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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작교는 싫습니다-108화 (108/125)

00108 오작교는 싫습니다 :  주인공은 싫습니다 =========================

이브가 예전부터 항상 입에 달고 살았던 말이 ‘ 한가롭게 놀고 싶다' 였다.

상단주에게서 풀려나기 전에도 그렇고, 막 풀려났을 때에도 그렇고 이브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여유롭게 살고 싶다는 말을 많이 했다.

그런데 막상 풀려나가도 딱히 달라지지 않았다. 규칙적인 생활에 여전히 끊임없이 일했고, 일했으며, 일했다. 예전보다 여유가 생긴 것 같으나, 그래도 일반 사람들이 일하는 양에 비해 턱없이 많다.

그런 그가 놀자고 했을 때에는 대부분 휴식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그가 생각하는 휴식은 마음이 편안해지는 사람과 그냥 같이 있는 거였다. 때문에 여러모로 바빠 휴식을 원하는 그는 나를 자주 찾았다.

이브는 많은 사람들을 알고 지냈지만 깊은 관계는 맺지 않는다. 이브에게 내가 특별해진 이유는 솔직히 진짜 잘 모르겠다. 돈을 받고 일하는 그런 정말 사무적인 관계에서 시작했다. 내가 그에게 해준 거라곤 별로 없었다.

의뢰 기간동안 껌딱지처럼 붙어있다가 조금 정이 들어 챙겨줬고. 이브치곤 너무 쉽게 나에게 마음을 열어준 것 같았다. 심지어 나 때문에 복수가 엉망이 되지 않았나?

이브랑 같이 여러 산을 넘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친해진 건 좀 많이 신기했다.

오늘 그와 같이 시내로 나가 놀기로 약속했으니 짐을 챙기고 나가려고 하는데 문득 예전 일이 떠올랐다.

예전 이브와 상단주 일로 시내에서 만날 때에 모습을 바꾸고 만난적이 있었다. 아무 생각없이 모습을 바꿨던 터라 ‘예안'의 모습이 나왔었지.

옛날 생각에 나자, 잠시 고민에 빠졌다.

“상관 없지 않을까.”

상관 없겠지.

나는 옷 갈아입는 것을 마치고 거울 앞에 서서 잠시 빙글 돌아보았다.

몸의 중심쪽에 힘을 모으고 마력을 쏟았다. 손가락으로 원을 그리고 그 안에 마법진의 세세한 내용들을 적어내려갔다. 많은 마력을 요하는 고차원의 마법이라 마력이 한꺼번에 쑹덩 빠져나갔다.

예전의 나였더라면 빠져나가는 마력의 양 때문에 마법석 없인 엄두도 못 낼 마법이었지만 지금은 예전에 비해 마력의 양이 많아졌으니 견딜만 했다.

환한 빛이 몸에서 뻗어 나아가며 내 모습이 천천히 변해갔다.

주황색 머리카락이 검은색 머리카락으로,  퀭한 삼백안이 평범한 속쌍꺼풀이 진 눈으로. 눈과 볼 사이에 점이 하나 생겨났다.

마법을 쓰고 다시 눈을 떴을 때, 거울 속의 내 모습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한예안이었다.

스스로 이렇게 모습을 바꾸고 옛 이름을 꺼내 부르니 부끄럽기 그지 없었다. 괜히 뻘쭘해서 방을 한 번 쭈욱 둘러보았다.

나 밖에 없다는 걸 알지만 괜히 확인했다. 옷장에서 후드를 꺼낸 나는 그 걸 푹 뒤집어썼다.

*

“슈슈? ”

이브는 시내 거리에 나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책을 읽다가 고개를 든 그는 내 모습을 발견하자마자 눈썹 한 쪽을 들어올렸다.

읽던 책을 덮고 자신의 옆구리에 낀 이브는 내 쪽으로 몸을 돌렸다.

“익숙한 모습이네? 웬일이야.”

한예안으로 모습을 바꾼 나는 이브의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 후드를 그저 더 푹 내리고 입을 내밀었다. 먼저 앞서서 몇 발자국 나갔다.

그러다가 문득 내가 왜 모습을 바꾸고 걸어다니는 걸 쑥쓰러워하는 건지 의아한 감정이 들었다.

