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데미의 검술 강사가 되었다 (227)
무대 인사까지 바치고 바로 성지안을 따로 불러 따지려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세진이와 은서의 따가운 시선도 시선이었지만, 연극이 끝나자마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학부모 무리가 학생들에게 다가왔으니까.
성지안의 아버지인 성진철도 마찬가지다.
딱 보니 세진이와 은서뿐만 아니라 성진철도 상당히 불쾌한 얼굴이다.
성지안도 성진철에게 진짜로 한 거 아니라고 발뺌하고 있는데 거기 가서 너 도대체 왜 그랬어라고 했다간 그대로 헬 파티가 나겠지.
"찬성아… 연, 극, 정, 말, 잘, 봤, 어."
스타카토 뭔데.
평소에 내가 알던 은서의 말투가 아니다.
"찬성아, 우리 잠깐 나가서 이야기 좀 할까?"
세진이도 입은 웃고 있지만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다.
"저기 그… 맞아. 일단 무대 뒷정리를 해야 하는데."
"정리야 천천히 해도 되지. 데려가세요…."
"맞아요. 야, 민찬성, 아까 사인 받아 준다며. 잊지 마라."
아니… 이 자식들아, 지금 사인이 문제가 아니라고.
저 바보들은 지금 내가 무슨 상황인지도 모르고.
결국, 은서와 세진이에게 양쪽으로 팔을 붙잡혀 소강당 구석으로 끌려갔다.
"저기… 둘 다 뭔가 오해하는 것 같은데."
"오, 해, 요?"
"아니, 은서야, 너 무섭게 말을 왜 그렇게 끊어서 해."
"제, 가, 뭘, 요?"
"장난칠 기분 아니에요. 방금 마지막에 그거 실제로 닿은 거 맞죠?"
…이걸 어쩐다.
거짓은 더 큰 거짓을 낳는다는 걸 모르는 건 아니지만 진실을 말했다간 무조건 사망일 텐데.
"다… 닿긴 뭐가 닿아. 연기지."
어쩔 수 없다.
"진짜로 한 것 같았는데."
"제, 가, 봤, 을, 때, 도, 요."
"그만하라니까. 애들끼리 하는 연극에서 실제로 키스 같은 걸 할 리가 없잖아. 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쳐다보고 있는데."
"흐음, 정말이죠?"
조금 찔리긴 하지만 내 의지로 한 것도 아니고 어디까지나 나는 당한 피해자(?) 입장이니까.
뭐, 키스 한 번 했다고 성지안에게 없던 마음이 생길 리도 없고.
내겐 오직 루시엘과 세진이 그리고 은서, 이렇게 셋뿐이다.
"그렇다니까."
다행히 내가 세게 나가자 둘 다 의심을 거두는 눈치다.
"그래도 너무 리얼해서…."
"맞아요. 객석에서 보면 정말 하는 것처럼 보였어요."
"연습할 때 그렇게 보이도록 연습한 거니까 그렇지."
"죄송해요."
"아니야. 두 사람 다 평소에 나에 대한 믿음이 없어서 그런 거겠지. 내 잘못이야."
최대한 아련하고 쓸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 아니에요. 제가 오해를…."
"그렇지 않아요. 그냥 저희가 너무 오버한 것 같아요. 선생님이 저희를 두고 그럴 리가 없는데."
둘 다 미안한 표정이다.
어떻게 잘 넘긴 것 같은데… 어휴, 진짜 수명이 한 10년은 줄어든 느낌이다.
"괜한 생사람 그만 잡고, 연극은 어땠어? 둘이 맨 앞에서 보고 있으니까 조금 떨리더라고."
"그런 느낌은 전혀 없었고 저는 정말 좋았어요. 다른 관객들도 진짜 선생님 같다고 하던데요?"
"그거야 원래 진짜 교사니까 당연한 거고."
내가 특별히 연기에 소질이 있다는 생각은 안 하지만 그래도 교사 생활을 2년이나 했으니까.
"저기, 그럼 전 먼저 가 볼게요. 연극 본다고 집행부 일을 땡땡이 쳐서 언니가 뿔났거든요."
은서가 먼저 자리를 떴다.
"세진이 넌 어땠어?"
"저는 스토리가 좋았어요. 선생님 생각도 많이 나고."
"그랬어? 선생과 제자라는 것만 빼면 비슷한 건 거의 없는데."
"그래도 결말은 같던데요. 해피 엔딩이었잖아요."
…제대로 된 답도 주지 못하고 있는 처지라 조금 찔렸지만 딱히 세진이는 그런 걸 생각하고 이야기한 건 아닌 듯하다.
"그럼 극본 쓴 애 한번 만나 볼래? 걔도 너//네 팬인 것 같던데."
아까 둘에게 끌려올 때도 그렇고 연극 시작 직전에도 세진이가 맨 앞자리에 앉아 있는 걸 보고 반 애들 사이에선 한바탕 소란이 일었다.
