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병으로 살다-88화 (88/216)

◈ 88화

스르륵-

조심스레 이불을 들쳤다. 그러자 그 밑에서 나타나는 네리아의 얼굴. 그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칸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

머릿속에 오만 가지 생각이 떠돌기 시작했다.

도대체 어제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머리를 붙잡고 생각을 이어갔지만, 단편적인 기억이 사진처럼 떠오를 뿐이다.

'····미치겠네.'

지금껏 칸은 여자를 함부로 건들지 않았다.

이 시대의 평균적인 위생이 별로인 것도 있지만, 그런 것과는 별개로 아랫도리는 함부로 놀려서 좋을 것 없다는 게 칸의 신조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수도승처럼 산 것은 아니다.

많지는 않아도 나름대로 경험이 있다. 좀 살 만한 도시에는 공중 욕탕이 존재했고, 제대로 씻는 사람도 많았으니까.

의뢰를 나갔다가 어느 깡촌의 아무개랑 뒹굴지 않을 뿐이지, 위생 문제만 해결되면 칸 또한 남들처럼 마음이 동하고는 했다. 하지만·····.

'귀족. 아니, 왕족이라니.'

지금껏 이런 적은 없었다. 많지 않은 경험을 일일이 훑어봐도 이건 정말이지 미친 짓이다. 칸은 머리를 거칠게 헝클었다.

'설마 라이오넬 왕가에서 나를 죽이려 들지는 않겠지?'

귀족 여성은 함부로 건드려서는 안 된다. 잘 풀리면 하룻밤의 즐거움. 혹은 가끔 만나서 즐기는 정부 정도로 남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만약 재수가 없으면 여자 쪽 가문에게 쫓기는 신세가 될 수 있다. 특히나 당사자 간의 신분이 맞지 않을 때 그리되는 경우가 많았다.

신분 상승? 데릴사위? 그딴 건 없다. 어디 동화에서나 나올 법한 얘기일 뿐이다.

실제 귀족들이 얼마나 깐깐한지 모르는 사람들이나 그런 생각을 한다.

'뭣 하러 아까운 딸을 귀족도 아닌 놈한테 넘기겠어. 그냥 죽여버리면 끝인데.'

예전에 그런 사람들을 몇 번 본 적이 있다. 하룻밤의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귀족 여성과 즐겼던, 그리고 그 대가로 인생을 조진 남자들.

하물며 어디에 있는지도 모를 남작가나 자작가에서도 그러할진대, 무려 라이오넬 왕가는 말할 것도 없겠지. 머리가 아파 왔다.

물론, 걸리지만 않으면 괜찮다. 어제 있었던 일은 그저 술 먹고 저지른 실수에 불과할 뿐이고, 앞으로 반복하지만 않으면·····.

"표정이 아주 볼 만하군."

갑작스레 들려온 목소리에 칸은 시선을 아래로 깔았다. 두 눈을 똑바로 뜬 네리아가 도발적인 미소를 짓고 있었다.

"걱정하지 마라, 칸. 겨우 하룻밤이다."

"····너무 태연한 거 아닌가?"

"그러는 넌 너무 심각한 것 같은데?"

네리아가 몸을 일으킨 것은 그때였다. 이불이 사르륵- 떨어져 내렸고, 살랑거리는 꼬리가 침대 귀퉁이에 놓인 옷가지를 감싸들었다.

"좋게 좋게 생각하자고. 너는 내가 싫은가?"

"····."

"나는 네가 썩 마음에 들었는데 말이야. 체스카에서 헤어진 뒤로 한 번씩 생각나더군."

옷을 걸치면서 네리아는 그렇게 말을 뱉었다. 잠에서 막 깨어났기 때문인지 그녀의 얼굴에서는 나른함이 묻어나고 있었다.

"그나저나 혼자 심각하게 고민하는 모습이 아주 재밌던데? 너에게도 그런 귀여운 면모가 있을 줄은 몰랐다."