눌러쓰던 후드를 아예 벗은 나는 이브의 팔목을 잡고 앞서서 나갔다.

"이브, 무슨 일이 있어도 돈 쓰지마."

내가 그의 팔을 잡고 살짝 빨리 걸어도 그는 길었기 때문에 평온하게 따라왔다. 이브는 내 말에 고개를 살짝 갸웃거렸다. 인상도 살짝 쓴 것 같다.

"오늘은 내가 내 돈으로 나를 위해 다 쓸 거야. 오늘은 내가 너의 봉이야."

"방해하면?"

"방해하면 배신죄로 계약 패널티가 발동될 걸."

이브는 그 말에 충격을 받은 듯 표정을 단번에 굳혔다.

“저기 게임장 가보자.”

지금까지 놀 땐 딱히 생각나는 놀거리가 없었기에 언제나 애들이 가는 곳을 따라갔었다. 그래서 이브네스는 내가 갑자기 적극적으로 나오자 눈을 좀 크게 뜨더니 헛웃음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시내 거리엔 오락장이 많았다. 다트를 던저 경품을 따는 곳도 있었고 공을 차야 경품을 주는 곳도 있었고 격파를 하여 경품을 주는 곳도 있었다.

“이브, 나 멋있는 것 좀 봐줘.”

나는 이브에게 영상구를 쥐어준 채, 격파 하는 쪽으로 이동했다.

불가능처럼 보이는 송판 깨기 장엔 사람들이 오지 않아 파리가 날렸다. 주인 아저씨는 모처럼 손님이 오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반겨주었다.

"아니, 귀한 손님들이 오셨네. 그래서, 남자 분이 여자 분에게 점수 좀 따보려고 도전하는 거지?"

새로운 송판을 꺼내며 세팅하기 시작한 주인 아저씨는 이브를 능글맞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브에게 능글맞음으로 상대하려고 하다니, 가소로운 분.

"근데, 그렇기엔 남자 분이 너무 힘이 없어 보이는 거 아냐? 너무 잘생기기만 했다~"

아저씨가 팔꿈치로 이브를 툭툭 건들며 불쾌한 시선을 보내자 이브가 비웃었다.

이브가 나를 바라보며 고갯짓을 하자 난 소매를 걷고 송판 앞으로 나갔다. 나가는 길에 아저씨가 방해길래 어깨를 잡고 옆으로 보내드렸다.

"단순한 힘자랑에, "

그렇게 말한 나는 손쪽에 마력을 모았다. 몰래 버프 마법을 걸자 팔이 근육으로 우락부락해지더니 점점 팽창했다. 팔에 힘을 주고 근육이 커지며 핏줄이 올라오기 시작하자 주인장 아저씨의 눈이 매우 동그래졌다.

살짝 몸을 비틀며 반동을 준 나는 그대로 주먹을 송판 위로 꽂았다.

"여자, 남자 없지 않나? "

엄청난 파괴음과 함께 송판이 부서졌다. 가루가 되어버린 송판을 바라보며 주인 아저씨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송판이 몇 단으로 쌓여있었는데 단번에 부서지는 것도 모자라 그 밑 땅까지 살짝 금이 갔다.

나는 고개를 돌려 상품 진열대 쪽을 바라보았다. 방금 10장 이상 깼으니 대형 선물을 받을 수 있었다. 아저씨가 놀라 벙쪄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자, 내가 진열대 쪽으로 이동했다.

이브를 닮은 주황색 여우 대형 인형이 보이자 나는 그걸 아저씨에게 흔들어보였다. 아저씨는 입을 다물지 못한 채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가져가라는 뜻이겠지, 뭐.

입꼬리 한 쪽을 올리며 살짝 놀란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이브에게 나는 인형을 던졌다.

"선물."

이브는 영상구를 들고 있다가 날아오는 인형에 빠르게 팔을 움직여 잡았다.

웬만해선 소리내서 웃지 않는 이브가 푸핫, 하며 웃음을 결국 짧게 터뜨렸다. 소매를 좀 더 걷어올리고 목을 좀 풀자 이브가 멋있다고 칭찬해줬다.

내가 다른 게임장에 가자고 말하자 이브가 고개를 끄덕이며 내 마음대로 하라고 한다. 이브는 옆구리에 주황색 여우 인형을 끼고 내가 가는 쪽을 따라 왔다.

