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병으로 살다-124화 (124/216)

◈ 124화

사람들은 말한다. 5년 전의 로젤린과 지금의 로젤린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고.

그건 틀린 말이 아니다. 로젤린은 용사냥에서의 일을 치욕으로 여겼으며, 그녀와 대적했던 네메토리아 왕세녀의 용사냥 원정대를 극도로 혐오했다.

오죽했으면 왼팔에 의수를 달자마자 용사냥 원정대를 잡아 족치려 했을까. 하지만 로젤린의 복수는 지금껏 단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었다.

'쥐새끼 같은 놈들.'

네메토리아 왕세녀의 비호 속에 아발론 왕국으로 숨어든 놈도 있고, 청색 마탑의 손이 미치지 않는 곳으로 멀리 벗어난 놈도 존재했다.

로젤린의 복수를 의식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어쩌다 보니 우연히 활동 영역이 겹치지 않은 것인지. 그건 아무도 모른다.

애초에 로젤린의 의수가 완성되기까지 1년이 걸렸다. 1년이면 용사냥 원정대에 참여했던 용병들이 제각기 흩어지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이루지 못한 복수 때문에 애석해하지는 말자. 그래도 지금 이렇게 기회가 찾아왔으니까.

'체스카의 칸.'

로젤린의 독기는 지난 5년에 걸쳐 지독하게 숙성됐다. 이제 그 독기가 온전히 칸에게로 투사되기 시작했다.

'지금부터 시작이야.'

체스카의 칸을 시작으로 용사냥 원정대 전부를 벌할 것이고, 그 끝에는 아발론 왕국의 왕세녀가 존재할 것이다.

심장이 뛴다. 독기로 가득했던 차가운 심장이 간만에 열기를 내뿜기 시작했다.

환희, 흥분, 희열. 아무렇게나 불러도 좋을 뜨거운 것들이 로젤린을 덮쳤다.

복수의 시간이다.

***

패잔병을 수습한 보르달로스는 군대를 트랑켄슈타인 인근으로 인솔했다. 그리고 그 꽁무니를 청색 마탑의 지원군이 따랐다.

하지만 숙영지는 따로 꾸렸다. 청색 마탑을 상징하는 '파도 문양' 깃발은 보르달로스와 섞이기 싫다는 듯 멀찍이 떨어진 곳에 세워졌다.

그렇게 밤이 찾아왔다. 하지만 마탑주 로젤린의 막사 안은 여전히 불빛으로 번들거렸다.

"우선은 그 남자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파악해야만 하오."

어떤 남자가 정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사용하고 있는 막사에는 방음 마법이 각인돼 있다. 바깥으로 소리가 새어 나갈 일은 없었다.

"지금 설마 내가 당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로젤린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남자를 바라봤다. 곱게 휘어진 입꼬리. 하지만 그녀의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진정하시오, 청골(靑骨). 설마 청색 마탑의 호법인 내가 그대를 모욕하려고 이런 말을 했겠소? 다 걱정돼서 하는 말이오."

"그런 걱정조차 나에게는 모욕이야."

로젤린의 앞에 서있는 남자는 꼭 산속 교회에 처박혀 평생 기도나 올리며 살 것 같은 외양이었다. 꺼슬꺼슬한 까까머리가 인상적이다.

"왜, 혹시 선지자에게 닿는 끈을 놓치게 될까 봐 무서워? 내가 죽으면 전부 끝이니까?"

"····부정하지는 않겠소. 모든 소리꾼의 소망은 결국 선지자에 포함되는 것이니."

청색마탑의 호법 데카르트. 그는 4명의 호법 중 가장 오래된 사람이다. 로젤린이 마탑주가 되기 훨씬 전부터 선지자를 섬겨왔다.

"데카르트. 이럴 것 같으면 그냥 당신이 탑주를 하지 그래? 왜 선대께서 나에게 청골 자리를 물려주는 걸 가만히 지켜만 봤는지 모르겠네."

청골(靑骨). 푸른색 뼈.

선지자 내부에는 여러 개의 '색깔'이 존재하고, 그 색깔은 '뼈'의 형태를 취한 채 대대로 계승된다. 저들끼리 사용하는 일종의 별칭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그저 나만의 색깔을 원했을 뿐이오. 청색이 아닌 나만의 색깔."

데카르트의 대답에 로젤린은 푸훗- 웃음을 흘렸다.

아아, 이 미련한 남자를 어찌할꼬. 저런 헛된 꿈이나 품고 있으니까, 빛나는 재능에도 겨우 호법에 머무는 것이다.

