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05 오작교는 싫습니다 : 주인공은 싫습니다 =========================
*저번화 요약*
흑마법으로 전생을 둘러본 후 우울해진 슈라이나에게 하일리가 찾아와 위로했다. 그 뒤 그는 구겨진 종이 한 장을 건네줬다. 그 종이는 슈슈가 전생에 읽었던 ‘헤스티아의 그놈들' 의 마지막 페이지였다.
+전생 이름 예인 -> 예안 수정했습니다. 둘째 동생은 예안 -> 예환입니다. 공책에서 잘 못 옮겨적었나봅니다. 제보해주신 독자님, 사랑합니다.
* *
하일리가 안의 내용을 읽을 수 있냐고 물어보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읽을 수 있다고 하면 무슨 내용이냐고 물어볼 거고, 이게 무슨 내용인지 알려주기엔 조금 뭐하다.
“소설이 피폐물이었던 건 알고 있었지만...”
나는 하일리에게서 뺏어온 그 마지막 페이지를 다시 한 번 읽었다. 너무 가물가물해서 잘 기억이 나지 않았었는데 이제 확실하게 기억이 난다.
“결말에 헤스티아가 아무도 맺어지지 않았던 이유가...”
난 단순히 헤스티아가 결정 장애가 와서 못 고른 건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다 죽고 파멸해서였던 것 같다.
작중 묘사를 보면 모든 것이 불구덩이에 잠겼고, 헤스티아는 이 모든 것을 저주하면서도 어딘가를 올라간다. 아우그란 산이었나. 소설을 대충 훌훌 넘기며 읽었던 난 파괴적인 표현들이 그저 비유인줄로만 알았다.
당시 ‘헤스티아의 그놈들’을 읽었을 때 나는 이 책이 그저 연애 소설인 줄 알았기에 뜬금없어 보이는 전개를 그저 웃으며 넘겼다. 하일리가 준 종이를 두세 번 접으며 주머니에 넣었다. 절로 한숨이 나온다.
“...확인해야 하나.”
못마땅스러워 작게 중얼거렸다.
현재까지 소설과 비슷하게 흐르는 부분이 거의 없었다. 그 뜻은 소설대로 현재가 흘러가지 않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책의 결말이 그런 결말이니 신경쓰지 않을 순 없었다.
“내가 죽었을 때 부분은 보기 싫었는데.”
지금까지 계속 내가 죽기 전 상황만 돌려보고 있었다. 죽을 때의 상황이 나올 것 같으면 다시 앞쪽으로 돌려 재생하고 재생했다.
죽었을 때의 장면을 보기 싫어하는 이유는 그저 무서워서였다. 죽음을 맞이한 그 상황이 그저 게름찍했다. 누구나 자기가 죽어가는 모습을 보는 건 달갑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그 책을 거의 죽기 직전에 읽었으니 확인하고 싶으면 그 때로 돌아가야하는 것이다.
“보기 싫다고. 보기 싫어.”
투덜거리면서도 아까 그 종이 속 읽었던 내용 때문에 마법진을 그렸다. 이번엔 시간대를 조금 더 뒤로 보냈다. 뒤로, 뒤로 내가 죽었던 그 시간대로.
진짜 보기 싫은데.
마력을 마법진 안에 부어넣으며 다시 한 번 생각했다.
진짜로.
그리고 나는 내가 죽었던 그 시점으로 이미지를 맞췄다.
*
나는 ‘헤스티아의 그놈들’ 이라는 책을 찾은 시점을 보려고 했지만 어쩐 일인지 찾을 수가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그 책을 들고 있었다. 정말 언젠가부터 들고 있었다. 제목부터가 로맨스 향이 물씬나고, 전개가 이상한 것 같지만 묘하게 끌리는 내용에 알바중에도 간간이 읽었다. 주로 로맨스 소설을 읽었던 나는 그 책을 꽤 재미있게 읽은 것 같다.
기실 장황한 스토리 위에 얹혀진 로맨스 부분만 읽은 거지만 말이다. 스토리 부분이 너무 어두워서 대충 흐름만 읽고 건너뛰었던 것 같다. 그래서 지금에서야 책의 그 무시무시한 결말이 이해가 되었던 거고.
알바생들이 입는 옷을 입고 손님이 한산한 시간에 ‘헤스티아의 그놈들' 을 읽고 있는 내가 보였다. 턱을 괴고 무덤덤한 표정으로 책장을 훌렁훌렁 넘기는 전생의 나 옆에 둥둥 떠서 다가갔다. 그나저나 별로 좋지 못한 인상은 전생 때도 마찬가지다.
전생의 나, 예안의 옆에 다가가 같이 그 문제의 소설책을 읽었다. 내가 내 옆에서 책을 읽으니 왠지 느낌이 이상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예안 몰래 뒷장을 먼저 넘겨보니 하일리가 준 마지막 페이지는 그대로 책에 있었다. 현재 나는 거의 책의 마지막 부분을 읽고 있었다. 뒷 이야기의 상황을 알아야했기에 나는 예안의 주변에 둥둥 떠서 같이 소설을 읽어내려갔다. 아, 오랜만에 읽으니 재밌네.
