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25 오작교는 싫습니다 : 졸업식 (完) =========================
검은색 졸업식 옷으로 갈아입었다. 거울에 비춰진 내 모습이 왠지 어색해서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이에 혹시 뭐가 끼지 않았는지 확인했고 옷에 먼지가 묻어있지 않는지 확인했다.
졸업 모자는 옐로우 반이어서 줄이 노란색이었다. 노란색 줄을 멍하니 만지작거리다가 문득 모자가 비뚤어져 있는 것 같길래 손을 들어 제대로 고쳐썼다. 고쳐쓰니 머리카락이 또 엉켜 산발이 되서 나는 한숨을 쉬었다. 모자를 다시 벗고 정성스러운 빗질을 한 뒤 다시 제대로 썼다.
뎅, 뎅 ,뎅.
졸업식 시작을 알리는 학교 종이 울렸다. 창 밖으로 보이는 날씨는 매우 쾌청했다.
“슈슈! 우리 늦었어! 빨리 가자!”
“어어. 잠시만!”
빨리 나가자는 헤스티아의 목소리가 들려오길래 나는 알겠다고 소리쳤다. 나는 마지막으로 내 모습을 점검하고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을 향해 이를 보이며 웃었다.
헤스티아와 팔짱을 끼고 졸업식을 진행되는 곳으로 걸어갔다. 헤스티아는 내 옆에서 재잘재잘거리며 앞으로 자신이 어디에 취직할 건지, 뭐할 건지 털어놓기 시작한다. 나는 웃으면서 그녀의 말을 들어주었다.
졸업식은 야외에서 진행되었다.
많은 이들이 꽃다발을 들고 한두 명씩 입장하는 학생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익숙한 얼굴들이 보인다. 하룬과 카림. 현재 내 삶의 부모님. 손에 예쁜 꽃다발을 한아름 안고 내 쪽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폐에 공기를 가득 채우며 숨을 깊게 들이 쉬니 가슴에 구멍이 생겨 바람이 금방 빠져나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깨끗하고 시원한 바람이 부는 건 기분은 좋았지만 왠지 기운이 빠졌다. 이런게 먹먹한 기분인가 싶다.
“전생에서 딱 이 시점까지 살았었지...”
잔디를 밟으며 걷고 있다가 문득 든 생각이었다.
이 시점에서 난 죽었었다. 졸업을 코앞에 남기고 이제 막 날개를 펼쳐 나아가려고 했을 때 숨이 끊겨 다시 처음부터 시작했었다. 졸업을 한 이 다음에는 이제 한 번도 살아보지 못한 새로운 나이대였다.
생각에 잠긴채로 의자에 앉았다. 교감 선생님의 나긋나긋한 연설이 들려왔다.
전생 이맘때쯤 나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문득 궁금해졌다.
“삶이 나아지기를 바라고 있었지, 난. ”
그저 밥 걱정 하지 않고 살 수 있는 환경을 바랬었다.
삶이 불안정하기 때문에 때문에 이번 생에서 무조건 국가의 공무원이 되려고 했었다. 일정한 수입을 보장받는 직업 위주로 내 미래를 계획했었다. 그리고 그 마음은 변하지 않다. 오히려 파티 이후로 굳세어졌다.
그러나 많은 이들과 만나며 우여곡절을 겪었고 앞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많은 것을 깨달았다.
나라는 존재는 생각보다 주변에 많은 영향력을 끼치고 있었다. 덕분에 제국도 구할 수 있었다잖아. 내가 생각한 것 만큼 난 별 것 아닌 존재가 아니었다. 별 것 아닌 존재가 맞긴 하지만 말이다.
예전까진 단순히 먹고 사는 것만 생각했더라면 나도 모르게 내 삶에 의미를 찾고 있었다.
안정적인 걸 바라는 게 나쁜 것은 아니었다. 지금도 안정적인 생활을 바랬다. 그 누구보다 더.
그러나 세상에 다양하고 무수한 사람들이 많고 여러가지 변수가 많은 만큼 내가 원하는 완벽히 안정적인 삶은 모순이었다. 내가 무슨 직업을 선택하던지, 어떤 사람이 되던지 간에, 휘청거림을 겪진 않을 순 없다.
다만 내가 돈 때문에 심하게 시달린 기억이 있었기에 돈 문제만 해결되면 삶이 안정적일 거라는 오해를 했었다. 생활적인 면에선 안정적일 순 있어도 안정되지 않는 다른 거슬리는 점들이 보일 것이다. 사람들을 거쳐가며 생각을 많이 수정했다.
계획대로 되는 게 있고 안 되는게 있다. 에릭과 사귀며 연애 계획을 북북 찢어버린 것처럼 뭐 하나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없다. 그래서 삶에 변하지 않는 의미를 두고 그 걸 중심으로 계획을 짜며 수정해나아가고 싶었다.
