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데미의 검술 강사가 되었다 (225)
"저기… 선생님, 좋아해요."
"짜식, 알아."
"네?"
"선생님도 우리 반장이 좋아. 담임은 올해 처음이었는데 은하 같은 좋은 반장을 만나서 도움을 많이 받았어. 정말 고맙다."
"저는 그런 뜻으로 좋아한다는 게 아니라…."
"컷―!"
"둘 다 왜 그래? 어제보다 더 못하는 것 같은데."
"맞아. 왜 그렇게 어색해해?"
…일요일 오전 일찍부터 연극 연습을 한다고 나왔지만 돌아오는 건 반 아이들의 신랄한 비평이다.
"야, 민찬성. 너 그렇게 하기 싫으면 지금이라도 말해. 차라리 내가 할 테니까."
왜 한마디 안 하나 했다.
다른 애들도 까 대는데 남지현 이 녀석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지.
나로서는 바라던 바라고 이야기하고 싶지만, 당장 내일이 축젠데 이제 와서 어떻게 대타를 하겠다고.
솔직히 나도 답답하다.
지금 이렇게 까이는 이유는 내가 아니라 성지안 때문이니까.
"혹시 너희 둘 싸웠어?"
"싸우긴…."
"그런 거 없어."
"그럼 왜 그렇게 서로 어색해하는 건데?"
"맞아. 눈도 제대로 안 마주치고."
"주인공들은 서로 좋아하는데 너흰 전혀 안 그래 보여."
나는 정말 열심히 하고 있는데 성지안 저 녀석이 어제 있었던 일을 신경 쓰는 건지 연기가 완전히 엉망이다.
공과 사 구분을 좀 했으면 좋겠는데.
"다들 너무 뭐라고 하지 마. 찬성이는 어제 처음 연습했다며. 지안이도 찬성이랑 호흡을 많이 안 맞춰 봤으니까 그런 거겠지."
우리 편을 들어 주는 건 담임인 서라뿐이다.
"배달 왔다고 연락 왔으니까 거기 셋은 선생님 따라와. 점심 먹고 다시 한 번 맞춰 보자."
오늘 점심은 학교 식당이 아니라 최서라가 중국요리를 시켰다.
일요일에도 시간 내서 연습하는 게 기특하다며.
가뜩이나 버는 대로 족족 기부한다고 들었는데 애들한테 이렇게 쓰면 생활이 되는지 모르겠다.
최서라와 함께 몇몇 애들은 음식을 가지러 간 사이 나는 구석에 앉아서 대본을 들여다보는 성지안에게 다가갔다.
"대본은 왜 봐? 지금 문제는 대본을 못 외워서가 아닌데."
내 이야기를 듣자마자 고개를 푹 숙여 버린다.
"잠깐 나가서 이야기 좀 하자."
성지안과 함께 밖으로 나왔다.
"너 오늘 왜 그래? 혹시 어제 일 때문에 그래? 그래도 연극은 제대로 해야지. 다 같이 노력해서 준비한 건데."
"…."
역시 애들에겐 공과 사 구분이 어려운 건가?
어휴, 별수 없다.
이대로면 점심 먹고도 오전이랑 똑같을 것 같은데 그러면 오늘 연습은 무척 길어질 거다.
내 황금 같은 주말을 연극 연습에 다 투자할 순 없지.
어제 잠도 미뤄 가며 대본까지 다 외웠는데.
"나 서은서 선배랑 만나는 거 아니야."
"어?"
"서은서 선배는 나 안 좋아해. 나도 마찬가지고."
"이제 와서…. 나 바보 아니야. 안 좋아하는 사람이랑 단둘이 놀이공원 가는 사람은 없잖아."
예리한 지적이다.
하지만 핑계를 대려면 얼마든지 만들 수 있지.
"놀이공원 같이 갔던 건 은서 선배가 부탁해서 그런 건데 다른 이유가 있어서 그런 거지.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야."
"그럼 뭔데?"
"선배가 말하지 말랬는데. 네가 자꾸 이러니까 어쩔 수 없네."
나는 차분하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은서가 작년에 WHCU에서 우승하고 강신혁에게 함께 놀이동산 가 달라는 소원을 빌었는데 강신혁이 죽어 버린 후 은서는 놀이동산에 대해 트라우마가 생겼다고.
이번에 친구들이 다 같이 가자고 했는데 못 갈 것 같다고 해서 트라우마를 극복할 수 있도록 돕고 싶어 동행해 드린 것뿐이라고 말했다.
"거짓말하지 마. 그런 말도 안 되는…. 그럼 그때 우리한테…."
"그건 선배가 장난친 거야. 선배가 좋아하는 사람은 내가 아니라 강신혁 선생님이야."
"그분은 이미 돌아가셨잖아."
아니요. 멀쩡하게 살아 있습니다만.
