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52 소꿉친구는 싫습니다 =========================
어제 머리카락을 땋고 자서 내 머리카락은 현재 정말 산발이었다. 답도 없는 까치집에 감히 빗을 엄두가 나지 않는 엉킴이다.
안그래도 곱슬거리는 머리카락 때문에 주황색 털뭉치라는 소리를 듣는 나인데, 이제 그냥 주황 털 그 자체가 되어버린 느낌이다. 어느 정도였냐면 곱슬거리는 머리카락이 내 얼굴 쪽으로 자신의 영역을 확장해, 아주 내 시야를 가렸다.
이럴 때 유용하게 쓰이는 것은 코리의 담요다. 코리는 과일 종류의 담요를 엄청 많이 가지고 있어서 몇 개 빌려도 상관없다.
그린 반에 가고 있는데 애들이 자꾸 내쪽을 힐끔 힐끔 쳐다본다. 지나가는 애들이 내 머리카락을 쳐다보며 킥킥 웃는다. 최대한 나를 쳐다보지 않으려고 하는 애들도 나를 지나치면 바로 고개를 돌려 내 머리카락을 보았다.
사자라는 단어가 계속 들린다.
부끄러움에 고개를 숙이고 빨리 걷다가 나는 누군가와 부딪히고 말았다. 앞을 보지 않은 탓이었다. 나와 부딪힌 사람은 내 어깨를 감싸고 넘어질뻔한 나를 붙잡아줬다.
나와 부딪힌 사람은 때마침 나를 보러 2학년 층으로 놀러온 이브네스였다.
이브네스는 내 얼굴을 멀뚱 멀뚱 쳐다보더니 입꼬리 한쪽을 들어올렸다.
“슈슈. 머리 오늘 귀엽네?”
“하아...”
이브네스는 더욱 탱글 탱글해진 내 컬을 보며 감탄했다. 그는 조심스럽게 내 부푼 머리카락을 만졌다. 어떻게 이런 머리카락을 만들 수 있냐고 신기해한다.
이브네스는 나를 귀여운 강아지 보듯 바라보았다.
“너 보고 싶어서 내려왔는데, 지금 안내려왔으면 섭섭할 뻔 했네.”
“...”
“이 머리카락 진짜 마음에 드는데 계속 이런 머리하면 안돼? ”
이브는 나를 껴안고 내 머리카락 위로 자신의 얼굴을 묻었다. 머리카락에 워낙 풍성하게 부풀어 올랐던지라, 작은 이브의 얼굴이 머리카락 때문에 사라졌다.
이브네스는 종종 나를 찾아 2학년 층으로 왔다. 시니어가 된 이브네스의 교실은 내 교실과 굉장히 멀었지만 이브네스는 꿋꿋이 찾아왔다. 이브는 2학년 층으로 올때마다 스완의 “회춘하고 싶은 마음은 알겠지만 다시 오면 무사하지 못할 거예요?.”라는 핀잔을 듣고 강제로 시니어 건물로 옮겨졌다.
저번에도 날 껴안다가 스완에게 들켜서 주먹이 꽂혔었지. 그리고 스완하덴에게 목덜미를 잡힌 채 시니어 건물로 질질 끌려 옮겨졌다.
질질 끌려가면서 항상 내 쪽으로 아련하게 손을 뻗는 이브네스였다. 나는 끌려가는 이브네스를 바라보며 언제나 잘가라고 손을 흔들었고. 그나저나 스완하덴은 이브네스를 정말 싫어하는 것 같다. 얼마나 싫어하면 그가 2학년 층에 발을 디디는 것도 허락하지 않는 거지? 그래도 쿵짝은 잘 맞는 것 같던데.
이브네스는 날 껴안으면서 스완하덴이 주위에 있나 없나 살펴보았다. 세모눈을 뜨며 그는 좌우로 고개를 돌리며 확인해본다.
“후, 다행히 없는 것 같군.”
“죽고 싶죠?”