"····귀엽기는 개뿔이."

칸은 당황으로 물들었던 머리가 차갑게 식는 것을 느꼈다.

흡혈귀 앞에서도 냉정하기만 했던 이성이 겨우 이깟 일로 흔들릴 줄이야. 사람이란, 참 신기한 동물이다.

"끄으응, 후우····. 나도 물 좀 다오. 머리가 쑤시는군."

기지개를 켜는 네리아. 칸은 조금 전에 자신이 사용한 물컵을 그대로 넘기려다가, 괜히 찝찝해서 주전자를 통째로 건네줬다.

네리아는 주전자를 기울여 물을 마셨다.

턱을 타고 떨어져 옷을 적시는 물줄기. 왠지 모르게 선정적인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칸이 조용히 말문을 열었다.

"사자왕께서 장녀의 명예를 회복하겠다며 내 목에 수배령을 내릴 가능성은?"

"푸하앗-!"

"·····."

촤아악- 네리아의 입에서 튀어나온 물대포가 칸의 얼굴을 적셨다.

네리아는 사레라도 들었는지 물기 섞인 기침을 뱉으며 칸을 올려다봤다.

"끄흑, 푸흐흡! 아아, 근래에 들었던 농담 중에 가장 웃기는 말이었다."

"····농담 아니야."

눈가에 묻어난 눈물을 옷소매로 찍어내며, 네리아는 칸의 말에 답했다.

"그럴 일은 전혀 없다. 아바마마는 내 혼사에서 손을 떼신 지 오래니까. 알폰스의 혼담을 거절한 뒤로 쭉 그랬지."

그렇다면 다행이다. 수배령이 무서운 이유는 별것 없다. 인생이 피곤해진다.

흡혈귀 놈들에게 노려지는 것도 빡센데, 거기에 수인 추격대까지 추가된다?

'그냥 뒤지는 게 편하지.'

이건 이기고 지고의 문제가 아니다. 누군가와 척지면 인생은 피곤해질 테고, 자연스레 개죽음의 위험도 커진다.

"다시 말하지만 딱 하룻밤이었을 뿐이다. 어디 가서 떠들고 다니지 않으면, 남들이 알 수도 없는 불장난."

주전자를 바닥에 내려놓으며 네리아가 칸에게 의미심장한 시선을 던졌다.

"하지만 이 불장난의 불씨가 언제까지 이어질까?"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데."

네리아의 두 눈은 아주 진지했다. 조금 전까지의 장난스러운 분위기가 싹 가셨다.

"내가 어제 말했었지? 나는 나보다 약한 수컷의 구애는 받지 않는다고. 과연 너는 나에게 구애할 자격이 있을까?"

"····난 너에게 구애한 적이 없다만?"

"앞으로 하게 될 거다. 내가 그렇게 만들 거거든."

이 근거 없는 자신감은 대체 뭘까. 칸은 한껏 미간을 구겼다.

하지만 그의 미간이 구겨진 것에는, 네리아의 자신감 외에도 다른 이유가 있었다.

질문의 의도가 너무 뻔했다. 네리아는 지금 칸의 자존심을 살살 긁는 중이다. 얕은 수작에 불과했지만, 낚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쨌거나 너는 충분히 멋있고, 또 매력적인 남자다. 오러를 다루는 재능은 말할 것도 없지. 하지만····."

거기까지 말한 네리아의 입가에 도발적인 미소가 걸렸다.

"내 상대가 되기에는 아직 부족할 것 같군."

"···글쎄, 크고 작은 건 대봐야 아는 거지."

칸은 네리아의 눈을 직시했다. 네리아 또한 지지 않고 그 시선을 똑바로 마주했다.

하나의 침대, 두 명의 남녀. 그리고 서로를 향하는 격렬한 눈빛.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야릇한 착각을 하기에 충분한 광경이다.

하지만 지금 침대 위의 두 남녀는 완전히 다른 이유로 뜨겁게 달아올랐다.

