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화
"일주일 전에 다수의 드워프를 목격했다는 제보가 있었어요."
제이나는 담담하게 말했고, 톨칸은 두 눈을 부릅뜨며 주먹을 꽉 쥐었다.
드디어 단서를 얻었다. 다수의 드워프라고 하여 그게 강철 용병단이라고 확신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 어떤 정보도 접하지 못했던 이전에 비하면 훨씬 낫다.
"목격된 위치는 놀리그란드. 도시라고 부르기에는 뭣하지만, 나름 규모가 큰 마을이죠. 거기서 몬스터 퇴치 의뢰를 수행하던 드워프 용병들이 있었다고 해요."
"허면, 지금은···?"
톨칸의 물음에 제이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용병단의 정확한 위치는 알 수가 없어요. 놀리그란드는 지금 함락된 상태거든요."
"······."
"그곳에서 마을 주민들과 함께 농성을 벌였고, 함락된 이후에는 뿔뿔이 흩어졌다는 것. 정보 평의회에 등록된 정보는 딱 거기까지예요."
놀리그란드는 대체 어디에 있는 어떤 마을이란 말인가.
톨칸은 파탈라 왕국의 지리에 대해서 잘 몰랐다.
하지만 토르아둠의 상황이 그리 좋지 않은 것 같다는, 확신에 가까운 직감이 그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래도 아직 실망하기에는 일러요. 강철 용병단 소속의 드워프 몇몇이 지금 우리 거점에 들어와 있거든요."
제이나에게 소식을 들은 톨칸은 곧바로 막사를 떠났다.
목적지는 거점 동쪽의 3번 구역.
파탈라 왕국 곳곳에서 모여든 사제들이 구호 사제단을 결성하여 부상자를 관리하는 곳이다.
종자 반슬리가 안내역을 맡아 톨칸과 함께 그쪽으로 이동했다.
"······."
제이나와 칸.
이렇게 두 사람만 남게 된 막사 안에는 어색한 공기가 내려앉았다.
곁눈질로 칸을 살피며 옆머리를 긁적이던 제이나가 입술을 뗐다.
"당신은 이제 뭘 할 거죠?"
어색한 분위기를 해소하기 위한 질문.
사실 막사 안에서 어색함을 느끼고 있는 사람은 제이나 뿐이었다.
칸은 별 생각없이 코코의 턱만 긁어 주고 있었다.
'꼭 뭘 할 필요는 없는데·····.'
그러고 보니, 허리춤이 허전한 게 약간 마음에 걸린다.
새로운 손도끼나 마련해 볼까?
생각을 마친 칸은 제이나를 돌아보며 말문을 열었다.
"혹시 무기상도 거점에 들어와 있소?"
"아, 무기상! 무기라면 몇몇 종군상단에서 취급하고 있어요."
종군상단은 말 그대로 전쟁터를 떠돌며 군대에게 물건을 팔아먹는 상단이다.
특정 상단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고, 군대에 물자를 대는 상단을 뭉뜽그려서 그렇게 부른다.
"5번 구역에 상점을 연 체스터 상회의 물건이 가장 좋아요."
"톨칸 영감이 돌아올 때까지 잠깐 둘러보고 오겠소."
"그럼 같이 가요. 어차피 나도 지금 당장 할 일이 없거든요."
제이나가 앞장 서서 막사를 나섰고, 칸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 뒤를 따랐다.
안 그래도 길을 안내해 줄 사람이 필요했던 참이다.
5번 구역이니, 3번 구역이니. 저들끼리 그렇게 떠들어도 칸에게는 낯설기만 했다.
***
고통에 심음하던 드워프 제워피는 토끼 눈이 되어 말문을 열었다.
"토, 톨칸 님?"
여기서 볼 줄은 꿈에도 몰랐던 얼굴이 눈앞에 있었다.
비단결처럼 기다란 수염을 턱에 달고 있는 드워프.
