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43회차의 후반부 묘사 수정, 그리고 마법 가면의 설명에 대한 약간의 보충이 추가됐음을 알려드립니다. 감상에 불편을 드려 죄송합니다.)***
철퍽!
"아으윽!"
필사적으로 도망치던 케리우스는 그만 엎어졌다. 빗물 때문에 땅이 미끄러운 것도 있었지만, 다리에서 힘이 빠진 탓이 더 컸다.
"····염병할."
흙탕물이 얼굴을 더럽혔다. 빗물과 뒤섞인 눈물이 케리우스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런 그가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커다란 가죽 장화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어디선가 갑자기 튀어나와 용병을 처치한 그 남자였다.
"왜 울고 있지?"
남자가 묵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케리우스는 옷소매로 거칠게 얼굴을 닦아내며 말했다.
"····안 울었어!"
남자, 칸은 케리우스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아비를 독살하려던 패륜, 구차하게 목숨을 구걸하는 도주. 전부 다 네가 선택한 일이다. 악으로 깡으로 버텨."
"·····."
케리우스는 침묵을 유지한 채 무릎을 짚고 일어났다. 그러고는 칸의 시선을 정면에서 마주했다.
"너, 너는···· 나를 잡으러 온 게 아니야?"
"잡으러 온 건 맞아."
"이런 염병!"
대답을 듣자마자 곧바로 몸을 돌리는 케리우스. 칸은 간단하게 손을 뻗어 그 뒷덜미를 낚아챘다.
"말은 끝까지 들어, 패륜아."
"뭘 끝까지 들어?! 날 잡으러 왔다며!"
"잡는 건 맞지만, 널 잡아서 백작가에 넘긴다는 말은 안 했어."
발버둥 치던 케리우스의 눈이 번뜩 뜨였다.
"뭐? 설마···· 너 혹시 왕가에서 나온 사람이야? 아아, 역시나 폐하께서 나를 이런 식으로 버릴 거라고는 생각지 않고 있었─"
빠악! 뒷통수를 얻어맞은 케리우스는 말을 잇다 말고 풀썩 쓰러졌다. 칸은 쓰러지는 케리우스를 그대로 어깨에 짊어지고 걸음을 옮겼다.
"내 의뢰주가 왕가의 사람이라면, 네 말이 맞을 수도 있겠지."
칸은 의뢰주의 정체를 모른다. 어쩌면 왕가쪽 사람일 수도 있겠지. 다른 사람일 수도 있는 것이고.
지금은 뭐 하나 확신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이거 하나는 알겠다.
"이 망나니를 부추긴 게 왕가였군."
켈리우스가 섣부르게 입을 벌린 덕분에 알게 된 정보. 별로 궁금하지 않았던 사실을 알게 됐다.
어쨌든 칸이 해야 할 일은 딱 하나뿐이다. 이 녀석을 약속된 장소에 배달하고, 그 보상으로 거인의 심장을 받는 것.
그게 전부였다.
***
케리우스는 구토감과 함께 눈을 떴다.
"····우욱."
계속해서 좌우로 흔들리는 머리. 지금 그는 드라코의 안장에 짐짝처럼 매달려 있었다.
"구와아악!"
천천히 코코를 몰던 칸은 케리우스가 입을 벌리는 것과 동시에 손을 뻗어 녀석의 머리를 돌렸다. 토사물이 코코의 몸에 튀지 않도록 최대한.
"끄르르르르르·····."
코코가 불편한 심기를 드러낸 것은 그때였다. 마법 피막 덕분에 갈색으로 염색된 코코. 녀석은 제 등 위에서 연신 속을 게워내는 저 인간이 싫었다.
"미안하구나, 코···· 으음, 라코야."
하마터면 코코라고 그대로 부를 뻔했다. 당분간은 드라코에서 '드'를 뺀 '라코'라고 부르기로 하자.
"네 몸에 튄 토사물은 내가 직접 닦아 줄게."
"꾸어어어엉!"
"그래, 알았어. 육포도 좋은 놈으로 몇 개 사주마."
힘차게 대답하면서도 코코는 고개를 살짝 돌려 칸을 바라봤다. 평소와 다른 주인의 모습이 어색했기 때문이다.
