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46 소꿉친구는 싫습니다 : 잃어버린 기억 =========================
과거편 2.
“....으윽”
이동 마법을 쓴 슈라이나는 자신이 모르는 장소에 도착하고 말았다. 저번에 연습용으로 비슷한 마법진을 만들어봤을 때 완벽하게 동작하길래 더욱 정교하게 만들어진 이번 마법진은 문제가 없을 줄 알았다.
연무장에 왔다면 헤스티아가 기다리고 있을테지만 헤스티아도 보이지 않는다. 연무장은 빛 마법구가 여기저기 설치되어 있어 환해야할텐데, 슈라이나가 있는 장소는 어둡기만 했다.
“...피냄새”
어두워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은 이 곳을 가득 채운 건 바로 비릿한 피냄새였다. 쇠냄새와 흡사한 이 냄새는 작은 공간안에서 진동했다. 슈라이나는 생전 이리 짙은 피냄새를 맡아본 적이 없었다. 슈라이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긴장하기 시작했다. 어쩌면 자신은 엄청난 곳에 굴러 들어온 것 일수도 있었다.
슈라이나는 욱신거리는 머리를 붙잡으며 이 곳이 어디인지를 파악하기 위해 두리번거렸다. 너무 깜깜해서 잠시 눈살을 찌푸렸다. 곧 어둠에 적응한 슈라이나는 방안의 사물이 하나 둘씩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슈라이나가 굴러 들어온 장소는 누군가의 방이었다. 작고 소박한 침대와 나무로 만든 책상이 보인다. 어두움에 점차 적응하면서 처음에는 물건들의 형태가 보이기 시작했고 그 다음에는 물건들의 색이 보이기 시작했다. 색이 드러났을 때 슈라이나는 놀라서 뒤로 자빠질 수 밖에 없었다.
방의 가구들이 피로 뒤덮였기 때문이었다. 슈라이나는 넘어져서 엉덩방아를 찍었다.
그러나 엉덩방아를 찍자마자 슈라이나는 몸을 일으켜 전투 준비를 해야했다.
낯선 곳에 떨어져 당황하고 있는 슈라이나의 뒤에서 공격이 날아왔다. 슈라이나는 살기를 느끼고 허리춤에서 단검을 빼내 뒤쪽에서 날아오는 공격을 막았다. 슈라이나에게 날아온 것은 깨진 그릇 조각이었다. 매우 뾰족한 그릇 조각은 충분한 흉기였다. 슈라이나가 막지 못했더라면 그녀는 크게 다칠 뻔했다.
슈라이나가 깨진 그릇조각을 막자마자 한 아이가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슈라이나에게 달려든 아이는 새하얀 색과 가까운 은발을 가지고 있었지만 피로 물들어 붉은색에 가까웠다. 아이는 도망치려던 슈라이나가 꼼짝도 못하게 바닥 쪽으로 누르고 목에 다른 깨진 그릇 조각을 가져다 대었다. 깨진 조각이 슈라이나의 목 쪽을 누르며 얕은 생채기를 냈다.
슈라이나는 자신을 공격한 이 아이를 알고 있었다. 아이는 슈라이나의 목을 깨진 조각으로 누르며 입을 열었다.
“....뭐냐 넌.”
남을 깔보는 듯한 익숙한 보석안이 자신을 내려다보았다.
슈라이나는 자신을 위협하고 있는 스완하덴을 마주 바라보았다.
일단 공격받은 것과 스완하덴의 엄청난 살기에 슈라이나는 놀랐지만 그보다 더 경악스러운 것이 있었다.
스완하덴의 피부 여기저기 처참하게 잘려있었다. 잘린 상처 뿐만이 아니었다. 맞은 상처와 터진 상처와 살이 찢긴 흔적 또한 있었다. 뼈가 뒤틀려있는 걸 보아 뼈도 온전치 않은 것 같다. 아이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성한 구석 하나 없이 너덜너덜했다. 뼈가 보일 정도의 깊은 상처들도 보인다.