예전과는 달리 수염이 허옇게 물들어 있었지만, 세월이 흘렀다 하여 그 얼굴마저 못 알아볼 정도로 제워피는 멍청하지 않았다.
"···정녕 톨칸 님이 맞으십니까?"
"그래, 제워피. 오랜만이구나."
톨칸은 옛 기억을 떠올리며 입가에 흐릿한 미소를 그렸다.
그가 아직 황금망치 용병단에 적을 두고 있었을 무렵, 제워피는 이제 막 신입으로 들어온 녀석이었지.
따지고 보면 아주 까마득한 후배라고 할 수 있다.
유독 토르아둠을 잘 따랐던 녀석인지라, 오래된 기억 속에서도 그 존재감이 선명했다.
"많이 다친 게냐?"
"···아, 아닙니다."
제워피는 어깨에 붕대를 덕지덕지 감은 채였다.
붕대 사이로 묻어난 핏물만 보더라도 상처가 가볍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럼에도 제워피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팔을 휘휘 저어 보였다.
하지만····.
"으윽!"
곧바로 찾아온 통증에 미간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뜬금없이 부린 객기의 반동으로 핏물이 한층 진하게 흘러나왔다.
"욘석아, 그냥 가만히 있어. 싸우다 얻은 상처가 뭐 그리 부끄럽다고 멀쩡한 척하려 드느냐."
"그건 맞는 말씀입니다만···· 그래도 오랜만에 뵙게 됐는데 이런 꼴을 보이는 게 영 쪽팔려서요."
"괜찮다. 하나도 쪽팔리지 않으니."
톨칸은 조심스레 제워피를 끌어안았다.
제워피가 아파하지 않도록 일부러 팔을 살짝 들어 녀석의 어깨에 닿지 않게 했다.
그 배려에 제워피는 잠시간 고통을 잊고서 미소를 흘렸다.
그래, 톨칸은 원래 이런 사람이었지.
"인사는 이쯤하고, 내 너에게 묻고 싶은 게 있구나."
"·····."
일순 밝아졌던 제워피의 얼굴이 삽시간에 굳어졌다.
이제 곧 톨칸의 입에서 튀어나올 질문이 무엇인지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토르아둠. 그 녀석의 행방을 너는 알고 있느냐?"
역시나 토르아둠에 대한 질문이다.
톨칸의 눈빛은 아주 집요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제워피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가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저도 단장님이 어디에 계시는지 정말 궁금하군요."
"·····."
"제발 살아만 계셨으면 좋겠습니다."
톨칸의 눈빛이 멍하게 변했다.
그 눈빛을 계속 마주하는 게 괴로웠던 제워피는 애써 고개를 돌려 먼 하늘을 바라봤다.
하늘 위를 떠다니는 저 구름이 꼭 토르아둠의 얼굴처럼 보이는 것은 혼자만의 착각일까?
"단장님께서는 놀리그란드에서 탈출할 때 부상을 입으셨습니다."
"····부상?"
"타고 계시던 멧돼지가 오크 놈의 돌팔매질에 맞는 바람에 크게 낙마하신 것 같았습니다."
문득 제워피는 지금 바라보고 있는 저 하늘이 일렁인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니, 하늘이 일렁일 리가 없지. 저도 모르게 차오른 눈물이 시야를 방해하고 있을 뿐이다.
물결치는 시야 속에서 그는 마지막으로 목격했던 토르아둠의 모습을 떠올렸다.
"의식을 잃으신 것처럼 보였죠. 멀리서 봤기에 확실하지는 않습니다만, 부단장 테르포차가 황급히 토르아둠 님을 등에 업고서 전장을 이탈하는 것까지는 확실하게 봤습니다."
"·····."
톨칸은 침음을 흘리며 두 눈을 감았다.
낙마는 생각보다 큰 사고다. 신체의 어느 부위로 떨어졌느냐에 따라 부상의 정도가 천차만별이며, 떨어진 위치에 재수없게 돌부리라도 있으면 그 자리에서 죽을 수도 있다.