세진이가 최연소 S 랭크 헌터에 10대 길드 마스터로 유명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내 생각보다 훨씬 인기 있는 것 같다.
극본을 쓴 남지현은 세진 님이 자기 연극을 보러 와 주셨다며 눈물까지 글썽였으니까.
전에 길드로 체험 학습을 갔을 땐 그렇게 동경하는 눈치는 아니었는데. 물론 그때는 세진이가 S 랭크 헌터가 되기 전이었다.
"극본은 누가 쓴 거예요?"
"지현이라고 전에 같이 너희 길드도 갔었는데. 아버지가 비천 길드 남일성 헌터야."
"아, 기억나네요. 그런데 남 헌터님은 아까 안 보이시던데요?"
"나도 못 봤어. 뭐, 내일이나 모레 오려나 보지. 가자. 가서 사인도 직접 나눠 줘. 길드 홍보도 할 겸."
"아직 1학년 학생들인데 그러면 템퍼링으로 잡혀가요."
"우리 대단하신 김세진 헌터님이 여기까지 오셨는데 제대로 소개도 안 해 주면 제가 먼저 곤란해질 것 같은데요?"
세진이와 함께 반 애들에게 가서 소개해 주고 사인도 나눠 줬다.
조금 오버하는 느낌도 없지 않아 있지만 일단 세진이가 내 후견인이기 때문에 이상하게 생각하는 애들은 없을 테니까.
여름 캠프에서 인연이 생긴 것도 기사로 크게 나갔으니 다들 알고 있는 상태고.
세진이도 시간이 많지 않아 사인을 나눠 주며 사진을 몇 장 찍어 주곤 바로 돌아갔다.
"찬성이 진짜 고맙다."
"김세진 헌터님을 실물로 보게 되고 사인에 사진까지…."
별것도 아닌데 다들 너무 좋아한다.
그래. 어차피 이 생활도 이젠 한 달도 안 남았는데 이런 거라도 해 줘야지.
"자, 자. 다들 모여. 이제 그만 정리 시작하자."
오후에도 공연을 해야 하니 점심 먹기 전에 정리는 끝내자고 해서 모두가 협동해서 정리를 마쳤다.
"다들 고생했어. 점심 먹은 뒤엔 다시 홍보하는 거 알지? 오후 공연은 리허설 없이 가긴 하지만 배우들은 2시 반까지 오도록 해."
"네."
다들 삼삼오오 모여 점심 먹으러 나가는데, 성지안 저 녀석 봐라?
내게 그런 만행(?)을 저질러 놓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남지현이랑 같이 나가고 있다.
"성지안, 잠깐 이야기 좀 하자."
"민찬성? 뭔데? 우리 밥 먹으러 갈 거야."
"잠깐이면 되니까 먼저 가."
남지현은 특유의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지만 성지안이 순순히 내 쪽으로 오니 자리를 떴다.
"너 아까 왜 그런 거야?"
"아까 애들이 지적했었잖아. 너무 가짜 같다고."
"아니, 그렇다고 해도 그런 건…."
"싫으면 다음 공연에선 안 할게. 하지만 너 나 싫어하는 거 아니라며? 혹시 처음이었어?"
싫어하지 않는다는 게 좋아한다는 뜻은 아니지 않나?
너무 당당한 태도에 오히려 내가 더 당황스럽다.
"아니, 지금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나도 내 마음을 조금 더 표현하고 싶었어. 그리고 나도 처음이었으니까 괜찮아."
말을 하고 그대로 남지현이 있는 쪽으로 가 버린다.
진짜 요즘 애들은 왜 이러는지…. 그냥 말을 말아야지 생각하는 순간 머릿속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역시 진짜로 한 거였네?
맙소사, 루시엘의 목소리다.
* * *
"승자는 제1헌터학교 1학년 이지성 학생!"
심판의 선언과 동시에 팔을 들었다.
처음 32강에 이어 이번 16강도 압도적으로 승리했지만, 전혀 기쁘지 않다.
보통 자기 학교 출전자가 승리하면 박수와 환호가 쏟아지지만 나에게 그런 건 없다.
물론 지금 무투 대회가 진행되는 대강당에 1학교 학생이나 관련자들이 없는 건 아니다.
본선에 진출한 1학교 학생이 나 하나만 있는 건 아니니까.
하지만 그 누구도 나를 응원하지 않는다.
박수와 환호성이 전혀 없어 취재를 나온 방송사들과 다른 학교 관계자들조차 의아해할 정도다.
이 정도라면 대외적으로도 소문이 퍼져 나가는 건 시간문제겠지….
답답한 마음을 뒤로하고 결투장에서 내려왔다.
물론 언론들이야 그룹 차원에서 압력을 행사할 테니 쉬쉬하겠지.
"쟤가 걔지? 화신전자 사장 아들."
"맞아. 진짜 인간쓰레기라고 하던데."
"어?"
