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7화
칸은 창가에 놓인 화분을 은근슬쩍 바라봤다.
딱 성인 여성 크기의 나무가 심겨 있는 화분. 그 나무의 이파리가 부들부들 떨리는 중이다.
얼핏 보면 바람에 흔들리는 것처럼 보였지만, 칸은 저 안에 로젤린이 있음을 알고 있다. 물론, 데카르트는 모른다.
"우리 마탑의 입장이 변치 않을 거요. 로젤린의 몸값을 지불할 일은 없소."
그렇기에 저런 말을 서슴없이 하는 것이겠지. 만약 로젤린의 면전에서도 저럴 수 있다면, 진짜 철면피인 것이고.
약간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겨우 몇 초였을 뿐이다.
'누구를 탓하겠어? 전부 본인이 쌓은 업보인 것을.'
솔직히 말해서 통쾌했다. 칸 입장에서는 로젤린을 좋게 볼 여지가 없었다. 두 사람은 악연으로 맺어진 관계였으니까.
그녀가 선지자의 일원이라는 것, 용사냥에서 마주쳤던 것, 대장전에서 싸웠던 것, 그 외 등등.
하나같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투성이다. 게다가 로젤린은 네리아에게 복수하겠다며 공공연하게 떠들고 다니는 여자.
'좋게 볼 여지가 없어.'
바로 며칠 전에 로젤린은 그 복수의 일환으로 칸을 죽이려 했었다. 말로만 복수를 떠드는 여자가 아니다.
'일부러 나 때문에 트랑켄슈타인까지 행차까지 했지.'
한다면 하는 여자. 독기로 똘똘 뭉친 악녀.
그냥 둬서는 안 된다. 어떤 식으로든 로젤린과 끝을 봐야 한다. 완전히 굴종시키든, 아예 죽여 버리든.
'일단 멘탈부터 박살 내놓자고.'
로젤린을 어떻게 할지는 아직 결정하지 않았다. 그녀가 어떻게 나오느냐에 따라 방향이 달라지겠지.
확실한 것은 딱 하나. 어떻게 해서든 로젤린에게서 정보를 뜯어낼 심산이라는 것이다.
"그럼 신임 탑주는 누가 되는 거요?"
칸은 일부러 그런 질문을 던졌다. 로젤린의 멘탈을 흔들기 위해서. 하지만 개인적으로 궁금한 부분이기도 했다.
"탑주는 아직 공석이오. 호법 중에 가장 강력한 사람을 뽑아서 올리기로 했소."
"당연히 그쪽도 탑주 자리에 도전하겠군."
데카르트는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오. 후회하는 한 번이면 족하니까."
뒷말은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다. 대체 뭘 후회했다는 걸까?
화분 위의 나무가 또 한 번 일렁인 것을 보면, 로젤린은 저 말의 의미를 알고 있는 듯했다. 나중에 물어보자.
"그럼 여기서 두 번째 질문."
"·····이 자리는 청문회가 아니오. 당신이 입은 피해에 대한 보상을 책정하는 자리일 뿐이외다."
데카르트가 불쾌하다는 듯 미간을 구겼다. 하지만 칸은 무시한 채 계속 제 할 말을 이어갔다.
"로젤린의 몸값을 지불하지 않는 이유가 뭐요?"
"다시 말하오만, 여기는 청문회가 아니─"
"몸값을 지불하고 데려간 다음에 확실하게 명줄을 끊어야 하지 않겠소?"
"·····."
칸의 거듭된 질문에 데카르트는 입술을 다물었다. 잠시간 생각하던 그는 이내 찻잔을 들며 말문을 열었다.
"굳이 죽일 필요가 없소. 이미 로젤린에 대한 대책은 마련해 둔 상태니까."
"대책?"
"그 대책이 뭔지는 말해줄 수 없소. 어쨌거나 로젤린이 다시 마탑에 돌아온다고 하여 상황이 달라질 일은 없을 거요."
입술로 찻잔을 가져가던 데카르트는 잠시 멈칫했다. 설마 여기에 독을 타지는 않았겠지?
