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데미의 검술 강사가 되었다 (244)
약간 웅성거림이 있긴 했지만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규칙 첫 번째, 이곳 헌터아카데미에서는 나이, 신분, 국적 어떤 것도 상관없이 교육생 여러분은 교육생입니다. 본 교장을 포함해 학교 교사의 지시와 통제에 협조하고 존중하며 예의를 갖추시기 바랍니다. 물론 불합리한 지시나 통제라고 생각했을 땐 따르지 않아도 되지만 추후 시시비비를 가려 불합리한 지시나 통제가 아니었다는 게 증명되는 즉시 벌점이 부여될 겁니다."
이 정도면 교사들도 부담이 좀 줄어들겠지.
"두 번째로 아카데미 내에선 모든 분쟁 및 다툼은 금지입니다. 여러 국가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였으니 생활 방식이나 습관, 생각 등 많은 것들이 다를 수 있습니다. 불편하기도 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도 있겠지만 서로 이해하고 넓은 마음으로 받아들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교육생 간의 물리적인 충돌은 물론, 언어폭력, 따돌림 같은 것 또한 절대 용납하지 않을 겁니다."
"대련은 그럼 아예 못하는 겁니까? 서로 동의해도?"
제일 앞에 있던 금발 머리의 중년 사내가 질문을 던진다.
모건 크리스.
10성의 일원인 미국의 S 랭크 헌터로 예전에 WHCU에서 마주친 적이 있다.
"상호 동의를 했다면 자유시간에 한정해 교사의 입회하에서 진행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모건 자네는 벌점 1점."
"…아니, 질문 좀 했다고 벌써 벌점을…."
"나는 교육생에게 질문을 해도 좋다고 허락한 적이 없고, 지금은 질문 시간이 아닙니다."
약간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는데 기세를 살짝 끌어올려 압박하며 노려봤다.
바로 눈을 아래로 내리깔며 내 시선을 피한다.
"셋째, 우리 헌터아카데미는 기숙사제입니다. 외출을 통제하진 않을 겁니다. 다만 외부에서 사고를 치는 경우 그리고 수업에 지각하는 경우, 벌점을 받게 될 겁니다."
이것들 외에도 규칙이 몇 개 더 있긴 하지만 나머지는 따로 안내 책자를 확인하라고 했다.
하나하나 전부 이야기하려면 너무 길기도 하고 어차피 가장 중요한 건 이 세 가지니까.
입교식을 마치자 은서를 포함한 교사들이 교육생들을 성별로 나눠 데리고 기숙사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후 일정은 학교 시설 안내와 설명, 점심 식사다.
첫 수업은 오후부터라 원래라면 여유가 좀 있지만 그러긴 힘들 것 같다.
단상에서 내려오자마자 취재진이 몰려왔다.
마음 같아선 무시하고 싶었지만 괜히 또 이상한 기사를 쓸 수도 있어 30분 가까이 기자들의 질문을 받아 줬다.
겨우 교장실로 돌아왔지만 나를 반기는 건 서류의 산이다.
당장 오후부터는 수업도 들어가야 하는데, 이거 참.
앞으로 학교 행정에 관한 건 교감에게 보내라고 하든가 해야지.
밀린 서류를 처리하다 보니 어느덧 점심시간.
오늘은 별도로 약속이 없어 급식실로 향했다.
교육생들이 줄을 길게 늘어서 있지만 나는 바로 앞으로 지나가 식판을 집었다.
교육생들의 뜨거운 시선이 느껴지는데 설마 줄 안 서서 그런 건 아니겠지?
꼬우면 교사 하던가.
식사를 받고 자리를 찾다 보니 다들 같은 국가, 비슷한 지역 사람들끼리 모여 있다.
은서가 있나 한번 쭉 둘러봤지만 은서는 안 보인다.
연락하고 같이 올 걸 그랬나?
대충 먹고 가려고 아무 데나 앉을까 하다 구석에서 익숙한 얼굴을 발견해 그쪽으로 향했다.
"찬성이 옆에 자리 있니?"
"교… 교장 선생님?"
괜히 왔나?
찬성이 녀석 완전히 부담스러워하는 표정이다.
"거기 자리 비었으니까 앉으셔도 돼요."
찬성이 맞은 편에 앉아 있던 서 이사가 내게 자리를 권한다.
한국 교육생들도 다 모여 있네.
우리 한국 교육생들은 시니어 둘, 주니어 넷이다.
시니어는 헌터협회 명예이사인 서이경과 최문성.
