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칸은 팔짱을 낀 채 소르덴을 응시했다. 소르덴의 눈빛에서 전해지는 음울한 감정이 안타까웠다. 그토록 원했던 오러를 이런 식으로 각성하게 될 줄이야. 참 아이러니했다.
"분노를 죽이지 않으면 네가 죽어."
그렇게 말을 뱉으며 칸은 팔짱을 풀었다. 그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톨칸 영감께서 지금의 네 모습을 봤다면, 절대 기뻐하지 않으셨을 거다. 오히려 크게 꾸짖으며 정신 차리라고 일갈하셨겠지."
"·····."
소르덴은 침묵을 지켰다. 톨칸. 그 이름은 이제 소르덴에게 역린이나 다름없다.
"다시 한 번 말하지. 분노를 죽여, 소르덴."
"······."
"만약 네가 이성을 잃고 날뛰게 된다면 내가 네 목숨을 거둘 거야. 친구라는 놈이 짐승이 되는 꼴을 그냥 볼 수는 없으니까."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게 친구를 향한 예의일 테니까. 뒷말은 굳이 입 밖에 내지 않은 채 칸은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홀로 남은 소르덴은 고개를 들어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다가 한마디 툭 뱉었다.
"···노력은 해 볼게."
될지 안 될지는 모르겠지만.
***
이틀이 지났다. 그사이에 의뢰를 맡기겠다는 사람이 꽤 많이 찾아왔지만, 칸은 모든 제안을 거절했다.
'이제는 진짜로 휴식.'
갑작스레 매사냥이 들어오지만 않았어도 벌써 한참 전에 취했을 휴식이다. 앞으로 얼마나 쉬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당분간은 지금껏 습득한 것들을 정리할 생각이다.
'근 몇 달 사이에 정말 많은 것을 얻었지.'
모르텐식 파동연공, 파동장, 허공답보, 운룡식, 그리고 만월검의 묘리까지.
이건 그야말로 대격변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눈앞에 먹이가 보일 때마다 마구잡이로 집어삼켰으니, 이제는 뱃속에 집어넣은 것을 곱씹으며 제대로 소화할 차례였다.
아무렇게나 먹으면 결국에는 탈이 나는 법. 칸은 여관 뒤뜰에 마련된 작은 공터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 오러를 순환했다.
두근, 두근, 두근····.
'거인의 심장'을 섭취한 뒤로 심장의 움직임이 더욱 세세하게 느껴진다. 단순히 영약을 섭취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자신의 기량이 상승해서 그렇게 된 것일까.
답이 나오지 않는 생각을 이어가던 칸은 문득 예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제이나는 모르텐식 파동연공의 경지를 세 개의 단계로 분류했었지.
개중에 2단계에 해당했던 경지는 흥분한 상태의 심장을 원활히 이용하는 것.
'솔직히 2단계를 따로 분류해 놓은 이유를 모르겠어.'
전투를 벌이다 보면 본능적으로 몸이 흥분할 수밖에 없다. 그에 따라 심장은 평소보다 거세게 뛰게 될 것이고, 그 심장에서 뿜어진 파동을 통해 파동 오러를 생성하게 된다.
즉, 흥분한 상태의 심장을 이미 이용하고 있다는 뜻이다.
'혹시 흥분한 심장이라는 게 다른 뜻이 있는 건가?'
모르겠다. 말뜻 그대로 흥분한 심장을 가리키는 것인지, 아니면 어떠한 특정 상태를 저런 식으로 표현한 것인지. 제이나를 만나게 되면 다시 한 번 물어봐야 할 것 같다.
"······."
생각을 끝낸 칸은 자리에서 일어나 어떤 자세를 취했다. 양팔을 좌우로 벌린 채 무릎을 살짝 굽힌 자세. 전생의 기억을 더듬어 나름대로 재해석한 '태극권'의 자세였다.
이게 맞는 자세인지는 모르겠다. 게다가 자세 자체도 아직은 어설프기만 했다. 차라리 이건 태극권이 아니라, 데후트가 보여줬던 만월검의 기수식을 약간 변형한 자세라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좋게 말하면 '칸식(式) 태극권'이요, 나쁘게 말하면 '만월검의 아류(亞流)'라고 할 수 있겠지. 사실 주먹을 사용하지도 않으니 '태극장(掌)'이라고 부르는 게 맞을 것이다.
