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데미의 검술 강사가 되었다 (263)
검은 신전.
이곳엔 정말 오랜만에 온다.
그동안 루시엘의 세계에 갈 때는 마계수의 나뭇잎으로 손쉽게 오갔지만 지금은 루시엘이 치료를 위해 마계수에 들어간 상태라 나뭇잎을 찢어도 이동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이곳에 왔다.
CCTV 같은 경계 시설은 여전하지만 군인들은 대폭 줄어든 느낌이다.
그도 그럴 게 지금 전 세계 모든 국가에서는 재건 작업이 한창이니 자위대도 그쪽으로 동원됐을 테니까.
이미 공략이 완료된 포탈이기도 하고.
아무튼 덕분에 은서와 함께 투명 마법을 사용해 손쉽게 내부로 진입했다.
물론 은서가 협조를 구하면 가볍게 통과할 수 있겠지만 시간이 좀 걸릴 수도 있고 일본 정부에서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며 귀찮게 할 가능성도 있으니까.
결정적으로 지금 나는 공개적으로 움직이기에 약간 문제가 있다.
지금 내 이미지는 상당히 좋지 않다.
마왕의 출현을 경고하고 내공심법까지 공유해 가며 많은 기여를 했어도 결국 마왕이 강림하자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겁쟁이.
이게 지금 전 세계 대다수의 사람들이 나를 보는 이미지다.
은서는 이런 사실을 최근이 되어서야 알았다고 한다.
세진이와 친구들의 사망, 루시엘마저 회복을 위해 마계수에 들어가 버려 상심이 컸고, 대부분의 간부들이 사망한 아레스 길드를 대신 떠맡아야 했고 전후 처리까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으니까.
그래도 이런 사실을 알자마자 마왕이 둘이었고 나 혼자 상대하러 간 거라고 말했지만 소용이 없었다고 한다.
이번에 가장 피해가 컸던 미국에서 위성으로 전 세계를 살폈지만 지구에 마왕은 하나뿐이었다고 발표를 해 버렸으니까.
오해를 풀려면 못 풀 것도 없고 솔직히 화도 났지만 지금 그런 건 중요치 않다.
모래사막을 지나 순식간에 검은 신전에 도착했다.
"혹시 여기에서도 안 되면 어떡하죠?"
"그런 일은 없을 거야.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걱정할 거 없어."
처음에 나뭇잎을 찢었는데 이동이 안 됐을 땐 나도 좀 당황스러웠지만 원시천존이 내가 직접 치료할 수 있다고 했으니 여기도 안 되면 데려다주기라도 하겠지.
경계를 서는 자위대원들을 점혈해 기절시키고 3층으로 올라왔다.
은서의 손을 잡고 익숙한 설명이 붙어 있는 동상을 의념으로 베었다.
콰앙―!
단번에 동상이 산산조각 나며 시야가 바뀌기 시작한다.
보랏빛 태양 아래 펼쳐진 푸른 풀밭과 거대한 마계수 그리고 그 옆에 있는 작은 캠핑카.
언뜻 봤을 땐 지난번에 왔을 때와 달라진 게 없는 듯하지만 분위기는 상당히 다르다.
고요하고 적막이 흐른다.
캠핑카나 마계수 옆에 누워 '왔나?' 하고 인사하던 카이나칸이 이젠 없으니까.
은서에게 이야기를 들었다.
카이나칸은 루시엘을 호출하기 위해 은서에게 자신을 죽여 달라고 했고 은서는 카이나칸을 벴다.
"괜찮아?"
은서도 카이나칸이 생각난 건지 얼굴이 어두워진다.
"괜찮아요…."
표정은 전혀 괜찮지 않아 보인다.
나 역시 올 때마다 육포 같은 걸 좀 챙겨 주고 몇 마디 인사하는 게 전부긴 해서 그리 친하다고 생각은 안 했었는데.
조금 쓸쓸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은서의 손을 한 번 잡아 주고 마계수에 다가와 섰다.
옆에는 작은 무덤이 하나 보인다.
[카이나칸의 묘]
"은서 네가 만든 거야?"
"루시엘 언니가 만들고 글씨만 제가…."
"그래. 고맙고 미안하다, 카이나칸."
네가 희생해 주지 않았다면 피해가 훨씬 더 컸겠지.
어쩌면 은서도 잘못됐을 수 있고.
고개를 숙여 조의를 표하고 마계수 앞에 섰다.
손을 가져다 대지 않아도 마계수에서 루시엘의 기운이 느껴진다.
더불어 음습하고 끈끈한 마기도.
가까이서 보니 마기 때문인지 약간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간 것 같은 느낌도 든다.
원래 루시엘이 각성을 하면서 마계수에선 더는 마기를 찾아 볼 수 없었다.
아마 마계수가 루시엘을 회복시키기 위해 마기를 빨아들이고 있는 것 같은데, 그래도 보자마자 안심했다.