슈라이나는 피투성이가 되어있는 스완하덴을 밀쳐내고 항상 들고 다니는 아공간 주머니에
넣어둔 봉투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거기에 슈라이나는 급한대로 구역질을 하기 시작했다.
“우웨에에엑....으윽...웨에에엑.”
“....”
스완하덴은 자신을 보자마자 구역질을 시작하는 슈라이나를 보며 인상을 썼다. 슈라이나는 실례인 걸 알아 구역질을 참아보려고 했지만 참을 수가 없었다. 저건 진짜 너무 심했다.
스완하덴의 상처들은 절대로 실수로, 혹은 사고로 난 상처가 아니었다. 고의적으로 누가 그의 살을 찢고 자르고, 그의 몸을 부수지 않고서야 저런 상태가 될 수가 없었다. 슈라이나는 고생했긴 해도 평범한 삶을 살아왔기 때문에 갑작스럽게 저런 잔인한 장면에 노출이 되면 거부감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슈라이나는 저런 잔인한 장면을 볼 때마다 자동적으로 자신의 전생의 기억이 떠올랐다. 전생의 부모님이 전신이 찢긴 차가운 시신으로 자신에게 돌아왔을 때의 그 기억. 그 때 보았던 시체는 너무 심각하게 훼손되어있어, 도저히 자신이 좋아하는 그 따뜻한 부모님이라고 생각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스완하덴의 상처는 그보다 심각했다.
슈라이나는 한참 동안을 구역질했다. 스완하덴은 그런 슈라이나를 차갑게 식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슈라이나는 진정해보려고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내쉬었다를 반복했다. 진정한 슈라이나는 자신을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는 스완을 마주 바라보았다.슈라이나는 입을 닦으며 스완에게 말을 걸었다.
“으윽, 미안해. 점심, 저녁때 과식해서 체했나봐. 네가 갑자기 달려드니까 놀라서 나도 모르게 그만....”
슈라이나는 스완하덴의 상처를 보고 구역질을 해버리고 만 것에 엄청난 죄책감을 느꼈다. 스완하덴이 자신을 보자마자 죽이려고 든 건 잘한 짓은 아니었지만 그를 보고 구역질을 한 것도 잘한 짓은 아니었다. 슈라이나는 최대한 그의 상처를 보지 않고 스완하덴의 눈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당황한 나머지 반말이 나왔지만 그는 별로 신경쓰고 있는 것 같진 않아 슈라이나는 계속 반말을 하기로 했다.
일단 대충 상황을 보아 이 곳은 스완하덴의 방임이 틀림없었다. 슈라이나는 최대한 침착하려고 노력했다. 스완하덴은 자신이 이 곳에 갑자기 나타나 경계하고 있는 것 같았다. 어쩌다가 이 곳에 왔는지에 대한 설명을 빨리 해야했다. 스완하덴의 경계를 빨리 풀지 않으면 자신은 진짜로 죽임 당할 것 같았다.
“여긴 도대체 어디야? 이동 마법진으로 연무장에 가려고 했는데 중간에 오류가 있었나봐.”
“....”
슈라이나의 변명과 태연한 척은 스완하덴에게 먹히지 않았다. 스완하덴은 특유의 살벌한 눈빛으로 슈라이나를 말없이 계속 노려보고 있다. 아까처럼 당장 달려들어서 슈라이나를 죽이려는 기세였다. 스완하덴의 몸이 상처투성이여서 힘이 많이 빠진 상태가 아니었다면 슈라이나는 스완에게 당장 죽어도 이상할 게 없었다.
스완하덴은 말을 하진 않았지만 당장 이곳에서 나가라는 눈빛을 담고 있었다. 슈라이나는 스완의 그런 기세를 읽고 한숨을 쉬며 말했다.
“다시 돌아가고 싶지만 마력이 부족해. 내 마력이 회복할 때까지만 잠시 있을게.”
“...”