'그냥 앞으로 계속 칸식 태극장이라고 부르면 되지 뭐.'
속으로 고소를 삼키며 칸은 눈을 감았다.
휘이이잉─
어디선가 강렬한 바람이 불어온 것은 그때였다. 뒤뜰에 자리한 나무들이 일제히 좌우로 흔들렸고, 나뭇잎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칸은 부드럽게 몸을 회전해 그 모든 나뭇잎을 한곳으로 모았다. 마치 칸을 중심으로 해 나뭇잎이 춤을 추는 것 같은 광경이 펼쳐졌다.
"오오····."
지금 막 뒤뜰로 들어섰던 카르틴은 손에 들고 있던 물건을 평상 위에 내려놓으며 감탄을 뱉었다. 저도 모르게 손뼉까지 짝짝 치는 중이다.
"흐읍!"
칸은 숨을 삼키며 전신으로 파동을 방출했다. 그러자 동그랗게 모여있던 파릇한 나뭇잎들이 일제히 사방으로 흩날렸다.
쏴아아아아──
보이지 않는 물결에 몸을 맡긴 나뭇잎들. 그 모든 물체가 하늘하늘 출렁이며 바닥에 몸을 뉘었다. 한 편의 묘기와 같은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던 카르틴이 말문을 열었다.
"이봐, 칸. 나뭇잎들은 네가 다 치워라? 빗자루로 싹싹 쓸어서 한쪽에 모아 놔."
"······."
"멋있기는 한데, 주변을 너무 어지럽히네. 다음에 그거 할 거면 빗자루부터 챙겨."
화려했던 연출의 말로는 결국 빗자루질. 칸은 입술을 살짝 삐죽이고서 평상을 향해 다가갔다.
"카르틴. 고기는 좋은 놈으로 구해왔지?"
"어엉, 톰 아저씨가 가장 좋은 놈으로 준다고 했어. 그 아저씨가 고기로는 장난 안 치는 사람이니까 믿어도 될 거야."
카르틴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인 칸은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동그랗게 돌을 쌓았다. 이 위에 커다란 철판을 얹고 고기를 구울 예정이다.
"요즘 톰 아저씨네 푸줏간이 인기가 아주 좋아. 몇 달 전에 새로 개업한 곳이거든? 그래서 그런지 신선도가 장난이 아니야."
칸은 뒤통수를 긁적이며 대꾸했다.
"난 처음 듣는데?"
"그거야 칸 네가 계속 돌아다녔으니까 그렇지. 요즘 계속 장기 의뢰만 받았잖아."
"고의는 아니야.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 거지."
칸은 그렇게 카르틴과 투닥거리며 고기가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주문한 고기의 양이 꽤 많았기에 푸줏간에서 가져다주기로 했다.
고기를 많이 주문한 이유는 별것 없다. 여관의 다른 식구들과 함께 고기구이를 즐기기 위함이다. 카르틴이 기분 전환을 하겠다며 돈을 많이 보탰다.
'····그 녀석은 안 왔네.'
소르덴에게도 참석하라는 말을 전달했지만, 역시나 오지 않았다. 아무래도 단단히 삐뚤어진 듯했다.
"사장님! 진짜 마음껏 먹어도 돈 안 받으시는 거죠?"
"아, 물론이지! 내가 씀씀이가 좀 인색하기는 하지만 쓸 때는 또 쓰는 남자야!"
마구간을 관리하는 사람까지 포함해 대략 다섯 명의 직원. 카르틴은 아주 양껏 먹으라며 돼지 몸통 반쪽을 주문했다.
"배달이요!"
덩치가 큰 남성 한 명이 뒤뜰로 들어선 것은 그때였다. 아마 저 사람이 푸줏간을 운영한다는 톰 아저씨일 것이다.
"카르틴, 고기는 어디다 놓으면 되냐?"
"여기요, 여기. 평상 위에 올려 주세요."
"아이구, 어깨 빠지겠네. 이제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이거 옮기는 것도 힘들다."
톰 아저씨는 어깨에 짊어지고 있던 것을 평상 위에 쿵! 소리 나게 내려놨다.
손질이 하나도 되지 않은 돼지 몸통. 털을 태울 때 생겨난 겉껍질의 그을림이 손질의 전부였다. 톰 아저씨는 소매를 걷어붙이며 말했다.