원시천존의 말대로 루시엘을 회복시킬 수 있겠다는 확신이 생겼으니까.
은서를 조금 뒤로 물러나게 하고 마계수에 손을 가져다 댔다.
사실 손을 댈 필요도 없지만, 자칫 마왕의 마기가 대기로 흩어져 은서에게 안 좋은 영향을 끼칠 수도 있다.
흡자결을 이용해 마계수에 존재하는 마기들을 뽑아내기 시작했다.
처음 만났을 때보다 훨씬 지독하지만 지금의 나 역시 루시엘을 처음으로 만났을 때완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다.
내 몸속으로 빨려 들어온 마기는 순식간에 사라진다.
그렇게 5분 정도 지나고 마계수에서 마기가 더는 느껴지지 않을 때 나무 중앙에 구멍이 생기더니 루시엘이 나왔다.
이곳의 시간은 30배 빠르게 흐른다.
900일 만에 나를 보는 걸 텐데 녀석은 은서처럼 나를 껴안기는커녕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이다.
상처는 완벽히 치료했는데… 뭐지?
"왜 그래? 아직 몸이 정상이 아니야?"
루시엘은 여전히 슬픈 표정으로 고개를 젓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미안…."
"뭐가 미안하다는 거야?"
타박하며 루시엘을 끌어안았다.
내 품에 안긴 루시엘은 은서가 처음에 그랬던 것처럼 눈물을 펑펑 쏟아 내기 시작했다.
"왜 그래?"
"다 내 잘못이야…."
"잘못?" "사부에게 신혁이 널 구해 달라고 부탁한 게 나야. 사부를 보내고 애들을 도왔어야 하는데. 널 기다린다고 포탈에 있는 바람에 세진이도 구하지 못하고…."
이미 사부에게 들어 알고 있던 사실이다.
펑펑 울며 자책하는 루시엘을 토닥이며 말했다.
"그게 왜 네 잘못이야? 네 잘못 아니야."
"아니야, 다 내 탓이야…."
"네가 사부님을 보내 주지 않았으면 나는 여기 돌아오지 못했을 거야."
숨이 끊어질 때까지 마신과 함께 우주를 떠돌아다녔겠지….
나를 살린 건 사부 그리고 사부를 보내 준 루시엘이다.
"사부를 믿자. 사부님은 돌아오실 거야."
"하지만… 세진이는 내가 신혁이 네 말을 듣고 다시 여기에 있었으면…."
"나를 구하려고 그랬던 거잖아?"
"그래도 사부에게 말을 하고 바로 여기로 돌아왔었다면 세진이도 구할 수 있었을 텐데. 미안해. 정말 미안…."
품이 점점 더 축축해져 간다.
"그것도 네 탓이 아니라 내 잘못이지. 내가 마왕의 전력을 오판했으니까."
처음부터 제대로 판단하고 루시엘과 함께 잡으라고 했다면 이런 결과는 없었을 테니까.
"하지만…."
"루시엘, 아까도 말했지만 네가 아니었으면 나는 지금 여기 없었을 거야. 그리고 네 덕에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구했어. 넌 잘했어."
루시엘 토닥이며 은서를 보니 녀석은 등을 돌리고 있다.
어깨가 들썩이는 걸 보니 우는 것 같은데 감정이 북받친 것 같다.
"왜 혼자 거기서 청승맞게 그러고 있어?"
의념으로 은서를 끌어당겨 루시엘과 함께 껴안았다.
역시 은서의 얼굴도 눈물범벅이다.
"오빠… 언니…."
양손으로 둘의 등을 토닥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둘 다 들어 줬으면 하는 이야기가 있어. 아직 끝난 게 아니야."
"네?"
"마왕 같은 존재가 또 나타난다는 거예요?"
"다른 마신이 오는 거야?"
"그런 의미가 아니야."
"그럼 무슨…."
"방법이 있어. 모든 걸 되돌릴 수 있는."
세진이와 내 제자들, 지인들, 희생된 사람들 모두를 되살리고 어쩌면 사부까지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은서는 흥분했는지 눈이 무척 커졌다.
하지만 루시엘은 담담하게 슬픈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할지 짐작한 것 같다.
원시천존이 방법을 이미 내가 알고 있다는 이야기를 했을 때 처음엔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를 하는지 이해를 할 수 없다.
하지만 오늘 아침 세진이의 무덤에서 돌아와 은서를 재우고 깨달았다.
기원의 시련.
해당 시련을 통과한 자에겐 어떠한 소원이라도 들어주는 기원의 구슬을 준다.
이미 하나 가지고도 있다.
난이도를 최저로 낮춘 시련을 통과하고 받은 거라 정말 작은 구슬이니 전부를 구하진 못해도 혹시 세진이만은 되살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바로 아공간 마법을 사용했고 구슬을 꺼내 소원을 빌었었다.
세진이를 되살려 달라고.