그는 품에서 은침을 꺼내 찻잔 안에 담갔다. 다행히도 은침의 색이 변하는 일은 없었다. 그 모습에 칸이 피식 웃었다.
"댁이 아무리 고까워도 사절에게 독을 쓸 정도로 내가 무도하지는 않소."
"훌륭한 인품이오."
데카르트는 찻잔을 호로록 들이켜 입술을 축였다.
"하던 말을 계속하자면··· 나는 오히려 로젤린이 마탑으로 다시 찾아와 주기를 바라고 있소."
"흐음, 그건 좀 의외로군."
칸의 예상과 전혀 달랐다. 데카르트는 로젤린을 어떻게 이용할지 나름대로 정해 놓은 듯했다.
"대부분의 청색 마법사가 순간적인 분위기에 휩쓸려 로젤린의 탄핵에 동의했소만, 아직 숨어서 로젤린을 지지하는 놈들이 있을 거요."
찻잔을 내려놓는 데카르트의 눈빛이 의미심장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쥐새끼처럼 숨어서 마탑의 행사를 방해하겠지. 그놈들을 색출하기 위해서라도 로젤린은 아직 필요하오. 로젤린이 뭔 일을 꾸미면 알아서들 호응하려 할 테니까. 그리고····."
데카르트는 찻잔의 표면을 만지작거리며 말끝을 흐렸다. 그리고 칸은 데카르트의 묘한 열기를 느꼈다.
"신임 탑주가 될 사람은 로젤린을 꺾음으로써 정당성과 실력을 증명하게 될 거요."
"권위를 쌓기 위한 재료로 로젤린을 사용하겠다?"
"말하자면 그런 셈이지."
로젤린은 당대 최고의 청색 마법사. 그런 사람을 무슨 수로 어떻게 상대한다는 건지 모르겠다.
지금 눈앞에 있는 데카르트도 분명 뛰어난 마법사인 것은 맞지만, 로젤린과 비교하면 영 별로였다.
이 또한 마탑 특유의 오만함인가? 아니면 진짜로 확실한 준비가 돼 있는 걸까?
'어쩌면 둘 다일 수도 있겠지.'
그래도 의문점은 어느 정도 해결됐다. 칸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편안하게 앉았다.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며 데카르트의 뒤편에 있는 화분을 바라봤다. 이제는 티가 날 정도로 지나치게 흔들리는 모습.
이 자리를 길게 끌면 안 될 것 같다. 재수가 없으면 들킬 수도 있겠다. 그러던 그때, 재밌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런데 말이오."
칸은 탁자 위에 놓인 과자 하나를 집어 들며 개구쟁이 같은 미소를 흘렸다.
"만약 내가 로젤린을 죽인다면 어쩔 거요? 댁이 이용하기 전에 말이오."
와작-!
그렇게 질문을 던지고서 칸은 과자를 씹었다. 달콤함이 혓바닥을 타고 전해졌다.
와그작-!
일부러 소리를 내어 과자를 씹었다.
반죽처럼 물컹하게 변한 과자가 목구멍 너머로 사라질 때까지 데카르트는 입을 열지 않았다.
"내 손에 로젤린이 죽는다면 댁네 마탑의 계획이 전부 틀어지는 거 아니오?"
결국 이번에도 먼저 입을 연 쪽은 칸. 그제야 미지근하게 식은 찻잔을 앞으로 밀어내며 데카르트가 말했다.
"그 또한 상관없겠지. 고귀한 포로를 죽였다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싶다면 그렇게 하시오. 나는 아무래도 상관없소."
나름 회심의 일격이랍시고 질문을 던진 것이었는데, 데카르트의 반응은 영 심심했다.
"오늘은 이쯤에서 끝냅시다."
칸은 입맛을 다시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데카르트의 목소리가 칸을 붙잡은 것은 그때였다.
"피해 보상에 대한 협상은 아직 끝나지 않았소만?"
"협상은 무슨, 어차피 푼돈이나 던져줄 거면서."
"·····."