마법 가면의 효과로 인해 칸의 이목구비는 며칠 전과 완전히 달랐다. 게다가 또 다른 부가 기능인 목소리 변조까지 적용됐기 때문인지 코코가 많이 낯설어 했다.
지금 칸의 얼굴은 원래보다 선이 굵었고, 목소리 또한 평소보다 걸걸했다.
"끄이이이이잉····."
"며칠만 참아라. 금방 끝날 테니까."
그래도 지금껏 맡아온 체취 때문인지 칸의 손길을 거부하지는 않았다. 아니면 본능적인 감각으로 주인을 인식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정신은 좀 차렸나?"
칸은 정면에 시선을 둔 채 말문을 열었다. 그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던 케리우스는 문득 불편함을 느꼈다. 팔다리가 밧줄로 꽁꽁 묶여있었기 때문이다.
"····백작가에 팔아먹을 생각 없다며."
"맞아."
"근데 팔다리는 왜 묶어 둔 거야? 불편하니까 빨리 풀어."
여전히 싹수가 없는 말투에 칸은 피식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너처럼 비협조적인 놈을 등 뒤에 그냥 태우고 다닐 수는 없지."
"씨발! 빨리 풀어! 팔 저리다고!"
"그냥 생각이 좀 부족한 망나니인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지능에 문제가 있는 것 같군. 사리 분간을 너무 못해."
따악! 칸은 왼손을 뒤로 넘겨 케리우스의 이마에 딱밤을 날렸다.
"아으으윽!"
"네 처지를 생각해라."
"····아프아!"
"공손까지는 바라지도 않아. 그냥 말투에서 명령조만 빼자고. 만약 못 고치겠으면 지금 말해. 아예 재갈을 물려줄 테니까."
"·····."
결국 케리우스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렇게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코코가 서서히 속력을 높였다.
목적지는 도시 랑티모르. 이곳에서 북서쪽으로 일주일 정도 달리면 도착할 수 있는 곳.
랑티모르에 케리우스를 데려다 놓으면 소리꾼 측에서 보상을 전달해 줄 것이다.
"이봐, 나 목말라. 물 좀 줘."
토악질 때문에 입안이 영 찝찝했던 케리우스. 그는 당당하게 물을 요구했고, 칸은 허리춤에서 수통을 끌러 녀석의 머리에 부었다.
"어푸, 어푸푸푸!"
"물 아까우니까 잘 받아마셔."
코로 물이 넘어가는 와중에도 케리우스는 혓바닥을 내밀어 목을 축였다. 그만큼 목이 말랐다.
그렇게 얼굴 전체가 물 범벅이 되고 나서야 케리우스는 깨달았다. 이 정체 모를 용병은 자신의 편의를 봐줄 생각이 없다는 것을.
"크흑, 눈이랑 코에 다 들어갔어."
몇 차례 코를 팽팽 풀어낸 케리우스는 눈물을 찔끔 흘리며 다시 말문을 열었다.
"····진짜로 나를 백작가로 끌고 갈 일은 없는 거지?"
칸은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럼 네 정체는 뭔데? 역시 나를 구하기 위해 왕가에서 보낸 사람인가?"
"나도 몰라."
"장난 까지 마! 네 정체를 네가 모르면 누가 아는데?"
칸은 별 흥미도 없다는 얼굴로 고삐를 느슨하게 잡으며 코코를 몰았다.
"이 세상의 누군가는 알고 있겠지."
"아니, 그러지 말고 제대로 대답 좀····."
칸은 조용히 재갈을 집어 들어 살랑살랑 흔들었다.
"이걸 원해?"
"·····."
"아니야. 그냥 채우고 가는 게 낫겠어. 넌 아무리 봐도 가만히 있을 놈이 아닌 것 같다."
결국 케리우스의 입에 재갈이 물려졌다. 안장에 매달린 케리우스는 눈알을 뒤룩뒤룩 굴리며 불만을 표출했지만, 딱히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그래도 백작가로 끌려갈 일은 없을 거라는 생각에 그는 일말의 안도감을 느꼈다.
'···아, 멀미.'
물론, 이렇게 속이 울렁거리지만 않았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마음이 편했을 것 같다.