슈라이나의 말에 스완은 대놓고 불쾌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스완하덴은 짜증이 난 듯하지만 반박할 힘이 없었다. 온몸에 기운이라는 기운은 모두 빠져있는 상태였다. 손의 뼈들도 여러 조각으로 부서져있고, 온몸에 깊은 상처가 많아서 움직일 때마다 매우 쓰라렸다. 스완이 겨우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는 이유는 그의 자연 치유 능력 덕분이었다.
스완하덴은 슈라이나를 창밖으로 던져버릴까 생각하다가 그럴 힘이 없으니 내버려두기로 했다. 슈라이나의 반응을 보니 정말로 얼떨결에 온 것 같은 눈치다. 스완하덴은 슈라이나에게서 몸을 돌리고 바닥에 널브러졌다. 숨소리가 차분해져가는 것을 보아, 스완하덴은 자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우연히 오게 됐지만, 여기가 네 방인 거야?”
“...”
"그나저나 너 저녁은 먹었어? 배는 안고파? 나 쿠키 있는데 줄까?"
"...."
"여기 물은 없는 건가? 너도 그렇고 방도 피투성이인데 닦으면 안돼?"
"...."
슈라이나는 현재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낯선 곳에 떨어진 것도 그렇지만 갑자기 목숨의 위협을 받은 것도 그렇고 스완하덴의 저런 모습을 목격한 것도 슈라이나에게 모두 충격이었다. 두려움과 당황스러움과 안타까움등의 감정이 섞여 슈라이나는 말이 많아졌다.
스완하덴은 등을 돌린 채 무심하게 대답했다.
“야, 머리 울리니까 있으려면 조용히 있을래? 마력이나 빨리 회복하고 여기서 꺼져.”
슈라이나는 조용히 입을 닫았다. 무릎을 끌어안고 슈라이나는 스완하덴의 맞은편에 앉아있었다. 슈라이나는 스완하덴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작고 하얀 아이가 피투성이의 등을 보이며 바닥에 누워있었다. 바닥은 모래와 먼지가 많았고 저렇게 바닥에 누워있으면 상처에 먼지가 들어갈 것이 분명했다. 게다가 스완하덴은 괴로운지 몸을 웅크리고 누워있었는데 저러고 잠에 빠진다면 다음날 아침 몸이 뻐근할 것이 분명했다. 물론, 고작 몸 하나 뻐근한 게 상처투성이인 스완에겐 문제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슈라이나는 여러모로 신경 쓰였다.
슈라이나는 조금 조용히 있다가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침대에 누워 있는게 편하지 않아?”
슈라이나가 묻자 스완은 자고 있던 건 아니었는지 대답해줬다.
“거기까지 갈 힘이 없어.”
스완하덴은 쇳소리가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피가 섞인 기침을 두 어번한 스완은 고통을 담은 숨을 내쉬었다.
스완이 확실히 싸가지는 없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슈라이나는 마음이 너무 아팠다.
“도와줄까?”
“시끄러워”
슈라이나는 계속 도움을 거부하는 스완하덴에게 다가갔다. 스완하덴의 팔이 너덜너덜했기에 슈라이나는 그의 몸통부분을 붙잡고 그를 세웠다.슈라이나는 그를 들어올리는 힘이 부족해서 겨우 채워진 마력을 힘을 불리는데 사용했다. 스완하덴은 거부했지만 곧 포기하고 슈라이나의 도움을 받았다.
슈라이나는 스완하덴을 질질 끌고 침대쪽으로 이동했다.
“너한테서 토사물 냄새나.”
스완하덴은 낑낑거리며 자신을 침대쪽으로 이끄는 슈라이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슈라이나가 토를 했기 때문에 토냄새가 나는 것은 당연했다. 슈라이나는 그의 말에 별로 개의치 않아하며 맞받아쳤다.
“너는 피랑 진물 냄새나.”
슈라이나의 말에 스완하덴은 쓴웃음을 지었다. 슈라이나가 침대쪽으로 가까이 다가가자 스완하덴은 슈라이나를 옆으로 밀쳤다. 덕분에 슈라이나는 또 엉덩방아를 찍으며 넘어지고 말았다.
