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이단 심문소에게 뭘 받기로 했지?"
바리엔투스의 물음에 칸은 잠시간 체리예니를 바라봤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계약 조건을 발설해도 괜찮다는 신호였다.
"마탑 이용권. 혹은 이단 심문소 소유의 마법 물품 중 적당한 녀석을 받기로 했습니다."
죠반니 호송대에서 이탈해 새로이 추격대에 합류할 때 다시 맺게 된 계약.
이미 많은 돈을 갖고 있는 칸은 색다른 보상을 요구했고, 체리예니는 마탑 이용권과 마법 물품을 제시했다.
그 대답을 들은 바리엔투스는 침음을 흘렸다.
"흐음····. 몸값이 엄청나군. 그런 수익을 계속 낼 수 있다면, 내 기사직 제안을 거절할 만도 해."
칸의 몸값이 이토록 뛴 것은 최근의 일이다. 그리고 심문소 측에서 칸의 가치를 높게 평가했기에 가능한 몸값이기도 했다.
기본적인 실력도 실력이지만, 흡혈귀를 다퉈온 칸의 경험이 저런 몸값을 크게 부풀렸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 무슨 전설의 마법 물품을 받게 되는 것은 아니다. 마법이 새겨진 확성기 하나만 해도 몇십 골드는 우습게 호가한다.
아마 칸이 받을 수 있는 물건도 끽해야 그 정도 선일 것이다. 그 이상의 것은 상부에서 내주지 않겠지.
"잠깐 고민 좀 하겠네. 자네의 구미를 당길 만한 것이 뭐가 있을까····."
바리엔투스가 수염을 긁적이며 생각을 이어가던 그때. 칸의 머릿속에서도 다른 생각이 이어졌다.
'마탑 이용권과 마법 물품. 둘 중 뭘 고르는 게 더 좋을까.'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사실 어떤 걸 선택하든 칸에게 나쁠 것은 없었다. 두 가지 보상 모두 쉽게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니까.
마법 물품은 오직 마법사만 제작할 수 있고, 그런 마법사들이 모여있는 곳이 바로 마탑이다.
그러므로 마탑 이용권은 마탑에서 물품을 구매하거나 개인적으로 제작을 의뢰할 수 있는 단발적인 권리를 뜻했다.
'마탑은 권위적이고 폐쇄적이지.'
오직 그 격을 갖춘 사람에게만 문호가 개방된 집단.
왕족, 귀족, 성직자, 부호, 그 외 등등. 그런 기득권에 속하지 않은 사람은 마탑에 진입조차 할 수 없다.
이건 그냥 가진 놈들끼리 다 해 쳐먹겠다는 뜻이다. 이런 불합리한 구조는 이미 수 세기 동안 유지됐다.
'의도가 너무 노골적이라서 별로 놀랍지도 않아.'
대륙의 기득권들은 마법 물품을 독점함으로써 제 권위를 공고하게 만들었고, 덕분에 마법 물품은 그 편의성에도 불구하고 여태 대중화되지 못했다.
'상류층을 더 단단하게 만들어 주는 수단.'
마탑이 생기기 이전부터 마법 물품은 그런 식으로 이용돼 왔다. 뭐, 최근에는 금전의 힘이 대두되면서 마법 물품이 시중에 많이 풀린 편이기는 하지만····.
'그래봤자 예전에 비해 많이 풀렸을 뿐이지.'
마법 물품의 숫자는 여전히 적었다. 여전히 있는 것들만 사용할 수 있는 물건이다.
그래도 언젠가는 결국 대중화될 것이다. 기존의 봉건 경제는 이미 무너지기 시작했고, 영지 경영에 실패한 귀족들은 마법 물품을 경매에 부칠 테지.
시간이 얼마나 걸릴 것이라고 확실하게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마법 물품의 대중화는 필연적인 흐름이다.
거스를 수 없는 시대의 흐름. 제아무리 기득권이라 할지라도 그 흐름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이다.
어쨌거나 그건 나중의 일이고·····
지금 당장은 기득권에 속하지 않은 사람이 마탑에 접근할 방법은 많지 않았다.
'신분 상승을 이루거나, 기득권에 속한 누군가의 추천으로 이용권을 양도받거나.'
그 둘이 가장 유력한 방법이다. 당연하게도 둘 모두 일반적인 양민이 쉽게 취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니다.
양민 중에 신분 상승을 이룰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된다고. 그건 진짜 하늘에서 별을 따는 수준이다. 사실상 꿈도 꾸지 말라는 소리와 다름없다.
