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병으로 살다-153화 (153/216)

◈ 153화

칸은 잠시간 키르케 여왕의 손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틀었다. 동굴 내부의 광경을 우선으로 눈에 담았다.

동굴 곳곳에 시립해 있는 식인거미들. 하나같이 무장 상태가 출중했고, 한쪽 손에는 횃불을 쥐고 있다.

동굴 내부가 갑자기 확 밝아졌던 것은 저 치들 때문인 것 같다. 일종의 기선 제압이라고 해야 할까?

'겨우 이런 거에 위압감을 느낄 정도로 간담이 작지는 않은데 말이지.'

칸은 피식 웃음을 흘리며 키르케 여왕의 손을 맞잡으려 했다.

하지만 그보다 앞서 여왕의 뒤편에 선 식인거미가 갑작스레 목소리를 높였다.

"어서 악수에 응하지 않고 뭣 하는가! 여왕님께서 친히 옥수(玉手)를 내려 주셨거늘!"

걸걸한 목소리였다. 상대를 억압하겠다는 듯 어깨를 활짝 펴고서 검자루에 손을 얹는 모습. 고압적이다.

저 수컷 식인거미의 신분이 정확히 뭔지는 모르겠지만, 나름대로 높은 자리에 있는 것 같다.

여왕의 곁을 아무나 지키지는 않겠지. 하지만 인외종의 신분 따위, 칸이 고려할 사항이 아니다.

이쪽은 이미 악어족 왕자님을 둘이나 죽인 경력이 있다. 식인거미 귀족? 그건 아무것도 아니다.

"까불지 마시오."

"····뭐?"

칸은 수컷 식인거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말을 뱉고 있으면서도 그 시선은 키르케 여왕의 얼굴에 머물렀다.

"사정이 궁해서 만남을 요청한 건 그쪽이잖소? 계속 이런 태도를 유지한다면, 난 그냥 돌아가겠소. 대화할 준비조차 안 된 작자와 마주하고 싶지는 않거든."

"이놈, 무엄하다!"

또 한 번 터져 나온 호통. 하지만 칸은 들은 척도 안 했다. 오히려 어디서 개가 짖냐는 듯 귓구멍만 후빌 뿐이다.

"경고했소. 같잖은 수작은 그만두시오."

수컷 식인거미는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였다. 지금 칸은 수컷 식인거미를 대놓고 무시하고 있었다.

투아 부족의 최고 결정권자인 여왕이 코앞에 있는데, 왜 굳이 따까리와 말을 섞는다는 말인가.

"먼저 사과한다면, 한 번쯤은 용서할 의향이 있소."

칸은 키르케 여왕을 향해 재차 말문을 열었다. 애초에 지금 이 상황 자체가 여왕의 묵인 없이는 성립될 수 없다.

저 수컷 식인거미의 독단일 수도 있고, 여왕이 사전에 계획한 시비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런 건 중요치 않다. 뭐가 됐든 간에 키르케 여왕은 이 상황 자체를 방관했다.

이쪽의 반응을 떠보려 한 것이다. 칸 입장에서는 썩 달갑지 않았다.

딸칵-!

수컷 식인거미가 은밀하게 검자루를 튕긴 것은 그때였다. 새하얀 검날이 검집에서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선을 넘는군."

그리고 칸의 눈은 그 은밀한 움직임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곧바로 손가락을 움직여 탄지공을 쏘아냈다.

피융-!

"끅!"

손목을 강타하고 흩어지는 콩알 모양의 파동. 탄지공은 위력이 그리 강한 편은 아니지만, 은밀함과 속도만큼은 다른 기술에 뒤지지 않았다.

투두두둥─!

칸은 연달아 손가락을 튕겨 사방으로 탄지공을 방출했다. 그 목적지는 동굴 안의 모든 식인거미.

"으윽! 이건 뭐야!"

"····아프지는 않아. 근데 기분이 더러워."