"그 소문 못 들었어? 쟤가 중학교 때 같은 반 학생 식물인간 만들었다잖아."
"레알? 아니, 그런데 어떻게 학교를 계속 다녀?"
"돈 처발라서 무마했겠지. 더 지독한 건 뭔지 알아?"
"뭔데?"
"식물인간 상태에서 깨어난 학생이 처음에 기억이 없었대. 그런데 저 자식이 그걸 알고 지가 식물인간 만들어 놓고 걔랑 친한 척 오지게 했다는데?"
정말 억울하다.
모든 사실을 알고 있긴 했지만 민찬성을 식물인간으로 만든 건 내가 아닌데….
"나중에 기억 되찾으면 고소 못 하게 하려고 그런 거 아니야? 결국 고소 안 했잖아."
"와, 그러네. 어떻게 사람이 그런 생각을 하지?"
"우리랑 같은 사람이 아니니까 그러지. 완전 사이코패스가 따로 없다니까."
"1학교에는 이미 소문 쫙 퍼져서 아무도 응원 안 하는 거잖아."
"1학교 친구한테 들었는데, 중학교 때부터 완전 개망나니였대. 애들 패고 왕따시키고…."
내려오는 나를 향해 수군거리는 학생의 교복을 보니 다른 학교 학생이다.
이렇듯 아무리 언론을 통제한다고 해도 사람들 입에서 입으로 퍼져 나가는 소문은 막을 수 없다.
이미 다른 학교 애들까지 알 정도면 퍼질 대로 다 퍼진 모양이다.
얼른 이미지 세탁을 해야 할 텐데….
일부러 그러는 건진 모르겠지만 내게도 다 들릴 정도로 나를 씹어 댄다.
애써 모른 척 무시하며 강당을 나왔다.
본관 입구 쪽을 지나다 연극 홍보를 하고 있는 우리 반 애들을 발견했지만, 역시 못 본 척 기숙사로 발걸음을 옮겼다.
가 봤자 환영은커녕 투명인간 취급일 테니까.
텅 빈 기숙사에 돌아와 옷을 갈아입고 있는데 마침 품속에서 진동이 느껴진다.
휴대폰을 꺼내 보니 오 비서다.
드디어 테러가 벌어진 건가?
그런 것치고 바깥은 아까 들어올 때와 별반 다를 게 없어 보이는데.
혹시 뭔가 이상한 점을 발견한 걸 수도 있지.
바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네, 오 비서님. 무슨 일입니까?"
―도련님, 경기는 잘 끝내셨습니까?
뭐야, 그냥 안부 전화인가?
"8강에 진출했습니다. 그보다 혹시 테러 조짐 같은 거 없습니까?"
―안 그래도 그 일 때문에 연락드렸습니다. 도련님이 얻으셨다는 정보 정말 확실한 거 맞습니까?
"확실하다니까요."
―우리 화신그룹이 파악하고 있는 안타스 코리아 쪽 인물들이 몇 있지만 그 중 어느 누구도 헌터1학교 쪽으론 오지 않았습니다.
…오늘이 아닌가?
테러가 일어난다는 건 알지만 정확히 축제 며칠 차에 발생하는진 기억이 희미하다.
한 가지 분명한 건 축제 마지막 날에 사고가 있었지만 그래도 잘 수습하고 마무리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교감이 연설을 했으니 오늘 아니면 내일일 텐데.
―저기, 도련님? 출처라도 알려 주시면 저희가 그 진위를 파악해 보겠습니다.
"오늘이 아니라면 내일 벌어질 겁니다. 어차피 제 경호 인력들로 배치한 거 아닙니까?"
안 그래도 심란해 죽겠는데 계속 의구심을 가지니 짜증이 치솟는다.
―도련님이 평소에 학교에 계시니 원래 이 시기엔 다들 다른 업무를 하고 있는 터라….
"확실한 정보입니다. 축제 내내 인력을 빼는 게 무리면 적어도 내일까지만이라도 근처에서 대기하게 힘 좀 써 주세요."
―알겠습니다. 그럼 내일 경기도 잘 치르시길 바라겠습니다.
알았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원작에 따르면 틀림없이 테러가 벌어질 텐데, 오 비서가 자꾸 칭얼거려서인지 불안함이 피어오른다.
최서라가 안타스에서 빠져나오게 되면서 테러가 백지화된 거라면….
아니, 그럴 리가 없다.
강신혁 그 자식이 김도현 집안도 돕고 민찬성의 치료비도 지원하는 둥 이런저런 개입을 하긴 했다만 안타스 코리아와 싸웠다는 기록은 없었으니까.
물론 최서라를 빼내 올 때 마찰이 있긴 했겠지만 안타스 코리아는 건재하다.
그래. 분명 괜찮을 거다.
하지만 내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축째 둘째 날, 무투 대회 8강과 4강을 마치고 결승 진출을 확정할 때까지도 테러는커녕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