"어떻게, 내가 손질 좀 해줘? 잘 드는 도끼가 있으면 하나 가져와 봐. 굽기 편하게 부위별로 뼈 정도는 끊어줄 수 있어."
그 말에 칸은 허리춤에 매고 있던 손도끼를 앞으로 내밀었다.
"마음껏 쓰시오."
한은(寒銀)으로 만들어진 손도끼, 그 이름 벨하임.
이 녀석의 첫 쓰임이 돼지고기 손질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아무렴 어떤가. 지금 당장 쓸 만한 도끼는 벨하임이 전부였다.
"····오오, 멋있다."
직원 하나가 벨하임의 푸른빛을 보며 감탄을 뱉었다. 저런 도끼로 고기나 자른다는 게 좀 웃겼다.
그런데 벨하임을 마주한 톰 아저씨는 어째선지 멈칫했다. 칸은 그 반응을 놓치지 않았다.
"허흠, 이 도끼 말고 다른 놈은 없나?"
"왜 그러시오?"
"아니, 그게 말이지···· 아, 그래! 그놈은 생긴 게 너무 부담스러워."
톰 아저씨는 한걸음 뒤로 물러나며 손사래를 쳤다.
"그런 걸로 고기를 조졌다가 날이라도 상하면 전부 내가 덤터기 쓰는 거 아니야?"
"괜한 걱정이오. 책임을 묻지 않을 테니 고기 손질이나 해 주시오."
"에이, 됐어. 난 그냥 푸줏간으로 돌아갈래. 알아서들 손질해서 구워 먹으라고."
사람들은 그게 뭔 뚱딴지같은 핑계냐며 톰 아저씨를 바라봤다. 딱 봐도 견고하게 생긴 저 손도끼가 겨우 돼지고기 몇 번 내려친다고 날이 상할까?
그러던 그때, 칸이 앞으로 움직여 벨하임을 톰 아저씨에게 가져다 댔다. 그러자 톰 아저씨는 기겁하며 뒤로 물러났다.
"에헤이, 지금 뭐하는 거야!?"
톰 아저씨는 과하게 뒷걸음질 치며 벨하임을 피하려 했다. 누가 보면 칸이 더러운 똥이라도 내민 줄 알겠다.
"····야, 칸. 손질하기 싫으시다는데 도끼를 들이미는 게 대체 뭔 경우냐. 그냥 우리가 손질해서 먹자."
그 장면을 가만히 바라보던 카르틴은 손을 뻗어 칸을 만류했다. 톰 아저씨의 이상한 태도 때문에 화가 날 수는 있지만, 이건 좀 과했다.
칸이 입을 연 것은 그때였다.
"이보오, 톰 아저씨. 고기 손질은 바라지도 않을 테니 이리 와서 손도끼나 한번 손에 쥐어 보고 가시오. 겨우 푸줏간이나 운영하는 사람이 언제 이런 놈을 만져 보겠소."
말투가 변했다. 조롱이 섞여 있는, 시비를 걸겠다는 의도가 다분히 느껴지는 말투. 여관 사람들은 당황한 얼굴로 칸을 돌아봤다.
특히나 카르틴은 진짜로 의아해했다. 그가 아는 칸은 이렇게 막장인 사람이 아니니까. 다혈질적인 면도 딱히 없었고.
"씨발! 싫다는데 왜 자꾸 지랄이야, 지랄은! 이봐, 카르틴! 다음부터는 우리 집에서 고기도 시키지 마!"
그렇게 말하고 돌아서려는 톰 아저씨를 향해 칸은 벨하임을 던졌다. 던져서 맞추려는 게 아니라, 바닥에 놓듯이 가볍게 툭.
가만히 두면 톰 아저씨의 몸통에 맞고서 바닥에 떨어질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도 그 반응이 너무나 과했다.
"왜, 왜 저러는 거야?"
"저 도끼가 그렇게도 싫은가?"
여관 사람들은 이게 뭔 상황인가 싶어서 멍하니 서있었고, 톰 아저씨는 거대한 체구를 바닥에 굴리며 벨하임을 회피했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였군."
칸의 입가에 살벌한 미소가 번지기 시작했다.
"이렇게 대낮에 고기 배달을 다니는 것을 보면 열등종이거나 순혈종. 둘 중에 하나겠지."