이윽고 작은 비명들이 동굴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다들 어안이 벙벙하여 멍청하게 칸을 바라볼 뿐이다.

그도 그럴 게 순식간에 타격을 허용했다. 비록 그 충격이 얕기는 했지만, 아예 반응하지 못했다는 게 중요했다.

"지금 이 안에 있는 놈들은 나에게 한 번씩 죽은 것과 다름없소."

칸의 목소리가 통렬하게 공기를 갈랐다. 그는 여전히 여왕을 응시하며 남은 말을 뱉었다.

"내가 힘을 약간만 더 줬으면, 다들 몸 어딘가에 구멍이 생겼겠지. 여왕 당신을 제외하고 말이오."

"·····."

키르케 여왕은 침묵을 지켰다.

그 침묵은 마치 전염병처럼 동굴 전체로 퍼졌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법.

"····미안해요, 칸 공. 내가 사과드릴게요."

결국 키르케 여왕이 말문을 열었다. 그 내용은 사과. 첫 대면에서 누가 우위를 점했는지는 명백했다.

"더 늦지 않아서 다행이오. 사과를 받겠소."

애초에 칸에게 주도권이 있을 수밖에 없다. 조금 전에도 말했지만, 지금 투아 부족은 도움을 청하기 위해 이곳에 왔으니까.

칸의 뒤편에서 무릎을 꿇고 있던 파샤크는 살살 고개를 저었다. 그는 지난 일주일 동안 칸의 성향을 제대로 파악했다.

'선만 지키면 돼. 먼저 건들지만 않으면 된다고.'

처음부터 악연으로 맺어진 게 아니라면, 칸은 누군가를 먼저 공격하는 성정이 아니다.

그런데 지금 키르케 여왕이 칸을 건드렸다.

이를테면 가만히 있던 말벌집을 들쑤신 셈이다. 이러면 그냥 넘어가기는 힘들다.

파샤크가 그런 생각을 하기 무섭게 칸이 다시 말문을 열었다.

"하지만 검을 뽑으려던 것은 명백한 적대 행위요. 만약 이게 저 수컷 식인거미의 독단이라면, 지금 이 자리에서 내가 임의로 처단하겠소."

"·····."

"동의하시오, 여왕?"

키르케 여왕의 침묵은 계속됐고, 수컷 식인거미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처분을 기다렸다.

키르케 여왕이 악수를 청했던 손을 거둔 것은 그때였다. 그러고는 고개를 살짝 숙였다.

"자비를 베풀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 모습에 주변의 다른 식인거미들은 미간을 확 구겼다. 이 상황이 마음에 들 리가 없다.

이건 단순히 여왕 개인의 굴욕이 아니다.

그야말로 부족 전체의 굴욕. 식인거미들은 자신들의 능력이 부족한 것을 분하게 여겼다.

칸은 곁눈질로 식인거미들의 반응을 살피며 키르케 여왕의 말을 귀에 담았다.

"내가 무례를 범했어요. 귀공의 실력을 가늠해 보고자 일부러 쇼잉 장군의 무례를 방관했어요. 전부 내 부덕의 소치입니다."

칸은 키르케 여왕을 잠시간 응시하다가 손을 내밀었다. 이쯤 했으면 충분했다.

"고개를 드시오. 여왕이 부하를 대신해 예를 보였으니 이번 일은 그냥 넘어가겠소."

여기서 뭘 더 해봤자 역효과만 날 뿐이다. 생쥐들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무는 법이니까.

무리해서 쇼잉인지 뭐시긴지 하는 장군을 죽인다고 하여 달라질 것도 없다. 속이나 좀 시원해지는 정도겠지.

이윽고 키르케 여왕이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는 칸의 손을 꾸욱 맞잡았다.

"이해해 줘서 고마워요. 그러면 본격적으로 대화를 나눠 볼까요? 우리들의 미래에 대해서."