"다시 말해줄게. 꿈에서 깨어나, 데카르트."

"······."

"당신의 재능이 빛나는 건 사실이지만, 색깔을 이룰 정도로 대단하지는 않아. 이제 알 때도 됐잖아?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으면서 왜 그래?"

그야말로 촌철살인. 로젤린의 혓바닥이 데카르트를 짓밟았다. 옛날의 로젤린은 이 정도로 표독스럽지는 않았다.

'물론, 5년 전에도 그리 친절한 편은 아니었지.'

하지만 지금은 아예 표독스러움 그 자체였다. 왼팔을 잃은 뒤로 성격이 아주 고약해졌다는 세간의 평은 결코 거짓이 아니다.

"더 빛바래기 전에 숙이고 들어가. 그러면 내가 자리 하나쯤은 마련해 줄게."

"·····고민해 보겠소."

"고민? 하! 그래, 좋아. 하지만 내 인내심은 그리 질기지 않다는 것만 알아둬."

알지, 아주 잘 안다. 로젤린의 얄팍한 인내심을 데카르트가 모를 리가 없다. 그는 머리를 벅벅 긁고서는 다른 말을 입에 올렸다.

"어쨌거나 그 문제는 이쯤에서 각설하고, 강경파 난쟁이들과는 언제까지 어울릴 생각이시오?"

반 불랑국 동맹. 개중에서 강경파.

무식하게 드워프 혁명을 외치는 강경파에게 지원을 아끼지 않는 이유는 별것 없다.

이놈들이 분탕을 치면 칠수록 대륙 북부가 혼란해지기 때문이다.

"당분간은 어쩔 수 없어. 이 상태를 계속 유지할 생각이야. 선지자 회의에서 결정된 방침이잖아."

로젤린은 손가락으로 책상을 톡톡 두들기며 작금의 상황을 반추했다.

북부를 혼란케 함으로써 선지자가 얻을 수 있는 이점. 그건 크게 두 가지였다.

'첫째로, 반 불랑국 동맹이 하나로 뭉치는 것을 방지할 수 있지.'

대륙 북부가 단일 세력화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 어느 한쪽이 득세하여 하나로 뭉치게 되면, 남쪽의 불랑국 군대에게 부담이 될 것이다.

'그리고 둘째는 명분.'

강경파 놈들의 무차별적인 인간 학살. 그건 일종의 보복 행위였다. 불랑국 국왕령에서 드워프를 학살한 것에 대한 반발인 셈이다.

'하지만 누가 먼저 시작했느냐는 이제 별로 중요한 문제도 아니게 됐어.'

전부 선지자의 뒷공작이 반영된 결과였다.

이렇게 의도된 놀이판 속에서 불랑국 국왕령은 북부를 침공했고, 그 명분으로 강경파 드워프의 '인간 학살'을 내세웠다.

먼저 드워프를 학살했던 불랑국에서 역으로 저런 명분을 들고 오다니. 참으로 우스운 일이다. 촌극도 이런 촌극이 따로 없다.

어쨌거나 불랑국의 알폰스 국왕이 내세운 논리는 이러했다.

─봐라, 저 드워프 놈들이 인간을 죽이고 있지 않느냐. 저놈들은 원래 저런 놈들이다. 죽어도 싼 놈들이다.

─우리 불랑국이 나서서 악독한 드워프들을 척살하고, 북부의 불쌍한 인간들을 구원해야 한다.

대충 그런 식의 선동이 알폰스 국왕의 주도로 이뤄졌다.

분명히 선지자의 뜻이 반영된 정세. 하지만 그럼에도 로젤린은 이게 참 뭣 같은 상황이라고 생각했다.

'귀에 붙이면 귀걸이. 코에 붙이면 코걸이. 웃기지도 않아, 정말이지.'

이러나 저러나 선지자 회의에서 결정된 방침을 대놓고 무시할 생각은 없다.

독단적으로 움직이는 것도 가능은 하겠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어쨌든."

생각을 끊어낸 로젤린이 다시 말문을 열었다.

"강경파를 버릴 시기는 내가 정해. 알폰스의 군대가 올라오면, 적당히 져주는 척하면서 물러나면 될 거야."

"알겠소이다."

호법 데카르트는 더 이상 왈가왈부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불랑국의 경로와 진군 속도는 내 계속 살피도록 하겠소."

"그래. 하던 대로만 해, 데카르트."

그렇게 밤이 깊어 갔다.

***

트랑켄슈타인의 중앙 시청.