***
슬슬 붉게 물들기 시작하는 하늘. 저 석양이 모두 사라지면 밤이 찾아올 것이다.
원래는 어느 마을이나 도시에 들어가서 숙박하려 했다. 나무를 숨기려면 숲에 숨기고, 사람을 숨기려면 사람들 속에 숨기라고 했으니까.
하지만 수배령이 생각보다 빠르게 퍼졌기에 멀쩡한 숙박은 포기하기로 했다. 일전에 케리우스가 뱌민 일행에게 쫓겼던 것도 여관에서 잠을 청하다가 그리 된 것이라고 하더라.
"가자, 라코."
"꾸엉!"
지금 칸은 일부러 길이 아닌 곳만 골라서 코코를 모는 중이다.
당분간은 도시나 마을에 들어갈 일이 없을 터. 기왕에 이렇게 됐으니, 아예 인적이 드문 곳으로 방향을 잡는 게 나았다.
그런 고민 끝에 칸은 숲을 가로지르기로 했다. 몬스터 때문에 사람도 없는 편이고, 몸을 숨기기에도 편할 테니까.
그러던 그때, 저 멀리서부터 어떤 그림자가 보이기 시작했다.
석양을 등진 채 천천히 말을 몰고 있는 두 명.
"·····."
칸은 가만히 정면을 응시했다. 그냥 행인일 수도 있고, 아니면 케리우스를 노리는 용병일 수도 있겠지. 그도 아니면 백작가에서 나온 추격조든가.
어쨌거나 저 두 사람은 이쪽을 향해 똑바로 다가오고 있었다. 이내 얼굴을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워졌을 무렵.
"읍! 으브으읍!"
케리우스가 발작하기 시작했다. 뭔가 할 말이 있는 것 같아 칸은 녀석의 재갈을 풀어 줬다.
"아는 사람들이야! 나를 도와주기로 했던 왕가의 기사들이라고!"
"····기사?"
"어엉, 기사! 내, 내가 독살에 성공하고서 백작령으로 돌아오면, 정권을 장악하는 걸 도와주기로 했었어! 지방에서의 반발도 억눌러 주고!"
멍청한 케리우스는 실실 웃었고, 칸은 미간을 찌푸리며 정면을 응시했다.
"저놈들은 왜 이제서야 나타난 거지? 진작에 너를 도와줄 수 있었을 텐데."
"아, 그딴 건 몰라! 어쨌든 우리 편이 늘었잖아! 그럼 된 거 아니야? 이건 호재라고, 호재!"
글쎄, 호재인지 악재인지는 지금부터 알아봐야 하지 않을까? 칸은 코코의 속도를 늦추며 앞으로 전진했다.
이윽고 두 일행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적절한 거리에서 딱 멈춰 섰다.
"용병인가?"
먼저 입을 연 것은 콧수염이 인상적인 남자. 그는 허리춤에 길쭉한 검을 차고 있었다.
"용병이지."
칸은 그렇게 대답하며 남자 옆에 서있는 다른 한 명을 살펴봤다. 날카로운 눈매를 가진 여자. 그녀는 남자와는 달리 창을 꼬나쥐고 있었다.
"허허, 둘째 공자의 신변을 혼자서 확보했다니. 재주가 아주 좋군."
콧수염 사내가 웃음을 흘리며 과장스레 팔을 벌렸다.
"온 백작령이 난리도 아니지. 둘째 공자에게 걸린 현상금을 타려고 말이야."
"·····."
"그런데 자네는 방향을 완전히 잘못 잡은 것 같아. 이쪽으로 계속 가면 백작령을 벗어나게 되거든."
칸은 별다른 반응 없이 가만히 고삐만 잡고 있었다. 그러자 콧수염 사내가 도발적인 어조로 지껄였다.
"길 찾는 실력이 영 별로인가? 그건 용병의 기본 소양인데 말이야."
칸은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였다.
"이쪽 방향이 맞아. 내 의뢰는 좀 다르거든. "
"응? 아, 아아····. 자네가 바로 그 용병인가?"
콧수염 사내는 어떤 사실이 생각났다는 것처럼 손뼉을 짝 쳤다.