무인(武人). 그래, 두 사람은 천생 무인이다. 서로를 향한 호승심이 눈을 타고 쏟아졌다.

그러던 그때.

"·····."

똑똑─

문 두들기는 소리가 길게 들려왔다. 그 소리를 듣고 나서야 칸은 호승심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어쨌든 다른 사람에게 네리아를 들켜서는 안 된다.

똑똑똑─

재차 들려온 노크 소리. 네리아는 여전히 소리 없이 웃으며 턱짓으로 현관문을 가리켰다.

"일단, 손님부터 맞이해라. 결투라면 언제든지 환영이다."

칸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벨룽은 아침부터 왕성 복도를 거닐었다. 매일 아침에 하는 수련을 막 끝내고 돌아온 참이다.

"벨룽 공. 그···· 이렇게 다짜고짜 찾아가도 되는 겁니까?"

그런 벨룽의 옆에는 어떤 남자 한 명이 함께하고 있었다. 그는 살짝 걱정된다는 표정이다.

"괜찮습니다, 저하. 이미 해가 중천에 뜬 시간입니다. 지금쯤이면 족장 살해자도 일어났을 겁니다."

"그런가요?"

"흐음, 저하께서는 너무 소심하십니다. 그런 성격을 고치지 않으시면 뭘 하시든 간에 앞으로 나아가기 힘드실 겁니다."

"····충고 고맙습니다."

역시나 벨룽은 직설적이다. 2왕자 퓌피르 소르봉은 어색하게 웃으며 말을 받았다. 그 뒤로는 한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괜히 말 걸어봤자 또 일침이나 날아오겠지.'

퓌피르는 벨룽과 자신의 사이가 그리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 대단한 남자는 본인이 선호하는 인물이 아니면, 이렇게 업무 외 시간에 함께 다니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 친분이 대단하냐고 묻는다면, 그건 또 애매했다. 벨룽은 진실로 마음에 든 사람에게는 꽤나 살갑게 대하기로 유명했으니까.

'이 정도 관계는 별것도 아니야.'

딱 무난한 수준이다. 벨룽의 기준에서 벗어난 것은 아니지만, 딱히 인정받지도 못한. 그런 관계라고 보면 된다.

"여기인 것 같은데요?"

"맞습니다. 동쪽 제3별관 객실 201호."

이윽고 두 사람은 칸이 머무는 객실에 도착했다. 똑똑 문을 두들겼지만, 안쪽에서 반응이 없다. 그래서 재차 두들겼다.

끼이익-

두 번째 시도 만에 문이 열렸다. 문틈 사이로 얼굴을 내민 사람은 예상대로 족장 살해자. 그는 살짝 퀭한 눈을 하고 있었다.

"누구십니까?"

"아, 나는···· 퓌피르요."

"퓌피르?"

칸이 고개를 갸웃하던 그때. 문 뒤에 가려져 있던 벨룽이 불쑥 몸을 내밀었다.

"2왕자 저하시네. 예를 갖추는 게 좋을 거야."

"당신은···· 벨룽 공?"

이게 뭔 일인가 싶어서 칸은 미간을 구겼다. 생전 처음 본 2왕자는 뭐고, 또 역전의 벨룽이 여기는 왜 찾아왔단 말인가.

"딱 하루만이군, 후배."

"여기는 어쩐 일이십니까?"

"자네랑 무론(武論)을 논하고 싶어서 찾아왔네. 어제 비무에서 봤던 그 장법이 꽤나 인상적이었거든. 안에 들어가서 얘기나 좀 하자고."

벨룽은 실실 웃음을 흘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볼 수 없었던 미소. 자신과 대화할 때와는 너무나 딴판인 그 태도 때문에, 퓌피르는 속으로 헛웃음을 삼켰다.

'····차별이 좀 심하네.'

퓌피르가 살짝 입술을 삐죽일 무렵. 칸은 난감하다는 듯 뒤통수를 긁적였다.

"죄송합니다만, 제가 오늘은 일정이 있습니다."

