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데미의 검술 강사가 되었다 (275)
외전 - 또 다른 미래
전 세계적으로 몬스터가 쏟아져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 순간이동 마법을 사용하려 했지만 갑자기 세상이 회색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이내 모든 게 멈추고 하얀 빛과 함께 원시천존이 나타났다.
“축하하네.”
“축하요?”
포탈 해방 사태는 마왕 강림의 신호탄.
지금 이 순간에도 사람들이 죽어 나가고 있는데 축하라니, 어이가 없다.
“3년 전 내가 보여 줬던 미래를 기억하나?”
그걸 어떻게 잊을까.
3년이나 지났지만 원시천존이 보여 준 미래에서 본 하얀 연기와도 같던 마신의 공포는 잊히지 않았다.
고개를 끄덕이니 원신천존은 씨익 웃는다.
“자네는 내게 확정된 미래가 아니니 최선을 다해 바꾸겠다고 했지.”
그래, 분명 그렇게… 잠깐. 설마?
“자네의 말처럼 미래가 바뀌었네.”
“미래가 바뀌다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마신이 이 세상에 강림하지 않는다는 말이지.”
“정말입니까? 그럼 마왕도….”
“에잉, 욕심이 과하군. 마왕은 예정대로 등장하겠지…. 그래도 강림하는 마왕은 지금 자네의 실력이라면 상대하는 게 그리 어렵진 않을 걸세.”
…꿈인가?
“미래가 바뀌지 않았더라면 자네에겐 꽤 아픈 미래가 기다리고 있었을 걸세.”
“네?”
“어려운 선택도 해야 했을 거고. 물론 자네가 바른 선택을 한다면 끝까지 불행하지만은 않았겠지만. 뭐, 미래가 바뀐 지금은 다 의미 없는 이야기지. 다시 한 번 축하하네.”
정말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기쁘다.
아직 마왕이 강림하진 않았지만 원시천존이 내가 쉽게 처리할 수 있을 거라고 보장을 했으니 큰 문제는 없을 테니까.
안도하는 마음이 들자 의문이 생겼다.
“저기… 원시천존님, 갑자기 왜 미래가 바뀐 건가요?”
당연히 그동안 내가 기울인 노력 때문이긴 하겠지만 그래도 직접 확인받고 싶었다.
“아, 그게….”
“말씀하시기 곤란하시면 안 해 주셔도….”
“사실은 내가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던 행성이 하나 있었는데 마신 녀석이 여기 오는 길에 갑자기 경로를 틀더라고.”
“네?”
“내가 그래서 허튼 데로 새지 말고 원래 가던 길 가라고 경고를 했는데 무시를 하네?”
“처… 천존님?”
“별 시답잖은 놈이 내가 경고까지 했는데 무시하면 내가 화가 나, 안 나?”
“나… 나셨겠죠.”
“그렇지. 꼴받게 해서 그냥 내가 해치워 버렸지.”
…내 노력 때문이 아니었구나.
뭔가 조금 허무하다.
“뭐, 아무튼 자네 입장에선 잘된 거 아닌가.”
원시천존의 말이 맞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고, 어쨌든 마왕뿐이라면 충분히 처리할 수 있을 테니까.
마왕 정도는 도현이와 이지성 정도에게만 맡겨도 충분하겠지?
“어허, 또 방심하네. 아까 내가 마왕이 그리 어렵지 않다고 한 건 어디까지나 자네를 기준으로 두고 한 말이니까. 기왕이면 직접 처리하는 게 좋을 거야.”
“앗, 넵. 알겠습니다.”
“그래. 기껏 좋은 미래로 갈 수 있는 상황이 됐는데 괜히 생고생하고 불행해지기 싫으면 처신 잘하라고.”
알겠다고 대답하려 했지만 이미 원시천존은 사라지고 세상도 색을 되찾았다.
조금 어안이 벙벙했지만 빠르게 세진이가 있는 청와대로 이동했다.
대통령을 움직여 한국의 사태에 대비하며 사람들을 대피시켰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 대한민국에 있는 포탈도 전부 안전지대가 사라지며 몬스터가 쏟아져 나왔다.