이번엔 다트였다.

연속으로 중앙을 맞추다 못해 판을 꿰뚫었다. 물론 마법이 조금 가세했지만, 아는 사람은 나와 이브밖에 없다. 게다가 마법도 하나의 내 실력이라고.

나는 3개의 상품을 따냈기에 상품 진열하는 쪽으로 이동했다.

"이 건 세미 거고"

달팽이 인형이 있길래 집어들었다.

"이 건 예환이거."

실용적인 것을 좋아하는 예환이에게는 과일깍기 칼을,

"한세유는,"

잠시 상품 진열대를 바라보는데, 목걸이 줄이 있었다. 비즈가 박혀야하는 자리는 비어있었다. 나는 잠시 인상을 쓰다가, 그 목걸이 줄을 집어들었다.

이브가 누구 선물이냐고 물어보자, 나는 애기들 선물이라며 얼버무렸다. 이브는 이해가 되지 않는듯 미간을 살짝 구기며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이브는 오늘따라 굉장히 활발히 움직이는 나를 흥미로워하고 있었다. 내가 즐기니 자신도 즐겁다는 상투적이지만 진심이 담긴 말을 했다. 이브는 내 쪽으로 가까이 다가와 어깨에 팔을 둘렀다.

"가지고 싶은 거 있어?"

평소에 이브가 많이 뭘 주니 나도 많이 주고 싷었다. 이브의 팔을 치우지 않고 물어보자, 그가 잠시 앞을 보며 고민했다.

그러다가 곧 나를 내려다보며 약스레 웃었다.

"가지고 싶은 것보단, 저거 하고 싶은데."

그가 가리킨 곳에는 연인들끼리 하는 좀 스킨쉽이 짙은 게임이 있었다. 별로 설명하고 싶진 않다.

"기각."

내가 거절하자 이브는 눈을 가늘게 떴다.

연속으로 한 게임 때문에 몸이 좀 지치자, 칼로리 보충을 하려 길거리 음식들을 파는 쪽으로 이동했다. 길거리 음식보단 오늘은 음식점에 가서 좀 사치를 부리고 싶었다.

그러고보니 전생의 나는 일인 일닭을 하고 싶어했었지. 나는 이브를 데리고 닭고기를 파는 곳으로 갔다. 한사람당 한 마리의 닭을 시키려고 하자, 이브가 사색을 하며 괜찮다고 했다. 나는 이브를 위해 과일과 샐러드를 시켜줬다.

닭요리가 나오기 전까지 나는 좀 지쳐서 의자에 널브러졌다.

책상에 엎드려 잠시 숨을 고르고 있다가 고개를 들어 맞은편에 앉은 이브를 바라보았다. 이브는 아까 내가 따준 주황색 여우 인형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여우의 머리에는 짧은 털들이 있었는데 이브는 그 걸 손가락을 정리해주고 있었다.

혹시 이 인형, 자신을 닮아서 준 거냐고 물어보는 이브의 말에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음식이 나오기 전 짧은 시간동안 이브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엎드린 내 눈 앞에는 표면에 물방울이 맺힌 물컵이 있었다. 그 물컵 너머로 바라본 이브는 흐물흐물했다.

이브에게 흐물흐물하니 못생겼다고 놀리자, 이브는 비웃으며 지금 내 눈이 3배가 되어서 더 웃기다고 반박했다.

이브가 볼 내 모습을 상상하니 이브의 말대로 상당히 웃길 것 같았다.

뭐, 웃기다니 좋은 거지 뭐. 나는 컵의 굴곡 때문에 눈이 3배로 된 그 상태 그대로 가만히 있었다.

이브와 꽤 오랜 시간동안 시선을 마주하다가, 눈이 대왕 크기로 커진 상태로 이브에게 조용히 윙크를 해보였다. 그는 조용히 물을 마시다가 곧 헛웃음을 지었다. 또 조용히 그는 나에게 괜찮냐고 물어보았다.

“이브, 넌 누군가가 정말 보고 싶었던 적이 있었어?”

음식이 나오지 않아 괴로워하며 테이블을 톡톡 건드리고 있었다. 세유에게 선물해주고 싶은 목걸이 줄을 바라보다가 문득 아무 말이 튀어나왔다.