"그럼 오늘은 이쯤에서 마치도록 하지. 다들 고생하셨소."

시장 집무실에서 시작된 내부회의는 늦은 밤이 돼서야 끝났다. 다시 등장한 강경파 때문에 다들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전처럼 분위기가 나쁘지는 않았다.

불과 2주 전까지만 해도 함락 직전까지 몰렸던 트랑켄슈타인이지만, 지금은 체스카의 칸이 함께하고 있으니까.

"칸 공이 우리 곁에 있어서 참으로 다행이오."

함께 복도를 걷던 경비대장 테르포차가 밝은 얼굴로 말문을 열었다. 얼굴이 밝지 않을 수가 없다.

칸은 존재 자체만으로도 군대의 사기를 높이는 위인. 게다가 2주에 걸쳐 증명한 그의 기량은 상상 그 이상이었다.

"나에게만 너무 의지하지는 마시오."

칸은 웃음을 흘리면서도 경고 섞인 대답을 내놓았다.

"천년만년 이 도시에 머물 생각은 없으니까. 때가 되면 다시 여정을 시작해야 하오."

"뭐····· 마음 같아서는 계속 붙잡아 두고 싶소만. 그건 내 욕심이겠지."

테르포차는 아쉽다는 듯 쩝쩝 입맛을 다셨다. 하지만 그도 알고 있다.

도시의 안위는 원래 스스로 챙겨야 한다. 너무 외부인에게만 의지해서는 안 된다.

"떠나기 전에 미리 말씀이라도 남겨주시구랴."

"그럴 거요. 애초에 이번 건이 끝나기 전에는 떠나지 않을 테니, 벌써부터 걱정할 필요는 없소."

"허허, 듣던 중 반가운 소리로군."

그렇게 테르포차와 헤어진 칸은 객사로 돌아왔다. 창문으로 쏟아지는 달빛을 맞으며 그는 책상 앞에 앉았다.

"·····."

칸의 손에 쥐어진 것은 작달막한 상자. 상당히 견고해 보이는 녀석이다. 그 쓰임새는 소형 금고였다.

딸칵-

열쇠를 집어넣자 귀여운 소음과 함께 금고가 입을 벌렸다.

그 속에서 칸이 꺼내 든 것은 한 권의 서책. 예전에 얻었던 정보를 기록해 둔 책자였다.

그러니까, 선지자를 위해 일하던 민둥수염을 고문해 얻어낸 정보.

그 녀석은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놈에게서 캐낸 정보는 이렇게 기록으로 남아있다.

대체로 선지자 혹은 소리꾼의 매사냥 사업에 가담한 고객과 관련된 정보들이다. 책을 펼쳐 든 칸은 호롱불에 의지해 그 내용을 살폈다.

"여기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고객은····· 침착한 뤼벤."

몇 번이고 읽어 봤기에 원하는 내용을 찾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북부에도 매사냥을 이용하는 사람은 존재했다.

침착한 뤼벤. 그는 루페텐의 시장이다.

루페텐은 고대 앙그마르 제국의 3대 수도 중 하나로, 드워프들의 자부심이 서린 도시다. 지하도시 몰도룸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이놈을 족치면 추가적으로 뭐가 좀 나오려나?"

흡혈귀의 어머니를 쫓자면, 필연적으로 매사냥과 엮일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자연스레 선지자와 대립하게 될 터. 더는 복잡한 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현실은 칸의 바람과 영 달랐다.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어."

칸은 용사냥 원정대에서 청색 마탑과 진즉에 대립각을 세웠다.

청색 마탑이 선지자의 일원이라는 추측이 사실이라면, 대립은 5년 전부터 시작된 셈이다.

어쨌거나 다음 목표는 '침착한 뤼벤'. 운이 좋게도 상황이 꼬일 일은 없을 듯했다.

강경파를 이끄는 수장 중 한 명이 뤼벤이라고 하더라.

"지금처럼 온건파의 손을 들어주면 되겠어."

온건파를 돕는다는 명분으로 아주 자연스럽게 뤼벤을 족치면 된다. 만약 뤼벤이 온건파의 인물이었다면, 그림이 좀 이상했을 것이다.

온건파 사람들에게 영웅 취급을 받는 작자가 갑자기 검을 거꾸로 잡는 모양새가 됐겠지. 아마 평판이 꽤나 깎이지 않았을까?

터억-!

칸은 책자를 소리 나게 덮었다. 그러고는 다시 금고 안에 넣고서 열쇠로 잠갔다. 창밖을 내다봤더니 하늘은 여전히 까맣기만 했다.