“!!! 젠장”
돌연히 등장한 스완하덴을 발견하고 이브네스는 뛰기 시작했다. 스완하덴은 사나운 웃는 얼굴로 이브를 쫓았다. 스완은 어디서 난 건지 철퇴를 붕 붕 돌리고 있었다.
여하튼 청춘이었다. 아주 힘이 넘쳐나는구만. 이브에게 힘내라고 소리치자 이브를 쫓는 스완하덴의 걸음이 빨라졌다.
이브네스가 무서운 속도로 쫓아오는 스완을 피하려고 창문 밖으로 뛰어내렸지만 스완하덴은 창문 뛰기 전문이어서 통하지 않았다. 이브는 쫓기면서 스완하덴에게 뭐라고 소리쳤고 스완은 그의 말에 더욱 살벌한 표정을 지으면서 달렸다. 둘은 서로 웃으면서 추격전을 펼친다. 아주 재미있게 논다. 나중에 끼워달라고 해야지.
나는 이브에게서 자유로워지고 코리의 반으로 찾아갔다. 코리는 내 머리카락을 보고 팔에 얼굴을 묻고 조용히 웃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다행히 저번과 같이 하루종일 웃고 있진 않았다. 코리는 금방 진정하고 내 얼굴을 바라봤지만 또 웃음이 터져버리는 바람에 다시 고개를 숙이고 몸을 떨었다.
코리는 스완에게 빌린 양모양 캐릭터 안대를 쓰고 겨우 나를 상대했다.
담요를 빌려달라고 말했는데 코리는 때마침 나한테 줄 게 있다고 말했다.
코리가 준 것은 무려 오렌지 담요였다. 내가 자주 담요를 빌리니까 출처가 어딘지는 몰라도 구해다준 것이었다. 나는 코리에게 고맙다고 말하며 내가 만든 마법 용품을 쥐어주었다.
마법 용품에 코리의 이름과 내 싸인을 박아넣었다.
코리는 슈니발렌 마법 용품을 받고 헛숨을 들이쉬더니 기뻐하는 표정을 최대한 숨기려고 했지만 결국 숨기지 못해 결국 반을 뛰쳐나갔다. 이브도 그렇고 스완도 그렇고 코리도 그렇고 요새 힘이 넘친다. 옆에서 하일리가 뛰쳐나간 코리를 보며 “쟤 왜 저래?” 하며 물어보았지만 나는 그저 웃었다.
나는 오렌지 담요로 내 머리카락을 감쌌다. 현재 나는 전생에서 내가 좋아하던 캐릭터 ‘가오나시’와 흡사했다.
하일리가 내 머리카락을 바라보며 엄청 웃기 시작하다가 내가 담요로 머리카락을 가리니 더 웃기 시작한다. 나는 짜증나서 하일리에게 주먹을 날렸다. 맞으면서도 웃는 하일리였다.
* * *
오후 검술 수업에 가기 전에 나는 옷을 갈아입기 위해 언제나 여자 탈의실이 있는 건물로 향했다.
작년까지만 해도 탈의실을 이용하는 여학생은 나하고 정말 소수의 몇명밖에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 수록 점점 여학생들은 다양한 전공을 선택하기 시작했다.
요새 여자에 대한 사회의 인식이 점차 바뀌어가고 있었다. 시간이 흐를 수록 마법이 점차 다양하게 쓰이고 발전하면서 사람들은 전보다 자신의 생각을 훨씬 더 빠른 속도로 공유하고 쉽게 퍼트릴 수 있었다. 물론 내가 이 발전에 일조했다고 할 수 있다. 내 마법 물품이 퍼진 후부터 발전이 빨라졌으니까.
여자 뿐만 아니라 노동자 계층의 평등에 대한 글들이 점차 빠른 속도로 퍼지면서 사람들은 점점 계몽되었다. 똑같은 사람이고 똑같이 자아가 있어 생각을 할 수 있는데 왜 가진 사람들은 그걸 모르는 척 하는지 모르겠다.