스완하덴은 걸레짝이 된 자신의 몸을 침대 위로 던지다시피 누웠다.피투성이인 스완이 침대 위로 쓰러지자, 침대 시트가 더욱 붉은색으로 물들었다.
슈라이나는 스완의 저 상처들을 지혈이라도 해야하지 않을까 걱정했다.
“붕대 어디있어.”
“아까부터 계속 도를 넘고 있는 거 알아? 그만해.”
슈라이나는 스완하덴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슈라이나는 자신의 윗옷을 찢으려고 하다가 문득 자신의 아공간 주머니에 여분의 붕대가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녀는 주머니에 손을 넣고 붕대를 꺼내다가 소독약도 발견했다.
슈라이나는 붕대와 소독약을 들고 스완하덴에게 다가갔다.
“하지 말라고 했잖아!”
스완하덴은 가까이 다가오는 슈라이나에게 주변에 잡히는 물건들을 던졌다. 날카로운 물건에서부터 무거운 물건들까지 슈라이나에게 날아온다. 슈라이나는 몇 개는 피했지만 몇 개는 그대로 맞고 말았다. 피가 조금 흘렀지만 슈라이나는 태연한 표정을 유지했다.
“...확실히 내가 너랑 친하지는 않지만, 다 떠나서 상처는 치료하자. 나도 너 치료하기 싫은데 너 지금 손도 제대로 움직일 수 없잖아.”
슈라이나는 장식품에 맞아 피가 나기 시작하는 머리를 붙잡으며 입을 열었다. 슈라이나의 시선은 스완하덴의 손에 가있었다. 스완의 손은 손이라는 형태를 겨우 가지고 있었다. 슈라이나는 저 손 상태로 용케 물건들을 던졌다고 생각했다.
“이딴 상처들은 내일 아침이면 전부 나아. 넌 모르겠지만 블란치 가문은 대대로 백마력을 가지고 태어나서 자연치료능력이 뛰어나거든.”
슈라이나가 자신의 상처들을 쳐다보자, 스완은 이불로 자신의 상처들을 가렸다.
블란치 가문은 자연 치료 능력이 뛰어나다는데, 확실히 스완하덴의 상처는 아까보다 눈에 띄게 사라지고 있는 중이었다. 빠른 속도로 상처가 아물고 있긴 해도 스완이 가지고 있는 상처가 워낙 깊어서 다 치료되려면 시간이 조금 걸릴 것 같았다.
슈라이나는 한숨을 쉬었다.
“그럼 붕대만이라도 감자. 너도 네 상처 싫어하잖아. “
“.....”
정곡이었는지 스완하덴은 조용히 있었다. 슈라이나는 스완하덴이 가만히 있자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다가오는 슈라이나를 차가운 눈빛으로 쫓던 스완하덴은 누워있던 상체를 일으켰다.
슈라이나는 스완하덴의 상처를 치료하기 시작했다. 상처가 너무 많아서 소독약은 금방 바닥이 났다. 슈라이나는 뼈도 알아서 제자리를 찾아가 붙는 스완의 엄청난 자연치유력에 깜짝 놀랐다. 최대한 당황하거나 놀란 티를 내지 않으며 슈라이나는 스완의 팔다리에 붕대를 감아줬다.
상처는 전신에 나있었기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붕대로 칭칭 감아야 했다. 붕대가 부족했기에 피부가 가장 드러나는 곳만 집중적으로 붕대를 감았다. 현재 감고있는 붕대에는 피가 묻지 않았다. 이미 피는 멎어 그 위에 새 살이 돋고 있었다.
스완은 자신을 치료해주는 슈라이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작은 주황색 머리가 자신의 상처를 이리저리 확인하며 열심히 움직인다. 스완하덴은 치료가 거의 끝나가는 것을 보고 슈라이나를 밀쳤다.
스완하덴은 슈라이나가 미처 다 못감은 붕대를 스스로 감기 시작했다. 그는 붕대를 다 감고 슈라이나를 노려보기 시작한다.
“집에 가.”