"둘째 공자를 살리기 위해서 실력 좋은 용병 하나를 고용했다는 연락을 받았었지. 그때는 뭔 헛짓거리인가 싶었는데···· 이렇게 훌륭하게 둘째 공자를 이송해 온 것을 보면, 내 생각이 너무 경솔했나 보군."
콧수염 사내는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뭐, 어쨌든. 자네는 이미 할 일을 다했어. 이제 그만 돌아가도 좋아. 둘째 공자는 우리가 보호하겠네. 의뢰 보수는 내가 챙겨 주도록 하지. 성공했을 때 얼마를 받기로 했었더라?"
칸은 같잖다는 듯이 웃음을 흘렸다. 너무 뻔한 수작이라 어이가 없을 지경이다.
"내가 성공 보수로 돈을 받기로 했었나?"
"으잉? 돈이 아니었어? 허허, 이런·····."
난감한 표정의 콧수염 사내는 말끝을 흐리며 허리춤을 더듬었다. 꼭 뭔가를 찾는 것 같았다.
"눈치가 영 없는 친구였구만. 적당히 속아 줬으면 목숨은 건졌을 텐데 말이야."
촤아앙─!
그러고는 여전히 난감한 얼굴을 하고서 검을 뽑아 들었다. 칸의 뒤편에 매달려 있던 케리우스가 다급히 말문을 열었다.
"뭐, 뭐야! 왜 그러는 겁니까, 데후트 경! 갑자기 왜 검을····!"
케리우스가 말을 끝맺기도 전에 검이 날아들었다.
따아앙!
미리 손잡이에 손을 얹어 뒀던 칸은 늦지 않게 공격을 받아냈다. 칸의 검은 딱 절반 정도만 뽑혀져 있었다.
"순발력이 좋구만! 보통 실력이 아니야!"
최초의 기습이 실패로 끝나자마자 콧수염 사내, 데후트는 곧바로 다음 공격을 준비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칸은 안장에서 도약했다. 그와 동시에 만근추를 시전하며 위에서 아래로 급강하. 검집에 반쯤 걸쳐있던 검은 어느새 완전히 뽑혀져 있었다.
묵직한 일격. 파동 오러를 사용하지 않은 상태에서 칸이 발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공격.
데후트는 검을 들어 그 공격을 받아내려 했고, 그 모습을 확인한 칸은 승리를 직감했다. 만근추를 사용하며 내지른 검격은 저런 식으로 막을 수 있는 게 아니다.
하지만 그때.
"····으허잇짜!"
반전이 일어났다. 데후트의 검이 요상한 방향으로 원을 그렸다. 어떤 묘리가 담겨있는지 모르겠지만, 그 기묘한 검로(劍路)는 칸의 공격을 완전히 받아냈다.
위에서 시작된 공격을 아주 부드럽게 받아서, 다시 아래로 흘려내는 움직임. 그 일련의 과정은 마치 폭포수처럼 자연스러웠다.
히이, 히이이이잉─!
덕분에 칸의 묵직한 일격은 애꿎은 말 한 마리만 썰고 지나갔을 뿐이다. 데후트는 안장에서 몸을 띄워 유유자적 뒤로 물러났다.
'···방금 전에 그건 뭐지?'
칸은 미간을 찌푸리며 데후트의 움직임을 눈으로 쫓았다. 만근추를 실어낸 검격을 이런 식으로 부드럽게 받아낸 사람은 지금껏 단 한 명도 없었다.
저런 움직임이 어떻게 가능한 걸까? 강맹함을 부드러움으로 받아낸 건가?
전생에 읽었던 무협지에도 그런 내용의 무공들이 더러 있었더랬지. 대체로 '태극'이 들어간 무공이 그러했다.
유능제강(柔能制剛). 예전에는 감도 잡히지 않았던 그 묘리에 대해 찐득하게 생각을 이어가고 싶었지만, 상황과 장소가 그걸 허락하지 않았다.
후우우웅-!
멀뚱히 서있던 여자가 창을 내지른 것은 그때였다. 말의 목에서 피어나는 선혈을 뚫고 날아든 창촉.
"으아아아아악!"