나중에 자신에게 도움과 힘이 될 수도 있는 사람들을 왜 깔아뭉개고 마음대로 휘둘러 망가뜨리는지도 이해가 가지 않고.
뭐, 다들 여러모로 정신적으로 힘드니까 그런 거겠지.
탓하려면 진화해서 똑똑해져버린 원숭이를 탓해야 하나?
아니다, 그냥 우주가 존재하는 것을 탓해야 한다. 우주에서 보면 우리 사람들은 작은 먼지 덩어리에 불가한데 나도 그렇고 모두들 참 치열하게 사는 것 같다. 먼지끼리 서로의 서열을 정하면서 서로를 까고 서로를 미워하는 게 참 웃기면서 한심하고 의미 없었다. 나를 포함해서 말이다.
난 내 의식주와 주변 사람들과 나의 안전만 보장된다면 만족하고 마는 꿈과 열정없는 저렴한 사람이어서 이 불평등한 사회 계층을 뒤엎는 데에 관심없다. 그냥 조용히 필요만 채우고 살다가 죽고 싶다. 근데 그게 제일 어렵다는 게 문제지만.
혼자 입닫고 있을 때면 생각이 참 많아졌다. 요새 자꾸 생각이 변해가는 헤스티아의 영향인지, 나도 요새 사회의 인식 변화를 의식하게 된다.
연무복으로 갈아입고 나는 사물함을 닫았다. 마른 수건을 목에 걸치고 탈의실을 나가려는데 내 뒷 사물함 쪽에서 여자애들 여럿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물함에 가려 여자애들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아, 맞다. 그래서 그 우리 검술부에 슈라이나 있잖아.”
“슈라이나 웨스트? 아, 저번에 우리 몬스터 토벌 도와줬던 애?”
뭔가 했더니 내 이야기가 나오고 있었다. 별로 관심이 없었다.
나는 나가려다가 머리카락이 사물함에 걸려 인상을 썼다. 망할 머리카락이 오늘 날 고생시킨다. 엉킨 머리카락을 풀려면 시간이 조금 걸릴 것 같다.
“걔 저번에 몬스터 토벌 후에 쓰러졌다더라. 우리 앞에선 엄청 멀쩡했으면서. 그리고 스완하덴님에게 안겨져서 왔다나?”
“솔직히 처음에는 그렇게 안 느꼈는데 여러모로 수상하단 말이지. 슈라이나 걔, 은근히 남학생들이랑 많이 붙어있단 말이야. 검술 시간에도 하일리님이랑 같이 있고. 동아리 시간엔 코리님까지.아, 시니어의 이브네스도 있다.”
“얌전한 여자보단 요즘 터프한 여자가 대세인가? 아니면 일부러 달라붙는건가 걔?”
아 진짜, 머리카락이 날 고생시킨다. 이거 진짜 왜 풀면 풀수록 더 엉키는 거지.
나는 엉킨 머리카락 부분을 뽑을까 생각하다가 침착하고 인내심을 가지며 풀기로 했다.
“우리 이런 이야기 하지 말자. 슈라이나 저번에 우리 도와줬잖아?”
“하기야, 생각해보면 걔는 생긴게 사나워서 그렇지 은근 착해서 남자애들이 쉽게 다가가는 것 같기도 하고. 검술이나 마법이라던지 접점이 많고 만만한 것 같으니까 주위에 남자가 많은 건가?”
“아니, 그런 것보다 걔랑 붙어다니는 애 때문일 걸. 분홍색 머리 있잖아. 진짜 예쁜 애. 걔가 옆에 있으니까 남자애들이 어떻게라도 접점을 만들어보려고 슈라이나를 이용하는 거겠지.”
“와, 진짜 그런 거 아냐? 슈라이나 여러모로 멋있는데 불쌍해~ 확실히 같이 있으면 슈라이나는 완전 희미하긴 해. ”
휴, 드디어 머리카락 엉킨 걸 풀 수 있었다. 머리카락이 조금 많이 뜯긴 것 같지만 해피엔딩이니 넘어가도록 하자.