원래는 저녁 훈련을 끝내고 진즉에 취침했을 시간. 내부회의가 생각보다 많이 길어져서 오늘은 훈련도 제대로 못 했다.

'내일 일어나자마자 연무장에 가서 몸을 풀어야겠어.'

그렇게 생각하며 칸은 곧바로 침대 위에 누웠다.

내부 회의에서 칸이 한 것은 남들의 말에 맞장구를 쳐주고, 적당히 조언이나 하는 게 전부였다. 적극적인 의견 개진은 없었다.

따지고 보면 그저 수다 좀 떤 것에 불과했다.

하지만 장기간의 회의는 심력을 착실하게 갉아먹는 법. 칸에게는 차라리 몸을 굴리는 쪽이 덜 피곤했다.

그렇게 몇 시간이 흘렀다.

아직은 약간 이른 새벽. 어둠이 서서히 밀려나기 시작했고, 창가로 스며든 햇빛에 칸은 습관적으로 눈을 떴다.

세수를 마치고 찾아간 연무장은 조용하기만 했다.

"역시 오늘도 왔네요?"

아니, 정정하자. 완전히 조용하지는 않았다. 차가운 새벽 공기를 뚫고서 어떤 목소리가 칸의 고막을 때렸다.

"이런 부지런함이 당신 실력의 원천인가요?"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 마음대로 생각하시오."

칸은 적당히 대꾸하며 연무장 한가운데로 향했다. 지금 칸에게 말을 거는 사람은 갓 성인이 됐을 법한 여자였다.

"대답이 참 성의가 없네요, 성의가."

"새벽부터 까불지 말고 그냥 가시오."

"까불다뇨?"

"조잘조잘 떠들고 싶지 않다는 말이오. 훈련에만 집중하고 싶소."

칸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굳이 거친 말로 번역하자면, 방해하지 말고 좀 꺼져라 쯤이 되겠지. 아직까지는 칸이 참고 있는 중이다.

"너무 매정한 거 아니에요? 내가 싫어요?"

"싫소."

"으에, 너무해."

장난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 칸은 진짜로 이 여자가 싫었다.

"뭐, 사실 나도 딱히 그쪽이 마음에 들지는 않아요. 매번 내 기회를 가로채기만 하고."

"개소리는 그쯤하고 빨리 나가기나 하시오."

기회를 가로챘다는 게 대체 뭔 소린지 모르겠다. 칸은 고개를 살살 젓고서 출구를 가리켰다.

이렇게 성가신 사람은 처음부터 단호하게 대처해야 한다.

"저기요, 자칭 체스카의 칸 님. 내가 왜 싫어요?"

여자의 물음에 칸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렸다. 이 여자의 이름은 메리 그루미라. 통성명은 지난 며칠 사이에 이미 끝냈다.

트랑켄슈타인에 처음 도착했던 그날. 괴상한 나무를 소환해 성곽을 방어했던 게 바로 이 여자였다.

그날의 전투 이후로 메리는 모두에게 환영받았다.

특히나 시청 사람들이 기뻐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녀 같은 실력자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으니까. 누가 보더라도 그녀의 재주는 평범하지 않았다.

'덕분에 이 여자도 시청과 직계로 계약을 맺었지.'

보통은 경비대와 용병 계약을 맺고, 그 지휘체계 밑으로 편입되는 게 정석이다.

하지만 시청에서는 몇몇 뛰어난 사람을 대상으로 따로 직계 계약을 체결했다.

직계 용병들에게는 개별적인 행동권이 보장된다. 그리고 지금 이 도시에서 직계 용병으로 분류되는 사람은 딱 3명. 칸과 메리 부녀뿐이었다.

"네? 나를 싫어하는 이유가 뭐냐니까요?

그럼에도 칸이 메리를 꺼림칙하게 여기는 이유는 그녀의 출신 때문이다. 메리는 스스로를 '녹색 마탑'의 마법사라고 칭했다.

"마법사니까."

"뭐라고요?"

"나는 마탑 소속의 마법사를 싫어하오. 단지 그뿐이오."

이미 칸의 머릿속에는 하나의 공식이 성립돼 있었다.

'마탑=선지자'라는 공식. 물론, 마탑에 적을 둔 모든 마법사가 선지자와 연관돼 있지는 않을 것이다.

'탑주, 호법, 장로. 대충 그런 윗대가리 놈들이나 선지자와 엮여 있겠지.'