"적당히 남겨 두고 가면 되오. 액수 가지고 따질 일은 없을 거요."
그렇게 두 번째 협상이 끝났다. 칸은 접객실을 나서기 직전에 살짝 화분의 나무를 바라봤다.
어째선지 이파리가 축 처져 있었다. 로젤린의 상태를 반영하기라도 하는 것 같다.
그렇게 협상이 끝나고 1시간여 뒤.
칸은 로젤린의 객사로 찾아와 미리 대기하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메리가 거대한 화분을 방에 들여다 놨다.
촤아아아──
이윽고 풀리기 시작하는 위장. <연리지>에 구속된 로젤린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외관의 변화는 크지 않았다. 그저 나무의 중간에서 로젤린의 상반신이 등장했을 뿐이다.
"똑똑히 들었겠지?"
실의에 빠진 로젤린. 동공에서 빛이 사라진 그녀를 향해 칸이 말문을 열었다.
"당신은 탄핵당했소. 내 말에 거짓이 없음을 데카르트가 손수 증명해 줬지. 이래도 믿지 못하겠다면, 그건 그저 현실도피에 불과하오."
"·····."
독기로 똘똘 뭉쳤던 여자가 저런 표정도 지을 수 있구나. 꼭 영혼이 빠져나간 사람을 보는 듯했다.
하긴, 본인이 평생 쌓아온 모든 것이 사라졌으니까. 인생 자체를 부정당한 느낌일 것이다.
어쨌거나 로젤린의 이런 모습은 딱 칸이 원하던 상태였다. 그는 미리 준비했던 대로 혓바닥을 놀렸다.
"왜 그런 표정을 짓고 있는 거요?"
칸은 로젤린의 턱을 들어올려 시선을 맞췄다.
"지금껏 당신이 쌓아온 모든 것이 단숨에 날아갔소."
"나, 나는·····."
"이건 반란이오. 지고한 경지에 올라 마탑을 선도했던 마법사를 향한 반란."
"·····."
고개를 살짝 숙이며 칸은 로젤린의 귀에다 대고 작게 속삭였다. 마치 악마가 속삭이는 것처럼.
"이럴 때는 당신이 잘하는 걸 해야 하지 않겠소?"
"내가··· 잘하는 것?"
"복수."
로젤린이 눈을 살짝 치켜떴다. 그녀의 뇌를 자극하는 달콤한 단어. 두 눈에는 약간이나마 생기가 돌아왔다.
"이번 일은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오. 용사냥에서 실패한 것 따위와는 비교를 불허할 정도지."
칸은 로젤린을 살살 자극했다. 그녀의 심중에서 복수심이 고개를 쳐들기를 기다렸다.
"당신은 복수를 해야만 하오."
"·····."
데카르트는 로젤린이 마탑으로 찾아오기를 바랐다. 그녀의 최후를 본인들이 이용하겠다는 식으로 말했었지.
"당신의 복수. 내가 도와주겠소."
그래서 원하는 대로 만들어 줄 생각이다. 다만, 그쪽에서 생각하는 것처럼 무력한 로젤린은 아닐 것이다.
원래 은혜와 원수는 받은 것보다 몇 배로 갚아주는 것이 인지상정. 칸은 당하고만 살 생각이 없다.
몸값을 주지 않겠다며 먼저 이쪽에 엿을 먹인 것은 청색 마탑이니까. 누구의 엿이 더 큰지 대결하는 일만 남았다.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을 거요."
칸은 수통을 끌러 로젤린의 메마른 입술에 물을 부었다. 처음에 로젤린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복수만 생각하시오. 너무나도 괘씸하지 않소? 그놈들은 당신을 역사상 최악의 탑주로 기록할 거요."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천천히, 아주 미약하게나마 입술이 꿈틀거렸다. 물을 받아먹는 것이다.
칸의 목소리가 삶을 향한 의지를 자극하기라도 한 걸까? 지금으로써는 그렇게밖에 보이지 않았다.
"바꿔야 하지 않겠소? 다시 위대해져야 하지 않겠소?"