나는 검을 챙기고 걸음을 옮기려고 했다.
“근데 걔 친구 이름이... 아. 헤스티아였나?”
나는 헤스티아의 이름이 나오자 멈칫했다. 내 이야기가 나오다가 주제가 헤스티아쪽으로 넘어갔다. 나는 왠지 듣기 싫은 소리가 나올 것 같아 나가고 싶었지만 동시에 나갈 수가 없어 일단 그냥 서있었다.
“헤실 헤실 웃는 애 있잖아. 남자 애들한테 인기 진짜 많은 애. 걔가 진짜배기 여우지.”
“헤스티아 저번에 남자애들 앞에서 눈웃음 치는 거 봤어? 게다가 동아리랑 전공도 전부 꽃꽂이라니까? 걔는 아카데미에서 우리처럼 배우려고 온게 아니라 그저 남자 잡으려고 왔을 걸?”
나는 조용히 여자애들의 말을 듣다가 이를 부득 부득 갈았다.
아니라고, 헤스티아 공부 은근 열심히 한다고. 매번 졸긴 하지만 수업에서 낙제한 적은 한번도 없고 남자 잡기는 개뿔 말만 남자를 잡는다고 하지 실제로는 별로 관심도 없어 보였다.
“저번에 헤스티아가 슈라이나한테 한말 들었어?”
“응?”
“여자는 조신해야 하느니, 그래서 검을 잡으면 안된다느니. 아주 그냥 우리 할머니가 말할 법한 내용만 내뱉고 앉아 있잖아. 근데 엄청 웃긴건 남자애들이 그걸 듣고 막 좋아한다?”
깔깔 거리는 소리가 탈의실 내에 울려퍼진다. 나는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나는 손톱으로 검의 겉부분을 긁고만 있었다. 아까 엉킨 머리카락 부분을 만지작 거리다가 결국 뽑고 말았다.
“그딴 애는 어차피 그냥 관상용이지~”
“맞아 맞아, 얼굴 예쁘고 몸매 좋으면 솔직히 남자애들 한텐 인기는 좋지만 그 이유는 결국 그저 보기 좋기 때문이잖아? 가슴 진짜 크던데 그건 좀 부럽더라.”
“푸핫. 완전 머리 빈 인형.”
나는 내 안의 무언가의 실이 끊긴 느낌이 들었다. 눈동자가 뒤집힐 것 같은 느낌이다.
나는 내 앞의 사물함을 발로 한번 크게 찼다.
쾅하며 사물함이 크게 요동치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여자아이들은 수다를 떠는 것을 멈추고 갑자기 들린 큰 소란에 깜짝 놀라했다.
나는 검을 챙겨들고 내 뒷 사물함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내 사물함 뒷편에는 다른 사물함들과 옷 갈아입을 수 있는 공간이 있었고 수다의 주인공들이 거기에서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얼굴을 보니 저번에 내가 몬스터 토벌 때 도와준 애들이었다.
애들이 내 얼굴을 보며 크게 당황하기 시작했다.
여자애들은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한명이 슬그머니 자리에서 빠져나가려고 하자 나는 들고 있던 검을 그 아이 앞에다가 바로 꽂았다.
내가 등장하자 이 자리에는 숙연만이 맴돌았다.
“슈, 슈라이나! 우,우린 널 욕한게 아니라... 그게..!!”
어색한 변명을 들으며 나는 귀가 가려워서 귀를 만졌다.
그딴 건 내가 듣고 싶은게 아니었다.
“너네 방금 뭐라고 했냐.”
“슈슈, 오해하는 것 같은데. 이건 네 욕이 아니라, 그게 다른 사람...”
“야, 누가 네 마음대로 내 애칭 부르래? 아~까 전에 했던 말은 관심없고 난 방금 말했던 말 말하는 거야. 헤스티아가 관상용이라고 누가 말했냐.”