스완하덴은 슈라이나에게 방금 만든 자신의 마법석을 던졌다. 마법석이란 마법사가 자신의 마력을 뭉쳐서 고체화시키면 나오는 돌이다. 강력한 마법사일수록 만드는 마법석의 마력 농도가 짙었다.
스완이 슈라이나에게 준 흰색빛 마법석안에는 짙은 농도의 마력이 들어있었다. 슈라이나는 이토록 짙은 마법석은 본적이 없었기에 깜짝 놀랐다. 이정도면 집에 돌아가는 것뿐만 아니라 이곳을 왕복하는 것도 가능했다.
스완하덴은 슈라이나에게 씌인 마법진의 흔적을 찾아내더니 그걸 복원했다. 그리고선 내 손에 쥐어진 마법석에 손을 뻗어 마법진과 함께 그걸 작동시켰다. 슈라이나의 몸이 흰빛에 감기며 곧 사라지기 시작한다.
“다시 여기 찾아오면 진짜로 죽여버릴 거야.”
사라지는 슈라이나를 보며 스완하덴은 살벌하게 입을 열었다.
* * *
집에 돌아온 슈라이나는 그 다음날 저녁에 가방을 쌌다.
호신용 검도 챙겼고, 날아오는 공격을 방어해주는 마법이 부여된 목걸이도 챙겼고, 과일과 쿠키등 간식도 챙겼고, 치료약이랑 붕대도 챙겼다.
슈라이나는 잠시 인상을 쓰다가 빼먹은 게 없나 확인했다. 아, 맞다. 그걸 깜박할뻔 했네! 슈라이나는 어제 밤에 집에 도착하자마자 만든 마법 아이템 또한 챙겼다. 이건 피와 관련된 모든 자국을 지워주는 마법이 걸려있었다.
헤스티아에게도 잘 말해뒀다. 걱정하며 눈물을 쏟는 헤스티아에게 엉뚱한 곳에 떨어졌을 뿐이지 재미있는 시간을 보내고 안전하게 왔다고 전해줬다.
슈라이나는 마법진을 이용해 스완하덴에게 가려고 했다. 그러나 막상 가려니 스완하덴의 말이 떠올랐다.
[다시 여기 찾아오면 진짜로 죽여버릴 거야.]
“그래, 어디 한번 죽여보시지.”
슈라이나의 팔목과 목과 발목에는 보호 마법과 관련된 악세사리로 주렁주렁했다. 스완하덴은 정말로 강했기에 이 정도 준비는 해야 약해진 그를 상대할 수 있었다. 슈라이나는 용감하면서 은근히 겁이 많았다.
슈라이나는 마법으로 스완하덴의 방에 사람이 몇명있는지 확인까지 해가면서 그의 방에 갈 타이밍을 정했다. 오전부터 오후까지 계속 방에 누군가가 왔다갔다하며 스완하덴과 함께 있다가 일정한 시간 이후로 사람들은 그의 방에 오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했다. 스완하덴은 저녁쯤 되면 언제나 혼자 방에 갇혀있었다. 슈라이나는 이 때 스완하덴의 방에 가기로 작정했다.
스완하덴이 오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슈라이나가 굳이 그곳에 찾아가려는 이유는 단 하나다.
전생에서 어린 동생들을 키우다시피 한 슈라이나는 상처있는 어린애들한테 정말로 약했다. 그냥 못본척하고 지나칠 수가 없는 성격이었다. 살벌한 스완하덴이 무서웠지만 그런 그를 못본척하는 자신의 모습이 더욱 싫었다. 슈라이나는 상처투성이에 혼자 차가운 방에 남겨져있는 스완하덴을 떠올렸다.
슈라이나는 마음을 다잡으며 다시 한번 스완하덴의 방으로 이동했다.
한편 스완하덴은 슈라이나가 마법진을 타고 오는 기척을 읽고 검을 잡았다. 그가 슈라이나를 보내면서 했던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슈라이나도 스완하덴이 공격을 해올거라 예상을 했기 때문에 날아오는 공격을 태연하게 막고 오늘도 상처가 심한 그를 마법으로 묶었다.