[스완하덴은 옆구리에 있던 원모양 검을 뽑아들고 그대로 눈 앞의 사람의 얼굴을 찍었다. 달빛에 비춰진 잔인한 웃음 위로 피가 튀겼다….]
열심히 책을 읽어내려가던 과거의 나는 한 장면에서 멈춰 인상을 쓰며 중얼거렸다. 옆에서 같이 읽던 나도 같은 장면에서 멈췄다.
[이거 고백 장면 맞지…?]
중얼거린 예안은 눈썹 한쪽을 들어올렸다.
예안이 중얼거리듯 읊은 대사에 내가 다 놀랐다.
맞다, 저 장면.
헤스티아에게 치근덕대는 사람들을 모두 그녀의 눈 앞에서 핏덩어리로 만들어버리는 장면이다. 그리고 그 뒤 스완하덴 미친놈이 그녀에게 좋아한다고 고백했었지.
당시엔 내가 이 책에 들어올 거라는 사실에 몰랐으니 그저 ‘작가가 고어한 거 진짜 좋아하네 보네.’ 라고 치부하며 넘어갔었다. 소설 캐릭터들의 도덕이 파괴된 장면들이 많이 나왔지만 꿋꿋이 읽어내려갔었다.
그래, 그랬었지. 가물가물했던 소설의 내용이 조금씩 되살아났다. 예전에 꿈에서 전생의 내용과 더불어 소설 원작 내용이 나오긴 했지만 워낙 희미한 꿈이어서 말이지.
“지금 읽으니까, 좀 색다르게 느껴지네.”
전생의 나와 나란히 앉아 책을 읽으며 나는 살짝 놀랐다.
일단 남주들 모두 맛이 간 건 원래 알았던 사실이었지만, 헤스티아와 하는 연애 부분의 대사가 상당히 작위적인 느낌이 들었다.
이야기가 전개가 될 때의 각 남주들의 대사는 그 성격과 참 맞아 떨어진다. 그런데 왜 연애 부분만 나오면 성격이 달라지는 것 같지. 억지로 상황과 연애부분을 끼워맞추려고 한 이질적인 느낌이다.
피튀기다가 갑자기 좋아해! 전투인 것 같다가 갑자기 뽀뽀! 이런 식이랄까.
게다가 이 작가, 슈라이나를 엄청 싫어하는 것 같다.
슈라이나를 묘사할 때 너무 얄밉게 묘사하고 있다. 물론 예전에 꿈 속에서 보았던 그 익숙치 않은 성격의 슈라이나와 소설 속 대사가 잘 어울렀지만 좀 더 얄밉게 적혀진 것 같다. 짜증나는데 안타까운 느낌의 캐릭터다. 근거 없는 자신감이 엄청나고, 만약 어떤 남자가 조금이라도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면 좋아하는 거라고 단정 짓는다. 허세와 허영심이 많고 행동이나 언사가 매우 가볍게 나온다.
...작가가 슈라이나를 진짜 아메바 수준의 사람으로 묘사했다. 너무해.
여러가지 의아한 점이 있어도 스토리 자체는 여전히 흥미진진했다.
[왜, 결말이 이 모양이지. 왜 다 죽는 거야? 결국 헤스티아는 어떻게 된 거고. ]
전생의 나는 피가 튀기는 부분에서 책을 휙휙 넘기다가 기어코 마지막 장을 다 읽었을 때 인상을 쓰며 투정부렸다.
내가 기억하는대로 헤스티아는 아무도 이어지지 않았다.
딱히 헤스티아도 남자 주인공들과 이뤄지고 싶은 마음도 없어보였기도 했고. 그나마 마지막에 헤스티아가 코리와 친한 걸 보아 코리에게 가능성이 보이는 듯 했지만 막판엔 코리마저 이상하게 변해버린다.
모두 헤스티아를 좋아해서 매달리긴 했지만 그녀 자신은 이들에게 질려 떠났다.
그리고 떠난 곳이 학교 뒷산이야? 왜 하필 아카데미 뒷산이야, 헤스티아. 뭔가 깨잖아.
...여튼 연애 라인은 엉망이어도 스토리는 굉장히 재미있었다.
책을 다 읽은 전생의 나는 찝찝함으로 표정이 괴로워보였다.
책의 단단한 겉표지를 만지작거리던 예안은 다시 한 번 결말 부분을 훑어보더니 짜증스레 책을 계산대 위로 가볍게 던졌다.
[아 짜증나, 찝찝하잖아.]
책을 다 읽었을 때는 마침 알바 시간도 끝났을 때였다. 어차피 손님이 한산한 시간 때 심심풀이 땅콩으로 읽는 소설이었기에 집에 돌아갈 시간이 되자마자 책에서 미련을 끊었다.