아무리 노력해도 닿을 수 없는 밤하늘의 별. 일반인들에게 마탑은 그런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좋아, 결정했어."
바리엔투스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칸은 꼬리에 꼬리를 물던 생각을 끊어냈다.
"파동."
····파동? 칸은 고개를 갸웃했다. 바리엔투스의 입에서 나온 단어가 너무 생뚱맞았기 때문이다.
"파동 오러와 관련된 기술서를 하나 주지."
"····정말입니까?"
칸은 저도 모르게 반문했다. 바리엔투스가 대단한 물건을 보상으로 내걸 것이라는 생각은 적중했다.
하지만 그게 오러 기술일 줄은 몰랐다. 이건 마법 물품보다 훨씬 더 구미가 당기는 보상이다.
"물론, 대단한 기술은 아니야. 예전에 할아버님께서 수집했던 기술서 중 하나에 불과하지. 지금은 가문 서고에서 잡서로 분류돼 있고."
"·····."
보우덴 백작가 정도의 명문이면 오러 기술을 잡서로 분류하기도 하는가 보다. 대체 얼마나 많은 기술이 가문 서고에 잠들어있을지 궁금해지는 순간이다.
어쨌거나 오러 기술서였다. 바리엔투스는 잡서라고 표현했지만, 그 값어치는 결코 낮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생각을 달리 해 볼 필요는 있다. 지금 이렇게 기술서를 선뜻 제안한다는 것은 그 물건에 하자가 있을 수도 있다는 뜻이니까.
어쩌면 하자가 없더라도 효용이 크지 않은 기술일지도 모른다. 실제로 별 같잖은 기술서는 가끔 암중에서 헐값에 거래되기도 한다.
물론, 그마저도 백 골드 정도는 가볍게 호가할 테지만······.
그런 하자 있는 매물조차 자주 나오는 게 아니다. 여러 도시의 뒷골목을 떠돌며 기술서를 찾으러 돌아다니는 것도 번거로운 일이고.
'게다가 그럴싸하게 글을 싸지르고서 사기를 치는 놈들도 있지.'
자칫 잘못했다가는 거금을 허공에 날리는 수가 있다. 대부분 뒷골목의 암상(暗商)을 통해 거래되는 장물이기 때문에, 진품과 가품을 구별하는 게 쉽지 않다.
'····옛날 생각이 나는군.'
부끄럽게도 칸은 그 사기를 직접 겪은 적이 있다.
당시 칸의 경력은 용병 5년차.
아득바득 돈을 모아서 오러 기술서에 꼬라박았고, 구입한 당일에 밤을 새워 그 기술서를 독파했다.
그리고 깨달음을 얻었었다.
아! 거금을 들여서 구매한 이 빌어먹을 기술서는 가짜구나! 그 씨발놈이 나에게 사기를 쳤구나!
그 길로 여관을 뛰쳐나와 뒷골목의 가판대로 향했지만, 물건을 팔아치운 녀석은 이미 장사를 접고 떠난 지 오래였다. 아예 도시 자체를 벗어났다고 하더라.
'······.'
그 사기꾼만 생각하면 아직도 살심이 치솟는다. 다시 만날 일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혹시나 만나게 되면 죽여버릴 것이다.
아니지, 죽이는 건 너무하니까. 죽여달라는 말이 나올 때까지 두들겨 패주도록 하자.
"자, 족장 살해자. 생각은 충분히 했나? 이제는 대답이 나올 때가 된 것 같은데."
문득 들려온 바리엔투스의 목소리가 칸의 생각을 뚝 끊어냈다.
"자네가 파동 오러를 다룬다는 말을 듣고서 이런 제안을 했네만,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그냥 돈으로 줄 수도 있어. 몸값을 후려칠 생각은 없으니 걱정하지 말게."
"그 기술서의 내용을 약간이나마 알 수 있겠습니까?"
칸의 물음에 바리엔투스는 옅은 웃음을 흘리며 말문을 열었다.
"탐색과 감지. 그런 쪽에 유용한 기술로 보이더군."
"···혹시 하자가 있는 물건은 아닌지요?"
칸은 조심스럽게 그런 질문을 입에 올렸다.
어쩌면··· 자신을 뭘로 보고 그딴 질문을 하냐며 바리엔투스가 화를 낼지도 모른다. 귀족들은 쓸데없는 부분에서 자존심을 세우려 드는 편이니까.
실제로 바리엔투스의 뒤편에 서있는 발프 오를렝은 살짝 미간을 구겼다. 하지만 백작의 명이 없었기에, 따로 어떤 행동을 취하지는 않았다.