물론 대비를 잘해 둬서 피해가 거의 없었다.
나는 물론이고 다른 헌터들 모두 합심하여 노력해 몬스터에게 점거당한 지역도 하나하나 수복했고 한국을 안정화한 이후에는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지원했다.
100일이 가까워지며 마족들이 등장하기 시작했지만, 그에 대비해 미리 헌터들을 모아 특별팀을 만든 상태였기에 빠르게 정리할 수 있었다.
그렇게 정신없는 나날들이 지나가다 보니 드디어 100일, 마왕이 뉴욕에 강림했다.
마나의 흐름은 물론 마족에게 알아낸 정보로 위치를 어느 정도 특정해 둔 상태라 사람들을 모두 대피시키고 홀로 남아 마왕과 최후의 결전을 벌였다.
루시엘과 세진이 은서가 함께 싸우겠다고 했지만 전부 거절했다.
원시천존이 내가 직접 해야 한다고 경고했었으니까.
확실히 마왕은 강했다.
루시엘을 포함한 우리 애들이나 아니면 다른 헌터들이 곁에 있었으면 오히려 걸리적거리고 방해가 됐을 거다.
하지만 혼자라 아무 걱정 없이 싸울 수 있었고 일주일의 사투 끝에 마왕을 소멸시킬 수 있었다.
마왕이 사라지고 세계는 평화를 되찾았다.
그리고 8년이 지났다.
* * *
눈을 떠 보니 침대가 텅텅 비어 있다.
[오전에 세계헌터협회 주요 회의가 있어서 먼저 출근할게요. ―세진]
왜 없나 싶었더니 회의라 일찍 나갔구나.
조금 더 뒹굴거리고 싶어 이불을 덮고 눈을 감았지만 얼마 안 가 다시 몸을 일으켜 세울 수밖에 없었다.
드르륵一 드르륵―.
침대 옆 탁자의 휴대폰이 울렸으니까.
꼭두새벽부터 누군가 했더니 우리 은서다.
“여보세요.”
―네. 여보입니다.
“여보요?”
―반응이 그게 뭐예요. 설마 아직까지 자고 있어요?
“…시차 좀 생각해 줘. 한국은 아직 8시도 안 됐어.”
은서는 지금 아프리카 대륙으로 출장을 간 상태다.
내가 마왕을 소멸시킨 지 8년이 지난 지금 안전지대가 사라져 나온 몬스터들 대부분은 처리됐지만 헌터를 비롯해 인프라 부족한 아프리카 쪽엔 여전히 몬스터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시간 다 확인하고 전화한 건데요. 오빠, 오늘 애들 돌아오는 날인 거 알죠?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구나.”
―벌써라니, 오빠는 애들 안 보고 싶어요?
날카로운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화상 전화는 아니지만 목소리만으로도 지금 은서가 어떤 표정인지 알 것 같다.
“아니, 너무 보고 싶지. 이따 12시에 데리러 가면 되잖아. 오는 길에 외식이나 해야지.”
―외식할 거면 사부님도 같이 챙겨요.
“아, 그것도 괜찮겠네.”
―탄산 금지, 사탕 금지, 밀가루는 조금만, 야채랑 단백질은 충분히, 알죠?
“네, 네. 알겠습니다요.”
―저도 저녁에 돌아갈 거예요.
“오케이, 그럼 저녁에 봐.”
시간이 참 빠르다.
벌써 돌아오다니 좋은 날도 다 갔구나.
더 잘까 했지만 지금 잠들었다가 12시 전에 못 일어나면 대참사가 날 테니 졸린 몸을 일으켜 욕실로 향했다.
씻고 나와 냉장고를 여는데 쪽지가 붙어 있다.
[안에 맨 위 칸 보면 샌드위치 있어요. 아침으로 먹고 애들 배고프다고 할 때 간식으로 주세요. ―세진]
아침에 회의라더니 우리 세진이는 참 대단하다.
원래 이런 건 집안일 담당인 내가 해야 하는 건데.
샌드위치와 주스로 아침을 해결하고 순간이동 마법을 사용해 사부가 있는 포탈에 왔다.
마중을 안 나오셨지만 섭섭한 마음 같은 건 없다.