'이놈아, 낙마가 뭐냐 낙마가. 전장에서 망치를 휘두르다 죽겠다던 놈이 낙마가 웬 말이냔 말이다.'
속으로 핀잔을 늘어놓으며 톨칸은 자신감 넘치는 얼굴로 망치를 휘두르던 토르아둠을 떠올렸다.
그러고는 애써 부정했다. 녀석은 그런 식으로 죽을 녀석이 아니라고.
"···제워피. 놀리그란드의 위치가 정확히 어디지?"
"이 거점에서 북동쪽으로 일주일 정도 걸어가면 나올 겁니다."
"그래, 말해 줘서 고맙다."
톨칸은 손을 뻗어 제워피의 뺨을 향해 손을 뻗었다.
황무지처럼 거친 피부와 깊게 패인 주름이 세월의 흐름을 알려왔다.
그리고 그 사이로 전해지는 촉촉한 액체.
그 모든 것을 쓸어내리며 톨칸이 말문을 열었다.
"끌, 여전히 눈물이 헤프구나."
"····눈물이 아니라 땀입니다."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이제 그만 푹 쉬거라."
제워피의 머리를 한 번 꾹 눌러 주고서 톨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중상을 입은 환자를 너무 괴롭혔다.
제워피가 말문을 열어 톨칸을 붙잡은 것은 그때였다.
"놀리그란드에 가보실 겁니까?"
"그럴 생각이란다."
"만약 그곳에 들렸다가 여의치 않으시면····."
말꼬리를 늘리며 제워피는 품에서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그건 지도였다. 손때가 타서 너덜너덜해 보이지만, 아직 제 기능을 상실하지 않은 지도.
"이 지도에 표시된 곳들도 한 번 가보십쇼."
"이게 뭔데?"
"강철 용병단의 분타와 안가를 표시해둔 지도입니다."
톨칸은 지도를 곱게 접어 품에 챙겼다.
여전히 막막했지만, 그래도 이제는 행선지가 생겼다는 점이 중요했다.
정처없이 파탈라 왕국을 떠돌기만 했던 지난 시간과는 달리, 이제 여정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게 될 것이다.
***
다음날.
칸은 아침 일찍 일어나 제이나의 막사 근처에 마련된 과녁 앞에 섰다.
어제 새로 구매한 손도끼를 시험해 볼 생각이다.
"자고로 도끼는 손맛이 중요한 법."
그렇게 읊조리고서 칸은 허리춤의 손도끼를 끌렀다.
척 봐도 새것처럼 보이는 손도끼. 손때를 묻히려면 시간이 꽤 걸릴 것 같다고 생각하며, 그는 적당한 세기로 도끼를 투척했다.
후우웅-!
살벌한 소리를 자아내며 날아간 손도끼는 과녁 정중앙에 콰직 박혀들었다.
명중이다. 하지만 칸은 미간을 굳힌 채 손바닥을 쥐락펴락할 뿐이다.
확실히, 이전에 쓰던 녀석들에 비해 손맛이 별로다.
뒤편에서 톨칸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칸! 바로 출발할 거다. 빨리 말에 안장부터 올려."
"놀리그란드로 가는 겁니까?"
"그래. 거기서부터 시작해서 파탈라 왕국 곳곳을 돌아봐야 해. 앞으로 많이 바빠질 거야."
칸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단서를 얻었기 때문인지, 톨칸은 아주 몸이 달아있었다.
아무래도 당분간 말안장에서 엉덩이를 뗄 일이 없을 것 같다.
그 위에서 밤을 지새우게 될 테니까.
그렇게 말을 몰아 거점 밖으로 나왔을 때, 칸과 톨칸은 뜻밖의 사람들을 마주했다.
그 정체는 바로 성기사 제이나와 종자 반슬리.
두 사람은 어디 멀리 떠나기라도 하는 듯 행랑을 꾸린 채 말을 몰고 있었다.