반면 바리엔투스의 표정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원래 그는 뒤끝이 없는 성격. 게다가 지금은 칸의 실력에 상당한 호감마저 품고 있었다.
바리엔투스는 대수롭지 않게 계속 대화를 이어갔다.
"나는 그 기술을 익혀 본 적이 없어서 하자가 있는지 없는지 확실하게 몰라. 두어 번 읽어본 게 전부거든. 하지만 선대의 누군가가 이미 검증을 끝냈을 거야. 하자가 있는 물건은 우리 가문의 서고에 머물지도 못해. 잡서로 분류될 이유도 없는 거지."
사실상 하자가 없을 것이라는 말과 다름없다.
바리엔투스의 말은 그렇게 끝났다. 그는 팔짱을 낀 채 은근한 시선을 칸에게 던졌다. 해줄 말은 전부 끝났으니, 이제 결정을 내리라는 눈빛이다.
이윽고 잠시간 생각을 이어가던 칸의 입술이 열렸다.
"좋습니다. 의뢰 대금은 기술서로 받도록 하죠."
"잘 생각했네. 후회하지 않을 결정이 될 거야."
대륙 전체를 둘러보더라도 파동 오러를 다루는 사람은 흔치 않다. 당연하게도 파동 오러와 연계된 기술서 또한 그 숫자가 적었다.
기술서의 매물은 적은 편이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희귀한 편에 속하는 게 파동 오러와 연계된 기술서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기회는 흔하게 오지 않는다. 게다가 그 출처가 보우덴 가문의 서고. 보우덴 백작 본인이 직접 보증까지 해줬다.
'이걸 받지 않을 이유가 없지.'
실제로 어떤 효용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벌써부터 칸의 마음은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새로운 기술은 언제나 환영이다.
"계약서는 내 집무실로 돌아간 뒤에 제대로 작성해서 넘겨주겠네."
"좋습니다."
지금 당장 맺을 수 있는 것은 구두 계약이 전부였다. 이 지하에는 잉크와 종이가 존재하지 않았기에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대화를 마무리 짓고서 일행은 식사를 시작했다. 발프가 가져온 포대기에는 음식이 가득했고, 간만에 즐기는 제대로 된 식사에 다들 입가에 미소를 그렸다.
음식들로 충분히 배를 채운 뒤에는 지상으로 향했다. 지상으로 올라가는 길은 그리 험난하지 않았다.
어떤 지령이라도 떨어졌는지 지하 공동을 가득 메웠던 괴물 놈들이 일제히 철수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마주치는 족족 머리를 터트리기는 했지만, 그 숫자는 현저히 적었다.
결국 지상으로 올라와 마주한 첫 풍경은 하나둘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괴물들의 뒷모습.
놈들이 사라진 어둠을 응시하며 바리엔투스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저놈들을 그냥 보내야 한다는 게 너무 아쉽군."
존재 자체가 해악인 놈들. 만약 여건이 따라줬다면, 놈들을 캉브란 산에 몰아넣고 일거에 소탕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상황이 아니다. 몸은 아직 회복되지 않았고, 부릴 수 있는 병사도 없었다.
설령 여건이 따라줬다고 해도 저런 잡졸들에게 눈길을 줘서는 안 된다. 지금은 내부에 있는 진짜 적을 색출하는 게 우선이다.
'···타르웨인. 이 상황을 정녕 몰라서 방치만 하고 있던 거냐? 너처럼 뛰어난 놈이 이걸 몰랐다고?'
첫째 아들을 향한 의심이 점점 깊어지는 것을 느끼며 바리엔투스는 몸을 돌렸다.
발프 오를렝의 충직한 얼굴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 다음으로는 체리예니와 헤르메이, 용병 칸이 동공에 맺혔다.
그리고 그들의 뒤편에서 몸을 덜덜 떨고 있는 부랑자 무리. 저 부랑자들은 그냥 풀어줄 생각이다. 제 갈 길을 찾아서 알아서들 떠나라고 이미 말해 뒀다.
어차피 세금도 제대로 내지 않는 것들. 어디로 떠나든 상관없다. 영문도 모른 채 이곳에 끌려온 게 불쌍하기는 했지만, 연민 그 이상의 감정은 느껴지지 않았다.
바리엔투스가 손을 휘익- 휘저은 것은 그때였다. 썩 꺼지라는 의미였다.
"가, 감사합니다요! 나으리들은 정말이지 복 받으실 겁니다!"