캠핑카 쪽에 왔지만 사부가 안 보여 호숫가로 가다가 사부를 발견했다.
“이랴! 이랴!”
땅바닥을 네발로 기고 있는 사부 위엔 은색 머리카락을 한 남자아이가 타고 있다.
…예전이라면 상상도 못 할 장면이지만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물론 처음은 아니지만 이런 모습을 하는 사부를 볼 때마다 마음이 좀 아프다.
“오! 아빠다.”
사부 위에 올라타 천진난만하게 이랴 이랴 하는 저 악동은 나와 루시엘의 아들, 강신엘이다.
“강신엘, 너 당장 안 내려와! 할아버지한테 말타기 놀이 해 달라고 하지 말라고 했지.”
“흥, 할아버지가 시킨 거 다 하면 소원 들어준다고 해서 하는 거거든?”
사부 뒤로 숨어서 메롱을 하는데… 어휴, 뺀질뺀질한 게 아주 제 엄마를 똑 닮았다.
“그래, 신혁아. 내가 소원 들어준다고 해서 그런 거니 너무 뭐라 하지 말거라.”
“사부가 맨날 그렇게 편들어 주고 해 달라는 거 다 해 주면 애 버릇 나빠진다니까요.”
“에이, 우리 신엘이가 무슨 버릇이 안 좋다고. 너보다 훨씬 더 착하고 잘생기고 노력도 하고 재능도 있고 학교에서도 인기 짱이라던데.”
나도 사부의 말에 대체로 동의하는 편이지만 그래도 우리 사부는 너무 오냐오냐만 한다.
“할아버지 최고. 아빠는 바보.”
저, 저… 저거 봐. 안 되겠다.
“아빠한테 바보? 네 엄마한테 다 일러야겠네.”
“어… 엄마요? 잘못했어요.”
요 여덟 살짜리 악동이 제일 무서워하는 게 제 엄마다.
솔직히 나도 신엘이한테는 모질게 대하지 못하는 편이지만 우리 루시엘은 얄짤없다.
초등학생인데도 아직도 엉덩이 팡팡을….
“쯧쯧, 못난 놈. 왜 우리 신엘이 기를 죽여.”
“사부도 자꾸 신엘이 편드시면 라면 통제 들어갑니다.”
“치사한 놈. 신엘아, 넌 커서 아빠처럼 되면 안 된다.”
“제가 뭐 어때서… 어휴, 말을 말아야지. 이따 신엘이 잠깐 데리고 나갔다 올 거예요.”
신엘이는 다섯 살 때부터 유치원이 끝나면 사부에게 가서 무공을 배웠다.
당연히 억지로 시키는 게 아니라 자기가 하고 싶어 한다.
초등학생이 된 지금은 학기 중엔 공부 때문에 자주 못 오지만 방학만 하면 아주 이곳에 눌러살고 있다.
“어디 가려고? 혹시 예방접종?”
“으앙! 할아버지, 나 주사 싫어….”
아주 기겁을 한다.
“그럼 치과? 우리 신엘이 이 잘 닦는데.”
“맞아. 나 이 엄청 깨끗해!”
아주 죽이 잘 맞는다.
지금 보니 무공 익히는 것보단 사부를 더 좋아하는 것 같다.
“오늘 신엘이 동생들 유치원 캠프 갔다가 돌아오는 날이거든요.”
“오, 그래? 그럼 이따 같이 오는 거냐?”
“네. 점심때 유치원 도착한다고 했으니까 데려와서 같이 점심 먹을까 하는데, 뭐 드실래요?”
“우리 귀염둥이들과 함께라면 뭐든 상관없지.”
“함께라면? 아빠, 라면 먹어요.”
순간 멈칫했다.
하여간 누가 내 아들 아니랄까 봐.
이제 보니 학교에서 인기 많다는 거 거짓말 아닐까?
이런 농담 하면 애들에게 야유받을 것 같은데.
“라면 좋지. 거기에 분식도 추가해서.”
은서가 밀가루 먹이지 말라고 했던 것 같은데.
튀긴 음식 먹이는 것도 별로 안 좋아한다.