"우리들의 미래가 아니오."

칸은 악수를 풀면서 앞으로 걸어 나갔다. 눈앞에는 돌을 깎아 만든 듯한 탁자와 의자가 존재했다.

"그저 서로를 이용하는 정도면 족하오."

"아, 그건···· 뭐 그렇죠."

칼같이 선을 긋는 칸의 말투에 키르케 여왕은 어설프게 미소를 흘렸다. 민망함을 감추기 위한 미소였다.

이윽고 두 사람이 탁자 앞에 마주 보고 앉았다. 동굴 특유의 음습한 공기가 코를 간질였지만, 그런 걸 신경 쓰는 이는 없었다.

다른 식인거미들은 전부 여왕의 뒤편으로 가서 시립했다.

최대한 얼굴을 관리하려 했지만, 좋게 말해도 표정이 편해 보이지는 않았다.

건너편의 칸을 눈빛으로 압박하는 듯한 모양새. 저 남자의 기세를 조금이라도 꺾어내고 싶었다.

"내가 뭘 요구했는지는 이미 파샤크에게 들었을 거요."

하지만 칸은 콧방귀 하나 뀌지 않았다. 그저 담담하게 자기 할 말을 꺼낼 뿐이다.

"한번 들어보고 싶구려, 뭘 준비해 왔는지."

키르케 여왕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긴장되는 순간이다.

칸을 얼마나 만족시킬 수 있는지에 따라 앞으로의 행보가 달라질 테니.

하지만 그런 긴장과는 별개로, 그녀는 입가에 자신만만한 미소를 매달고 있었다. 연기 따위가 아닌 진짜 미소였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요. 나는 흡혈귀들이 대륙 북부에서 뭘 하고 있는지 알고 있어요."

"그건 확실히 도움이 되겠군."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 통칭 어머니로 불리는 흡혈귀를 찾아갈 수단 또한 보유하고 있죠."

일순 칸의 눈썹이 크게 요동쳤다. 지금 나온 말은 예상의 범주를 뛰어넘는 것이었다.

허풍이나 떠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저쪽도 나름대로 부족의 명운을 걸고서 이 자리에 나왔을 테니까.

하지만 제대로 확인할 필요는 있다. 칸은 손가락으로 탁자를 톡톡 건드리며 말문을 열었다.

"흡혈귀의 어머니가 누구인지는 알고서 하는 말이오?"

"당연히 알죠. 마지막 흡혈공 체슈페의 딸이잖아요."

"그럼 그 여자가 대초원으로 도망쳤다는 것도 알고 있겠구려."

"물론이죠."

투둑-!

칸의 검지가 반복해서 두들기던 곳이 움푹 패였다. 이건 실수다. 이쪽의 감정을 드러낸 셈이다.

어쩌면 결정적인 단서를 획득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힘 조절에 실패했다. 칸은 조심스레 손가락을 치웠다.

그리고 키르케 여왕은 살짝 눈동자만 굴려 탁자의 구멍을 확인했다. 그녀의 뺨에 생긴 보조개가 한층 깊어졌다.

"귀공께서 우리 부족을 후원하겠다고 공언해 준다면, 대초원의 지도를 넘길게요."

"···대초원의 지도?"

칸이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뱉었다. 냉소적으로 눈을 빛내며 팔짱까지 꼈다.

"하, 있지도 않은 것을 나에게 주겠다고? 협상은 이런 식으로 하는 게 아니오. 거짓으로는 그 무엇도 이룰 수 없소."

"거짓이 아니에요."

키르케 여왕은 안심하라는 듯 품에서 가죽 한 장을 꺼내 들었다.

겉면에 여러 그림이 가득 채워져 있는 가죽. 그건 누가 봐도 지도였다.

"이건 대초원의 초입을 그린 지도에요. 파탈라 왕국의 접경지까지 함께 그려져 있죠."