이윽고 로젤린은 손수 혓바닥을 내밀어 물을 갈구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천박하게 보일 수 있는 모습. 하지만 그건 그저 살고자 하는 의지일 뿐이다.
복수라는 이름의 영혼이 로젤린의 몸에 생기를 피워냈다.
"놈들이 당신의 부귀영화를 빼앗고 있소."
"·····복수."
"그래, 복수합시다. 내 손을 잡으면 가능하오."
더 큰 복수를 위한 도움닫기는 이미 시작됐다.
***
로젤린은 머리가 멍했다.
칸을 비롯한 용사냥 원정대. 며칠 전까지만 해도 찢어 죽이고 싶었던 작자들이 더 이상 떠오르지도 않았다.
"···데카르트."
이제는 그 자리를 다른 사람들이 대신했다. 데카르트를 포함한 4대 호법. 그놈들이 탄핵에 찬성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4대 호법 중 두 사람은 로젤린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에 성장한 마법사들이다.
특히나 개중에 한 명은 로젤린의 직전 제자이기까지 했다.
배신과 상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것들이 속에서 요동쳤다. 이 모든 것을 갚기 전에는 결코 죽을 수 없다.
"은혜도 모르는 것들!"
까드득-!
로젤린이 이를 꽉 깨물었다. 잇몸이 상하면서 핏물이 입술을 타고 흘렀다.
망치로 뒤통수를 맞은 것처럼 멍하기만 했던 머릿속이 고통과 함께 환기됐다. 다시 한 번 의지를 다지자.
"····그래, 나는 원래 이런 년이야."
복수. 오직 복수만을 생각할 것이다.
유리잔처럼 박살 났던 로젤린의 정신은 다시 접착됐다. 그 중심에는 당연히 복수가 존재했다.
지금 이 시간부로 로젤린은 삶의 목적을 복수로 삼았다. 복수만 할 수 있다면 뭐든지 할 것이다.
설령 그것이 악마에게 몸을 파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결정은 내리셨소?"
문득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야심한 시각. 어둠이 내려앉은 방으로 손님이 찾아왔다.
이 시간에 손님을 맞이하는 것은 어제에 이어 두 번째. 하지만 이번에는 불청객이 아니다.
체스카의 칸. 로젤린은 저 남자가 찾아올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 오전에 언질을 받았기 때문이다.
"네 뜻에 따를게."
로젤린이 말문을 열었다. 그 결정에 칸은 비릿하게 웃었다.
"좋소. 그럼 의식을 시작합시다."
"···알았어."
로젤린은 칸이 싫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싫은 놈들이 생겼다.
자신을 버린 청색 마탑. 놈들을 부수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다. 말하자면, 로젤린에게는 칸이 악마였다.
"마나를 인질로 삼아 굴종을 맹세하시오."
이른바 '굴종 맹세'라고 불리는 의식은 어지간해서는 성립되지 않는다. 조건이 까다롭기 때문이다.
─맹세를 선언하는 마법사는 어떤 식으로든 상대에게 진심으로 굴종해야 한다.
이 조건에서 까다로운 부분은 바로 '진심으로'라는 대목. 사람의 진심을 확인하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다.
공포에 의한 것이든, 충심에 의한 것이든, 애정에 의한 것이든. 일말의 거짓조차 존재해서는 안 된다.
원래 스스로를 완벽하게 통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본인마저 자신을 모르는 경우가 태반이니까.
'그리고 마법사들은 자의식이 강한 사람들이지.'
누군가의 밑에 있을 수는 있다. 하지만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 마법사들은 강제를 극도로 혐오한다.
대륙의 그 어떤 존재보다 자율성을 추구하는 사람. 그게 바로 마법사라는 부류였다.
고로, 제아무리 굳건한 신뢰가 있을지라도 마법사는 본인이 평생 쌓아온 마나를 걸고서 맹세를 맺지 않는다.
어떤 마법사들은 굴종 맹세를 요구하는 것 자체를 모욕으로 여길 정도였다. 일종의 금기라고 보면 이해하기 쉽다.