"아, 기다리고 있었어요."
반갑게 손을 흔드는 제이나 때문에 칸은 인상을 구겼다.
기다리고 있었다고? 이게 대체 뭔 소린지 모르겠다.
"우리를 기다렸다고?"
"맞아요."
"왜 기다렸소?"
"당분간 같이 좀 다니려고요."
제이나는 천천히 말을 몰아 칸의 옆으로 나란히 붙었다.
칸은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제이나와 반슬리를 번갈아 쳐다봤다.
"임무 때문에 같이 가는 거예요. 어제 봐서 알겠지만, 왕국 곳곳에 퍼져있는 피난민을 모아서 거점으로 데려오는 게 내 임무거든요."
"그러니까, 이번에는 놀리그란드 방면으로 길을 잡겠다는 뜻이오?"
"맞아요. 길 잃은 피난민은 어디에나 있으니까."
그러던 그때, 일단의 기마가 나타나 제이나의 뒤로 정렬했다.
제이나를 수행하기 위해 수도회에서 내준 경기병대. 말을 탈 줄 아는 병사들을 선별해 구성한 부대였다.
그 모습을 확인하고서 칸은 고개를 돌려 톨칸을 내려다봤다.
"어쩔까요?"
"무얼, 이게 고민할 거리가 되나? 그냥 같이 움직이면 되지."
톨칸은 흡족하게 웃으며 수염을 쓰다듬었다.
파탈라 왕국의 현 상황은 막장이나 다름없다. 어디서든 오크 무리를 마주할 수 있다.
고로, 함께 움직일 인원은 많으면 많을 수록 좋았다.
***
"····미친 놈들."
칸은 미간을 찌푸리며 주변을 둘러봤다.
놀리그레이. 한때 도시만큼이나 번영했다는 이 마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됐다.
목조 건물은 잿더미로 화했고, 곡식으로 가득했을 논밭 또한 새까맣게 물들어 있었다.
하지만 칸의 시선을 잡아끄는 것은 따로 있었다.
그건 바로 나무에 걸려있는 사람들의 시체.
마치 크리스마스트리의 장식이라도 되는 것처럼, 토막 난 시체와 내장들이 나무에 걸려 있었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전부 죽인 듯했다.
"이, 이런 미친···· 우욱, 우웨에엑!"
종자 반슬리가 구역질을 참지 못하고 속을 게워냈다.
그리고 그게 신호탄이라도 됐는지, 제이나의 경기병들도 헛구역질을 하기 시작했다.
나름 전장을 굴렀다는 사람들이 저런 반응을 보인다.
그만큼 나무의 풍경은 잔혹했다.
"····시체를 거둬서 화장하도록 하죠."
제이나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와중에 톨칸은 흔들리는 눈동자로 나무 곳곳을 훑어봤다.
나무에 걸린 시체들은 대부분이 인간이었지만, 종종 인간에 비해 짧고 굵은 신체 부위가 눈에 들어왔다.
저건 아무리 봐도····.
"···드워프의 몸이야."
톨칸은 천천히 걸음을 옮겨 나무를 향해 다가갔다.
제발 저 속에 토르아둠의 시체가 섞여있지 않기를 바랐다.
멀리서 봐도 알 수 있을 정도로 톨칸의 몸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칸은 제이나를 향해 말문을 열었다.
"미안하지만, 드워프 시체들은 따로 모아줄 수 있겠소?"
"알겠어요. 어차피 드워프는 몇 되는 것 같지도 않아서 금방 분류할 수 있을 거예요."
"고맙소."
칸은 톨칸에게서 시선을 거뒀다. 그러고는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팔을 걷어붙이고서 나무를 향해 다가갔다.
나무를 향해 다가갈 수록 시체 썩은 내가 코를 강하게 찔러왔다. 하지만 애써 참으며 하나씩 시체를 걷어냈다.
다시는 하고 싶지 않은 경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