헤스티아처럼 아직까지 제국의 약자로 여겨지는 사람들, 여성이나 해외 노동자, 몸이 불편한 사람등의 인권을 높이겠다는 원대한 목표가 아니어도 괜찮다 .
나 나름대로 작은 의미를 찾아 그 걸 이뤄나가고 싶은 마음이 든다. 어느 역할, 어느 직업, 어느 상황이 주어지던지 간에 말이다.
가슴을 억누르는 막막함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교감 선생님의 연설에 꾸벅꾸벅 졸고 있는 헤스티아를 바라보았다. 침이 조금 흐르고 있길래 헤스의 노란색 모자 줄로 슥 닦아주었다.
“소설의 이야기도 여기까지였지.”
조용하게 속으로 중얼거렸다.
헤스티아의 그놈들이라는 소설도 이 이후의 내용은 다루지 않았다. 처음에 소설 속에 들어온 것으로 착각하여 애들을 마치 하나의 캐릭터처럼 바라보지 않았나 싶다. 물론 같이 보낸 시간이 쌓여갈수록 그런 생각은 자연스레 없어진 것 같지만.
소설의 내용이 끝난다는 점은 내가 이야기를 앎으로서 얻을 수 있는 혜택도 이제 없다는 것이었다. 솔직히 세상을 바라볼 때 어느정도 전생의 기억과 책의 내용에 의지했었다.
그러나 이제 그런 것들에 내 새로이 쓰여질 삶을 맡기기엔 내 주변과 내 자신이 너무 소중했다.
새로 시작하는 기분이었으나 동시에 잃어버리는 기분이었다.
진정한 홀로서기를 시작해야했는데 망설여졌다.
온갖 그림과 낙서와 글로 점칠된 페이지를 찢어내고 새 페이지가 주어졌다.
이젠 오롯이 내가 그려나가는 것이었다. 내 손에는 다색의 크레파스가 쥐어졌으나 쥐고만 있고 싶다.
길고 긴 연설이 끝나 어느새 교감 선생님이 졸업의 마지막을 알렸다.
하늘에는 수많은 모자가 날아다녔다. 내가 만든 마법 사진기를 들어 날아다니는 모자를 찍었고 내 모자도 저 하늘 위로 날려 한 컷을 찍었다. 헤스티아를 포함한 다른 애들과 찍은 사진들을 구경하고 있는데 돌연히 뒤에서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벽 뒤에서 누군가가 티격태격거리며 말다툼하고 있었다.
“잠시만, 네가 구했으면서 내가 왜?”
“닥치고 마음 바뀌기 전에 빨리 가.”
“부끄러우면 네가 직접 전해라.”
“이게, 양보해줘도.”
스완하덴과 하일리가 서로 뭔가를 주고 받고 하고 있었다. 하일리의 손에 들린 건 고급스러운 작은 상자였다. 스완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고개를 돌려 하일리가 들고 있는 작은 상자를 미련스럽게 쳐다보았다.
스완하덴은 하일리의 목덜미를 잡고 저 먼 벽의 뒷편으로 질질 끌고 갔다. 실랑이가 조금 더 있던 것 같았지만 하일리가 곧 벽에서 튀어나왔다.
“저기, 슈라이나. 줄 게 있다.”
하일리가 진지한 표정으로 나에게 다가왔다. 손에는 아까 봤던 작은 상자가 들려있었다. 하일리는 내 앞에 우뚝 서서 상자를 열었다.
하일리가 꺼낸 건 다름이 아닌 장미 뱃지였다.
나는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 장미 뱃지는 세유를 포함한 동생들이 내가 성년이 된 기념으로 돈을 모아 샀던 선물이었다.
“졸업 축하한다.”
하일리는 손을 뻗어 조심스럽게 내 옷에 장미 뱃지를 달아주었다. 뱃지를 손가락으로 한 번 툭치고선 예쁘다며 미소를 지었다.
바람이 내 얼굴가로 스쳐지나가며 주황색 머리카락이 일순 시야를 가렸다.
“하..하하.”
처음엔 헛웃음을 지었다.
그 다음엔 나도 모르게 손을 눈가로 뻗었다.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쏟아져나오는 울음에 나는 입술을 물었다.
곧 목놓아 울었다.
“...이제 정말… 시작이네...”
허리를 숙이고 몸을 웅크리고서 나는 한참 울다가 또 기뻐 웃었다.
한치 앞을 볼수 없는 미래를 더 나아가는게 왠지 무서워 머뭇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내 등을 따스한 손들이 강하게 앞으로 밀어주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두려움과 망설임이 따뜻한 햇빛과 함께 녹아내려갔다.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