사실 정말 아무 말은 아니었다. 문득 궁금했기에 물어보았다.

“응. 네가 에릭한테 갔을 때.”

넌 내 눈 앞에서 나타나지도 않았지. 이브는 먼저 나온 샐러드를 포크로 찍으며 나를 노려보았다.

“너무했어.”

이브는 그렇게 말하며 샐러드를 내 앞으로 내밀었다. 닭고기를 왕창 먹을 생각이라, 그가 내민 샐러드를 다시 그 쪽으로 밀었다.

거절당한 자신의 음식을 멀거니 쳐다본 이브는 하는 수 없이 깨작이며 방울 토마토를 입에 넣었다.

“아, 한 명 있다.”

잠시 짧게 우물거린 이브는 음식을 삼키고 누군가가 생각난 듯 입을 열었다.

때마침 닭고기가 나와 내 시선이 그 쪽으로 팔렸지만 입으로는 계속 말하라고 그를 부추겼다.

“하디스 루나아샤.”

“루나아샤?”

그가 꺼낸 이름의 성은 이브 것과 같아서 살짝 놀랐다.

“나름 친했던 친구이자 형제였어.”

고기에 손을 대지 않고 그의 말을 들으려고 하자, 이브가 먹으면서 들으라고 내 손에 포크를 쥐어줬다. 나는 닭고기의 연한 살을 집었다.

“같이 상단주의 저택에 들어갔을 때 변장했던 나 기억해? 넌 지금 모습에, 나는 붉은 머리였잖아.”

이브의 말에 나는 인상을 쓰고 과거 일을 떠올려보려고 했다.

때는 몇 년전이었다. 그 때는 상단주의 저택에 들어가기 전이었고, 서로 모습을 바꾸고 시내 쪽에서 만나기로 했었지.

모습을 바꾸는 마법을 시전할 때, 정확히 이미지를 잡아놓지 않으면 자신에게 강렬했던 사람 위주로 모습이 변한다.

그 때 한창 꿈에서 내 모습이 자주 나와서 그런지, 아무 생각없이 시전했다가 전생의 모습으로 변해버리고 말았고, 마력이 없는 이브는 그냥 속수무책으로 기억 속 아무 사람이 튀어나왔다고 했다.

그 당시 이브는 자신의 변한 모습을 보며 살짝 난감해했었지. 기억이 났다.

기억난다며 고개를 끄덕이며 우물거리자 이브는 이어 입을 열었다.

” 그 때 변한 모습이 하디스 루나아샤야. ”

그리고 하디스 루나아샤라는 사람이 이브가 변했었던 사람이라고?

내가 놀라 눈만 껌벅이자 이브가 입꼬리 한 쪽을 들어올렸다.

“웃음이 많고 시끄러웠던 형이야. 결국 죽었지만.”

죽었다는 말에 나는 인상을 썼다.

잠시 뜸을 들였다가 그 이유를 조심스레 물어보았다.

“어설프게 멍청하고, 어설프게 똑똑해서 그래.”

포크로 드레스에 버무려진 작은 사과 조각을 찍은 이브는 그 사람을 회상하는 듯 잠시 말이 없었다.

“희미하긴 하지만, 가끔 보고 싶기도 해. 마지막에 자기 살겠다고 배신한 건 괘씸했지만 말이야.”

마지막에 배신이라는 단어를 꺼낼 때, 이브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원래 그 사람을 생각하면 증오밖에 없었는데, 삶에 좀 여유가 생기니까 하디스가 이해가 좀 되는 것 같고. 여러모로 후회도 있고. 조금 더 그를 믿었더라면 상황이 달라졌을까 싶고."

혼잣말 하듯 중얼거린 이브였다. 그는 턱을 괴며 자신의 무릎 위에 올려놓은 주황색 여우 인형을 만지작거렸다.

이브와 하디스라는 사람과의 추억을 난 몰랐기에 그의 말이 완벽히 이해가지 않았다. 그 사람을 떠올리며 짓는 표정이 괴로워보여 더 많은 이야기를 캐물을 수가 없었다.

조용히 쓴 웃음을 짓는 이브네스를 잠시 조용히, 말 없이 바라보았다.

왠지 입맛이 사라져 포크로 괜한 고기만 쿡쿡 찌르는데, 문득 의문 하나가 생겨 입을 열었다.