스완하덴은 반항을 더 할 수 있었지만 순순히 슈라이나의 마법에 붙잡혀줬다. 스완하덴은 돌아온 슈라이나를 째려봤다.
슈라이나는 스완하덴의 살기어린 눈동자를 바라보며 잠시 뒷머리를 긁적였다.
“음, 안녕”
“....”
“배고프지 않아? 간식 가져왔는데.”
“....”
슈라이나는 가방에 손을 넣고 잠시 뒤적거렸다.
“붕대부터 갈고, 같이 놀자.”
스완하덴은 인상을 썼다.
* * *
슈라이나는 그 뒤로부터 계속 방에 혼자 있을 스완하덴을 찾아와 붕대도 갈아주고 건강한 간식을 가져와 같이 나눠먹었다. 스완은 처음에 슈라이나가 주는 음식을 거부했지만 나중에 슈라이나가 편해지니까 뺏어먹기까지 했다.
거의 매일 티격태격 싸운 슈라이나와 스완하덴이었다. 그러나 스완하덴은 언제나 몸이 너덜너덜했기에 슈라이나 상대로 매번 한 수 물러나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현재는 조금 반항하는 척 해주다가 슈라이나에게 져주는 스완하덴이었다.
“지겨운 놈”
스완하덴은 오늘도 찾아와 붕대를 갈아주는 슈라이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슈라이나가 가져온 핏자국을 없애주는 마법이 담긴 물건 덕분에 스완하덴은 더 이상 피투성이가 아니었다. 스완하덴은 슈라이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의 미간에는 주름이 잡혀있다.
"날 요양해야 할 할아버지처럼 모시지 말라고."
스완하덴은 자신이 어느 정도 회복하자 슈라이나가 감고 있는 붕대를 뺏어서 자기 스스로 치료하기 시작했다. 스완하덴은 슈라이나가 가져온 핏자국을 없애주는 마법 아이템을 부수더니 자기가 알아서 핏자국을 지우기 시작했다.
스완하덴은 매일 찾아오는 슈라이나에게 많이 경계를 풀었다. 아직까진 여전히 슈라이나에게 살벌했지만 그래도 예전처럼 죽이려고 달려들진 않았다. 슈라이나가 매일 찾아와서 상처를 돌봐주고 좋은 음식을 챙겨준 덕택인 건지, 스완의 자연 치유 능력은 매우 좋아져 있었다. 여전히 심한 상처들을 매일 새로 달고 왔지만, 그래도 슈라이나가 오기 전에 어느 정도 회복을 해서 예전보다는 나아졌다.
슈라이나는 현재 그에게 있어서 혐오하는 대상이 아닌 그냥 귀찮은 주황색 아이로 바뀌어있었다. 스완하덴은 모든 사람을 혐오했다. 스완하덴은 자신과 관련이 없는 사람이어도 그냥 사람이라면 모두 싫어했다. 그러나 슈라이나가 꾸준히 찾아오며 그와 함께 있어주니, 슈라이나는 스완하덴에게 유일한 예외가 되었다.
스완하덴은 문득 궁금해져서 슈라이나에게 물어보았다.
"왜 자꾸 오는 거야. '난 착해' 병이라도 걸린 거냐?"
스완하덴은 비아냥거리며 물어보았다. 슈라이나는 상처를 스스로 치료하는 스완하덴을 바라보다가 체스 판과 먹거리를 꺼냈다.
슈라이나는 과자들과 뜨거운 차를 보기 좋게 세팅하고 체스의 말들을 판위에 세우기 시작했다. 슈라이나는 승부욕에 불타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난 널 꼭 체스에서 이겨야만 해. 너 만나기 전까진 내가 원탑이었다고. ”
스완하덴은 슈라이나가 그저 허울 좋은 소리로 둘러대고 있다는 걸 알았다. 슈라이나가 저번에 자신의 상처를 보고 토했을 때 하던 거짓말들도 스완하덴은 눈치챘다.