"그런가? 으음···· 혹시 실례가 아니라면, 내가 그 일정이 뭔지 좀 알 수 있겠나?"

다행히 벨룽은 막무가내로 안에 들어올 생각은 없어 보였다. 만약 객사 안쪽에서 네리아와 마주치기라도 했다면, 꽤나 난감했을 것이다.

"마탑에 다녀올 생각입니다."

"마탑이라면···· 적색 마탑이겠지? 왕도 근처에 있는 건 거기뿐이니까."

"그렇죠."

"그럼 별문제 없겠군! 나도 같이 갑세, 후배. 가볍게 산책이나 하면서 대화를 나누면 되겠어."

칸의 표정은 미묘했다. 굳이 마탑에 함께 갈 이유가 있나? 대화 한 번 나누자고 왜 그런 귀찮음을 감수하는지 모르겠다.

"어제오늘이 벨룽 공의 휴일이라 그렇소."

그 의문에 대한 대답은 조용히 옆에 서있던 2왕자 퓌피르에게서 나왔다.

"오늘이 지나면 꼬박 일주일을 더 기다려야 하거든."

"그랬군요. 그건 그렇고, 저하께서는 어쩐 일로 저를 찾아오셨습니까?"

"으음, 나는·····."

말끝을 흐리며 우물거리는 2왕자. 이번에는 벨룽이 2왕자를 대신해 말문을 열었다.

"저하께서는 후배의 열렬한 추종자시네."

무슨 서로 대신 대답해주기 챌린지라도 하는 거야? 칸은 미묘하게 변하려던 표정을 감추기 위해 살짝 고개를 숙였다.

"감사한 일이군요."

"그리고 저하의 꿈 중 하나가 젊었을 적의 나처럼 용병 생활을 해보는 것이지. 그래서 조언을 좀 얻고자 자네를 찾아온 걸세."

"·····."

이번에는 칸의 표정이 미묘한 수준을 넘어서 확실하게 구겨졌다.

····이건 또 뭔 뚱딴지같은 소리일까? 2왕자씩이나 되는 사람이 용병질은 왜 하려는 건데?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는다. 세상에는 참 이상한 사람들이 많았다.

"후배, 표정이 왜 그래?"

"아, 이건···· 그냥 숙취 때문입니다."

"숙취?"

"어제 좀 많이 마셨거든요. 숙취가 가시질 않네요."

"저런, 내가 숙취에 좋은 포션을 가져다주지."

"감사합니다."

어쨌거나 일행이 늘게 됐다. 벨룽과 퓌피르는 왔던 길을 다시 돌아갔다. 준비를 마치고서 30분 뒤에 동쪽 성문에서 만나기로 했다.

네리아는 기척을 죽인 채 현관문에서 들려온 대화를 전부 귀에 담고 있었다.

그렇게 불청객 두 명이 모두 떠나간 뒤에는 그녀도 남몰래 방을 떠났다.

"그럼 30분 뒤에 보자고."

창문으로 도망치는 네리아의 뒷모습은 꼭 도둑고양이를 보는 듯했다. 객실의 높이는 2층. 네리아 정도의 고수에게는 별로 높은 층수도 아니다.

"·····."

문득 침대가 눈에 들어왔다. 침대 위에 피어난 붉은색 꽃 한 송이. 간밤의 흔적을 잠시간 노려보다가 칸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일단 대충이나마 씻자. 몸에서 나는 술 냄새가 상당히 역겨웠다.

***

준비를 마치고 밖으로 나왔을 때, 어느새 말끔하게 머리를 정리한 네리아가 왕성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나보다 늦었군."

여자들. 특히나 귀족 여성은 준비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기로 유명했지만, 네리아는 좀 다른가 보다. 그렇다고 행색이 후줄근해 보이지는 않았다.

"히이이이! 히히힝-!"