"살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씨발, 뭔 감사 인사야! 빨리 도망이나 쳐! 여기 있다가 괴물들한테 또 잡히고 싶어!?"
저들은 바리엔투스의 정체를 모른다. 그저 자신을 살려준 일행 중에 가장 높아 보이는 사람에게 고개를 숙였을 뿐이다.
부랑자들은 순식간에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 모습을 일별하며 헤르메이가 칸에게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가만 보니까 괴물들이 사라진 방향으로 몸을 던지는 작자도 있더군요."
"·····."
"괜찮을까요? 도망치다가 흡혈귀에게 걸리면 바로 피가 빨릴 텐데."
칸은 무표정한 얼굴로 말문을 열었다.
"글쎄, 너무 깊게 생각할 필요는 없소. 그것도 저치들의 팔자겠지."
냉정한 말이지만, 계속 쫓아다니며 저들의 뒤를 봐줄 수는 없다. 지옥 같은 곳에서 꺼내준 것만 해도 은혜는 충분히 베푼 셈이다.
그 이후의 일은 각자 알아서 책임져야 한다. 눈치가 있다면 괴물이 사라진 방향으로 걸음을 옮겨서는 안 됐다.
만약 칸이 저 부랑자 중 한 명이었다면, 일단 민가로 향했을 것이다. 지금은 다들 잠자리에 들었을 시간이지만, 비명을 지르면 사람들이 밖으로 나와 보기는 하겠지.
괴물들도 사람이 많은 장소에서는 습격을 자중할 것이고.
"뭐····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래도 많이 죽지는 않겠죠. 놈들도 정신없이 철수 중이지 않습니까? 그 와중에 배를 채우려는 놈은 많지 않을 겁니다."
"나도 그러기를 바랄 뿐이오."
어쨌거나 캉브란 산에서의 일은 이렇게 마무리됐다. 이제는 그 다음으로 넘어가야 할 때.
"백작성으로 이어지는 통로가 따로 존재하네. 그리로 이동할 테니 다들 잘 따라오게."
선두에서 걸음을 옮기는 바리엔투스. 일행은 말없이 그 뒤를 따랐다. 그러던 그때, 캉브란 산에서 내려오자마자 어떤 인기척이 느껴졌다.
기척을 감지한 바리엔투스는 미간을 찌푸렸고, 발프 오를렝이 검을 뽑아 들며 그 앞을 막아섰다.
"····적습인가?"
"모르겠습니다. 분명 백작성을 나올 적에는 미행이 붙은 흔적이 없었습니다."
"맞아. 나도 그런 낌새는 전혀 느끼지 못했어. 그러니까 그 말은···· 자네와 나의 감각을 속일 정도로 대단한 실력자가 따라붙었다는 뜻이로군."
냉철하게 상황을 파악한 바리엔투스는 뒤쪽의 일행에게 눈길을 줬다.
"다들 전투를 준비해. 아무래도 오늘은 일진이 영 사나운 것 같아. 어쩌면 여기서 명줄이 끊길 수도 있····."
긴장감 서린 목소리로 말을 이어가던 바리엔투스는 하던 말을 멈추며 고개를 갸웃했다.
"···자네, 왜 웃고 있지?"
칸이 실실 웃음을 흘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급박한 상황에 저런 웃음이 나온다고? 자신의 실력을 너무 자신해서 여유를 부리는 걸까?
바리엔투스의 오해가 서서히 깊어질 무렵, 칸이 말문을 열었다.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각하. 저 녀석은 제 친구입니다."
"···친구?"
그 의문에 구구절절 대답하는 대신 칸은 한 차례 손뼉을 쳤다. 그러자 어둠 속에서 꿈틀거리던 것의 정체가 서서히 드러났다.
"이리 와, 코코."
"꾸르르르····."
그 정체는 코코였다. 녀석은 칸에게 다가오면서도 눈알을 굴려 발프를 노려봤다.
아무래도 칸을 느끼고서 단숨에 달려오다가 발프의 서슬 퍼런 기세에 멈칫한 듯했다.
우와아앗! 아빠다, 아빠! 며칠 만에 만나는 아빠! 그런 생각을 하면서 신이 나서 뛰어왔는데, 그 앞에 웬 바람 아저씨가 있는 것이다.
겁을 먹을 만도 했다. 지금도 발프의 몸 주변에는 오러에 공명한 바람이 날카롭게 맺혀 있었다. 확실히 매서웠다.
"크롸아-!"
"·····."
코코는 작게 울음을 토해 제 용맹을 증명했다. 마치 조금 전에는 겁먹었던 게 아니라, 잠깐 탐색을 벌였을 뿐이라고 말하는 듯했다.