시계를 한 번 본 예안은 폐기 처분하려고 모아둔 삼각김밥중 하나를 먹고 옷을 챙겨 입었다. 부스스한 머리카락을 제대로 올려 묶고 자꾸 눈을 찌르는 앞머리를 쓸어넘긴 예안은 화장실에 가려는지 잠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과거의 내가 화장실에 간 사이 나는 그녀가 방금 가방에 넣은 책을 꺼내보았다.
‘헤스티아의 그놈들'은 제목은 유치하지만 그 표지 만큼은 굉장히 멋스럽게 되어 있었다. 책의 모서리마다 금색 패턴이 화려하게 그려졌다. 금색으로 동그란 원이 안으로 그려지다가 담쟁이 덩쿨같이 가지처럼 바깥쪽으로 뻗어나갔다.
섬세한 패턴 때문인지, 아니면 요새 서적답지 않은 두꺼운 표지 때문인지는 몰라도 옛날 서적 같은 느낌이 물씬 났다. 살짝 노란 빛깔의 종이를 손가락 끝으로 만져보며 나는 책의 앞뒤를 살폈다.
“작가 이름도 없고, 출판사도 없고.”
예안이 놓고간 책을 만져보며 인상을 썼다.
정말 작가에 대한 아무 설명도 없었다. 갑자기 이런 책이 어디서 튀어나온 건지는 잘 모르겠다. 현재 돌아가는 상황에 대한 단서를 얻고 싶어서 나는 좀 더 유심히 책을 살폈다. 앞 쪽 부분에 작가 프로필 설명이 있지 않을까 다시 한 번 확인했지만 역시 없었다.
예안이 돌아오기 전까지 빨리 확인하고 도로 가방 안에 집어넣어야 돼야 했기에 좀 급히 움직였다. 전생의 나 자신의 입장에선 내가 보이지 않을 테니 책이 혼자 붕붕 떠있는 것 처럼 보일 것이다. 기겁하겠지.
눈에 힘을 주며 나는 책장을 훌렁훌렁 넘겨보았다. 익숙한 인물들의 이름이 보이고, 전개가 보이고 내용이 보이고, 그게 다였다.
그저 책의 제목과 이야기만 담겨있을 뿐이었다.
“잠시만,”
뿐인줄 알았다. 잠시만.
첫 페이지는 빈 종이였고 두 번째 페이지에는 제목이 적혀있었다. 그리고 무심코 지나간 세번째 페이지에 시선이 문득 꽂혔다.
나는 조심스레 그 페이지에 적힌 내용을 읊었다. 짧은 문장이었지만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읽었다.
{ 달갑지 않은 마지막 희망에게 }
“마지막 희망…?”
간혹 작가들은 책의 들어가는 부분에 “이 책을 누구누구에게 바칩니다.” 이나 “~에게” 하고 적으며 이 책을 적으며 생각나는 사람, 고마운 사람 등의 이름을 적는다.
이 작가는 마지막 희망인 분을 찾는다. 심지어 희망이라면서 달갑지 않단다. 무슨 뜻인지 알고 싶어 더욱 자세히 읽어보려고 했지만 딱 그 문장 채 되지 않는 “마지막 희망에게” 밖에 없었다.
잠시 더 바라보며 이 의미를 생각해보려다가 예안이 돌아오는 소리가 들리자 재빨리 가방 안에 책을 넣었다.
그러나 넣는 순간 책의 겉표지 부분의 패턴과 모양이 눈에 걸렸다.
“저거…!”
그저 단순하게 책을 예쁘게 장식하기 위한 무늬인 줄 알았으나 마법진을 조각내어 책의 모서리 부근에 박아넣은 것이다.
마법진이 무엇인지 자세하게 분석하기도 전에 예안은 가방의 지퍼를 닫고 그대로 나가버리고 말았다. 편의점을 나가는 내 예전 뒷모습을 바라보며 혀를 찼다. 저 책 때문에 계속 졸래졸래 따라다녀야 할 판이다.
나도 모르게 눈썹 사이를 구기며 이를 악물었다.
이 뒤의 일은 다시 보고 싶지 않았지만...
바람이 얼음같이 차가운 날, 하얀 입김을 뿜어내며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예안은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가방 끈을 바짝 당긴 그녀는 하늘만 멀거니 바라보며 걸었다.
빛이 나야만 하는 별들은 주위의 빛들 때문에 희미했다. 동생들 주려고 산 붕어빵은 차갑게 식어가는 중이었다. 립밤을 바르지 않아 튼 입술이 따가워 그녀는 혀로 입술을 훑었지만 그럴 수록 입술은 더욱 건조해졌다.
내가 죽는 날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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깜짝하게 깜찍 등장.
홍당무안작은벌레님, wpejr님,나물나물이님,휘야03님 후원쿠폰 정말로 정말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