"은서 선배는 그렇게 생각 안 하시던데. 설령 죽었다고 해도 자기한테는 강신혁 선생님뿐이라고 하셨어. 못 믿겠으면 네가 직접 물어봐도 돼. 선배님이 좋아하는 사람이 강신혁 선생님이냐고."
은서가 직접 이렇게 말을 하진 않았지만 겉모습이 바뀐 나를 한눈에 알아볼 정도였으니 필시 이런 마음이겠지.
전혀 안 믿는 눈치였던 성지안도 조금은 넘어온 것 같다.
원래 거짓에 진실을 조금 섞으면 꽤 그럴듯해지는 법이니까.
조금 기운을 차린 것 같아 다행이다.
"…하지만 어제 너는 내게 마음이 없다며."
맞다. 그랬지.
"기억도 돌아왔다면서…. 혹시 나에 대한 기억은 안 돌아온 거야?"
이 녀석 진짜 중증이네.
"아니. 너에 대한 기억도 돌아왔어. 기억이 돌아오고 생각을 많이 해서 결론을 내렸어. 지금 나는 연애 같은 것보다는 지금은 내 발전을 위해 시간을 쓰고 싶어."
"그게 무슨 말이야?"
"솔직히 지금 하는 연극, 선생과 제자 사이라는 것만 빼면 우리 상황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우리 연극은 가난한 선생을 좋아하는 재벌 3세 여학생의 이야기다.
민찬성이 선생은 아니지만 천애고아에 가진 건 쥐뿔도 없다.
성지안도 재벌 3세는 아니지만 화성 길드라는 국내 10대 길드의 주인이자 S 랭크 헌터의 외동딸이지.
"우리 연극은 해피 엔딩이잖아."
성지안의 말대로 우리 연극의 결말은 해피 엔딩이다.
교사를 만나면 돈과 상속을 다 포기해야 한다는 아버지의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졸업 후 선생과 결혼.
"그건 연극이니까 그런 거지."
아직 어려서 잘 모르는 것 같은데 현실은 냉정하다.
성지안의 아버지이자 화성 길드 마스터인 성진철은 과거의 김대찬처럼 길드를 위해 딸을 이용하는 빌런까지는 아니더라도 상당히 계산적인 사람이다.
하나밖에 없는 딸자식이 천애고아에 쥐뿔도 없는 남자를 만나는 걸 절대 곱게 보진 않겠지.
"지금 내가 너랑 연애하면 주변에선, 특히 네 아버지나 네 가족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주위가 무슨 상관이야? 그런 건 상관없어."
"상관이 없긴. 이번에 이지성 사건 너도 알잖아. 걔는 범죄를 저질렀는데도 처벌도 안 받고 학교에서 쫓겨나지도 않았어."
"나도 그건 정말 잘못됐다고 생각해. 하지만 네가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는 거 아니야? 그래도 우린 아직 학생인데."
"3년 후면 성인이야. 지금이야 다 같은 학생이니 이렇게 너와 내가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졸업하면 우린 다른 세상을 살아가게 되겠지."
"그… 그렇지 않아."
"아니긴. 아까도 말했지만 이번에 기억이 돌아오면서 나는 정말 생각을 많이 했어. 지금의 나는 부족해. 부모도 없고 가진 것도 없어."
"자기 비하하지 마. 왜 그렇게 자기 자신을 깎아내리는 건데."
"깎아내리는 게 아니라 현실이 그래."
"…."
"물론 지금의 내가 부족하고 가진 게 없더라도 계속 부족한 사람으로 남고 싶지는 않아. 그러니까 지금은 연애 같은 것보다는 내 발전에 시간을 쓰고 싶어. 학생의 본분은 공부잖아?"
이만하면 잘 알아들었겠지?
"…그럼 하나만 이야기해 줘. 내가 싫은 건 아닌 거지?"
진짜 지독하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엔 강당으로 돌아와 점심을 먹고 연습을 재개했다.
그래도 따로 불러 내 이야기를 한 효과가 있었는지 오전보단 훨씬 집중도 잘하고 연기도 좋아져서 연습은 일찍 마쳤다.
연습이 일찍 끝난 건 좋지만 마음이 영 편치 않다.
올해 겨울 방학에 내가 강신혁으로 돌아가면 민찬성은 다시 식물인간이 된다.
그래서 어제도 일부러 정 좀 뗐으면 하는 마음에 심하게 이야기한 거였다.
오늘 이야기하면서 너무 여지를 준 건 아닌지 모르겠다.
* * *
강신혁 그 자식이 최서라는 안타스에서 빼내 바꿔 놨다고 해도 미래에 벌어질 습격까지 어떻게 하진 못 했을 게 분명하다.
따라서 이번에 벌어질 테러를 내가 미리 대비해서 수습하면 나락 간 이미지도 충분히 세탁할 수 있다는 판단에 비서실에 도움을 요청했다.
―아니, 도련님… 정말 안 됩니다.