애초에 선지자는 비밀스러운 단체다. 뒤에 숨어서 대륙을 조종하겠다는 놈들이 대놓고 활동할 리가 없지 않은가. 하위 마법사들은 그 존재조차 모를 것이다.

'모든 마법사를 경계할 필요는 없어.'

하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메리는 경계할 필요가 있다.

마탑은 그 어느 곳보다 실력이 우선시되는 곳들이고, 지난 며칠간 파악한 메리의 실력은 나이에 비해 너무 뛰어났다.

'마탑에서 한자리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아.'

그리고 마탑에서 한자리하고 있다는 것은, 어쩌면 메리가 선지자와 연관돼 있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물론, 이 모든 것은 확인되지 않은 의심에 불과했다.

하지만 일말의 의문조차 가볍게 넘겨서는 안 된다. 그런 불확실성을 간과하면서까지 메리와 가까이 지낼 필요는 없다.

메리가 허리춤에 손을 얹으며 목소리를 높인 것은 그때였다.

"아니, 그게 말이 돼요? 옛날에 마법사한테 뺨이라도 맞으셨나? 그냥 마법사라서 싫다고요?"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댁이 마탑 소속의 마법사라서 싫은 거요."

"그게 그거 아닌가요? 그리고 엄밀히 말하면 나는 마법사가 아니라, 마법 무투가예요."

마법 무투가. 녹색 마탑과 갈색 마탑, 그리고 금색 마탑 출신의 마법사들이 본인들을 소개하는 호칭 중 하나였다.

그치들이 다루는 속성은 각각 나무[木], 땅[土], 금속[金]이다.

전부 직접적인 전투에 어울리는 속성들인지라, 치고받는 쪽으로도 마법이 발전했다고 들었다.

어쨌거나 이 마법 무투가께서 계속 이쪽에 들러붙는 이유는 뭘까? 뭔 꿍꿍이라도 있는 걸까?

"왜 자꾸 나한테 들러붙는 거요?"

그걸 알아보고자 칸은 직설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빙빙 돌리면서 간을 볼 필요는 없다고 판단했다.

"그냥 뭣 좀 확인해 보고 싶어서 그래요."

"뭘?"

"다들 당신이 체스카의 칸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는데, 나는 아직 확신이 서질 않거든요."

칸은 가소롭다는 듯 피식 웃음을 흘렸다. 살짝 휘어진 눈매도 칸의 감정을 여실히 반영하고 있었다.

"건방지군. 그쪽이 뭐라고 그런 걸 의심하지? 그리고 내 정체를 확인할 방법은 있소?"

"물론이죠. 그러니까, 나랑 한 판 붙어봐요."

칸은 물끄러미 메리를 바라봤다. 정체를 확인할 방법이···· 있다고? 이건 좀 궁금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서로 얼굴조차 모르던 인간이 이런 소리를 지껄일 줄이야.

'그리고 진짜로 내 상대가 될 거라고 생각하나?'

솔직히 한 판 붙자고 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지난 2주 동안 칸이 보여준 활약은 그야말로 압도적이었다. 메리도 열심히 활동하기는 했지만, 칸에 비하면 새 발의 피다.

누가 봐도 메리는 칸의 상대가 아니다. 그런 객관적인 실력 차이를 메리 본인이라고 하여 모르지 않을 터.

"설마 쫄리세요? 그 천하의 칸이?"

그럼에도 이렇게 까불고 앉아있다.

같잖은 도발. 입술을 비틀며 말하는 꼬락서니가 아주 잔망스럽다. 나름대로 한 방 먹였다고 생각하는 얼굴이다.

하지만 경험 많은 칸에게는 영 맥아리 없는 도발에 불과했다. 이건 뭐 거의 어린애 장난 수준이다.

'그래도 잠깐 어울려 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이 여자의 꿍꿍이가 뭔지, 질 게 뻔한 대련을 벌여서 알고자 하는 게 무엇인지. 알아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뭐, 좋아. 한 판 붙어주도록 하겠소."

아침 몸풀기 정도로는 충분한 상대였다. 겸사겸사 궁금증도 풀 수 있겠지. 하지만 그 전에 돌려줘야 할 게 있다.

"그런데 마법 무투가라고 했소?"

"네, 우리 녹색 마탑의 마법은 대대로·····"

"참 우습지도 않군. 마법의 힘을 빌린 무투는 가짜에 불과하오."

"뭐, 뭐라고요?"

"그 조잡한 마법에 거창하게 무투라는 말을 붙이지 마시오. 그건 진짜들을 향한 모욕이니."

"이런 썅·····."

진짜 도발은 이렇게 하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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