뒷말을 뱉으며 키르케 여왕이 지도를 스르륵 밀었고, 탁자 표면을 쓸어낸 지도는 칸의 앞에서 멈췄다.

"직접 확인하겠어요?"

"됐소. 본다고 아는 것도 아니니까."

칸은 지도를 집어 들지 않고 곧바로 약한 파동을 방출했다. 한 차례 펄럭인 지도는 왔던 길을 그대로 돌아갔다.

"대초원의 지형을 모르는 내가 진위를 판단할 수는 없소. 가짜일 수도 있고, 진짜일 수도 있겠지."

"그렇죠."

키르케 여왕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며 칸의 말에 긍정했다. 그녀의 말똥한 눈을 바라보며 칸이 말을 이어갔다.

"일단은 그 지도의 출처부터 말해 보시오."

사실 칸도 저게 진짜이기를 바랐다. 다만, 상식적으로 맞지 않는 소리여서 쉽게 믿을 수 없을 뿐이다.

어쨌거나 탁자 위의 지도를 잘 갈무리하며 키르케 여왕이 입술을 열었다.

"6년 전에 있었던 오크 대침공. 잘 알고 계시죠?"

"알고 있소."

모를 리가 없다. 대침공의 현장을 직접 체험했던 사람이 바로 칸이니까.

그 사건을 기점으로 칸은 대륙급으로 명성을 떨치기 시작했다. 스승과 다름없던 톨칸도 그때 죽었다.

잊을래야 잊을 수가 없는 사건. 오크 대침공은 칸에게 여러 의미가 있었다.

키르케 여왕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칸은 생각을 끊고 대화에 집중했다.

"당시 대륙으로 들어왔던 오크 부족은 전부 토벌됐다고 알려져 있죠. 하지만 어찌 사람이 하는 일이 완벽할 수 있을까요?"

키르케 여왕은 싱긋 매력적인 미소를 흘리며 뒤편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자 파샤크가 담배 하나를 꺼내 그녀의 손에 얹어 줬다.

"한 대 피워도 될까요?"

"상관없으니 하던 얘기나 계속하시오."

"고마워요."

가까운 곳에 있는 횃불에 불을 붙이면서 키르케 여왕이 하던 말을 이어갔다.

"대침공 때 대륙으로 들어온 오크를 전부 죽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에요. 아무리 열심히 청소해도 보이지 않는 곳에는 먼지가 존재하기 마련이죠."

"그래서 하고픈 말이 뭐요?"

칸이 고개를 삐딱하게 하고서 키르케 여왕을 응시했다. 말이 질질 끌리는 것 같았다.

그 시선을 받은 키르케 여왕은 왠지 모르게 가슴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저 남자의 눈은 뭔가 좀 특별했다.

물론, 그런 감상을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대신에 담배를 한 번 쭈욱 빨고서 연기를 내뿜었다. 목소리가 나온 것은 그 다음이다.

"대초원으로 돌아가지 못한 소수의 오크 잔당을 우리 부족이 보호하고 있어요. 숫자는 대략 100명. 그렇게 많지는 않아요."

"대충 상황이 어떻게 됐는지 알겠군."

칸은 파릇한 턱수염을 긁적이고서 탁자 위의 지도를 바라봤다.

"잘도 오크들을 받아줄 생각을 했구려."

"불쌍했으니까요. 그 치들도 대초원의 힘 싸움에서 밀려나 대륙 침공을 시작했다고 들었어요."

어느새 손가락 한 마디 정도밖에 남지 않게 된 담배. 키르케 여왕은 꽁지의 불씨를 탁자에 비벼 껐다.

"꼭 우리 부족과 신세가 비슷하다고 생각했었죠. 그래서 약간의 은혜를 베풀었고, 오크들도 나를 따르더군요."

"인간에게 걸리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했겠지."