"오 비서! 좀 믿어 달라고! 전에 있던 김 비서는 내가 말만 하면 다 들어줬는데, 진짜 이럴 거야?"
―그 김 비서가 잘린 게 도련님 때문이지 않습니까? 정말 죄송하지만 사모님도 회장님도 더는 도련님이 이상한 일을 지시하면 절대 돕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당장 내일이 축제인데 진짜 돌아 버리겠다.
"내가 그리 어려운 부탁을 하는 것도 아니잖아. "
―저기, 도련님, 상식적으로 헌터학교 축제에서 테러라니요. 그게 말이 됩니까? 저도 1학교 출신인데 헌터학교 보안이 그렇게 허술하지 않습니다.
"첩보가 들어왔다고."
―첩보라니요? 저희 비서실에서 제공한 게 아닐 텐데 어떤 경로로 얻으셨습니까?
"그건…."
책에서 봤다고 말할 수도 없고, 진짜 답답해 미쳐 버릴 것만 같다.
―도련님, 저희 그룹 비서실에서도 안타스 코리아의 동향을 늘 주시하고 있지만 최근에 특별한 움직임은 없었습니다.
그럼 테러를 준비하는데 다 드러나게 행동하겠냐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여기서 더 성질내 봐야 일이 내 뜻대로 진행되진 않을 것 같다.
"그럼 비서실에 내 경호팀 있잖아. 그 인원들만이라도 축제 날에 학교 주변에서 대기시켜 줘. 그건 할 수 있지? 이건 이상한 지시도 아니잖아."
―3일 내내 말입니까?
"그래."
―평시엔 다른 업무들도 있는데… 일단 알겠습니다.
겨우 대답을 듣고 전화를 끊었다.
이 정도 가지고 테러를 막을 수 있을까?
원래 계획은 S 랭크 헌터가 있는 길드에 지원을 요청해 대기시킬 생각이었는데….
어쩔 수 없다.
테러가 발생하면 바로 대기하던 비서실 헌터들을 투입시키면서 바로 S 랭크 헌터가 있는 길드에 지원을 요청하라고 하면 되겠지.
마음에 썩 들진 않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이게 최선이니까.
* * *
헌터 학교 축제 첫날, 빠르게 아침을 먹고 교실로 향했다.
첫 번째 연극은 11시라 아직 한참 여유가 있지만 이미 교실은 애들로 한창 북적이고 있다.
연극은 11시에 시작하지만 그 전에 홍보를 해야 하니까.
"찬성아, 왔어? 팜플렛 봐 봐. 되게 잘 나왔지?"
다가가서 보니 퀄리티가 상당하다.
반 학생 중에 아버지가 영화 포스터 만드는 회사에 일하셔서 부탁을 드렸다고 하던데, 역시 전문가에게 맡기니 다르다.
"지안이 진짜 예쁘게 나왔다."
"그… 그래? 보정을 잘해 주셨네."
"자, 자… 다들 그만 보고 얼른 홍보하러 가자. 10시엔 최종 리허설 할 거니까 배우 역할을 맡은 학생들은 10시 전까지 강당에 와야 해."
"네."
최서라의 지시가 떨어지자 다들 팜플렛을 한가득 들고 밖으로 나간다.
솔직히 배우 하는 애들은 홍보에서는 좀 빼 줘야 하는 거 아닌가.
약간 너무하다고 생각하며 나도 내 짝꿍인 영식이와 함께 팜플렛을 들고 학교 정문으로 향했다.
"와, 사람 진짜 많다."
"그러네."
헌터 학교 학생은 3학년 다 합쳐 총 600명뿐이지만 축제 일일 방문자 수는 1만 명을 훌쩍 상회한다.
헌터 학교 축제 방문객 대부분은 헌터 학교 학생들의 가족과 친척이지만 학생 가족뿐만 아니라 직원이나 교사 가족은 물론 졸업생들까지도 출입할 수 있으니까.
보안 검색을 통과하고 들어오는 방문객들에게 팜플렛을 나눠주고 있는데 뭔가 이상하다.
"외국인들도 있네."
최근에는 조금 완화되긴 했지만 헌터 학교는 국가보안 시설.
외국인들의 접근은 철저하게 차단되어 있다.
"학생들 친척이겠지."
"친척이 외국인? 외국 국적은 헌터 학교 입학 못 할 텐데."
"친척 중에서 국제결혼 한 사람이 있을 수도 있잖아. 작년에 우리 사촌 누나도 이탈리아 사람이랑 국제결혼 했거든."
"그래?"
"응. 매형이 헌터 학교 축제 보고 싶어 해서 내일 온다고 했어."
영식이 말을 듣고 보니 이해가 되긴 하지만 작년이랑 재작년에 선생으로 근무할 땐 외국인은 아예 못 봤던 것 같은데….
보안 검문을 하는 선생들이 별말 없이 통과시키고 있으니 뭐, 괜찮은 거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