어제쯤 헤스티아가 씁쓸한 표정으로 자신이 관상용이냐고 물어봤던 것이 떠올랐다.
나는 갑자기 화가 솟구쳐서 주먹으로 옆 사물함을 세게 쾅 내리쳤다. 다시 요동치며 소란을 낸 사물함 때문에 여자애들은 꺄악, 하며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감정적이고 이렇게 난리피우는건 내가 아닌 것 같지만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왜 헤스티아가 뒤에서 이딴 소리를 듣고 있는 거지.
헤스티아가 자신을 숨기려고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매일 몰래 가족의 눈을 피해서 글도 쓰고 있었단 말이야. 아, 근데 나 이거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여튼 지금 이게 중요한게 아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뚫린 입이라고 쓰레기같은 말들을 분리수거도 하지 않은채 내뱉는 애들의 모습에 난 이성을 잃었다.
“머리 빈 인형이라고 말한 사람 누구야.”
나는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자애중에는 내 시선을 피하는 애들도 있었고 당황하면서 멀뚱 멀뚱 쳐다보는 애들도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입을 열어 내 말에 답해주지 않았다.
바보같은 침묵에 나는 다시 화가 났다.
“나오라고!”
나는 소리쳤다. 하일리가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건지 “슈슈?” 하며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내가 화를 내자 당황하고 있던 아이들이 인상을 쓰기 시작한다. 그리고 내 화를 받기만 하고 찍소리도 못한 것에 자존심이 상한 여자애들 중 하나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참, 네 욕 한것도 아닌데 왜 화를 내는 거야.”
목소리를 들어보니, 헤스티아를 머리가 빈 인형으로 취급하던 애가 이 아이였다.
여자애 중 한명이 일어나서 빈정거리자 옆에 있던 친구가 그녀의 소매를 잡았다.
“이사벨, 우리 잘한 거 없으니까 좀 가만히 있어.”
“왜? 근데 우리가 틀린말 한 거 있어? 난 솔직히 이 말 헤스티아가 들어도 상관 없고, 슈라이나 네가 들어도 상관 없어. 난 당당한데? 사실이잖아?”
성깔이 있어보이는 이사벨이라는 여자애가 내 앞으로 다가오더니 나를 거만한 시선으로 내려다보았다. 키가 작은 건 이래서 불편하다.
나는 이사벨이라고 불리는 애가 날 내려다 보길래 그녀의 멱살을 잡아 아래로 내려 시선을 맞췄다. 이사벨은 내 힘에 속절없이 당겨져 나와 시선을 마주했다.
내 시선에 이사벨은 그 거만했던 시선을 거두고 살짝 겁을 먹은 표정을 지었다. 지금 내 표정이 어떤지는 몰라도 일단 좋은 표정은 아닐 것이다.
“재미있냐?”
나오는 말투가 곱지 않았다.
오늘 여러모로 내가 아니었다.
“난 지금 이 상황 완전 재미있는데.”
나는 시선을 돌려 이사벨을 제외한 나머지 애들을 한번씩 쳐다보았다.
그리고 시선을 다시 이사벨에게 두고 다시 이를 악물며 물어보았다.
“헤스티아가 머리가 비었다고 말하는 넌 꽉차있다고 말할 수 있어? ”
나에게 자꾸 쫄아 자존심이 상한 이사벨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녀는 겁을 먹은 것을 티내기 싫어서 내 시선을 피하며 “저,적어도 너랑 헤스티아보단 덜 비어있지? 난 다르다고.” 하며 겨우 반박한다.
나는 그녀의 한심한 말에 비웃었다.
“아~ 그래. 확실히 똥 오물로 꽉차있겠네. 말하는 걸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고 하는데, 확실히 넌 알 것 같다. ”
이사벨은 굉장히 자존심이 강하고 남에게 무시받는 걸 싫어하는 애였다. 남을 까내리며 자신이 높여지는 걸 좋아하는 애다.
