 이 사람아, 선계에 술이 어디 있겠나?"
"술 없어? 네 녀석이 제일 좋아하던 게 술이었잖아."
무당파도 엄연히 도가 계열이라 술을 즐기지 않지만 삼봉이 녀석은 도사답지 않게 술을 상당히 좋아했다.
"내가 신선이 되며 그런 것들은 다 끊었거든."
"그럼 중원에 가서 구해 오면 되지 않나? 그래. 올 때 마파두부랑 동파육도 좀…."
"그… 자네가 신선이 아니라 잘 모르는 모양인데 신선은 함부로 하계에 내려갈 수 없네."
"그럴 거면 도와준다는 말은 왜 했나?"
"미안하네…."
역시 등선을 거부한 게 옳은 선택이었던 것 같다.
있는 것도 없고 되는 것도 없는데 저렇게는 못 산다.
언제 올진 모르겠지만 신혁이 녀석을 기다리는 게 백번 낫다.
다 필요 없으니 원래 있던 곳으로 보내 주라고 하려다 옛날에 제자 녀석이 부탁했던 게 생각이 났다.
"혹시 그럼 너희 문파 내공심법은 기억하냐?"
"기억은 한다만 웬 내공심법? 무당의 태극신공이나 양의신공이라고 해도 자네 수준에는 하등 도움이 되지 않을 텐데."
"내가 그걸 몰라서 요청했겠냐? 태극심법, 양의심법, 이딴 거 말고 그냥 기초 심법."
"기… 기초 심법?"
"제자 놈이 예전에 알아봐 달라고 하던데 평생 익힌 적이 없어서. 기억하나?"
"알긴 한다만…."
안다면서 저 자식은 왜 또 말끝을 흐리는 건지….
"좀 알려 줘. 등선까지 했는데 아직도 무당파에 연연하는 거냐? 대단한 것도 아니고 기초 심법인데."
"자네 제자면 다른 차원의 인간인데 무당의 무공을 알려 주면…."
"아니, 삼봉아, 이미 내 무공 익혔거든? 제자 녀석이 제자를 거둬 사손까지 거뒀는데 아까 원시천존도 별말 없었잖아?"
잠깐 고민했지만 설득이 통했는지 구결과 혈도의 움직임을 알려 줬다.
기초 심법이다 보니 효율이 상당히 안 좋다.
신혁이 그 자식은 이런 걸 어디다 쓰려고 알려 달라고 한 건지.
"다 기억했으니 이만 돌려보내 주게."
삼봉이 미안한 표정을 하며 손을 한 번 휘젓자 검은 틈이 나타났다.
"노파심에 하는 말이지만 혹 자네가 있는 공간 외에 다른 곳으로 나가 인과율에 해를 끼치면 천계에서 제재를 가할 수도…."
"알았다고. 넌 신선까지 됐는데도 잔소리냐?"
"자네가 빠른 시일 내에 제자와 재회할 수 있길 기원하겠네."
"뭐, 그리 매정한 놈은 아니니까 기다리다 보면 언젠간 오겠지. 네 녀석도 잘 지내라."
검은 틈으로 발걸음을 내딛자 어느새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왔… 잠깐, 이게 무슨 냄새야?
냄새가 나는 쪽으로 달려가 보니 비석 앞에 작은 탁자가 놓여 있고 치킨에 라면에 동파육, 거기다 술까지?
전부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다.
정신을 잃고 달려들 뻔했지만, 가까스로 마음을 다잡고 의념을 퍼뜨렸다.
뭐… 뭐지?
여기에 음식이 있다는 건 신혁이 녀석이 왔다는 소린데 어디에서도 녀석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다.
설마 그냥 간 건 않았겠지?
라면 국물에 손가락을 담가 보니 아주 미세하게 온기가 남아 있다.
태양 빛 때문에 그런 걸 수도 있지만 어쩌면 내가 녀석을 감지하지 못한 걸 수도 있다.
"강신혁! 야, 이 멍청한 제자 놈아!"
사자후를 내뱉으며 녀석이 늘 나타나는 곳으로 향했다.
하지만, 신혁이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의념이 아니라 포탈 곳곳을 뒤져 봐도 마찬가지고 동굴에도 어떠한 글귀조차 남겨져 있지 않다.
녀석만 탓할 게 아니다.
내가 삼봉이 녀석을 따라가지 않았다면….
아니, 동굴 벽에다 글이라도 한 줄 남겼다면 내가 등선하지 않았다는 걸 알릴 수 있었을 텐데.
허탈한 마음을 추스르며 음식이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일단 먹을까?
퉁퉁 부은 면발에 국물마저 차가운 라면이었지만 매콤함은 남아 있었다.
이미 눅눅해진 치킨이었지만 고소함을 잃지 않았고.
동파육도 차고 식었지만 달콤, 짭짜름 한 양념의 맛은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최고는 죽엽청과 감자깡이다.
감자깡의 바삭바삭한 이 식감은 예전에 먹던 그 느낌 그대로다.
죽엽청 또한 절반밖에 안 되고 뚜껑조차 닫혀 있지 않았지만, 향은 고스란히 남아 있었으니까.
바삭―.
오랜만에 음식들로 배를 채우고 나니 허탈했던 마음이 조금은 진정되는 느낌이다.
그러고 보니 그동안 여동빈의 기술을 따라 하겠다고 이곳저곳을 헤집어 놨다.
신혁이 그 자식이 갑자기 장님이 된 게 아니라면 분명 봤을 테고 내가 등선하지 않았다는 걸 알았겠지.
알면서도 기다리지 않고 간 녀석이 원망스럽지만, 조만간 다시 찾아오겠지.
나는 내 제자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