그렇지만 어쩌다 한 번은 괜찮지 않을까?
“그럼 준라면 순한 맛으로….”
“어허, 선 넘지 마라.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니지.”
“신엘이라면 몰라도 아직 애들은 매운맛 못 먹거든요.”
포탈에서 시간을 좀 죽이다 11시 반쯤에 포탈을 나왔다.
유치원으로 이동해 기다리고 있는데 다른 학부모들도 한두 명씩 도착했다.
어째 학부모들이 우리 쪽을 힐끗힐끗거리면서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하는데, 이거 좀 쑥스럽다.
강신혁 인기 아직 안 죽었구나.
벌써 8년이란 세월이 지났고 대외 활동도 안 하고 있지만 이 몸은 세계를 구한 영웅이니까.
어떤 칭찬을 하고 있는지 궁금해 귀에 내공을 보내 청력을 끌어올렸다.
“저기 애기 좀 봐요. 엄청 잘생기지 않았어요?”
“그러게. 혼혈 같은데 진짜 모델 해도 되겠어요.”
“어떻게 애기가 저렇게 멋있지?”
…내가 아니라 신엘이를 보고 그런 거였구나.
나 혼자 김칫국을 장독대째로 퍼마셨다.
“아빠, 저 버스 아니에요?”
신엘이 말대로 버스 한 대가 유치원 주차장으로 들어왔다.
이내 아이들이 내리기 시작하는데… 어? 우리 공주님들도 보인다.
양갈래 머리에 양쪽에 빨간 헤어핀을 꽃은 귀여운 공주님은 나와 은서의 딸 시은이고 똑단발에 파란색 토끼가 그려진 머리띠를 한 공주님은 나와 세진이의 딸 세은이다.
둘 다 여섯 살로 신엘이와는 두 살 터울이다.
우리를 봤는지 활짝 웃으며 달려오는데 신엘이 녀석도 마주 서서 달려간다.
“시은아! 세은아!”
뺀질뺀질하고 까불거리는 악동이지만 동생들은 끔찍이 아낀다.
하지만 어림도 없지.
우리 두 공주님은 다가가는 신엘이를 개무시한 채 그대로 쭉 달려 내게 안긴다.
“아빠다!”
“아빠!”
양쪽 볼에 연신 뽀뽀를 하는데 내가 이 맛에 산다.
“얘… 얘들아, 오빠는 투명 인간이야?”
“오빠도 있었어?”
“아빠가 너무 빛이 나서 오빠는 있는지도 몰랐네.”
신엘이 녀석 완전히 시무룩한 표정이다.
“나도 시은이 세은이 엄청 보고 싶었는데….”
“오빠도 참, 농담이자나!”
“그랭. 오빠도 보고 싶었징.”
두 살 터울인데 벌써부터 오빠를 이렇게 들었다 놨다 하는 걸 보면 내 딸들이지만 여간 잔망스러운 게 아니다.
나중에 크면 남자들 엄청 울릴 것… 아니지. 우리 공주님들은 절대 시집 안 보낼 거다.
“우리 공주님들, 캠프는 재밌었어?”
“응! 하지만 아빠랑 노는 게 더 좋아.”
“시은이두, 시은이두! 아빠가 제일 좋아!”
“그… 그래요. 아빠도 공주님들이 제일 좋아. 점심은 아직 안 먹었지?”
“간식 먹긴 했는데… 세은이 배고파.”
“시은이 떡볶이 먹고 싶어.”
“세은이는 라면.”
“그럼 할아버지랑 같이 먹으러 가자.”
양손에 각각 공주님들의 손을 잡았다.
“신엘이도 얼른 시은이나 세은이 손… 엇?”
신엘이 녀석 갑자기 내 등에 올라탔다.
“난 업힐 건뎅.”
이제 보니 동생들에게 살짝 샘이 났나 보다.
이런 걸 보면 초등학생이 됐어도 아직 애다.
“오빠 치사해. 시은이도 업어 줘.”
“아빠, 세은이도.”
보채는 공주님들을 보고 있으니 기가 다 빨리는 기분이지만 절로 미소를 짓게 된다.
이런 게 바로 행복 아닐까?
THE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