"·····."
이미 걸렸다는 것을 깨달은 톰 아저씨는 칸을 죽일 듯이 노려봤다.
"개씨발, 네가 왜 한은으로 된 도끼를 가지고 있는 건데?"
"선물로 하나 받았어. 요즘 너 같은 모기들이 하도 많이 돌아다녀서 말이야."
터벅터벅 걸음을 옮긴 칸은 벨하임을 주워들었다.
"그래도 훈련이라도 좀 해야 하는 거 아닌가? 겨우 한은 좀 가져다 댔다고 그렇게 기겁을 하면···· 이렇게 도시에 잠입한 이유가 없잖아."
톰은 빠드득 이를 갈았다. 실제로 다른 동지들은 한은 앞에서 평정을 유지하는 적응 훈련을 받는 중이다.
한은의 매물이 너무 적어서 그 진척 상황이 매우 더뎠고, 아직 톰에게는 순서가 돌아오지 않았다. 훈련을 받았다면 상황이 좀 달랐을까?
톰은 생각하던 것을 멈추며 이글거리는 눈동자로 칸을 노려봤다. 그의 두 눈은 서서히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진짜 너는 우리와 지독한 인연이군."
"나도 너희랑 엮이는 게 싫어. 어쩌다 보니 우연찮게 계속 마주하게 됐을 뿐이지."
두 눈이 붉게 물든 다음에는 톰의 입술 사이에서 송곳니가 삐죽 튀어나왔다.
"····우연? 지랄하지 마라. 가는 곳마다 동족의 일을 망치는 주제에 우연은 개뿔. 넌 이미 우리의 주시 대상이야."
이번에는 칸이 침묵을 지키며 미간을 구겼다. 주시 대상? 겨우 두 차례 엮인 정도로 저렇게까지 말할 필요가 있나 싶었다. 솔직히 더 이상 엮이고 싶지도 않았다.
저놈들의 목적이 뭔지는 모른다. 대륙으로 복귀해서 온 세상을 뒤엎고 싶은 것인지, 아니면 그냥 복수를 꿈꾸며 대륙 곳곳에서 테러를 자행하려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칸은 그저 저런 놈들과 엮였다는 게 싫었다. 처음부터 그냥 모르고 살았어야 했다. 하지만 이미 상황은 꼬일 대로 꼬였다. 이 상황을 당장에 뒤집는 건 힘들어 보였다.
"설마 나를 계속 감시하고 있던 건 아니겠지?"
칸의 물음에 톰이 으르렁거렸다.
"그건 내 업무 중 일부일 뿐이다."
"일부라고?"
"됐어, 뭔 말이 그렇게 많냐? 아가리 닫고 빨리 덤비기나 해."
칸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진짜 여러모로 피곤해졌어."
"크르르르르!"
드디어 톰의 입에서 짐승 소리가 튀어나왔다. 이미 그는 여기서 살아나가기를 포기했다. 괜히 꼬리가 잡혀서 고문을 받느니, 깔끔하게 죽는 편이 나았다.
"캬아아아악!"
갑자기 입을 크게 벌리며 달려드는 톰. 그 모습에 여관 사람들은 혼비백산하여 사방으로 흩어졌다. 도시 안에서 저런 괴물을 보는 것은 생전 처음이다.
"이런 씹···! 빨리 경비대에 신고해!"
"저 새끼 저거 뭔데!? 톰 아저씨 맞아?"
"닥치고 빨리 물러서기나 해!"
물론, 그런 반응들과는 별개로 톰은 오직 칸을 향해서만 달려들었다. 자세를 낮춘 채 달려들던 녀석은 손을 휘저어 무언가를 발사했다.
피슈슉-!
그 정체는 손톱. 손톱이 빠져나간 자리에서는 곧바로 새로운 손톱이 날카롭게 자라나고 있었다. 이건 또 생경한 경험이라고 생각하며 칸은 옆으로 몸을 날렸다.
조금 전까지 칸이 서있던 자리에 박혀든 손톱들. 톰은 애초에 빗나갈 걸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곧바로 칸을 따라 발을 놀리려 했다.
그러던 그때, 칸의 몸이 갑작스레 하늘로 솟구쳤다. 허공을 밟으며 뒤로 돌아가는 모습.