“그런데 하디스라는 사람으로 변한 거면, 그 때 그 모습으로 상단주에게 나선 거 엄청 위험했던 거 아니야?”

이브는 내 말에 턱을 괴던 손을 빼더니 인형에게 꽂은 눈동자를 내 쪽으로 꽂았다. 느리게 고개를 끄덕이는 이브였다.

“어. 그래서 조금 난감했었어. 알다시피 난 마력이 없어서 모습을 내 원하는대로 바꿀 순 없거든.”

그가 유리컵의 표면을 손가락으로 건들이자, 안의 녹아가는 얼음이 빙글, 반바퀴를 돌았다.

“어차피 하디스는 상단주 얼굴도 보기 전에 저택 내의 애들 손에 죽었어. 혹시 그 모습으로 변했을 때 알아챌 수도 있는 경우를 생각해 잠시 기억에 혼란을 주는 액을 뿌렸으니까, 뭐.”

어깨를 으쓱이며 말한 이브네스는 물을 한 모금 마셨다. 혹시 스완하덴이 기억에 혼란을 주는 액을 줬냐고 물어보자 이브네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지간히 스완이 싫은지 조금 불쾌한 표정이었다.

“그래서, 슈슈 네가 보고 싶어하는 사람이 누구야? ”

이브는 눈을 가늘게 뜨며 화제를 돌렸다. 아까부터 이게 참 걸렸다고 말한 이브는 내 손에 들린 목걸이 줄을 바라보았다.

“...안 알려줘.”

집요한 이브의 시선을 피하고 싶었지만 유심히도 노려보는 이브였다. 알려줘도 상관은 없지만 그렇게 된다면 주구절절 전생 일을 꺼내고 설명해야 해서 귀찮았다.

남자냐고 묻는 이브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자, 이브의 입꼬리가 움찔거렸다. 표정관리를 할 때의 특유 표정이었다.

남자도 있고, 여자도 있고, 길거리 고양이들도 있다고 추가로 말하자 이브가 등을 의자에 기대며 괜히 나를 노려보았다.

테이블에 앉은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는지 컵 속의 얼음이 많이 녹아있었다. 물 위에 작게 둥둥 떠다니는 얼음을 보며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잠시 말이 없어지면 자연스럽게 생각나는 이들에 나는 한숨을 쉬었다. 한숨과 같이 푸념도 튀어나왔다.

“앞으로 평생 볼 수 없는 사람들인데, 너무 보고 싶고 생각나. 무엇보다 너무 걱정 돼. 어쩌면 좋지.”

이브를 쳐다보며 말하자 그가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물어볼 번짓수를 잘 못 찾았다고 말한 이브는 그래도 날 위해 같이 고민은 해줬다.

“...글쎄. 어렵다.”

이브는 작게 중얼거렸다. 나를 쳐다보면서 생각에 잠긴 이브는 손을 뻗어 내 입 주변을 털어줬다.

“평생 볼 수도 없는데 걱정이 된다면, 그저 그 사람들을 믿는 것 밖에 달리 방도가 있을까.”

나를 올곧이 바라보며 입을 여는 이브를 보니, 새삼 그가 참 많이 변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처음엔 여러모로 조급하고 불안해보였었는데 지금은 이해와 신뢰를 생각해볼 수 있을 정도로 사람에게 여유가 생긴 것 같았다.

그가 천천히 좋은 쪽으로 변해가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갑자기 새삼스레 느껴졌다.

"옛날에도 내 셔츠에 잔뜩 묻히면서 먹더니, 네 옷에도 흘리는 거야?"

잠시 딴 생각을 하며 음식을 먹다보니 아주 조금, 진짜 조금 흘리고 말았다. 이브는 내 옷에 음식이 떨어지자마자 방긋 미소를 지으며 타박했다.

"어쩔 수 없네. 새로 옷 사러 가자."

어차피 옷가게도 들릴 생각이긴 했다. 예전의 나는 예쁜 옷을 입고 시내를 돌아다니고 싶어했으니까.

이브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를 털고 일어나려 하는데, 지갑이 사라졌다.

"슈슈, 사실 아까 어떤 소매치기가 네 지갑 훔쳐가는 걸 봤거든."

그렇게 말한 이브의 손에는 내 지갑이 들려 있었다.

네가 소매치기였냐.