때문에 내가 이사벨을 하찮게 취급하며 평가질을 하자, 이사벨은 분노가 앞서 두려움을 이겨내게 되었다.
“이게!! 너!!”
이사벨은 내 말을 듣고 손을 뻗어 내 머리카락을 쥐었다.
나는 잡히는 게 불쾌해서 머리를 홱 뒤로 빼고 이사벨이 그걸 그냥 뽑게 내버려두었다.
이사벨은 내 뽑힌 머리카락 뭉치를 들고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싸움은 쟤가 먼저 걸었지?
그거 잘 들고 있어라 이사벨. 내 뽑힌 머리카락이 나중에 내가 교무실에 끌려가게 될 때 나를 변호해 줄 것이다. 이브한테 엄청 억울한 척하는 연기 알려달라고 해야겠다.
하일리는 밖에서 우당탕하며 싸우는 소리를 듣고 결국 선생님들을 불렀다. 하일리가 말리지 않았더라면 나는 끝까지 갔을 것이다. 내 머리에 생긴 땜빵을 보며 하일리는 웃지 않고 조용히 오렌지 담요를 덮어주었다.
하일리가 여자애에게 화내려고 했지만 걔네 상태가 나보다 훨씬 좋지 않아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하는 안색이었다.
나는 결국 오후 수업을 건너뛰고 말았다. 교무실에 불려 징계도 먹었다.
다행히 처참하게 뽑힌 머리카락들이 걔네들이 먼저 싸움을 건 증거가 되어줘서 내 처벌의 정도가 줄어들었다.
아 근데 내 땜빵 어떻게 해.
헤스티아를 욕보인 걸 갚아줘서 후련했지만, 조금 드러난 두피도 동시에 후련했다.
* * *
나는 처벌 때문에 하교 후 쉬는 시간이면 한동안 무조건 기숙사에 있어야 했다.
오늘은 식당에 가서 밥도 못먹었다. 사감 선생님께서 직접 가져다 주며 여기 있으라고 했다. 솔직히 기숙사 내에서도 재미있는게 많았기에 나는 이게 처벌 같지도 않았다. 머리카락을 희생하며 얻어낸 솜방망이 처벌이 참 좋다.
생각을 조금 바꿔보면 밥도 가져다주고, 완전 룸서비스잖아?
나는 식사를 마치고 잠시 기숙사 내를 걸었다. 학생들은 모두 식당에서 밥을 먹고 있을 시간이어서 기숙사 내는 조용했다.
나는 걷다가 헤스티아의 방을 발견해 그쪽으로 들어갔다. 헤스티아는 없겠지만 그냥 습관적으로 들어간 것이었다. 헤스티아의 룸메이트는 자주 부재중이어서 내가 자주 놀러가 그녀와 놀아줬다.
헤스티아가 방에 없다는 것을 깨닫고 나는 도로 방을 나가려다가 헤스티아의 책상 위에 펼쳐진 공책을 발견했다. 그리고 공책 사이에 끼워진 왠지 익숙한 펜도 같이 발견했다.
기숙사방에 주인이 없으면 들어가는 게 실례인 걸 알면서도 나는 헤스티아의 책상 쪽으로 다가가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나는 헤스티아의 펼쳐진 공책에 적힌 내용을 읽었다.
나도 모르게 눈에 눈물이 고였다.
============================ 작품 후기 ============================
헤스티아 편은 다른 남주들 편보다 짧습니다.
ㅈㄴ암이 너무 졸려요... 새변 연재는 이래서 하면 안되는 겁니다. 이러다가 밤낮이 바뀔 것 같아서 걱정이지만 바뀌면 야식을 먹는 즐거움이 있으니까! 하하
+BLC발렌시아 님 후쿠 정말로 감사합니다.
+보배로운 서평을 적어주신 rlaalsdudsdfc님 정말로 감사합니다.
+투표해주신 분들 정말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