갑작스러운 말 울음소리에 칸은 고개를 살짝 틀었다. 네리아가 고삐를 쥐고 있는 명마. 푸른색 갈기가 인상적인 에딘스버러 혈통.

한때는 칸에게 절반의 소유권이 있었던 폭풍급 군마가 반갑게 고개를 주억였다. 이름까지 기억난다.

"돌망. 날 알아보는 거냐?"

"히이이잉-!"

확실히 명마는 명마다. 엄청 똑똑했다. 칸이 돌망의 머리를 살살 쓸어내리던 그때. 옆에서 불편한 울음이 들려왔다.

"크르르르르····."

코코였다. 녀석은 굵직한 꼬리를 휘둘러 돌망과 칸 사이를 가로막았다. 돌망은 별꼴이라는 듯 투레질을 한 번 하고서 고개를 휙 돌렸다.

"질투하지 마, 코코."

"꾸으응."

"그냥 잠깐 말만 걸었을 뿐이잖아."

칸과 코코의 만담을 지켜보며 네리아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못 본 사이에 저 백색 드라코는 부쩍 자라 있었다. 이제는 위엄마저 느껴진다.

"멋있군."

그렇게 짧은 감상을 뱉고서 네리아는 코코를 향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코코는 그 손길을 회피했다.

마치 나는 너의 말처럼 줏대 없는 드라코가 아니라고 말하는 듯했다.

"음음, 그래. 기품에 어울리는 성깔이야."

네리아는 오히려 그게 마음에 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보며 칸은 헛웃음을 흘렸다. 잘 생겼으면 성질이 까탈스러워도 괜찮다는 걸까?

"칸. 할 말이 있다."

"무슨 할 말?"

"내가 오는 길에 사용인들의 말을 살짝 엿들었는데····."

말끝을 흐리는 네리아. 칸은 무의식적으로 그녀의 머리를 올려다봤다. 어제와는 달리, 거대한 모자가 그녀의 정수리를 꼭꼭 갖추고 있었다.

"아무래도 소문이 좀 퍼질 것 같다."

"소문?"

"청소하는 사용인들이 내 얘기를 떠들고 있더군. 너와 내가 한 방으로 들어가는 걸 봤다는 식으로."

"·····."

"하지만 뭐, 별일은 없을 거다."

"····별일이 있을 것 같은데?"

네리아는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고는 한쪽 입가를 슬쩍 비틀었다.

"소문이 퍼지면 뭐 어때? 이미 밀가루가 익어서 빵이 됐구만."

칸은 손으로 이마를 찰싹! 짚으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주인의 어지러운 마음을 읽었는지 코코가 어깨에 콧등을 문질러 왔다.

하지만 별 위로는 되지 않았다. 뭐, 이제는 그냥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다.

네리아의 말이 사실이라면, 사자왕의 추격대에게 쫓길 일도 없을 테니까.

"너는 나보다 강해지기만 하면 돼. 그러면 모든 것을 얻을 수 있을 거다."

"어련하시겠어."

그렇게 얼마간 걸음을 옮겼을까. 두 사람은 동쪽 성문에 도착했다. 벨룽과 퓌피르는 이미 나와서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칸이 앞으로 나서며 기다리게 하여 죄송하다는 사과를 입에 담으려던 그때. 눈매를 얇게 여민 네리아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벨룽 아재."

"응? 네메토리아 전하? 전하께서도 함께 가시는 겁니까?"

그러고 보니, 아까는 경황이 없어서 제대로 말하지 못했다.

칸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와중에도 네리아는 날선 목소리로 벨룽을 쏘아부쳤다.

"내가 만나자고 할 때는 바쁘다며 이런저런 핑계나 대더니, 지금은 잘도 나오셨군. 어찌 사람이 그런 식이오?"

"허허, 전하. 원래 사람은 마음이 동해야 만나는 법입니다."

네리아는 눈을 더 날카롭게 하고서 벨룽을 노려봤다. 그리고 벨룽은 가소롭다는 듯 입가에 미소를 그렸다. 얼굴에 철판이라도 깐 듯했다.