이브는 나를 도발적으로 바라보며 내 지갑을 몇 번 던졌다 받더니, 그대로 없애버렸다.

없애기보단 이동 마법이 걸린 물건을 사용하여 내 기숙사 쪽으로 보낸 것 같았다.

내 쪽으로 다가온 이브는 내 어깨에 자신의 팔을 올려놓고 식당 계산하는 곳에 동전 몇 개를 튕겨 컵 속 안에 명중시켜 넣었다.

원래 더 좋아하는 쪽이 더 많이 해주는 거야. 귀에 중얼거린 이브는 참 재수없는 미소를 지었다.

*

나는 그 날 하루 종일 예안의 모습으로 있었다.

이브와 시내에서 잔뜩 뭔가를 사고 놀고 돌아왔을 땐, 주황빛 석양이 하늘에 잔상을 남기고 있었다.

기숙사로 바로 들어가기 전에, 나는 학교의 작은 호수 쪽에 있었다. 기숙사로 들어가면 옷을 갈아입고 예안의 모습에서 벗어나야 하는데, 왠지 빨리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그냥 조금 더 즐기고 싶어 밖에 나와 있었다. 어차피 주말이어서 학생들은 아카데미에 거의 없었다. 기숙사 안에서 놀고 있거나 집에 돌아갔다.

호수 쪽에는 학생들이 더욱 없었다. 조용한 게 좋아서 호수 옆 잔디에 앉아 조금 쉬다 가려고 했다.

호수 앞에 앉아 물에 반사되는 내 모습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내가 죽고 나서 잘 생활하고 있을까.”

손을 뻗어 물 표면을 만져보았다.

“세유가 불안한데...”

딱히 책임지려는 성격도 아니고. 제대로 비뚤어져 있을 것 같았다. 세유와 다른 동생들이 잘 생활할 거라고 믿고 싶었지만, 솔직히 조금 많이 불안했다.

괜찮았던 기분이 다시 무거워졌다. 안 그래도 상처가 많은 아이들인데, 더욱 상처를 크게 입었겠지.

걱정이 되어 그 뒤의 일들을 보고 싶었지만, 우려했던 결과를 볼까봐 무서웠다.

“짜증나네...”

예안의 얼굴 위로 덧발랐던 화장을 지우고 단정히 묶었던 머리도 풀러 헝크러뜨렸다.

물 표면에 비친 내 얼굴 위로 손을 뻗어 작은 파도를 만들었다. 물 표면의 내 얼굴은 희미해졌다.

이제 슬슬 돌아가려고 등을 돌렸는데 스완하덴이 나무 그늘 아래 앉아있었다. 손에는 '믿음직스러운 사람의 특징 10가지'이라는 책이 들려있었다. 근데 읽기 보다는 햇빛 가리는 용으로 쓰고 있던 것 같다.

스완은 들어올 때는 보이지 않는 부분의 각도에 앉아있었다. 그래서 들어올 때 그를 발견하지 못하고, 막 이 곳을 벗어나려 몸을 돌리니 그의 존재를 눈치챈 것이다.

나는 괜히 뻘쭘해져서 스완은 무시하고 빨리 자리를 뜨려고 했다. 스완은 예안의 모습인 내가 처음일테니, 날 못 알아볼 것이다. 못 알아봤으면 좋겠다.

"...잠시만."

그가 나를 불렀다.

"너, 왠지 익숙한데..."

생각해보니, 예전에 상단주의 저택에서 이 모습으로 마주한 적이 있었다. 그 때 내 얼굴을 바라보며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었던 것도 기억났다.

"한..예안...이라는 이름..으로 슈슈가 기억하고 있었지."

인상을 쓰며 필사적으로 떠올리려는 스완하덴이었다. 나는 그의 말을 듣고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코리나 하일리는 몰라도 스완하덴에겐 이 모습의 이름을 알려준 적 없었다.

너 어떻게 알고 있는 거야.

============================ 작품 후기 ============================

제가 최근에 치킨을 너무 시켜 먹고 싶었는데, 그 치킨 전단지를 잃어버린 거예요. 그래서 그냥 시켜 먹었어요.

근데 정말 맛있더라구요. 그래서 100화 외전 쓰기로 한 거 너무 귀찮은 일이 되어버렸어요. 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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