그 움직임을 놓친 톰이 고개를 위로 쳐들며 뒤를 쫓으려 했지만, 등에서 느껴지는 격통이 생각을 뚝 끊어냈다.
"커허윽!"
등을 타고 찌르르- 전해지는 통증. 이건 단순히 날붙이에 찍혔다고 느낄 수 있는 통증이 아니다. 실시간으로 살이 썩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좆같은 도끼!"
눈에 보이지 않음에도 톰은 제 등에 박혀있는 날붙이의 정체를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분명 칸이 손에 들고 있던 그 도끼가 등에 박혀있을 것이다. 손을 뻗어 도끼를 뽑아낸 톰은 그걸 바닥에 내팽개쳤다.
칸은 여유가 넘치는 자세로 가만히 톰을 바라봤다. 피부 위로 도드라진 까만 혈관. 처음에는 보이지 않았던 혈관이다. 벨하임에 맞은 뒤로 생겨난 반응인 듯했다. 약간이지만 한기까지 느꼈는지 입술도 새파랗게 변했다.
'엄청나게 극적이지는 않지만, 그래도 은(銀)이라서 그런지 일반 날붙이에 비해 효과가 좋아.'
칸은 톰의 정체를 열등종으로 확정지은 상태였다. 저번에 상대했던 순혈종 흡혈귀, 죠반니는 몸을 혈액으로 바꾸며 기괴한 전투법을 선보였었지.
그에 비하면 톰은····크게 놀랍지도 않다. 손톱을 뽑아내는 것 정도는 혈액화에 비하면 상대하는 게 어렵지 않았다. 그냥 피하면 그만이다.
어쨌거나 벨하임의 진면목은 순혈종을 상대할 때나 드러날 것 같다. 한은의 핵심 기능은 순혈종의 혈액화를 어느 정도 억제한다는 점이었으니까.
혈액화가 불가능한 열등종에게는 몸을 좀 불편하게 만드는 정도가 끝인 듯했다. 게임으로 치면, 무기에 도트 데미지가 추가된 느낌.
'물론, 그것만 해도 메리트는 충분해.'
칸은 생각을 정리하며 톰을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입술을 타고 흐른 핏물을 혓바닥으로 핥아낸 톰은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자세를 낮췄다. 그러고는 열 개의 손가락에서 일제히 손톱을 사출했다.
피슈슈슉─!
빠르게 날아드는 열 개의 손톱을 마주한 칸은 태연하게 자세를 취했다.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태평해 보이는 그 움직임. 누가 봐도 칸의 몸에 손톱이 박혀들 것 같았다.
'····이, 이게 먹힌다고?'
마지막 발악이라고 생각하며 일제 사격을 가했던 톰은 멍한 표정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성공이다. 사사건건 동족을 방해했던 골칫덩이를 드디어·····!
"뭐?"
톰의 생각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지금 그의 눈에 들어찬 장면은 딱 하나. 당장 위기에 처한 것 같던 칸이 유려하게 몸을 돌리며 손톱을 흘려내는 광경뿐이었다. 열 개의 손톱은 뒤편에 있던 나무에 투두둑 박혀 들었다.
"아아·····."
톰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잠시간 기대를 품었던 것이 너무나 허무했다. 자신을 향해 천천히 다가오는 칸을 바라보던 톰은 이내 손톱을 다시 뽑아냈다. 그 행동에 망설임은 없었다.
"헛수고일 뿐이야, 톰. 애쓰지 말고 쉽게 쉽게 가자고. 네가 이 도시에서 무얼 하고 있었는지 순순히 불면, 적어도 고통스럽지 않은 죽음을 맞이할 수 있지 않겠어? 그러니까 발악은 그만하고 우리 대화를·····."
파샤아악-! 톰의 머리가 터진 것은 그때였다. 작살처럼 손톱을 길쭉하게 뽑아낸 그는 그 열 개의 손톱을 그대로 제 머리에 꽂아 넣었다. 그와 동시에 머리가 터진 것이다.
"····과격하기는. 대화 좀 나눠 보자니까."
톰을 향해 천천히 다가가던 칸은 표정을 굳힌 채 남은 말을 뱉었다. 그런 칸의 시선에 뒤편에 숨어있던 여관 식구들이 들어왔다.
아무래도 오늘 하기로 했던 고기 만찬은 다음으로 미뤄야 할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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