붙잡힌 오크의 삶은 매우 비참해진다. 팔다리가 잘린 채 공연단에 팔려 가거나, 농촌에서 마소 대신에 부려지기도 한다.

물론, 농촌에 팔려 간다고 하여 팔다리가 잘리지 않는 것은 아니다. 강제적으로 심각한 장애를 갖게 된다.

손목의 힘줄 절단, 눈알 적출, 송곳니 절삭, 그 외 등등.

도망치지 못하게, 또 평범한 농민도 부릴 수 있게 개조하는 것이다. 아주 살벌한 개조라고 할 수 있다.

자르지 않는 것은 오직 두 다리뿐. 쟁기를 매고 논밭을 갈게 하려면 다리만큼은 보존해야 한다.

어쨌거나 오크의 존재는 둘째치고·····.

"겨우 대초원 초입을 그린 것 정도로는 거래가 성립될 수 없소. 체슈페의 딸년은 대족장의 영역에 있으니까."

그랬다. 설령 저 지도가 진짜라고 할지라도, 겨우 대초원 초반부를 담고 있을 뿐이다.

"아, 뭔가 좀 착각하고 계시는군요."

키르케 여왕은 가느다란 손가락을 뻗어 탁자 위의 지도를 집어 들었다.

"이건 그냥 예시일 뿐이에요. 혹시나 귀공께서 대초원 초입의 지형을 알고 계신다면, 확인용으로 제시하고자 마련한 물건이죠."

"그럼?"

키르케 여왕은 칸의 물음에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손에 쥐고 있던 지도를 그대로 횃불 위로 던져버렸다.

타닥, 타다닥-

가죽 타는 냄새가 코를 간질였다. 매캐한 연기 속에서 키르케 여왕이 눈빛을 빛냈다.

"이런 가죽 쪼가리는 필요 없어요. 나는 귀공에게 살아있는 지도를 제공할 생각이니까요."

"살아있는 지도?"

반문을 던지자마자 어떤 생각 하나가 칸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오크를 나에게 맡기시겠다?"

"네. 우리 부족이 거둔 오크 중에는 한때 족장이었던 늙은 오크가 있어요. 대초원의 지리를 훤히 꿰고 있죠. 애초에 족장 오크의 기본 소양이 길잡이 역할이니까요."

칸은 침음을 흘렸다. 대초원에서 길잡이를 맡을 수 있는 오크가 있다면, 말이 좀 달라진다.

오크는 기본적으로 명예를 중시하는 종족. 결투로 노예가 되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하는 성향이 아주 강하다.

덕분에 노예가 돼서 고생하는 오크는 많지 않다. 의식을 잃었을 때 붙잡히는 경우가 태반이다.

'보통은 노예가 되기 전에 자살하는 편이니까.'

특히나 족장 출신의 오크들은 그 자살법부터 독특했다. 자신의 송곳니를 뽑아서 심장에 박는다고 했었나?

아무튼 그런 문화를 지닌 것이 바로 오크. 덕분에 대초원을 안내하는 오크 길잡이 같은 건 역사상 존재한 적이 없다.

설령 노예가 된다고 하더라도 인간에게 협조하지 않는다. 호시탐탐 자살할 기회만 노리는 편이다.

애초에 오크 노예는 수명 자체도 그리 길지 않다. 신체에 장애를 줘서 막 사용하다가 명이 다하면 버리는 도구.

오크 노예의 사용법은 딱 그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칸은 새로운 가능성을 찾았다.

"오크들도 동의한 사안이오?"

"당연하죠. 사전에 얘기도 안 된 것을 가지고 협상에 나설 정도로 무례한 여자는 아니랍니다."

키르케 여왕이 손을 털었다. 그러자 지도를 태우고 남은 잿가루가 허공을 부유했다.

"거래에 응하시렵니까?"

파동을 방출해 잿가루를 걷어내며 칸은 생각했다.

거절하기에는 너무나 달콤한 제안이라고.

0