코코의 시선은 여전히 발프에게 머물러 있었고, 발프는 뻘쭘한 얼굴로 바람 오러를 거둬들였다.
"꾸으으응···."
그제서야 다시 걸음을 옮긴 코코는 칸의 손등에 얼굴을 문댔다. 녀석의 입에 고삐가 물려있던 두 마리의 말도 제 주인들을 향해 움직였다.
"후후, 참 각별하네요."
자신의 말을 살살 쓰다듬으며 체리예니가 그렇게 말했고, 칸은 그저 웃음으로 대꾸했다.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던 바리엔투스는 살짝 민망하다는 듯 헛기침을 토했다.
"····크흠, 허흐흠! 적습이 아니라서 다행이군."
창피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자신의 이목을 속일 수 있는 실력자인 것 같네, 빨리 적습에 대비해야 하네, 어쩌고저쩌고.
조금 전에 지껄였던 말들이 머릿속을 떠돌았다. 결국 그 호들갑의 원인은 드라코 한 마리와 말 두 마리였을 뿐이다. 적습 같은 게 아니었다.
"서둘러서 움직이자고. 밤은 그리 길지 않으니까."
괜히 민망해진 바리엔투스는 성큼성큼 다시 앞으로 나아갔다.
"따르겠습니다, 각하!"
민망한 것은 발프 또한 마찬가지였기에, 그는 일부러 큰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과장된 대답 때문에 자신의 주군이 더 얼굴을 붉혔다는 것은 꿈에도 몰랐다.
"우리도 어서 갑시다."
칸의 말에 체리예니와 헤르메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민망함을 떨치지 못한 백작과 기사는 그 걸음이 무척 빨랐다. 벌써 저만치 앞서 가는 중이다.
그렇게 모든 일행이 캉브란 산을 떠났다.
밤공기는 차갑기만 했고, 삭막한 바람이 바닥에 쌓인 나뭇잎을 괴롭혔다. 까만 어둠과 정적만이 빈자리를 채웠다.
어둠이 한 차례 일렁인 것은 그때였다.
"휴우···. 지, 진짜로 걸린 줄 알고 식겁했네."
아무것도 없는 어둠 속에서 여인 한 명이 툭 튀어나왔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백작의 감각이 날카로웠던 것일까, 아니면 그냥 소 뒷걸음질 치다가 쥐를 잡을 뻔했던 것일까.
뭐가 됐든 간에 이미 기회는 지나갔다.
그녀의 특기는 흑화(黑化). 극단적으로 잠행에 특화된 능력. 대신에 전투력은 아주 형편없어서 걸리면 곧바로 죽음이다.
"에휴휴휴····."
지금 이렇게 식은땀을 뻘뻘 흘리는 것도 그런 연유였다. 조금 전에 그녀는 진짜로 죽을 뻔했다. 아직도 몸이 덜덜 떨린다.
행여나 심장이 뛰는 소리가 밖으로 새어 나갈까 봐 심장마저 어둠으로 물들였다.
그 원리는 강제로 심장을 멈추게 하는 것. 사실상 잠깐 죽었던 것과 다름없다.
덕분에 그녀는 지금 아주 격렬한 흉통을 느끼는 중이다. 생명 활동을 잠시 멈춘 것에 따른 여파가 전신을 타고 내달렸다.
"아그극, 끄응····. 엄청 아파. 그, 그래도 뒤지는 것보다는 낫지. 그래··· 살았으면 된 거야, 살았으면."
어쨌거나 여기서 보우덴 백작을 목격한 것은 엄청난 성과였다. 본의는 아니었지만, 목숨을 걸고서 대박 정보를 입수한 셈이 됐다.
덕분에 그녀는 극심한 통증 속에서도 미소를 흘릴 수 있었다.
"히·· 히히힛···. 유, 율리아 님이 분명··· 치, 칭찬해 주시겠지?"
그녀는 일행이 사라진 곳을 잠시간 응시하다가 콧구멍에서 떨어지는 코피를 훔치며 몸을 돌렸다.
잠시 후 다시 한 번 어둠이 일렁였고, 그 속으로 쓰러지듯이 몸을 던짐과 동시에 그녀의 의식은 끊겼다.
그렇게 진정한 침묵이 캉브란 산에 찾아왔다.
***
다음날.
침실에 칩거했던 보우덴 백작이 아침부터 사람을 호출했다는 소식이 백작성을 강타했다.
그가 집무실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정말 오랜만에 있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