주니어는 비천 길드의 남지유와 일레븐 길드의 윤세희, 아레스 길드의 이진수, 찬성이다.
찬성이만 현역 헌터 학교 학생에 미성년자고 나머진 다 성인이다.
약간 걱정이 돼서 진수에게 조금 챙겨 주라고 할까 했는데 이렇게 모여 있는 걸 보면 그런 부탁은 따로 안 해도 될 것 같다.
"쌤, 아까 입교식 때 카리스마 쩔던데요?"
"이진수 교육생? 여기 후배도 있는데 바르고 고운 말을 써야지?"
"…네, 넵."
하여간 진수 녀석은 졸업하고 성인이 됐어도 까불거리는 건 여전하다.
"강 이사, 나 방 좀 바꿔 주면 안 되나? 같이 방을 쓰는 헌터가 인도에서 왔다던데 잘 안 씻는지 냄새가 아주 고약해서…."
"크흠, 해당 사항은 남자 기숙사 사감에게 확인을 시키고 사실이라면 조치를 취해 드리죠."
"뭘 또 확인을… 진짜 냄새 고약하다니까."
애들 앞이고 첫날이니 웬만하면 좋게 넘어가려 했는데 이 아저씨 안 되겠네.
"최문성 교육생, 내가 아까 내가 입교식 때 한 말 잊었습니까?"
"아니, 강 이사…."
"최문성 교육생, 여긴 헌터협회가 아니라 헌터아카데미입니다."
반박은 안 하지만 못마땅한 표정이다.
"사감이 확인했을 때 사실이 아니면 벌점을 받게 될 겁니다."
"버… 벌점이라니?"
"안 씻는다는 게 사실이 아니라면 혐오 발언이지 않습니까?"
표정이 잔뜩 구겨지는데 어쩔 수 없다.
딱히 최문성에게 사감이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교칙은 교칙이니 한국 교육생이라고 편의를 봐줄 순 없다.
아니, 오히려 더 엄격해야 한다.
지금 이 아카데미엔 전 세계에서 온 교육생들이 있는데 내가 한국 교육생만 편애한다고 생각하면 안 되니까.
분위기가 약간 가라앉으려 했지만 다행히 최문성이 금방 자리를 뜨자 다시 회복됐다.
식사를 마치고 교감실로 돌아왔다.
양치를 하고 서류를 처리하고 있는데 문이 열리더니 은서가 들어왔다.
"식사는 하셨어요?"
"난 먹었는데, 안 먹었어?"
"저도 먹었어요."
"교육생들은 좀 어때?"
"입교식 때 하신 말씀 때문인지 다들 고분고분 잘 따르던데요."
"다행이네."
"그렇다고 문제가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요."
"무슨 문제?"
"몇몇 교육생들이 급식에 문제 제기를 해서요."
"왜, 밥 맛있던데."
헌터아카데미도 기존의 학교처럼 두 가지 스타일의 음식을 제공한다.
한식과 양식.
한식은 비빔밥에 콩나물국 제육볶음으로 거를 타선이 하나도 없었고 양식도 새우튀김과 돈가스, 크림스파게티로 아주 잘 나왔다.
"종교가 무슬림인 교육생들이 있어서 할랄 푸드가 아니면 먹을 수 없다고 하면서…."
하하….
전 세계에서 오다 보니 이런 문제가 또 있네.
"몇 명이나 그랬는데?"
"4명 정도인데."
"4명?"
40명도 아니고 4명이라니….
"어떻게 할까요?"
개인의 종교는 존중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고작 넷을 위해 급식에 이슬람식을 추가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헌터아카데미에 왔으면 헌터아카데미에 맞춰 생활해야지.
"마음 같아선 굶든가 알아서 조달해 먹으라고 하고 싶지만…."
"네?"
"그러면 안 되겠지…. 불만 제기한 교육생 국가 정부와 연락해서 설명하고 자기들이 비용을 내겠다면 준비해 주는 거로 하자."
"아, 네."
"다른 문제는 없고?"
"아직까지는요."
아직 첫날인데 이런 문제가 튀어나오는 걸 보면 앞으로도 아카데미 운영이 결코 편하진 않을 것 같다.
* * *
헌터아카데미 대강당.
어느덧 아카데미가 개교한 지 벌써 2주란 시간이 흘렀다.
내공심법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라 걱정을 조금 했지만 주니어반이고 시니어반이고 할 것 없이 다들 배우는 게 빠르다.
뭐, 애초에 교육생 대다수가 자기 나라에선 내로라하는 헌터들인 데다 가르치는 선생이 나니까.