구슬이 황금색 빛으로 물들며 엄청난 속도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희망을 가지고 구슬을 뒤쫓았다.
산도 넘고 바다도 건넜다.
한참을 날아가던 구슬은 갑자기 멈추더니 산산이 부서졌다.
하지만 구슬이 멈춘 곳엔 세진이는 없었다.
구슬이 사라진 곳은 그랜드 캐니언.
지옥의 문의 입구였다.
"오빠?"
"기원의 시련에 도전할 거야."
* * *
지옥의 문에 들어왔다.
루시엘은 루미엘을 보기 위해 몇 번 들렀다고 들었지만 나는 처음 시련을 받은 이후 단 한 번도 이곳을 찾지 않았다.
루미엘을 만나는 순간, 강제로 기원의 시련에 도전하게 되니까.
처음에는 두 사람이 반대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원작에서 도현이가 기원의 시련을 극복하고 복귀하는 데 3년이었나?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렸으니까.
물론 지금의 나는 도현이보다 정신력이 강하다고 생각하니 훨씬 짧겠지만 단언할 수 없다.
내가 바라는 소원은 도현이가 바랐던 소원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려운 일이니까.
하지만 세진이와 사부 그리고 모든 사람들을 구할 수만 있다면 얼마가 걸리더라도 무조건 시도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말을 하지 말까 생각도 했지만 그건 둘에게 정말 못 할 짓이니까.
정말 다행히 루시엘과 은서는 반대하지 않았다.
특히 은서는 고민도 하지 않고….
"세진 언니가 아니라 제가 죽었어도 오빠는 같은 선택을 했을 테니까요. 저는 오빠를 믿어요."
이렇게 즉답했다.
루시엘은 조금 고민을 하긴 했지만 허락을 해 줬고 지금도 내 옆에 있다.
입장은 한 사람밖에 할 수 없지만 천사인 루시엘은 인원에 포함이 안 된다.
"저기… 신혁, 마지막에 은서 표정 못 봤어?"
루시엘이 본 걸 내가 못 봤을 리가 있나….
"봤어."
조금 전 입구에서 헤어졌던 은서는 무척이나 밝게 배웅을 해 주고 일이 많다며 순간이동 마법을 써서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사라지는 그 찰나의 틈에 녀석은….
아니, 사실 훨씬 전부터 알았다.
목소리는 밝았지만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으니까.
루미엘이 있는 곳까지 얼마 남지 않았는데 루시엘이 내 팔을 붙잡는다.
"꼭 이렇게 급하게 가야 해? 조금 더 있다가…."
루시엘의 얼굴도 아까 은서처럼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다.
루시엘의 마음이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다.
은서를 만난 지 24시간도 채 되지 않았고, 루시엘 입장에서는 깨어나자마자 거의 바로 이곳에 온 거니까.
나도 둘과 조금이라도 시간을 보내다 도전할까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니지만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마음이 약해지고 세진이를, 사부를 잊어버리게 될지도 모르니까.
"루시엘, 나 못 믿어? 전에 한 번 도전했을 때도 일주일 만에 극복했잖아."
"그건 최저 난이도였잖아…."
붙잡으려는 말과 달리 루시엘은 내 팔을 붙잡던 손을 풀었다.
하지만 이번엔 내가 루시엘을 끌어당겨 안았다.
"믿어 줘. 최대한 빨리 돌아올 테니까."
얼마 지나지 않아 루시엘이 먼저 나를 밀어냈다.
끝내 참지 못했는지 투명한 눈물이 루시엘의 뺨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다.
뭔가 더 할 말이 많이 남은 것 같은 표정이었지만 루시엘은 입을 꾹 닫고 내게 가라고 손짓을 한다.
"정말 금방 돌아올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줘. 은서도 부탁할게."
말을 마치고 그대로 뒤돌아서 달렸다.
더 보고 있으면 가지 못할 것 같았으니까.
얼마 가지 않아 전에 한 번 봤던 거대한 문이 보인다.
바로 내공을 흘려보내자 빛과 함께 루미엘이 나타났다.
"어? 또 실수한 거야? 최저 난이도는 이젠 도전 못 하는… 너 울어?"
급히 손으로 눈을 훔쳤다.
"실수 아니야. 이번엔 진짜로 도전하러 왔어. 처제, 최고 난이도로 부탁할게."
"최… 최고 난이도? 그럼 우리 언니는 어떡하고?"
"당연히 허락받았지. 어차피 금방 돌아올 거야."
"지난번에 봤을 때랑 느낌이 다르지만 최고 난이도는 절대 쉽지 않아. 언니가 말 안 했어?"
기원의 시련이 어떤 트라우마를 보여 주든 지금보다 심각할 순 없겠지.
설령 지금과 버금갈 만큼 힘들더라도 상관없다.
애들과 약속을 했으니까.
내 사람을 위해서라면 나는 그 어떤 것도 두렵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