그는 왜 슈라이나가 자신에게 상처 입히기 싫어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자신은 상처 받기 위해 태어난 존재였다. 스스로의 상처는 기본이고 남의 상처들도 떠안아야 했다. 모두들 자신에게 상처를 입히고 싶어만 했다.
스완하덴은 인상을 썼다.
"솔직하게 안 말해? 왜 오는 거냐고."
슈라이나는 스완하덴의 질문은 웬만하면 피하려고 했다. 매일 오는 이유는 그저 어리고 불쌍해서였다. 뭐 처음에는 불쌍해서 찾아왔지만 스완이 머리가 좋아 체스를 기가 막히게 잘하니 슈라이나는 요즘 그에게 체스 한 수 배우러 온다.
슈라이나는 어떻게 대답할까 생각하다가 스완하덴을 바라보았다.
달빛이 유난히 밝았던 그 날 밤의 오색 빛 눈동자가 슈라이나를 올곧게 응시했다. 스완하덴은 솔직한 아이였다. 꾸밈이 있는 것을 정말로 질색하는 아이. 솔직하면서 동시에 타인에게 굉장히 방어적이었다. 여하튼 스완하덴은 알 것 같으면서 굉장히 모르겠다. 슈라이나는 한숨을 쉬었다.
슈라이나는 그냥 솔직하게 대답하기로 했다.
“...네가 왜 그렇게 다치는진 난 잘 모르거든? 일부러 알아보지도 않았어. 네가 진짜 싫어하니까. 그래도 네가 공작이랑 우리 저택에 오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여기 매일 혼자 갇혀 있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어.”
슈라이나는 왠지 자신이 상당히 스토커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스완하덴의 뒷조사를 좀 많이 했었지. 스완의 방에 누가 오는지도 솔직히 조금은 알아봤고.
“몸도 아파서 충분히 서러울텐데 외롭기까지 하면 너무 슬프잖아. 넌 모르겠지만 적어도 난 그렇거든.”
슈라이나는 과자를 입에 하나 넣으며 계속 이어서 말했다.
“사실 결정적인 이유는 내가 상처 많은 어린이들한테 조금 약해.”
얌전히 슈라이나의 말을 듣고 있던 스완하덴이 인상을 썼다.
“너도 어리거든.”
스완하덴은 자신을 상처받은 어린애라고 말하는 슈라이나에게 차갑게 반박했다. 그는 그녀의 말을 하나하나 곱씹어보다가 결론을 냈다.
“네가 아무리 말을 돌려도 결국 동정이라는 소리잖아.”
“그렇지. 그 단어는 피하려고 했는데 날카롭네. 그런 건 그냥 넘어가 달란 말이야. 그리고 이젠 굳이 동정이 아니어도 체스 이기려고 오고 있고.”
스완하덴은 슈라이나의 직설적이면서도 당돌한 말에 피식 웃었다. 웃기보다는 비웃음에 가까웠지만 혐오 가득한 표정보다는 훨씬 괜찮았다. 슈라이나는 비웃음이어도 요새 웃음을 보여주기 시작하는 스완하덴을 보며 뿌듯함을 느끼고 있었다.
스완하덴은 슈라이나를 지그시 쳐다보았다. 짧은 주황머리에 차가워 보이지만 따뜻한 빛을 머금고 있는 주황색 삼백안을 가지고 있는 아이. 매일 매일 찾아오는 이 애가 귀찮았지만 귀찮은 만큼 즐거울 때도 있었다.
그냥 자신을 가만히 두면 좋겠지만 스완하덴이 예상하기론 그녀는 계속 올 것 같았다. 스완하덴은 그녀가 나쁘진 않았다. 그건 지금까지 사람을 혐오하며 벽을 세우던 스완하덴으로선 엄청난 발전이었다.
“너 계속 올 거면 매일 이 시간대에 와. 더 일찍 오면 절대로 안돼.”
그리고 슬슬 슈라이나에게 마음을 열기 시작해 나름 생각이 담긴 경고까지하는 스완하덴이었다.