'티미도 네리아에게 굴종 맹세는 하지 않았을 거야.'
네리아는 티미를 존중한다. 그리고 티미도 네리아를 존중한다. 고로, 두 사람 사이에 굴종 맹세 같은 건 필요치 않았다.
문득 칸의 머릿속에 단안경의 티미가 떠올랐다. 지금쯤 어떤 연구를 하고 있으려나? 괜히 궁금해졌다.
하지만 그 호기심은 오래가지 않았다. 눈앞에서 심상치 않은 기운이 일렁였기 때문이다.
"····맹세합니다."
로젤린의 입술이 벌어졌다. 그녀의 의지에 호응한 마나가 방 안의 공기를 울리며 가구를 어지럽게 흔들었다.
파라락-!
한쪽에 놓여있던 종이가 흐름을 이기지 못하고 허공에 흩날렸다. 그 종이의 상단에 적혀있는 글자는 '탄핵 결정문'.
정신없이 흩날리는 와중에도 그 단어가 로젤린의 눈에 딱 들어왔다. 꼭 운명의 장난 같았다. 복수를 향한 마음이 더욱 짙어졌다.
쨍그랑-!
창가에 놓여있던 화분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박살 났다.
벽에 걸린 시계가 떨어졌고, 각종 장식품이 로젤린을 중심으로 굴러다니기 시작했다.
"나, 맹목적으로 마나를 바라봤던 어린양."
후우우우웅······!
공기의 울림이 점점 그 크기를 키워 갔다. 이제는 단순히 흐름이라고 말할 수 없는 수준. 작은 소용돌이가 객실을 휩쓸고 있다.
"나, 마나를 쫓아 진실에 닿고자 했던 구도자."
아무래도 이번 의식이 끝나면 방안의 모든 물건을 갈아야 할 듯했다. 칸은 만근추를 사용해 흐름에 휩쓸리지 않도록 버텼다.
어디선가 날아온 찻잔이 뺨을 건드리고 지나갔지만, 칸의 눈길은 오직 로젤린 쪽에 머물러 있을 뿐이다.
"나, 태초의 마나를 재현하고자 했던 모방자."
로젤린의 눈에서 형형한 안광이 뿜어졌다. 동공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이제는 마나가 아닌 다른 것을 보고자 합니다."
하지만 로젤린의 시선은 분명 칸에게 닿고 있었다. 이윽고 칸은 로젤린에게서 어떤 것이 풀려나오고 있음을 느꼈다.
마나핵이 자리하고 있을 단전. 그곳으로부터 생전 느껴본 적이 없는 파동이 전달되고 있었다.
생경한 경험. 마나에서 느껴지는 파동.
마나 때문에 공기가 울리면서 파동이 만들어진 게 아니라, 마나 자체에서 파동이 전달된 것이다.
"이제는 마나가 아닌 다른 것을 쫓고자 합니다."
그 와중에도 로젤린은 계속 말을 이어갔다. 이제 슬슬 굴종 맹세의 마지막 단계였다.
스파아아아아앗·····!
로젤린의 눈에 맺혔던 안광이 일제히 터져 나온 것은 그때였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그 모든 안광이 칸의 몸에 흡수됐다.
"이제는 마나가 아닌 다른 것을 섬기고자 합니다."
잠깐 몸을 움찔 떨었던 칸은 미간을 찌푸리며 로젤린을 계속 응시했다. 이윽고 모든 빛무리가 사라졌을 때.
"그동안 고생한 마나여, 이제는 인질이 되어 주세요."
어째선지 이전보다 온순해진 눈빛으로 로젤린이 칸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칸은 단번에 알아챘다.
온순해진 것은 눈매뿐이다. 지금 로젤린의 눈빛은 꼭 광기가 녹아든 용광로를 보는 듯했다.
"당신을 배신하며 굴종을 맹세합니다."
로젤린의 마지막 말이 담담하게 방안을 타고 흘렀다. 조금 전까지의 난리와 상반된 목소리였다.
그렇게 복수의 화신이 탄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