조금 의외였던 건 시니어보다는 주니어들 쪽이 훨씬 더 이해력이 좋다.
기존의 가진 능력을 보면 시니어 쪽이 훨씬 압도적이지만 그만큼 성장할 때까지 쌓아 온 습관이 있어서 배우는 데 의심을 가지지만 주니어들은 그렇지 않으니까.
거기다 시니어들은 기존에 보유한 마나가 커서 내공으로 바꾸는 데 시간이 훨씬 많이 필요한 반면 주니어 중에 찬성이를 포함해 몇 명은 벌써 완전히 내공으로 바꿔 축기 중이다.
이 정도 속도라면 기존에 계획했던 세 달이 아니라 두 달에 교육을 마쳐도 될 것 같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 다들 눈 떠."
"수고하셨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다들 점심 맛있게 먹어."
오늘 점심은 세진이가 도시락을 싸 온다고 해서 빠르게 교장실로 가려는데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진다.
돌아보니 주니어반 대표 비앙카 로웰이다.
10성의 일원인 콘래드 로웰의 딸로 예전에 세진이와 WHCU 결승전에서 만나기도 했었다.
내공심법 없이 마법과 검을 함께 사용하는 이론을 개발했는데 교육생으로 와서 상당히 의외였다.
"비앙카 교육생, 무슨 일이지?"
웬만한 시니어들 못지않게 가진 마나가 많다 보니 아직 마나를 내공으로 전부 바꾸지는 못했지만, 학구열도 높고 수업 이해도도 탁월하다.
특히 내가 이론보단 실습 위주로 가르치는데도 혼자서 혈도의 개념이나 이론적인 부분에 대해 어느 정도 감을 잡은 느낌이라 신기했다.
그만큼 질문을 많이 해서 약간 귀찮은 느낌도 있지만.
그래도 예전엔 상당히 자만하고 무례했던 이미지 였는데 세진이에게 지고 정신을 차렸는지 깍듯하게 예의도 잘 지켜서 좋게 보고 있다.
"여기서 말씀드리기는 좀 긴 이야기라…."
오늘은 또 무슨 질문을 하려고 그러는지.
"알았어. 그럼 같이 가자."
녀석과 함께 교장실에 왔다.
"그래, 오늘은 또 뭐가 궁금한데? 점심 먹으러 가야 하니 되도록 짧게 끝내자."
"네. 저번에 대련하고 나서 자꾸 의문이 들었는데…."
"대련이라면 은서랑 했던 대련?"
"네. 그런데 전에 붙었던 세진이라는 친구와는 느낌이 상당히 다른 것 같아서. 둘이 익힌 심법이 다른 것 같은데, 맞죠?"
"약간 다르지만 완전히 다른 건 아니지."
태연하게 대답했지만 솔직히 상당히 놀랐다.
똑똑하다고 생각은 했지만 고작 2주 만에 내공심법이 다르다는 걸 깨달을 줄이야.
거기다 세진이랑 붙었던 건 완전 예전인데 그때 느낌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니, 대단하다.
"다르지만 완전히 다른 건 아니라는 게 무슨 의미예요?"
"으음, 지금 교육생들이 배우는 심법은 웬만한 사람들 모두에게 맞게 보편화시킨 거고 세진이와 나는 각자 개인에 맞게 튜닝을 했다고 생각하면 조금 어렵나?"
"아니요. 무슨 이야기인지 바로 이해했어요. 튜닝하고 안 하고 차이가 상당히 큰 것 같은데, 그럼 혹시 저도 심법을 제게 맞게 튜닝해 주실 수 있을까요?"
"그게 그렇게 간단히 되는 일이 아니라서…."
아무래도 저번에 대련 때문에 살짝 오기가 발동한 것 같다.
저번에 진행했던 은서와 비앙카의 대련은 무승부, 솔직히 비앙카가 약간 우세하긴 했지만 승부는 나지 않았다.
아무래도 그 대련에서 충격을 좀 많이 받은 것 같다.
나이나 경험으로 봐선 비앙카가 이겨도 본전인 대련이었으니까.
"어렵다라…."
눈을 빛내는 게 쉽게 포기할 눈치가 아니다.
"혹시 그럼 저도 선생님의 여자가 되면…."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비… 비앙카 교육생?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겁니까?"
"선생님의 여자라서 심법을 튜닝해 준 거 아닌가요? 그럼 저도… 어? 김세진?"
갑자기 웬 세진이… 맙소사.
뒤를 돌아보니 정장을 입은 세진이가 서 있다.
도대체 어, 언제부터 와 있던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