창촉이 노리는 것은 칸이 아닌 케리우스였다. 손발이 꽁꽁 묶인 케리우스는 벌써 죽기라도 한 것처럼 비명을 질러댔다.
하지만 여자의 시도는 결실을 맺지 못했다.
채앵-!
잡념을 떨쳐낸 칸이 곧바로 여자의 공격에 반응했기 때문이다.
그러고는 곧바로 걸음을 크게 내딛는 칸. 그는 당장에 여자의 품으로 파고들 것처럼 자세를 한껏 낮췄다.
"······!"
그 모습에 여자는 황급히 뒤로 몸을 날렸지만, 이내 허수임을 깨닫고 얼굴을 붉혔다. 속된 말로 낚시질에 당한 것이다.
지레 겁을 집어먹은 그녀와 달리, 칸은 제자리에 망부석처럼 서있었다.
"····생각보다 싸움에 엄청 능숙한데?"
"동의합니다."
데후트는 살짝 뻐근한 팔목을 이리저리 돌리며 표정을 신중하게 바꿨다. 창을 꼬나쥔 여자 또한 마찬가지.
어디서 굴러먹던 용병인지 모르겠지만, 마냥 쉽게 볼 상대는 아닌 듯했다.
그렇게, 잠시간 소강상태가 이어졌다.
칸은 케리우스를 태운 코코를 뒤로 둔 채 두 남녀를 바라봤고, 두 사람은 서로 거리를 두고서 칸을 응시했다. 완벽한 삼각구도가 완성되는 순간이다.
"자, 잠깐!"
그 침묵을 뚫고 목소리를 높인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케리우스였다.
"데후트 경! 밀라나 경! 대체 왜들 이러시는 겁니까! 예?! 그냥 다같이 국왕 직할령까지 이동하면 되잖아요! 왜 아군끼리 여기서 이렇게····!"
"조용히 좀 해 봐."
"으븝!으브븝!"
칸은 열변을 토하는 케리우스의 입에 다시 재갈을 물렸다. 너무 시끄러워서 생각하는 데 방해됐다.
작금의 상황을 빠르게 정리해 보자. 일단, 지금 나타난 저 둘은 명백히 케리우스를 노리고 있었다.
데후트라는 남자가 칸의 시선을 끌었고, 그 틈을 노린 여자가 케리우스에게 창을 꽂으려 했다.
만약 국왕이 케리우스를 이용해 일을 벌이려 했고, 저 두 사람이 진짜로 국왕의 궁정 기사라면·····.
'꼬리 자르기.'
그것 말고는 떠오르는 게 없었다.
이번에는 가정을 약간 다르게 해보자. 만약 저 두 사람이 애초에 국왕의 기사가 아니라면? 처음부터 궁정 기사를 사칭한 제3의 세력이었다면?
'···그래 봤자 크게 달라질 것은 없어.'
전제가 약간 달라졌을 뿐, 똑같은 꼬리 자르기일 뿐이다.
'애초에 나를 살려줄 생각도 없었겠지.'
목격자 하나 없이 깔끔하게 상황을 정리하고 싶을 것이다. 케리우스가 어떤 소리를 지껄였을지 알 수 없으니까.
그때, 데후트가 삼각구도를 깨면서 한 발 앞으로 나섰다.
"대충 상황을 이해한 것 같으니 입에 발린 소리는 하지 않겠네. 그러니까 자네는···· 그냥 운이 없었던 거야. 어디서 이상한 의뢰를 받는 바람에 저 망나니와 함께 죽게 된 거지."
그렇게 말하면서 데후트는 천천히 칸을 향해 걸음을 옮겼고, 그와 동시에 밀라나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세 개의 꼭짓점 중 움직이지 않은 것은 오직 칸 하나. 등 뒤에 지켜야 할 것이 있었기에 그는 자리를 옮길 수 없었다.
밤이 되기 직전의 석양은 아주 뜨거웠다. 바람이 불어와 그 열기를 약간이나마 식혀 줬지만, 전투의 긴장감마저 해소하지는 못했다. 폭풍전야와 같은 분위기가 주변에 감돌았다.
이윽고 세 개의 꼭짓점이 한자리에서 격돌하며 적막을 깨트렸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