슈라이나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일찍 오지 말라는 이유가 대충 예상이 갔다. 스완하덴을 보러 올 때, 그의 상처는 언제나 새로 생겨있었다. 뜨거운 피가 흐르는 것을 보아 언제나 자기가 오기 직전까지 학대 당하고 있던 것이다.
스완하덴은 그 지옥 같은 시간과 슈라이나를 보는 시간을 분리하고 싶어했다. 슈라이나가 자신이 맞는 모습을 보지 않았으면 했다. 보게 된다면 자연스럽게 공작에게 들키게 되고 기억이 지워질테니 딱히 상관은 없는데, 여러모로 즐거운 광경은 아니었기 때문에 스완하덴은 슈라이나가 보지 않았으면 했다.
간단한 간식을 먹으며 둘은 체스를 했다.
슈라이나가 처음 이곳에 게임을 가져왔을 때, 스완하덴은 게임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 그러나 스완은 머리가 그냥 좋은건지, 대충 룰을 설명해주자 게임의 전략같은 걸 스스로 생각해내고 슈라이나를 이겨버리고 말았다. 카드게임이면 카드게임, 오목이면 오목, 하는 방법만 대충 알려주면 이기지 못하는 게임이 없었다.
슈라이나는 분했다. 검술에서도 지는데 체스에서만큼은 이기고 싶었다. 심지어 요새 스완하덴은 내기까지 걸기 시작했다. 매일 혼자 방에 있으면서 내기하는 건 또 어떻게 안 건지 모르겠다. 스완은 특히 사람 골리는 쪽으로 머리가 굉장히 빠르게 돌아가는 것 같다. 슈라이나는 매번 그의 함정에 빠져 매번 벌칙에 걸렸다.
저번엔 스완하덴 앞에서 무음악으로 춤까지 췄었지. 비웃던 스완의 모습이 아직까지 슈라이나의 뇌리에 박혔다.
그리고 슈라이나는 이번 턴에서도 지고 말았다. 몇 십번의 패배 끝에 슈라이나는 인정해야 했다. 이건 남주 버프중에 하나임이 분명했다. 자신은 절대로 뛰어넘을 수 없을테지. 슈라이나는 패배에 쓴웃음을 지으며 벌칙 음료를 마셨다. 참고로 벌칙 음료의 개념은 스완하덴이 스스로 생각해낸 거다.
스완하덴은 슈라이나가 게임 안한다고 할까봐 일부러 첫번째 턴에서 져주는 척하며 복수전을 향한 그녀의 희망을 자극했다. 교묘한 그의 말과 행동에 슈라이나는 몇 번이고 속아 벌칙을 받았다.
슈라이나는 물에 과자랑 머핀이랑 포도쥬스를 섞여 원샷했다.
늦은 밤이 되자 슈라이나는 이제 슬슬 집에 가려고 짐을 쌌다. 게임 판과 과자 쓰레기들을 정리하고 가방에 모두 넣었다.
슈라이나는 스완하덴이 준 고농축 마법석을 쥐고 손을 흔들었다.
“그럼 친구, 나중에 봅시다.”
그녀의 말에 마주 손을 흔들던 스완하덴이 인상을 팍 썼다.
“....친구? 네가 왜 내 친구야?”
“같이 매일 놀고 서로 비밀 알면 친구지. 그걸 친구가 아니면 뭐라고 부르냐?”
스완하덴은 슈라이나의 말에 눈을 가늘게 떴다.
"난 네 비밀 모르는데. 너만 내 비밀 알잖아."
슈라이나는 스완하덴의 말에 일리가 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음. 내 비밀? 그래, 하나 알려줄게. 나 사실 여자애야."
"뭐?"
"사실 딱히 비밀은 아니었지만, 네가 날 남자애로 알길래."
슈라이나는 그렇게 스완이 몰랐던 사실 하나를 알리고 나선 그대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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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평을 써도 되겠냐는 댓글이 달려서 답변해주기 위해 빨리 왔슴당. 뺩
서평을 써주면 저야 너무 좋습니다. 여러분은 못보겠지만 모니터 너머 기뻐서 춤도 추고 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