"····치잇. 쩨쩨하게 굴지 마쇼, 아재. 용사냥 경험 좀 들려달라는 게 뭐 그리 어려운 일이라고."

"용살가를 들으십쇼. 제 경험은 그 노래에 전부 담겨 있으니."

"헛소리."

용살가는 그저 듣기 좋은 노래에 불과했다.

거기 적힌 내용은 적당히 각색된 찬양일 뿐, 벨룽이 어떤 식으로 용을 잡았는지는 자세히 적혀있지 않았다.

히이이히힝-!

"흥! 계속 그렇게 나오면 앞으로 재미없을 거요."

네리아는 말을 몰아서 먼저 성문 아래를 지나쳤다. 그 와중에 가만히 대화를 듣고만 있던 퓌피르는 속으로 생각했다.

'····누님. 저에게는 인사마저 건네지 않으시는군요.'

살갑지 않은 벨룽의 태도도 서러웠지만, 네리아의 무시 또한 서럽기는 매한가지. 뒤편에 서있던 칸이 퓌피르에게 말했다.

"가시지요, 저하."

"아, 칸. 고맙소."

뭐가 고맙다는 걸까. 신경써 줘서 고맙다는 건가? 칸은 천천히 코코를 몰면서 퓌피르의 근골을 살펴봤다.

'상당히 단련된 몸이야.'

고급스러운 비단에 가려져 있지만, 안쪽에 자리잡은 근육은 겉옷을 뚫고서 존재감을 과시했다.

아마 따로 소르봉 왕가의 오러 연공법을 익혔을 것이다.

'소르봉의 비전 기술이 뭐였지?'

언제 한 번 들은 적이 있는 것 같은데, 딱 바로 떠오르질 않는다. 그러던 그때, 칸의 생각이 뚝 끊어졌다.

"내가 왜 네메토리아 전하께 용사냥 경험을 전하지 않는 줄 아나?"

뜬금없이 날아든 벨룽의 질문. 칸은 고개를 저었다.

"전하의 실력이 부족하기 때문이야. 저 실력으로 용을 사냥하러 가잖아? 그럼 십중팔구 개죽음이야. 뛰어난 고수이신 건 맞지만, 아직은 부족해."

뜻은 잘 알겠다. 그러니까, 네리아가 위험해질까 봐 일부러 정보를 주지 않는다는 뜻인 것 같다. 하지만 그게 옳은 선택인지는 모르겠다.

벨룽이 정보를 전해주지 않더라도 네리아는 용사냥에 나설 것 같았다. 아니, 분명 그러겠지. 그녀의 성격은 아주 저돌적이고, 불꽃처럼 화끈했다.

"그건 그렇고, 자네는 네메리 전하처럼 까다로운 분과 어쩌다 어울리게 된 건가? 어제 연회장에서도 같이 술잔을 기울이더만."

"뭐···· 그냥 우연찮게 그리됐습니다."

벨룽이 고개를 갸웃했다.

"우연? 대체 어떤 우연이 있어야 라이오넬 왕가의 장녀와 친분을 쌓을 수 있는 거지? 거참, 신기하군."

그러게나 말이다. 네리아뿐만이 아니라, 벨룽과 퓌피르까지. 어쩌다가 이런 높으신 분들과 어울리게 된 건지 칸 스스로도 도통 모르겠다.

여러모로 혼란스러운 아침. 숙취로 어지러운 머리를 부여잡고서 칸은 코코의 안장에 궁둥이를 붙였다.

일단 출발하자, 마탑으로.

***

왕도 리네폴리스에서 적색 마탑까지는 그리 멀지 않다.

말 타고 한나절이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 칸 일행도 잘 닦인 도로를 따라서 무난하게 나아갔다.

그렇게 마탑에 도착했을 무렵. 일행은 뜻밖의 상황을 마주했다.

"····티미?"

마탑에서 일을 보고 있다던 네리아의 수행 마법사가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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